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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우연과 운명 사이 (9/20)

08. 우연과 운명 사이

“서원아. 엄마가 사랑하는 남자야. 엄마 고등학교 선밴데, 외아들이 네 학교 다닌다더라. 얼마 전에 한번 봤는데 참 잘생겼더라. 이름이 선오라 그랬었나. 그래 맞다. 문선오.”

문선오.

좋아했었다. 모친이 새아버지가 될 남자의 아들이라 소개하기 전부터, 훨씬 전부터 좋아했었다.

무뚝뚝하고 냉랭하기로 유명했지만 실은 알고 보면 다정하단 것도 서원은 알고 있었다.

학교 앞에서 비를 맞고 있는 할머니께 우산을 씌어드리고, 곤경에 처해있는 여학생을 발 벗고 도와줄 줄 아는 남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운동하는 것을 좋아해 자주 학교 운동장에서 농구 게임을 하는 것도 오랫동안 지켜봤었다. 날아오는 축구공을 피하려 몸을 움츠렸는데 교복 차림의 그가 대신 맞아주었었다. 퍽, 그의 등을 강타한 공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는 딱히 아픈 내색도 없이 자신만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괜찮냐?’

‘어? 어.’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는데.’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자신의 학창시절은 온통 그였다.

고2, 좋아한다고 고백했지만 1초도 안 돼 거절당했다. 자신의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래도 좋았다. 고3, 우연히 이동수업이 겹쳐 옆자리에 앉게 됐는데 한 번 더 고백했다. 몇 번만 만나달라는 바보 같은 고백에 그가 허락해주었을 땐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자신이 양념치킨을 좋아하지 않는단 걸 그가 알고부터는 단 한 번도 단둘이 있을 때 양념치킨을 시킨 적이 없었다. 말은 차고 냉랭했지만 세심하고 섬세한 남자였다. 자신조차 잊고 있었던 사실까지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와 함께하는 잠시나마의 시간이 행복했다.

술에 취한 친부가 찾아와 장사한 돈을 내놓으라 행패를 부릴 때보다, 네 엄마가 새살림 차려 정말 행복할 거 같냐는 윽박을 지를 때보다, 유산을 받으면 내놓으라고 머리채를 잡힐 때보다 선오가 자신을 경멸의 눈으로 볼 때가 더 힘들었다.

“며칠만. 갈 데가 생길 때까지만. 부탁이야.”

차마 친부가 자꾸만 찾아와 그렇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엄마가 구치소에 수감된 그날도 친부는 자신을 찾아왔었다.

새아빠에게 과도를 겨누던 엄마는 전남편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달려들었다. 술에 취한 엄마의 눈에는 새아빠가 전남편으로 보였던 걸까.

“우리 딸, 엄마가 꼭 좋은 집에 시집가서 비단 금침 깔아줄게. 엄마가 살아온 것처럼 고생 안 시킬 거야. 너만은 내가 지킬 거야.”

그렇게 약속했던 엄마는 결국 지난 결혼으로부터 비롯된 실패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전남편에게서 딸을 지키려 그리 발버둥 쳤는데, 전남편이 남겨놓고 떠난 괴물이 엄마를 집어 삼켜버렸다. 엄마는 수감 되었고, 오랜 이별이 시작되었다.

그 순간조차 선오가 좋았다. 문선오가 내미는 작은 친절 하나에 생과 사가 오고 갔고, 주저앉고 싶은 자신을 일으켜주기도 했다.

사랑에 미쳐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멈출 수 있었다면 그게 사랑이었을까.

어쩌면 제 생에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자신이 철이 없어, 엄마가 그리되고도 선오의 곁에 있을 수 있어 그게 좋았었다.

선오가 교환학생 때문에 미국으로 떠났을 때, 친부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때도 술에 취해 보도로 뛰어들어 벌어진 일이었다. 차라리 잘된 일인데, 이 소식을 엄마에게 전해줄 수는 없었다. 겨우 잊어가는 엄마에게 그 이름을 다시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또 몇 달을 보내고 예전과 같은 생활로 돌아왔을 때쯤 선오가 한국에 들어왔다.

