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0501
“다음 소식입니다. 지난 새벽, 위험한 탈주극을 벌이던 김영범이 시민의 제보로 붙잡혔습니다.”
선오는 그를 향해있는 카메라와 마주 보고 있었다.
아침 뉴스를 위해 새벽에 잠에서 깼을 때 그녀는 사라져 있었다. 출근을 했다고 하기에는 아주 이른 시간이었으니, 결국 도망치듯 그의 옆자리를 떠난 것이다.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어 무너지는 이 가슴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명주가 그를 모른다, 부정했던 그때와는 또 느낌이 달랐다.
그땐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면 그녀를 붙잡을 수 있을 거란 일말의 기대가 있었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명백하게도 현실이었다.
생방송 도중 속이 울렁거려 곤욕을 치렀다. 그녀가 떠나간 지 이제 겨우 하루인데 그는 엉망진창이 되었다.
서원이 없는 하루가 이렇게도 쓸쓸한지 미처 몰랐다.
늘 오던 전화가 없고, 보고 싶다는 문자 한 통이 없다. 은근히 잔인한 데가 있다. 일찌감치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으면서 영원히 사랑할 것처럼.
선오는 스튜디오를 나오자마자 핸드폰을 찾았다. 전화를 걸어 봐도 답이 없었다. 재차 재다이얼을 눌러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어, 문선오, 오늘 우리 회의… 야! 문선오!”
원영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선오는 방송국을 나와 서원의 숍으로 향했다. 서원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일주일 동안 쉰다고 했다는 직원의 말 외에는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집으로 찾아갔지만 불은 꺼져 있었다.
“…….”
현관 비밀번호가 바뀌었다. 다시 번호를 눌러봤지만 잘못된 번호를 눌렀을 때 흘러나오는 기계음만 돌아왔다. 분명, 이 집에 이사를 오고부턴 단 한 번도 바뀐 적 없었다.
그의 생일 0911.
어디로 가서 그녀를 찾아야 하나. 집, 그의 오피스텔, 가게. 그 세 군데 말고는 생각나는 곳이 없었다. 서원이 갈만한 장소가 떠오르지 않는다. 이렇게 그녀를 모르고 있었나.
한참을 대문 앞에 서 있던 그가 다시 도어락으로 손을 뻗었다. 혹시나 하는 번호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
“…….”
문이 열렸다.
고3, 그와 첫 데이트를 했던 날. 0501.
대체 이러면서 뭘 다 끝냈다는 건지. 온통 서로와 함께 했던 흔적뿐인데.
선오는 불이 꺼진 집으로 들어갔다. 서원의 로션 냄새. 침대 옆 콘솔엔 그가 준 스킨도 있었다. 향이 좋다고 몇 번이나 바르길래 가지고 싶으면 가져가라고 그가 의미 없이 준 것이었다. 그 옆엔 자신이 생일선물로 준 시계하며 갖가지 액세서리들이 줄지어 놓여 있다.
여자에게 선물을 줘본 적이 없어 많이들 하는 걸로 대충 고른 것이었다.
그 전엔 내색도 않더니, 문선오가 들어오지 못하게 현관 비밀번호까지 바꾸곤 선물을 모두 꺼내놓았다.
책상 앞에 놓인 탁상용 달력을 가져왔다. 빨간 펜으로 둥글게 칠해놓은 날짜가 있다. 2주 후 출소라더니 화연이 가석방되는 날인 듯 보였다.
제 어미와 함께 살기 위해 밤낮없이 일해 번 돈으로 가게를 차렸나 보다. 왜 그렇게 본인 명의의 가게에 집착하나 했더니 이유가 있었다. 그 안엔 은연중 그를 떠나겠다는 다짐 역시 있었을 것이다.
이 침대에 함께 누워 있을 때도 그런 마음에 속을 끓였을 그녀를 생각하니 화가 나면서도 가슴이 미어진다.
“하여튼 구질구질한 짓은 혼자 다 하지.”
당장 눈앞에 있다면 안아줄 텐데, 왜 또 혼자 끙끙 싸매고 있었냐며 타박이라도 할 텐데.
선오는 핸드폰을 꺼냈다. 당장이라도 전화가 올 거 같은데, 늘 그랬던 것처럼 영상 통화가 올 거 같은데, 핸드폰은 암전이다.
다행히 어디 멀리 가진 않았는지 옷장의 옷들은 많이 비어있지 않았다. 삼사일 갈아입을 옷 정도만 사라졌을 뿐. 그것만으로 안도했다.
“아니, 무슨 일이 있으면 있었다고 말을 해야지. 그것도 모르고 또 괜히, 흠. 그랬잖아.”
원영은 회의시간에 맞춰 돌아온 선오를 보며 헛기침을 했다.
말 못 할 사정이 있었다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자 주위 시선을 의식한 원영이 간사하게 웃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후배라 또 질투를 한다느니, 괜한 구설수에 오르긴 싫은 모양이었다.
실력으로 인정받아 빠르게 아침 뉴스까지 맡은 후배라 질투심에 눈이 멀었다는 둥, 벌써부터 9시 뉴스 메인 자리로 거론되는 후배라 모함을 한다는 둥, 인터넷 코멘트들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회의를 하면서도 통 집중할 수가 없었다. 공사 구분이 누구보다 분명했던 그였다.
그래서 서원이 내심 섭섭해한 적도 있었다. 내색 안 하기로 유명한 서원조차 그의 그런 면모를 서운해 했었다.
“문 아나, 무슨 안 좋은 일 있어? 영 안 좋아 보이네.”
“아뇨. 괜찮습니다.”
“아무튼 이번 강연은 문 아나가 하기로 했으니까 잘해. 윗분들 다 참석하신다니까.”
강연 정보에 관해 적힌 종이를 들고도 선오는 답이 없는 핸드폰만 보았다.
사람 미치게 하는 데는 타고 났다. 사랑하지 않겠다고 밀어내는 그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더니 이젠 이렇게 사람을 진창으로 밀어 넣고 있다.
사랑하면서 안 된다고 한다. 그녀도 자신을 사랑하면서. 이젠 더 이상 만나선 안 된다고 그만하자고 한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씨발.
욕지거리는 하지만 실은 할 말이 없다. 지난 세월 자신이 그래왔다. 사랑이란 걸 인정하지 않았다. 제 사랑이 서원이라는 걸 알면서도 부정했었다. 몸 섞는 건 허락하면서 그녀에게 다른 남자가 있는 건 두 눈 뜨고 못 봤다.
한 여자 돌려쓰는 기분이라 좆같다고 경고했지만 실은 그녀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는 그 자체가 싫었다. 그녀에게 남자라곤 저 하나였으면 했다.
인내심 하나는 타고난 그인데 그 인내심을 무너뜨리는 건 언제나 신서원이었다.
“역시 우리 문 아나는 참 차분해. 그때 생방 때 사고 난 날 말이야. 내가 다 아찔하던데 문 아나 끝까지 방송했었지? 배우고 싶다니까, 이런 평정심.”
그야말로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현실로 돌아오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역사 실록을 좀 뒤져보았다.
