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연인
“여기 있습니다, 연고.”
어젯밤, 서원이 종이에 손가락을 베는 바람에 피까지 찔끔 났다. 지난번처럼 그가 없는 사이 또 무릎이 까질지도 모를 일이고, 약을 몇 개 사놓을 필요가 있었다. 아무튼 손 많이 가는 신서원. 그래도 그 모습마저 사랑스러워 보이니 더 말해 뭐할까. 이 싸움의 승패는 더 이상 따져봐야 소용없는 짓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연고를 사러 방송국 맞은편에 있는 약국에 들렀다.
대충 지폐 한 장을 꺼내 내미는데 약사 얼굴이 어디가 낯익다. 저 희끗희끗한 머리, 주름진 피부. 분명 어디선가 본 듯한데…. 어디서 봤더라. 기억력은 좋은 편인데 관심이 없는 것엔 또 신경을 두지 않는지라, 선오는 약사의 얼굴을 보며 한참 동안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그 전생 타령하던 영감?
“왜 그렇게 보시나, 아나운서 양반.”
어딘지 모르게 의뭉스럽게 웃는 약사가 수상하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특별히 좋은 약을 파네, 마네 하면서 분명….
의심스러우나 여기서 따져 물어봤자 저 혼자 미친놈이 될 게 뻔했다.
“애인이 어디 다치기라도 했나 봐요.”
분명 그 영감이 맞는 듯한데.
“연인과 함께한다는 건 참으로 좋은 것이지.”
한마디 할까 미간을 찌푸리는데, 약사가 껄껄 웃었다. 됐다. 이상한 놈 취급이나 받을 텐데, 제 입만 아플 뿐이었다.
“왜요?”
“아닙니다. 됐습니다.”
돌아서서 나가려고 하는데 약국 문을 열고 그 남자가 들어왔다.
송학도. 현실의 이름은 알고 싶지도 않고, 알 바도 없으나 전생의 이름은 확실히 알고 있다.
선오를 발견한 남자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흠흠. 서원 씨는 잘 지내시죠?”
“그럼요. 남의 애인 안부가 왜 궁금한 건진 모르겠지만.”
“서원 씨 새로 개업한 에스테틱에 화분 하나 보냈는데 잘 받으셨는지 모르겠어요.”
개업 선물이 워낙 많이 들어와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으나 자신이 들여놓은 화분 말고는 다 내다 버렸다.
“우리 서원이가 좋은 일 한다고 다 기부했을 겁니다. 아, 감사하다는 말은 따로 안 전하겠습니다.”
선오는 지나치려다 말고 남자 앞에 멈춰 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그냥 가는 건 기분이 나빠서 안 되겠다. 선오는 남자를 향해 나지막이 뇌까렸다.
“다시는 신서원한테 알짱거리지 마라. 어?”
언제 경고했냐는 듯 싱긋 웃어 보인 그가 약국을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송학도 저놈은 재수 없다.
이 거지 같은 약국, 하나 같이 께름칙하다. 다신 오나 봐라.
* * *
“야, 왜 이렇게 늦게 와.”
“내가 너처럼 한가한 줄 알아.”
“하여간 저, 저. 잘났지, 아주. 빨리 와.”
호프집 안으로 들어서자 경식이 빨리 오라 성가신 타박을 했다. 그냥 저들끼리 대충 마시고 파하면 될 자리에 굳이 왜 부르는 것인지. 선오는 귀찮은 내색을 있는 대로 하며 빈자리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그때 그 자리였다. 교환학생 시절, 서원과 서로 눈이 마주쳤으면서도 누구 하나 섣불리 알은척 하지 않았던 날, 그때 앉았던 그 자리.
그녀는 하지 못했고 자신은 하지 않았었다. 구태여 힘들여 다가가지 않아도 적당히, 성가시지 않은 선에서 다가와 준 그녀 덕분이었다.
사랑이 사랑임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지난날, 자신과 달리 일찌감치 그가 사랑임을 깨달은 서원이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 절실함이 잔인할 정도로 느껴진다.
자신은 그녀에 대한 마음을 깨닫자마자 질투에 눈이 멀어 미친놈처럼 날뛰었었다. 그것도 남편이 있는 여자를 붙들고 알아듣지 못할 말을 지껄이고, 그녀가 서방이라 부르는 놈을 제 손으로 죽이기까지 했다.