“쟤 설마 아직 만나냐? 설마. 진짜? 야, 너희 정상 아냐. 정상적이진 않아.”

경식의 말에도 그는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순간 마음이 덜컥했다. 엄마가 저지른 일 때문에 선오가 자신을 부담스러워 해서 더 이상 보려하지 않는다면. 그날의 일이 다시 우리의 발목을 잡으면.

그가 떠나가면 어쩌지. 늘 마음속으로 두려워하던 것이 경식의 입에서 나오자 심장이 덜컹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늘 다른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그를 알면서도 제 곁에만 있어 달라 말하지 못했다. 혹여나 마음을 드러내면 부담스러워 그가 자신을 떠나가는 것보다 그게 나았다.

자신의 구질구질한 처지 때문에, 어미가 저지른 죄 때문에.

대학 시절, 졸업 준비로 너나 할 거 없이 바쁜 졸업반 때 있었던 일이었다.

친구 혜란이 잠시 저녁이나 먹으러 자취방에 오라고 하는데, 저 역시 배가 고파 막 드러누운 참이었다. 꼭 공부하느라 머리를 좀 쓰면 평소엔 당기지도 않던 음식들이 괴로울 정도로 생각이 났다. 어차피 혜란의 자취방이야 여기서 그렇게 멀지 않고, 잠시 다녀와서 다시 공부할 생각이었다.

선오는 한창 도서관에 있을 시간, 서원은 찌뿌듯한 몸을 좌우로 돌리며 자취방을 나왔다.

야참 같은 저녁을 먹고 골목을 나오는데 어쩐지 등 뒤가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요새 대학가에 혼자 사는 여자만 노리는 범죄가 기승이라는 신문기사가 떠올랐다. 등줄기가 오싹했다.

때마침 핸드폰이 울려 허겁지겁 받았다.

“선오야, 지금 어디야?”

「왜, 너 무슨 일 있어? 목소리가 왜 그래.」

“나 혜란이네 자취방에서 집으로 가는 길인데 자꾸 누가 따라오는 거 같아.”

거기가 어디냐는 목소리가 날카롭게 이어졌다. 서원은 부들부들 손을 떨며 뒤를 살폈다. 무조건 큰길로 나오라는 그의 목소리에 서원은 횡단보도가 보이는 쪽으로 뛰어갔다.

신호등 건너편, 학교 도서관에서 여기까지 뛰어온 건지 땀에 흠뻑 젖은 그와 마주쳤는데 안도의 눈물이 났다.

“야, 너.”

“선오야.”

얼마나 급하게 뛰어왔는지 체력이 보통 성인 남성보다도 월등한 선오가 숨을 가쁘게 내쉬고 있었다. 그를 와락 껴안았는데 세상 어떤 갑옷을 입은 것보다 든든했다.

대학 졸업을 할 때까지 도서관에서 늦게 나오면 꼭 그가 학교까지 데리러 온 것도 그날의 일이 있고 나서부터였다.

“혼자 갈 수 있다니까.”

“퍽도 혼자 갈 수 있다.”

“지난번에 떡볶이 먹으러 나온 거 때문에 그래?”

“너 그 떡볶이…, 됐다 말을 말자.”

“걱정 안 해도 돼. 학교에서 자취방까지는 안전해.”

“안전 좋아하시네. 미친놈들 천지야. 노리고 있다가 낚아채 간다니까.”

늘 곁을 지켜주었다. 조금이라도 밤늦게 밖에 볼일이 있다 싶으면 그가 대신 나갔다. 덕분에 야식은 항상 선오 담당이었다. 손을 잡고 엉겨 붙으면 귀찮다는 듯 흘기지만 뿌리치지는 않았다.

그를 아는 사람은 문선오 더러 천하의 냉정하고 정 없는 놈이라 했지만 자신에게 문선오는 그녀가 아는,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남자였다.

제 아버지와는 다른 남자였다. 아니라 해도 상관없었다. 다정하지 않다 해도, 그렇다 해도 문선오는 제 사랑이었다.