형 이휼의 기습을 받고 행방불명되었던 이선은 그 후 반년 뒤 군사를 일으켜 대업을 도모하게 되니, 이휼을 직접 처단하고 그해 왕위에 올랐다. 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기습을 받고 행방불명이 되었었다는 사실이 그 전에도 기록되어 있었던가. 분명 그가 아는 역사서엔 그러한 사실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도 아니면 자신이 역사를 바꿔놓은 것인가. 하지만 그게 어떠하든 전생은 흘러간 전생일 뿐 중요한 건 현생이었다.
중요한 건 지금 그의 곁에서 사라지고 없는 서원이었다.
선오의 세단이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삼 일째 감감무소식이다. 이대로 두 손 놓고 있다간 정말 미칠지도 몰랐다.
방에서 발견한 달력에 작게 적힌 주소가 마음에 걸렸다.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의미 없이 적어 두진 않은 게 분명했다. 그 성격에 좀 꼼꼼하게 적어두었을까.
주소를 보니 바다와 인접한 소도시였다. 이곳에 연고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그래도 모를 일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녀에 대해 아는 게 많이 없다.
연고가 없다는 것도 추측이었다.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고, P대를 졸업했고, 피부 관리숍을 경영하고, 김밥을 먹을 땐 꼭 단무지를 하나 더 얹어 먹고, 당근을 싫어해 그녀가 쏙쏙 빼놓은 당근은 언제나 제 몫이었다. 떡볶이를 좋아하고 계란을 풀지 않은 라면을 즐기는 신서원.
아는 게 이거뿐인가. 잠자리에서라면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지경인데 그 외적인 사항들은 그다지 아는 게 없었다.
이 주소가 어디인지, 네 고향은 어디인지, 친부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물어본 게 없었다.
서원은 묻지 않으면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걸 알면서도 묻지 않았다. 공연히 서로에 대해 깊이 알아봤자 좋을 게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그를, 그녀는 알고 있었던 거다.
제가 이렇게 나쁜 놈이었나. 서원에게 묻는다면 한사코 아니라 할 게 뻔했다.
어느 샌가부터 보이기 시작한 바다를 끼고 해안도로를 달렸다. 여행을 가고 싶다고 자주 그랬는데 여행 한 번 못 가봤다. 생각해보면 못 해준 게 너무나도 많았다.
선오는 마을에 진입해 주소지를 찾았다. 생각보다 훨씬 외진 어촌 마을이었다. 멀리 하얀 등대가 보였다. 주소지에 적힌 곳은 파란 지붕의 돌담 집이었다.
“계십니까.”
인기척 하나 없는 집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주인 없는 마당에 오래 있을 수 없어 밖으로 나오는데 대문 앞에서 집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와 마주쳤다.
“누구신지….”
“신서원, 아니 서원이 여기 왔습니까?”
“아, 서원이 찾아오신 손님이구나. 서원이 아까 점심 먹고 읍내 나갔는데 아직 안 들어왔나 보네. 들어와서 기다려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힐끔거리는 아주머니가 커피 한 잔을 내왔다.
건네는 성의를 물리치지 않았다. 선오는 아주머니가 권하는 대로 마루에 앉았다.
“근데 우리 서원이랑은 어떤 사인지.”
서원과의 관계를 떠올릴 때면 항상 생각이 많아지곤 했다. 명확하게 정의를 내릴 단어가 바로 떠오르지 않았기에. 하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그에게 있어 그녀와의 관계는 명확했다.
“…남자친구입니다.”
“아, 애인이구나. 그것도 모르고 누군가 했네. 낯이 익어서 티브이에 나오는 사람인가 했어요.”
남자친구라는 답에 아주머니의 안색이 금방 밝아졌다.
친인척 같아 보이진 않는데, 왠지 혈연보다도 더 가까워 보이는 어조다. 그녀를 잘 안다는 뉘앙스.
내심 경계를 하던 선오도 마음을 놓은 건 그 때문이었다.
“아유, 이렇게 잘생긴 애인이 올 거였으면 미리 말을 해주지, 서원이 얘도. 찬거리가 별로 없는데 어쩌죠. 이럴 때가 아니지 시장이라도….”
“아닙니다. 서원이 데리고 바로 올라갈 겁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저녁은 먹고 가요.”
부랴부랴 일어나 집을 나서는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보던 선오는 시계를 확인했다.
점점 해가 저물어 가는데 대체 왜 안 오는 건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돌담 집을 나와 등대가 있는 길을 따라 무작정 걸었다.
방파제가 바로 보이는 항구 안쪽에서 낚싯대를 잡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그의 감이 맞는다면 서원이었다. 신서원.
사랑스러운 등, 애교를 부리던 뒷모습, 완벽하게 그녀였다.
천천히 서원을 향해 다가갔다.
이제 겨우 이틀 못 본 건데도 그녀가 눈앞에 있다는 생각만으로 가슴이 세차게 뛴다.
가까이 다가가자 시멘트 바닥에 간식으로 먹은 떡볶이와 튀김, 당근만 수북하게 뽑힌 김밥이 보였다. 보통 바닷가에선 회를 먹지 않나. 바닷가에서 분식이라니. 메뉴 선택마저도 신서원다웠다.
“해 지면 혼자 있지 말랬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천천히 돌아보는 얼굴, 서서히 커지는 눈, 벌어지는 입술.
누가 봐도 놀란 눈치였다. 도망쳐 여기까지 왔는데 그가 떡하니 여기 있으니 그럴 만도.
“나 같은 나쁜 놈이 또 있으면 어쩌려고.”
“…나쁜 놈 아냐.”
“뭐?”
뭐라고 중얼거리는데 되물으니 고개를 돌려버린다.
“나 없으면 신서원 반찬 투정은 누가 받아줘.”
그는 서원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파도가 방파제에 부딪혀 철썩거린다.
환절기라 밤낮으로 날이 쌀쌀한데 그녀는 옷을 얇게 입고 있다. 선오는 작은 한숨과 함께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어깨 위로 둘러주었다.
“자꾸 움직이면 옷 바다에 떨어진다.”
괜찮다고 바르작거리다가도 그가 더 강한 힘으로 옷을 덮어주자 더 거절치 못한다. 유독 그의 스킨 향이 짙게 묻은 옷을 좋아하던 그녀였다.
무릎에 대충 붙은 반창고가 대번 눈에 들어왔다.
“뭐야, 그새 무릎 갈았어?”
“…아까 읍내에서.”
“잘한다. 치료는 누가 해줬어.”
“그냥, 있어.”
“그냥 누구, 나 몰래 숨겨둔 놈이야?”
평소라면 아니라고 펄쩍 뛰고 애교를 살살 부릴 서원이 묵묵부답이다. 낚시 그런 거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낚싯대만 보고 있다. 저 속도 말이 아니겠지. 그러니 취미에도 없는 것들에 마음을 쓰며 혼란스러운 속을 달래려 애쓰고 있다.
“진짜 바람이라도 피워? 왜 대답 안 해.”
“…나 농담한 거 아니야. 우리 더 이상은 이제….”
“이미 사랑하는데 어떡해, 그럼. 심장 떼어내서 버려? 다시 시간을 돌려서 고3 때로 돌아가?”
“돌아가면?”
“그땐 네가 아무리 들이대도 돌려보내야지.”
푹 숙어지는 머리통이 또 고뇌에 휩싸였다. 대체 저 작은 머리 안에서 무슨 고민이 저리도 많은 건지.
“아무리 섹스하자고 조르고 안겨도 칼같이 거절해야지.”
