4. 열여덟
점심시간이 되면 애들은 삼삼오오 창가에 붙어 운동장을 구경했다.
주로 축구를 하거나 농구를 하거나 운동장을 무대 삼아 활보하는 남자애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 중심엔 선오가 있었다. 다들 아닌 척하고는 있지만 많은 여자애들의 관심이 그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가 다른 남자애들과는 확연히 구분이 되는 뚜렷한 외양을 가진 건 사실이지만 자신이 그를 좋아하는 이유가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신서원, 국사가 부른대."
“왜?”
“나야 모르지.”
책 정리를 하다 말고 밖으로 나왔다. 국사 선생이 자신을 부를 일이 없는데, 시험 본 게 뭐 잘못된 거라도 있나, 싶어 교무실로 향하는데 남자에 하나가 길을 가로막는다.
어디서 본 적이 있다. 낮조차 익지 않은 얼굴이었다.
"너한테 할 말이 있어서."
"뭔데? 나 지금 교무실 가야 해서."
"내가 부른 거야.”
“어?”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국사가 아니라 내가 부른 거야.”
이 멋쩍은 공기를 잘 알고 있다. 하고 싶은 말이 뭔지도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선뜻 말하기도 조심스럽고 그렇다고 머뭇거리자니 상대가 기다리고 있고, 그 어찌할 바를 모르는 표정, 아니나 다를까 운동장 벤치로 나와 앉자마자 속내를 드러낸다.
“나 8반 김준식인데 너 좋아해."
"난 아냐. 미안."
“답이 너무 빠른 거 아냐?"
서원은 운동장에서 농구 경기에 열중인 선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제 시선을 앗아가는 남자가 따로 있는데 답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자신은 아직 고백조차 해보지 못했는데, 이렇게 거절을 당해도 좋으니 말이라도 걸어 보는 게 맞는 걸까.
넌 날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그때 나 대신 네가 축구 공에 맞았던 날, 그날부터 너를 좋아하게 된 거 같다고, 자꾸 눈이 가고 생각이 난다고, 다른 애들에 비하면 머리통 하나는 큰 키를 하고서 힘없고 약한 사람한텐 다정한 남자라니.
“너 내 말 듣고 있어?”
내내 뭐라고 쫑알거린 거 같은데, 농구공을 독차지하고서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선오를 보느라 잠시 정신이 나가 있었다.
“응, 미안해.”
“답이 그거란 거지, 알았어. 너 근데 좋아하는 사람 있어?"
"응. 그런 거 같아."
"그런 거 같다고? 아직 확실하진 않다는 거네?"
"그랬는데 방금 확실해졌어."
우연찮게 이쪽으로 향하는 선오와 눈이 마주쳤다. 턱 끝에 맺힌 땀을 닦는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는 게 보였다.
살짝 찡그린 눈썹 아래 짙은 눈매, 다른 남자애들에 비하면 확연히 붉은 입술, 그날, 저 대신 공에 맞으며 저 입술로 괜찮으냐 물었다.
그는 자신이 기억에도 없는지 마주친 눈을 무심히 돌려버린다.
어쩌면 기억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잠깐 스쳐 지나가듯 마주쳤었던 그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 게 이상한 일일지도. 하지만 자신에게 남자란 아빠처럼 그저 무섭고 폭력적인 존재라는 인식을 깨준 사람이기도 했다.
단지 좋아하는 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
무의식중에 흘러나온 본성, 보통의 남자는 두 번 다시 보지도 않을 여자에게 잘해주는 짓은 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녀가 아는 남자란 그랬다. 그의 진면목을 아는 여자애들이 얼마나 될까. 그가 다른 애들한테도 그런 친절을 베풀었다면 알고 있겠지.
제 남자도 아닌데, 사귀는 사이는 더더욱 아닌데.
벌써부터 질투가 났다. 그와 말을 나누고 오고 가며 이것저것 함께 했을 많은 여자들, 그를 가만히 뒀을 리가 없을 테니까.
“점심 안 먹어?"
"너 먼저 들어가."
아쉬운 듯 들어가지 않고 앉아 있는 자신을 힐끔거리는 준식이 느껴졌지만 서원의 시선은 한곳에 박혀 있었다.
아이들이 하나들씩 하교를 시작했다. 서원도 가방을 챙겨 계단을 내려왔다. 교문 앞으로 친구와 함께 학교를 나가는 선오가 보였다.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우연히 같은 방향으로 제법 오래 걸었다.
뭐라 뭐라 끊임없이 말하는 친구의 수다를 주로 듣는 쪽인 문선오는 가끔 대꾸를 해줄 뿐, 그런 그를 가만히 보고 있는 것도 지루하지 않았다.
"근데 너 영어 과제 다 했어? 이번 수행평가에 반영된다던데."
"그거 내일까지 아니냐?"
"어."
"그럼 당연히 다 했겠지.”
뭘 그딴 걸 물어보냐는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그래, 너같이 공부 잘하는 것들은 당연히 다 했겠지. 이 새끼야. 맨날 운동만 하는 놈이 공부는 언제 하냐. 당최 모르겠네. 집에 가서 해? 보통 집에서 잘 안 되지 않나?"
“너처럼 책상 앞에 앉아만 있다고 다 공부야?"
“아 이 새끼가 진짜. 너 내 집중력 무시해?”
“맨날 포르노나 끼고 사는데 집중이 되는 게 용하지. 나는 네가 지금 그 성적을 유지하는 것도 신기하다."
“하여튼 좆 큰 놈들은 발언권을 없애야 돼, 네가 뭘 알아. 네가 내 설움을 알아?"
가만히 걷는데 순간 선오에게 몸을 돌리고 있던 남자애의 눈이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가는 길이 같았을 뿐인데 괜히 몰래 훔쳐보고 있었던 것만 같은, 제발 저린 기분에 서원은 빠르게 두 사람을 지나쳤다.
"너 재 알아? 나 쟤 알아. 오다가다 봤어.”
"네가 오다가다 보는 애가 한들이야?"
"그냥 오다가다 봤으면 기억 못 하지, 근데 예쁘잖아. 존나게 예쁘잖아, 새끼야."
제 친구의 말에도 별다른 대꾸도 않는 문선오는 심드렁했다.
“쟤 알 사람은 다 알아. 성찬이 새끼도 재 좋아할걸? 성찬이 새끼 요새 성적 떨어진 거 알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안 궁금하다."
“내가 그 얘기 했나?"
"뭐.”
"너 씹새끼인 거."
“한심한 새끼.”
“죽어.”
"불로장생하려고.”
의미 없는 그의 농담조차도 자꾸 신경이 쓰였다. 역시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구나.
자신의 마음을 깨달은 이상 방법은 하나였다. 그의 답이야 어찌 됐든 이 마음을 전해야지, 널 좋아한다고,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