오고 가던 문자 속에 흘러가는 말로 순대가 먹고 싶다 했는데, 새벽녘 도서관으로 가던 그가 순대를 사 들고 자취방에 왔었다.

“또 새벽에 기어나갈까 봐 왔다.”

“선오야.”

하고 답삭 안기면 작게 한숨을 내쉬다가 가슴을 빌려주던 남자였다.

“빨리 한번 하고 가면 안 돼?”

급하게 몸 한번 섞고 도서관에 가면 안 되냐는 그녀의 유혹에 헛웃음을 짓던 그는 이마를 톡 치곤 했다. 자다 말고 일어나더니 섹스를 하자는데 어이가 없을 만도.

“공부나 해.”

“너 섰는데?”

“혼자 뺄 거다. 왜.”

그간 겪은 경험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문선오는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남자였다. 쉽게 곁을 내어주지도 않지만, 한번 곁을 준 상대가 조금이라도 신뢰를 깨뜨리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 남자.

좋아한다는 고백에도 답 한번 해주지 않던 그였다. 그래도 보채지 않았다. 언젠가 제 어미가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는 날을 위해, 이렇게 이도 저도 아닌 관계가 나을지도 몰랐다.

지난 시간은 그러지 못했지만 앞으로 다가올 시간은 엄마를 지켜야 하니까. 딸을 위해 모든 걸 감수했던 어미를 위해 먼 훗날엔 자신이 어미를 지켜야 했다.

세상 사람이 모두 제 어미를 욕해도 자신만은 그녀의 편이 되어야 했다.

그땐 선오를 떠나야 한다는 걸 잘 알았다.

셋이서 함께 행복하게 지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그건 이기적인 욕심이었다. 선오는 제 모친 때문에 아버지를 잃었다. 그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아무리 부자간에 사이가 좋지 않아 선오가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다고 한들 제 어미의 죄가 없던 일로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분명 그 응어리가 언젠가는 그의 발목을 잡을 것이고 그런 불행이 닥쳐오기 전에 그를 떠나야 했다.

어느 날부터 라디오에선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가 라디오를 하던 시절에 서원은 매일 같은 시각 라디오를 끼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지만 그녀가 보기에 문선오는 아나운서가 천직이었다. 유난히 감미롭고 낮은 중저음 목소리, 발음만큼이나 반듯한 자세. 잠결에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이는 순간조차도 달큼하게 느껴졌으니까.

자신이 그렇게 느낀다면 보통의 많은 사람들 역시 같은 생각을 할 테다. 회사 사람들 입에서도 자주 선오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그가 모두에게 인정받는 거 같아 멀찍이서 보기만 해도 좋았다.

지금까지 그저 그녀의 사랑을 들어주기만 하던 선오가 처음 마음을 보여준 건 그녀가 입사를 하고 얼마 있지 않아서였다.

하반기 프로젝트 진행으로 바빠 11시가 조금 넘어서야 회사를 나왔는데, 늦는다는 말에 선오가 회사까지 픽업을 왔다. 피곤한 몸으로 그의 차에 올라타는데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까 그 새끼 뭐야. 너랑 친해?”

“응? 누구?”

“네 가방 들어준 새끼.”

“가방? 아. 같이 회의했는데 내가 피곤해 보인다고 로비까지만 들어준 거야.”

“넌 그렇게 쉽게 아무한테나 덥석덥석 네 물건을 맡겨?”

자신의 곁에 있던 남자를 향해 그가 언짢은 기색을 보이는데, 이상하게 가슴이 몽글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봐도 질투 같은데, 물어보면 싫어할 거 같아 바라만 보았다.

“대답은 안 하고 뭘 그렇게 봐.”

“아무한테나 덥석덥석 맡기는 거 싫어?”

“장난해?”

그는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그새 딴 새끼가 마음에 든 거면 적어도 나랑 끝내고 만나. 사람 가지고 놀지 말고. 이놈 저놈 동시에 따먹을 거면 나는 빼주라, 어?”