“내가 그렇게까지는 안 했어.”
“진짜 나 안 쳐다볼 거야?”
힐긋 곁눈질을 하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다시 정면, 다시 시선이 겹치면 또 회피. 감질나 속이 탔다. 답을 기다리지도 못하고 재차 재촉했다.
“어?”
그동안 쫑알거렸던 게 다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녀는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바다를 쳐다보며 소리쳤다.
“아, 잡혔다!”
까딱까딱, 찌가 까딱거리더니 물속으로 쑤욱 들어갔다. 동시에 초리대가 거세게 휘었다. 서원은 열심히 릴을 감기 시작했다. 그가 힘에 부쳐 휘청거리는 그녀의 손을 겹쳐 잡고 지지대가 되어주자 서원이 한결 편하게 릴을 감았다. 손바닥 반만 한 물고기 한 마리가 수면 위로 튀어 올랐다.
“잡았어!”
잡긴 잡았는데 물고기 입에서 낚싯바늘을 떼어내는 건 못하겠는지 물끄러미 올려다보는데, 선오는 내색 없이 그녀가 원하는 대로 낚싯바늘을 제거해주었다. 작은 통 안으로 물고기를 넣자 서원이 가만히 들여다본다.
“이게 뭐야? 참돔 그런 건 아니지?”
“그냥 잡고기야.”
딱히 값나가는 종이 아니라는 말에도 실망하는 기색은 없었다.
“너 좋아하는 튀김 해 먹으면 되겠네.”
“그냥 풀어주자. 작잖아. 근처에 어미가 있으면 어떡해.”
“…그래 풀어주자.”
기껏 잡았으면서 풀어주고 싶다는 그녀를 보는데, 서원답다고 생각했다.
물이 든 통을 방파제 사이로 기울이자 물고기가 물속으로 첨벙, 하고 사라졌다. 바닷속을 한참 동안이나 들여다본다 싶더니 기우뚱 몸이 기울었다.
“어, 아!”
넘어갈 뻔한 몸을 낚아챘다. 자객에게 쫓겨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던 그때가 생각났다. 등에 식은땀이 나고 온몸이 다 아찔했다.
“큰일 날 뻔했잖아! 조심해야지!”
작은 몸을 확 끌어와 머리통을 감싸 안았다. 안 돼. 여기서까지 그녀가 잘못되면 자신은 정말 살지 못한다. 죽음보다 더한 두려움은 그녀와 더 이상 함께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절벽에 몸을 던지는 순간 알았다. 그녀를 잃을 바에야 함께 물거품이 되는 편이 낫다는 것을.
“신서원.”
몸을 떼어내고 어깨를 붙잡지만 자꾸 시선이 바닥이다.
“안 봐?”
“…여기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말 안 할 거다.”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어 주자 올려다보는 얼굴이 그새 수척해져 있었다.
이별의 아픔은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처음이네, 너랑 여행 온 거.”
‘저, 이런 건 처음입니다. 걱정도 근심도 다 놓고 이렇게 한가로이 하늘도 보고, 새도 보고, 꽃구경도 하고. 어머니가 계셨다면 참으로 좋아하셨겠지요.’
가느다란 목소리로 감탄하며 들판을 보던 명주가 겹쳐 보였다. 서원의 전생.
그녀를 떠올리자면 화살이 등에 꽂혀 피를 흘리던 모습까지 자꾸만 함께 겹쳐져 가슴이 지끈거린다. 지켜주지 못했던 전생의 연인.
“우리 전생에서 악연이었을지, 그때 네가 물었었지. 그랬을지도 모르지. 근데 전생은 전생이고 지금은 지금 아니냐? 전생이니 뭐니 그런 게 뭐가 중요해.”
“그게 무슨 소리야?”
“있어. 그런 게.”
어째 조금 오랫동안 눈을 마주친다 싶더니만 다시 휙 고개를 돌려버린다.
“집으로 돌아가자.”
“말했잖아. 안 된다고.”
“네 엄마 때문이라면 이런 멍청한 짓 안 해도 돼.”
“아니. 중요해.”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에 서원은 잠시 벅찬 숨을 감추는 듯 보였다.
“우리 엄마 죄가 언젠가는 다시 우리를 갈라놓을 거야.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리진 못하니까. 나 때문에 네가 불행할 이윤 없어.”
“그게 네 행복보다 중요해?”
“그런 널 보고 싶지 않아. 나 때문에 네가 힘들어할 이유도 없어. 그럼 우리 엄마도 상처를 받을 거고, 너도 상처받을 거고, 그런 널 보는 나도 마음이 너무 아플 거야. 우리 다 힘들어질 거야.”
더 이상 자신 때문에 누구도 다치는 게 싫다던 명주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냥 저 하나만 생각해도 될 걸, 그가 다칠까 고민하고, 그를 대신해서 모든 아픔을 혼자 감내하려고 한다. 이렇게 그녀를 또 놓을 순 없었다.
“겪어보지도 않고 네가 어떻게 알아.”
“겪기 전이니까 그만두려는 거야. 엎어진 후에는 정말 힘들 거 같으니까. 나 너랑 그렇게 끝나면 정말 너무너무 힘들 거 같아. 내가 이기적이라는 거 알아. 나 좋을 대로 너 사랑해놓고, 이제 와 상처 받을까 봐 끝내는 것도, 순 나만 생각한 거 맞아.”
냉정한 척하지만 손을 떨고 있다.
“누가 우리 관계를 알게 되면… 우리 엄마가 네 아빠를 그렇게, 그렇게 했는데도 만나는 사이라는 거 알게 되면 누구나 할 거 없이 손가락질할 거야.”
“언제는 우리가 그런 거 눈치 보면서 몸 섞었어?”
기어코 답을 주지 않는 그녀가 돌아갈 생각인지 바닥에 펼쳐놓은 물건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왜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는 버려야 돼. 왜 놓을 생각부터 하냔 말이야.”
들고 있는 짐을 자연스레 그에게 뺏긴 서원이 다시 달라 손을 뻗었지만 어딜, 어림도 없었다.
“근데 너 손바닥에 상처… 아냐.”
손바닥에 남은 상처 자국을 향한 그녀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었지만 더는 묻지 않는다.
“넌 어서 올라가 봐. 내일 방송은 어떻게 하고.”
이 와중에도 방송 걱정하는 신서원. 그런 그녀가 자신을 온전히 뿌리칠 수 있을 리 없다.
“너 두고는 안 가. 걱정되면 같이 가든지.”
“난 휴가야 쉬다 갈 거야.”
평소 같았으면 껴안고 비비고 한번 하고 얼른 올라가자, 야살을 떨었을 텐데 어째 오늘은 굳건하게 버틴다. 그래도 그녀가 이리 냉정하게 대해주니 어떤 면에선 좋았다. 꼭 그에게 모든 걸 맞춰주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굴지 않고 저 하고 싶은 대로 의견을 피력하니 이제야 그녀와 동등하게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랄까. 물론 지금은 그와 끝내기로 마음먹은 상태라 본심이 아니긴 하겠지만.
자연스레 돌담집 안으로 들어서자 그녀가 머뭇거린다.
“넌 왜 들어가?”
“왜긴, 바늘 가는데 실 안 가면 어떡해.”
“너랑 내가 바늘이랑 실이야?”
