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시절인연 (14/20)

외전, 시절인연

“추워….”

서원은 어깨를 비비며 창문을 닫았다.

날이 급격하게 추워졌다. 추워도 추운 줄 모르고 살았는데 선오가 온전히 제 남자가 되니 이젠 약간만 추워도 시리게 느껴진다. 한시도 안아주지 않은 때가 없으니 그의 품을 조금만 벗어나도 몸이 시린 것이다.

호강에 겨워 배부른 소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처음이었다. 이렇게 마음껏 욕심 내어 보고 손에 쥐어보는 건.

열여덟에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오랜 세월을 알고 지냈지만 한 번도 완전히 제 남자라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사랑을 언급한 적 없었고, 이 관계에 대해 명확하게 확답을 준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만족했었다. 다른 이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몸을 섞는 여자는 자신뿐이라는 걸 알기에 더 욕심내지 않았었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했었다.

그런데 그가 완전히 제 남자가 되니 이건 또 다른 영역의 문을 연 것만 같았다.

생각해보면 예전에도 다 해주던 것들이었다. 다만 이제 돌려 표현하지 않는다는 데에 차이가 있었다.

재고 따지지 않아도 명백한 관계였다. 연인 내지는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

그는 그녀를 사랑이라고 인정한 이후 더 미루지도, 머뭇거리지도 않았다. 이미 마음은 쌓을 만큼 쌓아 미어터지도록 넘치니 새로운 것을 시도할 차례였다. 두 사람은 그 단계를 결혼으로 택했다. 그래 모든 변명은 다 치우고 이유는 하나였다.

‘없이 못 살겠으니까 평생 같이 살자는 건데 뭐, 다른 이유가 필요해?’

출근 준비를 마친 그가 넥타이를 고쳐 매며 한 말이었다. 하얀 셔츠에 반듯한 슈트 바지, 깔끔한 손목시계에 함께 맞춘 반지까지. 세상에 더없이 잘난 그 남자가 그렇게 말하는데 하루 종일 행복했다.

서원은 숍을 나오자마자 방송국으로 향했다.

만나기로 한 방송국 앞 카페, 그녀의 에스테틱까지 오겠다는 걸 방송국 앞에서 보자며 말린 건 그녀였다.

유리창 너머로 그가 보였다. 카페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며 책을 읽는 남자는 커피와 잘 어울렸다. 늘 공부해야 하고 습득해야 하는 그의 직업 특성상 그는 책을 들여다보는 일이 잦았다.

그녀가 섹스하다 지쳐 곯아떨어졌을 때도 뒤늦게 눈을 떠보면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아 등 하나 켜둔 채 대본을 보거나 책을 읽었다.

그는 그런 모습이 잘 어울렸다.

등 뒤에서 여자 두 명이 걸어오더니 그를 부른다. 소리는 들리지 않으나 사인을 해달라는 듯했다. 내미는 펜을 쥐고 슥슥 이름을 써주는데 그 모습도 멋있었다.

그 후 몇몇 사람들이 더 그에게 다가왔다. 한참이 지나도 서원이 오지 않자 핸드폰을 든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에게로 전화가 왔다.

서원은 진동하는 핸드폰을 쥐고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왜 이렇게 늦어. 일부러 너 일찍 끝난대서 방송국 앞에서 만난 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데리러 갈 걸 그랬다며 그가 손목시계를 확인한다.

“그냥. 내 남자 잘생겨서 구경 좀 했어.”

“신소리 그만하고 앉아. 추워.”

그는 자연스레 옆자리를 만들어주었다. 따뜻한 커피를 주문하고 그가 내어주는 자리에 앉았다.

“왜 이렇게 얇게 입고 왔어. 안 추워?”

“괜찮아. 네가 안아주잖아.”

“하여튼 말이나 못 하면.”

그도 피식 웃으면서 괜히 말만 저런다는 것도 안다.

“그럼 더 가까이 와야 안 춥지.”

눈은 책을 향해 있으면서 더 가까이 와 앉으라 한다. 서원은 그의 허리를 와락 껴안았다. 그러자 어깨를 끌어안아 주는데 끝내 그의 시선이 책에서 떨어져 그녀에게로 향했다.

“근데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시선을 테이블로 내리는데 예상과는 달리 그림이 알록달록 그려진 잡지였다.

웨딩드레스가 컬렉션 별로 그려진 웨딩 카탈로그 북이었다.

봄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슬슬 서둘러야 되기는 했지만, 어쩐지 그가 이런 포토북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네 옷 취향은 잘 몰라서, 내가.”

“입어보러 가자. 봐줄 거야?”

“웨딩드레스랑 그 뭐야, 본식 끝나면 입는 한복.”

“한복 왜?”

“그것도 사.”

“빌리면 돼. 다 빌려서 식 치르는 거야.”

“아니. 사.”

영 모를 말만 하는데도 너무나 확고하니 더 묻지도 못했다.

“녹의홍상, 홍원삼, 뭐 좋은 거 많잖아. 그런 걸로 몇 개해.”

“몇 개씩이나? 한복 입을 일이 잘 없을 텐데.”

그에게 한복 페티쉬가 있나? 아닐 거다. 그랬다면 진즉 한복을 입고 떡을 쳐도 여러 번 쳤을 테니. 꼭 화려하고 고운 비단 치마를 둘러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냥 해주고 싶어서 그러니까 해.”

“알았어.”

“나가자.”

그의 손을 잡고 카페를 나왔다.

“선오야.”

부르는데 냉큼 돌아본다. 아아, 너무 빛이 나서 보기만 해도 행복했다.

“왜.”

“그냥.”

“그래, 닳을 때까지 불러라.”

자꾸 이유 없이 부르니 그도 어이가 없다는 듯 받아친다.

그래도 밀어내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가다 말고 차에서 또 한판 하겠지.

서원은 눈을 반짝이며 주차장 안쪽으로 주차하라 신호를 보냈다.

그 의미를 알아챈 그가 헛웃음을 흘리는데 결국 손을 뻗어 운전석으로 그녀를 끌어왔다.

“오늘은 보지로만 넣어줘.”

“왜.”

“임신.”

“알았다, 알았어.”

결국 원하면 다 들어주는 문선오.

서원은 그가 좋아 목을 꼬옥 끌어안았다.

“사랑한다고 말해줘. 나뿐이라고, 말해줘. 어서.”

이렇게 다 받아주니 자꾸 응석받이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너 원하는 건 다 말하라 토닥인다.

태어나 처음으로 누구에게 의지하고 기대어보는 기분이란, 뭐라 형언하지 못할 기분이었다. 불편하고 빚진 기분이 들 줄만 알았는데. 자꾸 이게 당연한 거라 말하는 선오 때문에 마음이 몽글몽글거렸다.

서원은 그의 고백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너를 사랑한다고.

<금단증>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