“끝낼 거야, 나랑?”

“너 하기에 달린 거겠지.”

그래도 그가 먼저 떠나겠다, 하지 않아 그것만으로도 안심했다. 자존심, 그딴 거 선오를 좋아하는 순간부터 다 버렸다. 연신 짜증 섞인 눈으로 핸들을 돌리는데 사실 그런 그를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

“아니 씨발, 지가 왜 가방을 들어줘. 물어는 보고 들어준 거야, 뭐야. 너한테 먼저 물어봤어?”

“아니.”

“근데 그걸 보고만 있었어? 내가 뭐라 그랬어. 남자 새끼들은 이유 없이 친절하지 않아.”

“너는 이유 없이 나한테 친절하잖아.”

“친절….”

헛웃음과 말이 동시에 터졌다. 그 모습도 섹시했다.

“친절한 남자 다 얼어 죽었어? 도대체 네 머릿속에 있는 남자들은 어떻게 분류되어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선오는 집 앞에 도착해서도 블라우스 단추를 풀어 어디 그 남자가 남긴 흔적이 없는지 확인했다.

“저 새끼랑 뭐 딴짓한 거 아냐? 눈웃음으로 사람 죽이는 게 넌데 널 어떻게 믿어.”

아무리 봐도 질투가 분명했다. 다른 남자 만날 거면 자신은 빼달라면서, 정말 그랬다가는 꼭 그놈이고 저놈이고 죄다 죽일 거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만약에 누가 억지로 날… 그렇게 하면? 내가 문선오뿐이라고, 싫다고 그랬는데 날 막….”

“그게 질문이야? 생각 좀 해보자. 어떻게 죽일지.”

생각보다 질투가 아주, 몹시도 많은 문선오. 하루가 다르게 그에 대해서 알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곤 했지만 생각해보면 그는 예전부터 그랬었다. 자신이 다른 남자와 엮일 때면 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그가 눈에 띄게 불편해했다.

한없이 너그럽게 굴다가도 화가 나면 전에 없이 냉정해지고 무서워졌다. 사실 그건 5년 전, 고3 시절부터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나야 이깟 푼돈, 안 받아도 그만이지만 넌 아닐 거 아냐. 떡값이라고 생각해.’

‘…….’

‘한 백쯤 되려나? 보지 한번 대주고 백이면 남는 장사 아닌가? 왜, 처음이야? 처음이라 비싸?’

그가 그렇게 말하며 일부러 모질게 대했을 때도 너무나 가슴 아팠으니까.

하지만 그 분명한 간극이 좋기도 했다. 그와 몸을 섞으며 만난 지도 거의 5년이었지만 그럴 때면 그의 바운더리 안에 온전히 자리 잡았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는 확실히 어려운 남자였지만, 다른 여자들한테도 헤프게 구는 것보다는 차라리 저에게도 비싸게 구는 게 마음이 편했다.

웃고 있으니 이게 웃을 일이냐고, 중지 마디로 이마를 톡 치는데 일부러 아프지 않게 힘 조절을 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질투로 부글부글 끓는 그가 좋았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은근한 애정이 느껴지는 그의 질투가 행복했다.

“나중에 딴 새끼랑 살림 차리고 문선오가 누군지도 모른다고 모른 척이나 하지 마.”

“내가? 말도 안 돼.”

“왜 말이 안 돼. 지금 네 마음이 영원할 거 같아? 어차피 사랑이니 뭐니 하는 것도 다 한순간이야.”

“내가 다른 남자랑 살림 차리고 아이도 낳고 막 문선오는 누군지도 모른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야? 그래도 넌 평정심을 유지할 거 같아. 이성을 잃지도 않고, 차분하게.”

“그때 가서 생각해보지, 뭐. 누구부터 차례대로 날 가지고 논 벌을 줄지.”

조곤조곤, 농담 반 진담 반 경고를 하는 그가 생각은 그만하고 집으로 들어가 자라고 등 떠밀었다.