“바늘이랑 실이다 뿐이냐? 8년을 붙어살았는데 애만 안 낳았다 뿐이지 이게 부부가 아니면 뭐야.”
까만 눈동자가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는데 그게 사랑스럽다.
한번 마음을 인정하니 봇물 터지듯 넘치는 이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다.
아닌 척 애쓰지만 쭈뼛거리는 얼굴이 귀엽다. 괜히 눈 끝을 닦아내는데, 아무리 아닌 척해도 숨길 수 없다. 서로의 마음을 꽁꽁 숨기며 살았지만 저 표정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건 그녀와 함께해온 세월의 힘이기도 했다.
“아주머니가 싫어하실 거야.”
“아주 좋아하시던데.”
선오는 싱긋 웃으며 마당으로 들어갔다. 얼큰한 매운탕이 끓는 냄새가 났다. 아주머니는 주걱을 든 채로 마당을 나왔다.
“서원아, 얘. 얼마나 기다린 줄 알아. 저녁 하는 중이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괜히 폐를 끼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휴, 무슨 그런 소릴. 서원이 애인이면 우리 집 사위나 마찬가진데.”
서원의 미간이 미세하게 주름졌지만 선오는 사람 좋은 웃음으로 보란 듯이 웃었다. 마루에 상을 편 서원이 상차림을 도우면서도 자꾸만 그를 힐끔거렸다. 선오는 그녀의 시선을 알면서도 그녀가 마당에 널브려 놓은 낚시도구를 정돈했다.
“근데 하나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뭔데요?”
“누구신지 제가 아직 몰라서요.”
상에 둘러앉았지만 선오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집주인은 아주머니건만 손님인 선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녀의 정체에 대해 물었다. 누가 보았다면 확실히 이상한 광경이었다.
“아이구, 여기가 누구 집인지도 모르고 오셨구만. 우리 서원이 어릴 적에 아랫집 윗집으로 같은 아파트에 살았어요. 화연이랑 동고동락하고 지내던 사이여서 거의 뭐 서원이는 내 딸이었지. 조그만 게 어찌나 똘똘하고 예쁘던지 많이 아꼈어요. 아, 말이 길어졌네. 저녁 들어요. 입맛에 맞나 모르겠어요.”
선오는 싱싱하고 통통한 갈치 한 마리를 젓가락만으로 정갈히 발라 서원의 숟가락 위로 올려주었다.
아주머니가 흐뭇한 표정으로 젓가락질을 했다. 생선 반찬을 좋아하지만 뼈가 많은 건 잘 못 먹는 그녀 때문에 백반집에 가도 가시를 바르는 건 그의 일이었다. 생선 살은 잘도 바르면서 비린 음식은 입에도 대지 못하는 그였기에 생선은 모조리 서원의 차지이기도 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건만 서원이 난감해했다.
“왜.”
“…아니. 너 내 방 들어갔지.”
어서 먹으라고 턱짓을 하니 그제야 씹기 시작한다.
“너 어떻게 들어간 거야?”
“국 식는다.”
더는 말하지 말란 소리에 서원은 못마땅한 얼굴을 하면서도 열심히 숟가락을 들었다.
아주머니는 투닥투닥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이 그저 보기 좋은 얼굴이었다.
“근데 선오 씨는 매운탕을 영 못 먹네. 입맛에 안 맞아요?”
“선오 비린 거 잘 못 먹어요. 이건 그렇게 비리지 않은데….”
그토록 오래 부대끼며 살았으니 서로의 식습관에 대해 잘 알 수밖에.
말을 꺼내놓고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서원이 입을 다문다.
식사가 끝이 나고, 커피가 마시고 싶은지 서원이 주방으로 들어갔다. 한참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그럼 자고 올라갈 거예요?”
“예, 서원이가 안 가면 그래야죠. 제가 잘못한 게 좀 있어서 점수 따러 왔거든요.”
“보기 좋아요, 두 사람.”
“서원이랑 오랫동안 연락하고 지내셨나 봐요. 통 연고도 없는 사람처럼 굴길래 알고 지내는 사람이 없는 줄 알았거든요.”
“연락하고 지낸 것도 최근에서야 그랬어요. 저나 나나 사는 게 바빴지. 저 어렸을 적, 화연이 장사한다고 나가면 내가 우리 서원이 밥 먹이고 입히고 했는데 그것도 눈치가 보이는지 그 어린 것이 편히 쉬는 걸 못 봤어요. 그래도 제 엄마 오면 환하게 웃고. 우는 법을 배우지 못했던 것도 제 어미 때문이었지. 제가 울면 또 엄마가 아플까 봐. 화연이 그년도 참 박복한 년이지. 망할 서방이랑 이제 좀 연 끊나 싶더니 겨우 만난 남자랑 그래, 또 그렇게 되어버리고. 서방 복 없는 년이 무슨 팔자가 편할까.”
아주머니가 눈물을 훔쳤다.
“우리 서원이가 제 어미 팔자는 닮지 말아야 할 텐데, 그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이렇게 얼굴 보니 내 마음이 한결 편하네요. 맨날 살림 때려 부수는 제 아비 때문에 조금이라도 소리 지르는 남자는 못 만나는 앤데, 안 봐도 선오 씨가 좋은 남자란 건 알겠어요.”
“저 좋은 남자 아닙니다. 그냥, 좋은 척하는 남자일 뿐이죠.”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아주머니가 희미하게 웃었다.
“정말 나쁜 놈은 그런 말 안 해요.”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서원이 커피 두 잔을 만들어 가져왔다.
“왜 두 잔이야.”
“넌 내일 아침 뉴스 있잖아.”
“네가 안 가면 나도 뉴스하러 갈 일 없어.”
서원의 몫으로 만든 커피를 가져와 들며 지그시 웃자 또 그녀의 표정이 흐려진다. 주름진 미간이 귀엽다. 천생 다정한 신서원이 화를 낼 리는 만무했지만 요즘 들어 평생 볼 주름 다 보는 듯했다. 그의 엄포를 농담이라곤 생각지 않을 것이다. 그는 지키지 않을 약속은 하지 않았고, 빈말은 입 밖에도 꺼내지 않으니까.
“아, 어디서 봤나 했더니 아침 뉴스에서 봤었구먼. 가만 그러고 보니 요즘 유명한 시사프로에서도 봤는데. 아유, 내가 유명한 아나운서를 몰라봤네. 자고 갈 거면 자리를 좀 봐줘야겠네.”
아주머니가 빙그레 웃으며 일어섰다. 서원은 꼼짝없이 궁지에 몰린 생쥐였다.
결국 나란히 마주 누웠다. 자꾸 그녀가 등을 돌려 눕는데 상처받은 명주의 등이 생각나 선오는 입이 썼다. 전생에서도 꽤 깊은 연으로 이어진 사이라는 걸 그녀가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문득 궁금했지만 선오는 입을 다물었다.
전생의 제 처지까지 구태여 떠벌리고 싶지 않았다. 기억을 잊은 채 현재를 행복하게 살기를 바랄 뿐.
“정말 한번 안 하고 자도 돼, 너?”
“…….”
“자지 빨고 싶다고 사람 괴롭힐 땐 언제고. 냉정하네, 신서원.”
“시간 맞춰서 올라가. 생방송 사고칠 일 있어.”