서원의 얼굴을 한 명주가 다른 놈과 살림까지 차린 것을 보고, 평생 받을 화병을 한꺼번에 다 얻었다. 자신은 냉철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그녀 앞에선 그도 아니었다. 벽을 높이 치려 애쓰던, 사랑에 빠진 남자일 뿐.
그녀의 곁에 다른 남자가 있는 꼴을 볼 바에야 차라리 함께 죽는 편이 낫다는 걸 겪고 나서야 알았다.
“넌 대체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되냐.”
“바빠.”
“잠깐 통화할 시간도 못 내? 순 핑계야.”
“귀찮아.”
귀찮았다. 여전히 술자리는 따분했고 지루했다. 주제는 늘 같았다. 사내 연애 이야기, 상사 뒷담화, 누구의 결혼 이야기, 늘 뻔한 대화 루틴. 하지만 왜 서원과 함께 하는 그 모든 것은 조금도 지루하지 않은지. 열아홉, 그녀와 했던 첫 데이트 때부터 그랬다.
선오는 어느 순간부터 대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너 왜 술 안 마셔?”
“차 가져왔어.”
“대리 부르면 되지. 마셔.”
“너랑 마시는 거 재미없어.”
“그럼 왜 왔는데.”
“오라고 생난리도 난리도, 네가 그럴 말 할 입장이야?”
“개새….”
“담배 피우고 온다.”
“저 정 없는 놈. 저래 가지고 장가는 가겠어?”
담배를 피운다고 나오긴 나왔지만 오늘은 담배도 영 당기지 않았다.
전화가 왔다. 서원이었다. 그녀는 가게 이전을 하고 나서 훨씬 바빠졌다. 고객도 늘었고, 장사도 훨씬 잘됐다. 좋은 일이긴 했지만 그로서는 차라리 예전이 그리울 만큼 그녀가 바빠졌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오야! 집이야?」
비음이 섞인 애교 많은 특유의 목소리.
“호프집.”
「술 마시러 갔어?」
“말도 마라.”
「친구들이랑 있는 거야?」
“그때 거기. 블루라벨.”
「언제 올 거야?」
“지금.”
「응. 어서 와.」
“올래?”
「친구들이랑 있는 거 아냐?」
“그러니까.”
찰나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잠깐의 침묵 동안 그녀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대강 짐작이 갔다.
“근처겠네. 와.”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기다려.」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하고 나니 그녀는 전과는 또 달랐다. 꼭 섹스할 마음이 없을 때도 알몸으로 자는 통에, 느닷없이 발기를 할 때도 부지기수였다. 일부러 저 보라고 음란하게 엉덩이를 흔들고, 집게손가락으로 보지를 쪼개 벌리고, 물을 싸대는데, 거기에 넘어가지 않는 게 이상한 수준이었다.
보는 앞에서 자위를 하라고 시키면 고양이처럼 엎드려 손가락으로 엉덩이 구멍을 쑤시는데, 머리 꼭대기가 지끈거렸다. 이곳은 딜도를 먹을 테니 넌 앞을 채워달라는 신호였다.
섹스할 때만이 아니었다.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꼭 밖에서 데이트를 하다 디저트를 먹어도 그의 입술에 커피가 묻었다며 손으로 닦아주기도 하고, 운전 중인 그의 바지춤에 먼지가 묻었다고 사타구니 쪽을 털어주기도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의도적인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는 원래 매사 다정다감한 성격이었고, 사랑과 애정이 많은 여자였다.
사람이 많을 때는 조심스러웠고, 단둘이 남겨지면 전에 없이 몸을 붙여오는데 아마 그녀라면 돌기둥도 녹이고 남았을 거다. 화연이 소싯적 장사에 소질이 있었다 하더니, 서원 또한 그런 능력을 물려받았는지 장사에도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그나마 여성 전문 숍이니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아나운서고 뭐고 일 다 때려치우고 관리실 문지기나 했을지도 모른다.
들어가지 않고 기다리고 서 있는데, 건너 횡단보도에서 그녀가 손을 흔들었다.