그 이후에도 버스정류장에서 대학 친구를 만났는데, 그땐 정말 화가 많이 나 보였다. 떠나려는 그를 붙잡고 눈물로 애원했다. 그래도 은연중 그가 자신을 떠나지 않을 거 같다는 확신을 받았다.

이토록 뜨거운 눈을 한 남자가 정말 먼저 떠날 수 있을까.

어쩌면 그의 말대로 자신이 정말 영악한 건지도 모르겠다. 교묘하게 그를 물들이고, 길들여 어디에도 가지 못하게 만드는 요물. 결국 자신만을 사랑하도록 그렇게.

“자지도 넣어서 확인해봐. 다른 남자 자지 들어갔었는지.”

“이게 은근슬쩍.”

“그래야 내 결백이 증명 되지. 응?”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고 뺨을 비비는데 입으론 싫다, 냉정하게 굴면서, 몸을 비비면 비비는 대로, 입 맞추면 입 맞추는 대로 거절하지 않았다. 멀어지지 않았다. 싫으면 가까이도 오지 못하게 하는 게 문선오였다. 그런 그를 알기에 이것만으로도 괜찮았다.

그와 때로는 연인처럼, 언제는 친구처럼 지내다가도 문득 엄마 소식이 들려올 때만 심장이 내려앉았다. 엄마를 그곳에 버려두고 정말 혼자 행복해도 되는 건지, 아니, 실은 아직 선오를 떠날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못된 마음들이 뒤섞여 자신을 괴롭혔다.

엄마가 보고 싶은 마음과 선오를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하루에도 수십 번은 충돌했다.

제 처지에 그 모든 걸 가지기엔 욕심이었다. 감히, 꿈꿀 수도 없는 욕심.

엄마와 장사를 하면서도 늘 돈을 갈취하는 아빠한테 시달렸었다. 벌면 뺏기고, 심심하면 가게로 와 깽판을 놓고, 함께 어울리던 동네 건달들과 물건을 부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가게를 뒤집어 놨었다.

그러면 주위 사람들이 좋지 못한 이야기를 수군거릴 것이고, 그것이 딸에게 영향을 끼칠까 봐 엄마가 재빨리 돈을 내놓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된 장사를 해볼라치면 늘 같은 수순이었다.

엄마가 출소를 하면 함께 가게를 운영하고 싶었다.

선오를 만나기 전, 인생에 있어 가장 행복했을 때가 엄마와 단둘이 장사를 했던 시절이었다.

엄마가 평생 소원했던 우리 가게를 제 손으로 준비하여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출소하는 그날까지 열심히 일을 하여 돈을 모아놔야 했다.

세상 사람이 떠드는 것처럼, 저마저도 살인자라고 떠나버린다면 엄마는 정말로 혼자가 되니 엄마에게 기댈 수 있는 곳이 되어주어야 했다.

그 후로 가석방 심사 통과가 됐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이젠 정말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지난 8년, 욕심인 줄 알면서도 움켜쥐고 있었던 손을 펼 시간이었다.

그를 위해서도 그게 맞았다. 둘의 과거를 다 떠안는 건 자신만으로 족했다.

이기적인 건 선오가 아니라 자신이었을지도 몰랐다. 이 순간이 오리란 걸 알면서도 그의 곁에 붙어있었던 건 순전히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였다고 해도 무방했다.

어쩌면 제 행복을 위해 선오를 이용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간 자신은 행복했으니까 이젠 엄마 곁에서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몇 번이나 마음을 다잡았다. 이별을 고하기가 무서워, 그와 약속을 잡은 장소에 나가지 못했다.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이 답답해 결국 약속 장소에서 멀지 않은 약국에 들러 소화제까지 사 먹었다.

제 손으로 인연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에 약을 먹는 순간에도 숨이 턱턱 막혔다.

집 앞에서 만난 그를 보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결국 또 말하지 못했다. 그만 만나자는 말 대신 좋아한다는 말을 해버렸다. 실수였지만 진심이었다.

이별을 고하는 순간조차 그가 잡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그리한다 해도 이젠 정말 함께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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