“나 봐.”
“…….”
“나 보면 올라가고.”
마주 보면 올라가겠다는 그의 농간에 그녀가 살금살금 돌아눕는다.
이때다 싶어 그녀의 손목을 확 잡아 끌어당기는데 화들짝 놀라는 눈이 속았다는 걸 깨닫는다.
“저리 가. 헤어졌는데 이러는 게 어디 있어.”
“우선 헤어진 적 없고, 사귄 적도 없는데 빤스 까고, 자지 빨고, 오줌 싸고 먼저 한 건 너였고.”
칼 같은 그의 정정에 그녀는 말이 없었다.
“한번 빨고 자, 구멍 빨아주는 거 좋아하잖아. 어디 봐.”
그녀의 엉덩이를 당겨와 잠옷 원피스 안으로 손을 넣고 팬티까지 한 번에 스륵 내리려는데, 서원이 답삭 손을 잡아 세운다.
“싫어.”
하자는데 싫다는 서원은 난생처음이었다.
“소리 들릴까 봐 그러는 거면 소용없어. 얌전떨기엔 한참 멀리 왔거든, 너?”
“헤어졌잖아, 우리. 끝났는데 왜 이래.”
“그 말은 좀 더 냉정하게 해야지. 그렇게 울먹거리면서 하면 내가 또 오해하잖아. 아님, 오해가 아냐?”
서러운지 눈가를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는데 또 그 모습이 애처로웠다.
여태 그녀의 모든 삶이 그래왔다. 철저히 혼자만의 짐이었고 혼자만의 상처였다.
어미에게는 늘 든든한 딸이 되어야 했고, 아비에게선 어미를 지켜야 했던 그녀.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었던 어린 신서원. 동네 아주머니에게 의지했던 그녀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저 역시 딱히 행복한 가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머니 사랑이라도 독차지하고 자란데다 태어나길, 사랑이 고파 누굴 의지해야 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누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자신과는 달리 그녀는 겉으로는 씩씩한 척하지만 실은 누가 돌아봐 주길 바라는 여린 여자가 아닌가.
그런 정성을 다른 새끼에게 쏟는다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다 못해 오장육부가 뒤집힐 지경인데 순순히 끝낼 마음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빨아만 줄 테니까 자지 필요하면 말해.”
선오는 머리맡에 놓인 작은 조명등을 급하게 켰다.
“싫어. 자꾸 이러면 우리 정말 못 끝내.”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의 손을 그러쥔 서원이 고개를 젓는다. 지금 당장 그녀를 가지고 싶어 심장이 뛰다 못해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넌 거짓말을 못 하는 건지, 일부러 이러는 건지, 그건 아직도 구분이 안 된다.”
자신은 화연이 아닌 오로지 서원 하나만을 보며 달려가려는 것이다. 화연이니 누구니 하는 건 그의 관심 밖이었다. 그의 심중에 그런 것들은 있으나 마나 한 티끌에 불과했다. 서원은 자꾸 화연을 들먹거렸지만 누군가를 싫어하는 마음조차도, 그에겐 귀찮은 일일 뿐이었다.
그러니 그녀 역시도 자신 하나만 생각했으면, 그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했다.
“네가 더 좋아지는 거 싫어. 나.”
진지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눈을 감는 그녀는 지쳐 보였다.
“더 공들여 빨아야겠네, 그럼.”
“지금도 너 잊느라 힘든데 더 힘들어질 거야.”
“혼자서도 이렇게 힘들면서 출소하는 엄마까지 돌보겠다고? 뭐든 네가 중심을 잡아야 주위 사람이 굳건하지. 이렇게 억지로 버틴다고 네 엄마가 퍽도 얼씨구나 좋다, 하겠다.”
두 다리를 당겨와 벌리곤 쪽 허벅지 안쪽, 야들야들한 살결에 입을 붙였다.
웃기지만 퍽 경건하게 입술을 맞댔다.
“신서원.”
화살을 맞고도 너만은 도망가라 그를 떠밀던 그녀가 생각나 목구멍이 시큰거린다.
용서를 구하는 죄인처럼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래, 네가 만족할 때까지 밀어내. 우리는 안 된다고 계속 부정해.”
“…….”
“이번엔 내가 네 옆에 있어 볼 테니까.”
자신이 그녀를 사랑이라 인정하지 않은 세월만큼 그녀 역시 부정해도 상관없었다.
끝까지 붙들고 놓지 않으면 된다. 지난 생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이번에는 놓지 않는다.
그는 고개를 더욱 숙여 그녀의 가랑이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도 닦는 수도승처럼 기도하듯 입을 붙였다. 따뜻한 그녀의 체온에 그제야 심장에 피가 도는 기분이다.
조심스레 팬티를 옆으로 젖히고 짜부라져 있는 소음순을 혀끝으로 살살 달래 입구를 텄다. 벙긋 벌어지는 구멍이 습기를 머금어 녹녹하다. 그의 것을 받아들이기 위한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늘 기름져 있던 질구였다.
평소보다 훨씬 세심하게 구멍 주위를 달랬다. 혓바닥을 밀착해 안에서 전해지는 열기를 만끽했다. 구멍이 꾸물거리며 벌름벌름 입구를 여닫을 때마다 입술이 촉촉해진다. 물 많은 신서원, 육중한 좆으로 두툼한 속살을 찔러주면 그대로 물을 싸지를 테지.
물먹은 조갯살처럼 머금은 보짓물을 쏘아댈 테다. 이 구멍을 예뻐해 준 시간만 해도 얼만데 척 보면 척이었다. 자지부터 꺼내 냅다 찌를 수도 있었으나 선오는 인내했다.
오랜만에 맛보는 그녀의 구멍이 맛있어 입을 뗄 수도 없겠거니와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는 저 눈망울 때문이었다. 여차하면 또 울릴 것 같았다. 명주가 울먹거리던 얼굴이 떠올라 또 그의 발목을 붙잡는다.
“신서원, 더 빨게 다리 벌려 봐. 안까지 혀 넣어주는 거 좋아하잖아.”
어차피 지금 어찌해도 울 듯싶은데, 선오는 잠시간 시름에 잠겼다.
아니 씨발, 분명 그녀를 살살 달래러 온 건데 또 이러고 있다.
신서원하고 붙기만 하면 머릿속은 좀비처럼 이성이 제거되고 본능만이 남는다. 그 문선오가, 순리니 상식이니 하는 것들 따위는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고 기꺼이 보지를 빨기 위해 고개를 처박는다. 옆방에 있을 아주머니 때문에 걱정이 되는지 그녀가 입을 틀어막았다.
선오는 서원의 가랑이 사이에 머리통을 은밀하게 가두고서 천잡하게 혓바닥을 놀렸다. 원을 그리며 마구잡이로 혀를 돌렸다가, 비비기도 하고 혀끝으로 입구를 긁기도 했다. 서원의 살 냄새가 그리워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그의 마음을 안다면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젠 코끝에서 착착 달라붙는 신서원 보지 살 냄새. 8년 세월을 이 맛만 보고 살았는데 떠나겠다는 그녀가 밉다가도 더없이 소중하기도 했다.
“으응, 음, 하지, 마. 하지….”
“물 나온다. 가만히, 어?”