품을 벌리자 다가와 폭 안기는 그녀에게 향긋한 오렌지 냄새가 났다. 늘 조금씩 달라지는 스킨로션 냄새. 그녀의 향기가 그를 즐겁게 했다.
“근데 난 조금 그래.”
“뭐가.”
“전경식 말이야.”
“알아.”
“뭐가?”
“조금 그런 거.”
그녀가 웃음을 터트린다. 친한 친구라 하는 말이지만 그녀가 말하는 바가 뭔지 알고 있었다.
다소 생각 없이 말하고 사람을 귀찮게 하는 스타일이긴 했다. 오래된 친구니 그러려니 하는 거지만 타인의 눈엔 그가 어떻게 비칠지도 안다.
“가서 또 괴롭히지 말고.”
“보고.”
새침하게 답을 피하는 그녀가 손을 잡아 왔다. 선오는 깍지를 끼고 경식과 친구들이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어, 뭐야?”
“뭐가.”
“둘이 뭐야? 둘이 이제 대놓고 그렇고 그런 사이야?”
경식의 눈알이 튀어나올 듯이 번뜩였다. 금세 주위가 소란스러워졌지만 선오는 태연히 그녀를 데려와 옆자리에 앉혔다.
“넌 술 마시지 마.”
“응.”
마시지 말고 얌전히 곁에만 붙어있으라는 단속에도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준다. 사실 놀랄 일도 아니라는 듯 경식은 혀를 내둘렀다.
“누가 대단한 거야? 8년이 넘도록 저 목석 옆에 붙어있는 신서원이 대단한 거야, 그 세월 동안 신서원 다 받아준 문선오가 대단한 거야. 이 정도면 천생연분 아니냐?”
“네 인정받자고 데려온 거 아니고, 알아 두라고. 입 잘못 놀리지 말고.”
“개자식아.”
말은 그랬지만 서원에게 축하를 건네는 경식이 밉지 않았다.
“나 너 알아. 아, 말 놓는다? 고등학교 동창인데 얼굴만 몇 번 봤지 말 한번 안 해봤네.”
“나도 너 알아. 선오 친구잖아.”
“저놈이 뭐 어디가 그렇게 좋아? 고딩 때부터 심상치 않더니 둘 다 결국 서로밖에 없을 줄 알았어.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내가.”
경식이 치킨 다리를 뜯으며 분개했다.
“넌 뭐가 그렇게 못마땅한데.”
“항상 나만 없지, 나만 없어.”
“없는 이유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을 좀 해봐. 문제를 알아야 발전을 하지. 넌 매사 발전이 없잖아.”
“내가 뭐.”
경식이 발끈하는데 서원이 웃는다. 그녀가 제 친구들이 있는 데서 이렇게 웃는 건 처음 보았다. 그녀를 친구들 앞에 정식으로 소개한 건 처음이었지만 우연히 한 공간에 있을 때도 그녀가 웃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경식이 그 모습을 넋을 놓고 보는 데 기분이 나빠졌다. 괜히 저 새끼 앞에 서원을 내놓았나.
“여기는 프라이드치킨이 꽤 맛있어.”
치킨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제법 먹는다 했더니 그녀의 입맛에 맞는 모양이었다. 서원이 잘 먹으니 그것도 보기 좋았다.
“하나 포장해 가. 가서 먹어. 네 엄마 것도.”
화연은 서원이 살던 집으로 들어갔고, 서원은 선오와 결혼계획을 세우면서 완전히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8여 년을 알고 지냈지만 서로의 집은 서로의 것이었다.
며칠씩 그의 집에서 자면서 생활하다가도 결국 그녀는 제 안식처로 돌아갔었다. 제 어미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제 더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식을 올리면 함께 살 테니 조금 이르게 합친 거나 다름없었다.
8년의 세월 동안 화연은 많이 수척해져 있었지만 서원의 곁에서 하루가 다르게 생기를 찾아갔다. 처음부터 곁에 자식만 있으면 되는 여자였다.
8년 전에도 제 자식만큼은 금쪽같이 아끼던 여자가 아닌가. 어쩌면 전남편에게서 자식을 지키다 그리된 것이었다.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그런 그녀의 모정을 알기에 그녀를 더 싫어했었다. 이용하는 화연이나 이용당하는 아비나, 둘 다 꼴 보기 싫었으니까.