혓바닥 가득 들러붙는 물을 맛보면서 동시에 애액을 윤활제 삼아 속살을 쿡쿡 쑤셨다. 진득하게 감기는 신서원 구멍 물. 무엇이 애액이고 침인지, 경계가 상실될 정도로 뒤섞여버린 액체를 끝없이 삼켰다.
Y존 동굴 한가득 질척거리는 소리가 울린다. 그 소리마저 신경이 쓰이는지 서원이 치마를 내려 제 아랫도리를 덮었다.
“후으… 응… 싫다고 그랬는, 으응!”
박을 타듯, 도톰한 속살 가운데를 수십 차례 오가며 추삽질했다. 혀가 다 얼얼할 정도로 쑤셨지만 역부족이다. 콧날을 간지럽히는 음모는 하등 신경 쓸 거리가 못 됐다. 아니, 피부로 닿아오는 모든 게 서원의 존재를 증명하는 듯해 좋았다.
“소리, 소리 안 나게.”
“물이 많은데 어떻게 소리가 안 나.”
그녀가 오늘의 일을 둘만의 비밀로 하기를 원하니 굳이 남들에게 알릴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고 쉬엄쉬엄, 사정 다 봐주며 빨 마음은 결코 없었다. 마음을 이래 먹으나 저래 먹으나 제어가 되지 않는 건 매한가지였다.
“힘 풀어, 구멍에 힘 너무 들어갔다.”
“으응, 흐… 소, 리.”
“애인이 물 마시는 소리였다 그래. 목 관리 중이라 많이 마셨다 그러든가. 둘러댈 말이야 많잖아. 설마 그게 신서원 보짓물이라고 생각이나 하겠어?”
아닌 게 아니라 정말 꿀물이라도 마시듯 구멍이 싸는 물을 끊임없이 삼켰다.
찔꺽찔꺽, 질퍽질퍽, 혓바닥 안으로 물먹은 애액을 모았다가 한꺼번에 목을 축이기도 했다. 집요하게 구멍을 헤집을수록 소리가 더욱 난잡해졌다.
점점 입 속으로 굴러 들어오는 덩어리가 커진다. 타액과 뭉친 애액이 목구멍을 축이다 못해 좌우 양옆 음모까지 흠뻑 적셔놓았다. 이쯤 되면 성기를 삽입하는 게 보통의 순서였지만 그렇게 했다간 옆방에 있는 아주머니가 눈치챌 게 뻔했다.
백발백중으로 서원은 신음을 참지 못한다. 오랜만에 빨아준 탓에 평소보다 그녀가 흥분한 이유도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소리 내지 않기로 마음먹어 성공한 적이 없었다. 그만큼 그녀는 예민하고 민감했다.
유독 신음이 요란한 서원이 아닌가.
선오는 가까스로 입술을 떼어내고 그 자리에 검지와 중지를 갖다 댔다. 눅눅한 안쪽은 벌써 그를 알아보고 벌렁거리며 삽입을 채근했다. 그는 마다하지 않고 후미진 속살 안까지 푸욱, 단번에 밀어 넣었다.
치맛자락을 꾹꾹 쥐고 있는 그녀의 목덜미가 뒤로 젖혀진다. 이가 부서져라 깨물고 있다가 도저히 안 되겠는지 긴 치맛자락을 끌어 올려 입에 무는데 눈가가 벌써 발갛다.
“자지는 싫다니까 손가락으로 할게. 응? 서원아. 신서원.”
서원이 베개를 베고 있어 눈물 어린 눈가와 그새 침 범벅이 된 입가가 고스란히 보였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물살을 가르듯, 천천히 보지 속을 열고 점막을 갈라 박자를 탔다. 펌프질이 시작되자 안쪽에 고여 있던 물이 찔꺽거리며 구멍 밖으로 밀려 나온다.
세게 하지 말라 고개를 젓는데, 단단히 조여 물고 질겅거리는 구멍은 더 빠르게 쑤셔 달라 조르고 있다. 애원과 다름없었다.
몸을 섞을 땐 단 한 번도 뺀 적이 없는 서원이 이토록 몸을 사리는 걸 보니 어지간히 들키기 싫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미 가속이 붙은 손가락은 제어할 수가 없었다.
보짓물로 듬뿍 웅덩이진 속이 질퍽거리는데, 그 소리가 이젠 숨길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스펀지처럼 도톰하게 부풀어 흥분이 고조된 속살을 둥글게 문지르며 그녀의 쾌감에 부채질을 해주었다.
말초신경이 집합된 부위이자 서원의 성감대 중 하나. 아니나 다를까 서원의 아랫배가 움찔거리며 튀고, 구멍이 자잘하게 부들거리며 손가락을 씹어대는데 그 떨림도 한층 빨라졌다.
오르가슴의 궤도에 들어섰다는 건 이젠 결코 되돌릴 수 없다는 걸 뜻했다. 기어코 절정을 봐야만 해갈이 되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아는 그녀가 필사적으로 말했다.
“아, 나 싸, 하지 마. 이불 더러워지는, 앗!”
자신의 절정을 직감한 얼굴이 사랑스럽고도 음란했다. 홍조가 든 뺨이며 살포시 풀린 눈, 침이 흐른 입술, 외설스럽게까지 느껴지는 표정.
한마디로 보기 좋았다. 언젠가 둘이 같이 야동을 본 적이 있는데, 삽입에 열을 올리고 있는 화면을 보며 그를 힐끔거렸던 표정과 닮아 있었다.
“싸. 내가 마시면 돼.”
몸 겹친 세월이 얼만데, 쌀 거 모르고 쑤셨겠는가.
긴 중지로 지스폿이 얼기설기 뭉쳐 모인 살점을 더욱 집요하게 찌르자 결국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물기가 손가락을 적시는데, 선오는 곧장 손가락을 빼고 그 자리에 입을 갖다 댔다. 혀를 쑤석거리며 나오는 물을 받아마셨다.
화수분처럼 쑤시는 족족 터져 나왔다. 한번 터지면 주워 담을 수 없는 둑 같기도 했다. 절정의 응축액이 입가를 적시고도 턱 끝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신음을 삼키느라 제 입을 있는 힘껏 틀어막는데 그 소리도 정신없이 예쁘니, 말 다했다.
질구부터 회음까지 번들거리며 묻어있는 분비물까지 삭삭 핥아주었다. 그것도 기분이 좋은지 적갈색 구멍이 기분 좋게 벌어지는데, 그새를 못 참고 벌름거리는 요도가 남은 흥분액을 내보낸다.
짤끔거리며 남아있던 오르가슴의 찌꺼기까지도 마저 배출하는 그녀가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애써 숨길 뿐. 그런 그녀를 모르지 않았다.
오럴 섹스를 좋아하는 그녀는 제 좆을 빨 때 정액 한 방울까지 좋다고 쪽쪽 삼키지 않는가. 그리고 언제는 뭐 그녀의 밑구멍에 입을 안 댔나. 사실 그녀나 그나 똑같은 셈이었다.
어차피 서로가 이깟 추태쯤은 아무렇지 않은 사이였다. 다리를 M자로 쩍 벌린 채 늘어진 그녀를 보자니 다시금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동안 부정했을 뿐 그녀는 처음부터 제 여자였다.
선오는 입가에 묻은 액을 손끝으로 쓸어 닦으며 여운 짙은 눈으로 서원을 응시했다.
서로에 대해 잘 모른다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면 서원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도 그였다.
꼭 잘 때 몸을 뒤척이는 버릇이 있어 등을 쓸어줘야 하고, 가끔 불면증에 시달릴 때면 섹스가 특효약이 되곤 했다. 이리 한번 절정을 쏟아내고 나면 그녀는 깊게 숙면을 취했다.
이제 그녀가 잠들 시간이었다.
선오는 손수건으로 그녀의 가랑이 사이를 닦으며 잠을 청하라 말했다.
“올라가, 이제. 약속했잖아.”
“너 나 올려보내려고 허락한 거지.”
“약속, 지켜.”
“넌 언제 올라올 건데.”
“…휴가 끝나면.”
“그 휴가 언제 끝나는데.”
“…말 안 해.”
“그래, 너 안 오면 공개적으로 찾지 뭐. 뉴스 하다말고 원에스테틱 운영하는 문선오 애인 신서원 찾는다고 공개적으로 방송하면 되지 뭐. 생방이라서 바로 나갈 거야. 알지? 나 한다면 하는 거.”
“…이상해.”
“뭐가.”
“네가 이렇게 나 붙잡는 거.”
“내가 너 붙잡고 매달리는 게 더 보고 싶어? 뭐 어떻게 매달려 줘. 말해 봐.”
끝내 답을 않는 그녀가 촉촉해진 눈을 감는다.
“그럼….”
“어?”
“그럼 이제 네가 나 붙들어 줘. 나 지금 흔들리니까 네가 나 많이 잡아 줘.”
눈물을 참는다고 참아보지만 서러워 어쩔 줄을 모르는 코끝이 빨개져있다.
나를 좀 잡아 달라고, 언제까지나 곁에 있어 달라고, 나만 사랑해달라고, 그 말을 8년 만에 한다.
그에게 짐이 될까, 부담이 될까, 드러내지 못했던 진심을 이제야 꺼내놓는다.
그 말이 이토록 어려웠나.
“씨발.”
그녀를 껴안았다. 고동치는 이 작은 심장에 제 몸을 겹쳤다.
“아직 다 넘어간 거 아냐. 반만, 반만 넘어간 거야.”
“목소리는 이미 문선오 여잔데?”
“아냐.”
“알았다, 알았어.”
목소리엔 애교가 가득 실렸으면서도 아니라고 훌쩍거린다.
하여튼 신서원 끝까지 여우다. 끝까지 문선오를 조종해서 제 입맛대로 다룬다. 어쩌겠는가. 이번에도 알면서 넘어간다. 이러려고 밀어낸 건 아니겠지. 합리적인 의심이었지만 넘어가 주기로 했다. 그녀에겐 몇 번이고 져주어도 상관없다.
“늦어도 내일은 와. 더 늦으면 잡으러 올 거야. 잡으러 왔는데도 없으면 바로 전국구 방송 타는 거야.”
여지를 주는 듯하면서 끝까지 답이 없었다. 이쯤 되면 작정한 수법인지 의심이 든다.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선오는 절레절레 혀를 내둘렀다. 속이 타고 애가 끓는다. 알면서도 휘둘리는 제가 싫었지만 어찌해볼 방법도 없었다.
“더 양보 못 해.”
어차피 화연이 출소하는 이상 가게를 두고 어디 갈 서원이 아니었지만 경고는 할 필요가 있었다.
“서원.”
“…….”
“신서원.”
선오는 가만히 쳐다보는 그 눈을 보면서도 어딘가 불안했다.
데리고 가는 게 맞는데. 아무래도 같이 가지 못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그녀는 제 앞길은 야무지게 가는 여자였다. 저에게나 흐물거리고 말랑거리지 제 손으로 가게도 뚝딱 차릴 만큼 단단한 여자기도 했다.
“나오지 말고 계속 자. 해 지고 나서 밖에 돌아다니면 혼나.”
“잡는다면서, 사랑한다는 말은 왜 안 해?”
허, 헛웃음이 터졌다. 그 말을 저리 뻔뻔하게 하는 거 보니 이제 조금은 서원의 마음이 돌아왔다는 사실이 실감 나기도 했다.
“네가 완전히 내 여자가 되면 마르고 닳도록 해줄 거다, 왜. 어서 자기나 해.”
톡, 이마를 건드리자 그녀가 긴말 없이 눈을 감는다.
선오는 새벽 늦게야 돌담 집을 나왔다.
조금씩 비가 내리는 시작하는 새벽 마을은 해무가 깔려있었다.
“문 아나, 어디 연락 기다리는 곳 있어?”
무사히 아침 뉴스는 마쳤지만 여전히 그곳에 두고 온 서원이 신경 쓰였다. 데리고 왔어야 하는데, 오럴 섹스 후 푹 잠을 청할 그녀를 위해 억지로 데려오지 않았더니 하루 종일 그의 신경을 갉아먹는다.
“아닙니다. 뉴스 때문에 신경을 좀 썼더니요.”
“문 아나도 참. 새삼스레 별걱정을 다 해. 걱정 마. 오늘 진행도 좋았으니까. 이러다가 정말 문 아나가 9시 뉴스 메인 자리 꿰차는 거 아냐?”
당연했다. 누가 진행하는 뉴슨데. 좋지 않을 리가. 공적인 업무에 차질은 없었다. 다만 문제는 가슴 속에 들어앉아 그를 좀먹고 있는 서원이었다.
시사 토론 프로를 진행하는 와중에도 온 신경은 연락이 없는 그녀에게 가 있었다.
다시 내려가서 둘러업고 와야 하나.
선오는 방송을 끝내자마자 운전대를 잡았다. 생각보다 녹화 시간이 길어져 시간이 지체됐다.
엎친 데 덮쳐 퇴근 시간이 맞물려 차가 막힌다. 전화는 다시 불통이었다.
붙잡아보라 하더니 농담이 아닌지 끝까지 애를 태운다.
때아닌 비가 내린다 싶더니 빗줄기가 제법 굵어졌다. 며칠간 비는 계속될 거라는 건 알았지만 강수량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거라던 일기예보가 완전히 빗나갔다. 기상청에서 예보한 것보다 훨씬 세차고 많은 양의 비가 쏟아졌다.
그야말로 예상치 못한 날씨였다. 서원이 잘 올라왔는지 알 길이 없었다.
예상한 시간보다 훨씬 지체되어 골목 안으로 들어서는데 서원의 가게 건물 앞에 정차돼있던 경찰차가 골목을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그새 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아닐 거라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조급했다.
계단 두세 개를 한 번에 올랐다. 숍 문을 열자 가게 내 분위기가 다소 어수선했다. 선오는 빠른 걸음으로 데스크를 지키던 직원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아, 전에 사장님 찾으러 오셨던 문선오 아나운서 맞죠?”
“서원이는, 오긴 왔습니까?”
“네, 방금 전까지 여기 계셨는데. 상황 정리되고 나가셨나 봐요. 웬 남자가 가게 문 열고 들어와서는 자기도 관리받겠다고 우기는데 아시다시피 저희는 여성 전문 케어 숍이거든요. 무슨 술집에 아가씨 고르러 온 것도 아니고. 저희 테라피스트 선생님들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직접 지명해서 관리 받겠다는데, 여긴 그런 곳이 아니라니까 손님 가려 받냐면서 소리를 지르고. 이게 무슨 경우 없는 짓인지.”