하지만 다 옛일이었다.
여전히 선오와 화연의 사이는 서먹했다. 어쩌면 평생 그럴지도 모른다.
평생 서로가 껄끄러운 사이가 될지도 몰랐다. 선오의 성격으로 보자면 그럴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렇지만 예전처럼 가까이 가는 것도 꺼려져 얼굴도 보기 힘든 정도는 아니었다.
이제는 서원과 그의 사이가 달라졌으니, 화연과도 조금은 달라져야겠지.
서원은 더 바랄 것 없이 그냥 지금 이대로가 좋다고 했다.
그가 무리하는 모습을 견디지 못하는 그녀니 빈말은 아니었다.
서원이 그의 마음을 모조리 여는 데 무려 8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으니 화연이라면 평생이 걸려도 그의 마음을 열지 못하는 게 당연한 것일지도.
호프집을 나와 서원이 예전에 살던 빌라로 길을 잡았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그를 보며 그녀는 혼자 들어가 엄마에게 치킨을 건네주고 나올 테니 기다리라 전하곤 쏙 입구로 들어갔다. 선오는 입구가 보이는 곳에서 차체에 기대 담배를 피웠다.
익숙한 그림이었다. 그녀가 사는 작고 조그만 동네, 빌라.
익숙한 실루엣이 금방 툭 튀어나오더니 활짝 웃는다.
와락, 안기는데 어울리지 않게 고소한 치킨 냄새가 났다.
“야, 담배.”
재가 떨어질까 서둘러 떨어뜨린 담배를 구두코로 지르밟았다.
“엄마가 잘 먹겠대.”
겨울이 얼마 남지 않은 계절, 서늘하고도 청량한 바람이 불어왔다.
“있잖아, 선오야.”
“어?”
“…우리 아기도 낳을 거지?”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내는데, 선오는 삐딱하게 기대있던 허리를 바로 세웠다.
“싫어?”
“난, 난 좋아. 너는?”
“피임약 먹지 말란 말은 오래전부터 하지 않았나?”
“그런데 확인차.”
“네 구멍 사이즈를 보면 걱정되긴 한데.”
“어서 갖고 싶어.”
이젠 스스럼없이 자연스레 임신 계획까지 세우는 사이가 되었다. 선오는 새삼 확실히 변한 그녀와의 관계에 기분이 좋아졌다.
혹여 임신하면 그가 자신을 버릴까 안에 싸달라 울며불며 사정을 하면서도 피임약을 꼬박꼬박 먹던 그녀였다. 생각해보니 자신은 정말 그녀에게 나쁜 새끼였다.
“나 임신하고 싶어.”
“가자.”
“응?”
“급하다며.”
“너도 급해?”
“차에서 한판 하고 들어가자는 거지, 너.”
“어서.”
약간 상기되어 목덜미가 벌긋벌긋 붉어진 그녀는 밑이 근질거려 그의 것을 얼른 담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빨리, 가자고 손을 잡아끄는데 급하기는 그도 매한가지였다.
차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녀의 팬티만 젖히고 서로의 생식기를 맞춰 이었다.
좁은 골목, 누가 지나가기라도 한다면 들킬 가능성이 농후했지만 집까지 가기엔 그녀나 그나 무리였다.
서원은 그의 목을 끌어안고 천박하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흐으….”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터져 나올 듯한 교성을 참느라 그녀는 코가 다 시뻘게졌다.
주룩, 보지 틈으로 흐르는 물이 불알 새 고여 엉덩이를 내리찧을 때마다 물기가 첨벙거린다.
서원은 엉덩이 골에 불알을 딱 붙이곤 뱅글뱅글 허리를 돌려 원하는 스폿 곳곳을 자유자재로 찔렀다. 길쭉하고 넓적 두툼한 귀두가 알아서 성감대를 착착 찌르고 박혀 드는데, 결국 견디지 못하고 신음을 터트렸다.
“아앙! 선오야!”
“보지 힘주지 마.”
“나, 읏, 더 돌리면, 싸.”
“너 원하는 건 다 싸라니까.”
서원은 예감했다.
곧 배 속에 생명이 자리 잡을 것만 같은 기분 좋은 느낌.
두 사람은 행복한 일이 다가올 것만 같은 직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