선오는 그길로 곧장 건물을 나왔다. 어디 숨어있기라도 한 건지, 걱정이 됐다. 폭력적인 아버지를 보고 자란 그녀였다. 화연에게 미친 그 화가 서원에게 미치지 않으리라곤 장담 못 한다.
원래 정신적으로 겪은 고통이 육체적인 학대보다 훨씬 벗어나기 힘든 법이다.
그 트라우마가 오래오래 그녀를 집어삼키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한참을 골목길 곳곳을 뛰며 그녀를 찾던 선오는 멀리 떨어지지 않은 커피숍 안에서 서원을 발견했다.
맞은편엔 또 그 남자가 앉아 있었다.
송학도. 가게 건물주라고 했던가. 칼 맞아 뒈진 새끼가 왜 또다시 나타난 건지.
선오는 주먹을 꽉 쥐고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이라면 다행인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녀의 얼굴은 괜찮아 보였다.
잔뜩 주눅 든 서원은 역시 어울리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겉으론 늘 환하게 웃던 서원이라 천하의 문선오도 저 속마음을 알아채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그러니까 지금 저 웃음은 진심으로 시름없는 미소였다.
선오는 대강 빗물을 털곤 그녀가 있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신서원.”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는데 테이블 위엔 계약서와 관련된 부동산 자료들이 놓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맘때쯤이 재계약 시즌이었던 거 같은데.
“여기서 뭐해. 전화는 왜 안 받아.”
“너 비 다 맞은….”
습관처럼 걱정이 앞섰던 건지 그녀가 말을 건네다 만다.
아차 하는 눈치였다.
“왜, 여기 있냐고.”
“재계약 때문에 건물주분과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그런데 너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실과 바늘.”
다신 안 볼 것처럼 굴던 것이 좀 나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예전처럼 손을 뻗어 오진 않았다. 제 마음을 단단히 후리려고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별수 있나, 그녀가 원한다면 또 매달려 줘야지. 문선오 꼴이 말이 아니다.
제 나름 냉정하게 거리를 두겠다고 해놓고 그가 어디 가버릴까 힐끗 올려다보는데 또 거기서 마음이 살살 녹았다. 조금이라도 강하게 밀고 나가면 마지못해 옆자리를 내어줄 눈치였다.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해줘야지.
그녀의 옆자리를 차고앉자 송학도의 눈이 가늘어진다. 나이도 상당히 있어 보이는데 신서원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 자체가 양심불량이다. 주제에 누굴 넘봐.
“넌 여기 왜 앉아?”
“입가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나 닦아.”
자연스레 입가에 붙은 부스러기를 떼어주었다. 아, 그녀가 좋아하는 디저트가 마카롱이었나. 디저트 종류는 전혀 좋아하지도 않고 즐기지도 않는데 그마저도 그녀 덕분에 몇 번 사봤다.
“저번에 가게 앞에서 뵈었던 분이네요. 근데 누구신지.”
송학도랑 똑같이 생긴 남자가 떨떠름하게 묻는데 저 눈깔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원에게 손찌검을 하고 아이를 낳으라 종용하던 새끼였다. 그게 전생이라 할지라도 그녀에게 마음을 품었다는 것부터 죄였다.
“제가 신서원 법적 보호자니까 저한테 말씀하시면 됩니다.”
“법적… 보호자라면….”
“말 나와서 말씀드리는데 저희 이번 계약을 끝으로 재계약 안 할 겁니다. 가게 내놓을 거니까 다른 세입자 알아보셔야 할 거예요.”
“예?”
상의조차 없었던 얘기였기에 서원이 놀라는 건 당연했지만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재계약을 안 한다니? 원래는 전세 보증금 인상하려고 했는데 그냥 그대로 재계약 해주시겠대.”
“내가 알아봐 놓은 상가 있어. 너 출퇴근하기 편하라고 우리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대충 추렸으니까 후보지 보고 고르면 돼. 내 건물로 들어오면 더 좋고.”
부담 주기 싫다고 말 하나도 쉽게 하지 않는 그녀가 문선오 건물이라고 얼씨구나 좋다, 들어오지 않을 건 뻔할 뻔 자였다. 그랬다면 처음부터 저 다 허물어져 가는 상가가 아니라 자신의 빌딩으로 들어왔었을 거다.
“알았어?”
“…….”
“알았어, 몰랐어.”
당시엔 괜찮다기에 더 권하지 않고 말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떤 마음으로 그랬을지 그 속이 다 보인다.
화연과 함께 장사를 할 생각이었을 테니 건물주가 문선오라면 그녀에게는 최악의 시나리오였을 것이다. 거기다 저 성격에 개업을 안 했으면 안 했지 비싼 월세를 낮춰달라는 말은 죽어도 하지 않았을 거고. 뻔했다.
“난….”
반만 넘어왔다는 그녀의 말이 맞았다. 아직 그녀는 결정하지 못했고 마음의 짐을 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녀를 여기서 끌어내기 위해, 여기서 널 사랑하니 나에게 와달라고 구걸하고 싶진 않았다. 한순간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는 건 의미가 없다 여겼다. 그녀가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 이상 서원은 언젠가 이 순간을 후회할 것이다.
그렇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오늘을 떠올리며 후회하지는 않았으면 했으니까.
“당장에 널 얻기 위해서 입에 발린 사랑한다는 뻔한 말, 안 하고 싶어. 그러니까 더 잘 준비해서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 때까지는 네가 좀 기다려 줘. 너도 알잖아, 나한텐 여자라곤 너밖에 없는 거. 이미 마음은 차고 넘치는데 말이 더딜 뿐이니까. 가게 이전도 좀 생각해주고.”
거친 말 대신 그녀에게 어떻게 고백을 해야 자신의 이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전할지, 나름대로 고민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로맨틱한 말들은 제 머릿속에선 없는지라.
원래가 이리 생겨 먹었으니 별수 없지 않은가. 무슨 말을 해도 마음먹은 대로 꺼내놓았다간 산통 다 깰 게 뻔했다. 정제되지 않은 거친 말과 어조.
대본이나 대사가 정해진 뉴스 진행은 잘할 자신이 있는데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는 사랑 고백은 영 소질이 없어서. 하긴, 서원은 그런 문선오를 좋아했다. 다정은 개미 똥구멍에게나 준 문선오를.
건물주라는 남자는 돌 씹은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등신 새끼. 얼빠져서는.
전생에서 그녀는 송학도와 혼인을 하고서도 문선오의 새끼를 뱄었다.
전생에서조차 송학도와는 이어질 수 없는 운명이었다. 지금도 서원의 눈엔 오로지 문선오뿐이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아니 이제 우리는 안 된다고 밀어내도 저 눈빛만큼은 숨기지 못한다.
당장이라도 손을 벌리면 늘 그랬듯 폭 안길 것만 같은, 문선오만을 바라보는 저 눈동자.
답을 들은 거나 진배없었다.
문선오가 아니면 저런 눈빛을 보내지도 않는 그녀였다. 고로 결론은 그녀에게 송학도 따위의 개새끼는 안중에도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전생에 대해서 그녀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새삼 궁금해졌다. 그럼 구태여 그가 방어를 치지 않아도 송학도 저 새끼를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텐데.
선오는 그 순간에도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