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욕심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너.”
어느새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어디로 모습을 감추어버린 건지 벌써 몇 시간째 찾아 헤매는데도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저잣거리에서도 벌써 한참을 떨어진 외진 길이었다. 이 길로 곧장 더 가면 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일 텐데.
현검이 말없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현검은 비에 맞아 추적해진 상전을 걱정했지만, 정작 선오는 제 옷 하나 젖는지도 모르고 명주를 찾고 있었다.
손목시계가 없으니 몇 시인지 알 길은 없으나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것만은 확실했다. 선오는 풀벌레 소리가 나는 길을 헤치며 좀 더 안으로 들어갔다. 말발굽 소리만이 울리는 좁은 길.
기시감이 들었다. 언제 또 한 번 이런 적이 있었다.
대학 시절, 서원이 친구네 집에 갔다가 돌아오던 밤늦은 길이었다.
전화를 붙잡고 누가 따라오는 거 같다고 울먹이는데, 그날 심장이 내려앉을 뻔한 걸 생각하면 새삼 지금과 다를 게 없었다. 이미 그때부터 사랑이었던 것을.
등신같이 그것도 알아채지 못했었다. 자신은 이리 그녀를 찾아 헤매는 것만으로 가슴이 다 무너지는데, 그녀는 8년이라는 세월 동안 답 없는 자신의 뒤꽁무니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미의 죄를 자신의 죄라 생각하며, 죄책감과 부채감에 더 다가오지도 못하는 걸 알면서도 그 마음을 모른 척했다.
“대감. 괜찮으십니까.”
“무조건 찾아야 한다.”
“대감.”
“내 여자다. 그러니 찾아.”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던 현검이 묵례한다. 이미 혼인을 한 여인이든, 왕의 여인이든, 제 윗전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더 말을 붙이지 않는 현검이 말을 재촉해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선오는 더 한참을 들어갔다. 풀벌레 울음소리가 유독 가득한 그곳엔 연못 하나가 있었다.
높은 풀 사이에 앉아 몸을 감추고 있는 여자.
선오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전생의 제 여인이자 현생의 제 여자.
말에서 내린 선오는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빗물이 내려앉아 흠뻑 젖은 몸을 일으키는데 몸이 얼음장이었다.
“명주야.”
“대, 대감. 여긴 어찌.”
뒤늦게 그를 발견하고 수색을 멈춘 현검의 말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을 뻗자 현검이 장옷을 건넨다. 선오는 곧장 그녀의 무명저고리 위로 장옷을 둘러주었다. 따뜻하게 몸을 감싸자 다시 고개가 떨어진다. 흔들리는 눈꺼풀엔 이슬이 맺혀있었다. 비가 아니었다.
“왜 여기 있어. 또 왜 울어. 괜찮아, 너?”
“…대감께선 소인에게 왜 이리 잘해주십니까?”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분명 울고 있었다. 감싼 어깨를 두 손으로 붙잡는데 그마저도 한 줌이다.
“소인이 아무래도 아이를 가진 듯합니다.”
선오는 따뜻하게 어깨를 비벼주던 손을 멈추었다. 그 말을 꼭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하는데 아랫입술이 떨고 있었다. 말없이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연다.
“감히 저 같은 것이 대군의 아이를 가진 듯합니다.”
두 손으로 배를 감싸는 명주가 서글피도 울먹거린다.
“아이는 어미의 팔자를 닮는다는데 제 팔자를 닮은 아이를 갖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 몸은 아이를 잉태하는 것이 불가하다 생각해 다행이라고 여기기도 했습니다. 이 아이가 제 팔자를 닮으면 어찌합니까. 어미의 신분을 이어받은 천한 출생이라 또 손가락질을 받으면 어찌합니까.”
“네가.”
“예?”
“괜찮으냐고 묻고 있잖아.”
뺨에 벌건 흔적이 있는 것을 보니 송학도가 손찌검을 한 게 분명했다. 선오는 그 뺨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그의 하문에 제법 한참 눈을 마주하고 있는 그녀가 조심히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럼 됐어.”
모든 게 괜찮다는 그의 말에 기어이 그녀가 또 눈물을 보인다.
“왜 자꾸 제게 잘해주십니까. 왜요. 왜 자꾸 저를 여인 대하듯….”
“그럼 네가 여인이지 사내야?”
“자꾸 대감만 바라보면 마음이, 마음이 제 마음 같지가 않아 도통 멋대로 움직이는 듯해, 저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꼭 제가 다른 여인이라도 된 것처럼…. 정말 제가 대감께서 말씀하시는 그 여인이라도 된 것처럼. 저를 이리 만든 대감이… 대감이 원망스럽습니다.”
전혀 그러지 않은 눈으로 원망스럽다고 한다. 배를 소중히 감싸 쥔 손으로 원망을 말한다.
“영 목석처럼 굴더니 애쓴 게 먹히긴 했네. 집으로 가. 해줄 말도 있고, 처리해야 할 일도 있고.”
“소인, 아무리 그래도 대감께 갈 수는 없는 몸입니다.”
“그럼, 다시 그 새…, 그놈한테 가고 싶어? 서방이라고 부르면서, 원치도 않은 놈 옆에서 살고 싶으냐고.”
다시 돌아가겠냐는 그의 물음에 아까의 일이 떠올랐는지 그녀의 눈가에 살짝 눈물이 맺혔다.
선오는 그녀가 고민하는 틈을 타 냉큼 손을 채어와 움켜잡았다.
명주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온 선오는 곧장 사랑으로 향했다.
부랴부랴 달려와 고개를 숙이는 종놈의 안색이 어찌 좌불안석이었다. 선오는 집에 손님이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조 판서, 김 대감께서 뵙기를 청하시옵니다. 돌아오실 때까지 잠시 기다리신다 하여. 어찌할까요?”
마침, 주인이 없어 사랑으로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나오는 갓을 쓴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대군 대감, 이제야 오십니까. 마침 나가던 참이었는데 좀 더 기다리길 잘한 모양입니다.”
이조 판서 김홍식.
이 작자가 이조 판서란 말이지. 뱀같이 교활한 자라 지금은 자신과 같은 뜻을 가진 듯 보이나 언제나 내 편이라고 생각 말고 늘 경계해야 한다고 의정 대군이 언질을 주고 간 인물이었다.
어차피 저 역시 이용가치가 있어 이용할 뿐. 언제까지고 내 사람이라 생각할 만큼 아둔하지 않았다.
김 판서가 힐끔 잡고 있는 손을 내려다본다. 어김없이 수그러드는 그녀의 고개가 땅으로 처박힐 기세였다. 손을 놓아버리는 그녀가 뒤로 물러선다.
“팔복아.”
“예, 대감.”
부른 저의를 알아들은 팔복이 냉큼 명주를 데려갔다.
사랑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나란히 찻잔을 들었다.
“이 시간에 비를 많이 맞으신 듯합니다.”
“예, 그럴 일이 좀 있었습니다.”
“대감답지 않으십니다. 이 다 늦은 시간에 말입니다.”
떠보는 말에 웃음기가 들었다. 영악한 인간. 누가 모를 줄 알고.
선오는 찻잔을 들다 말고 모른 체 하며 물었다.
“김 판서야 말로 이 늦은 시간에 여기까진 어인 일로.”
“다 알면서 물으십니다.”
제가 이 세상으로 오기 전에 분명 무슨 말이 오고 간 모양인데, 모르긴 몰라도 은밀한 이야기인 것만은 분명했다.
“지금의 주상 자리가 위태위태한 것은 대군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용은 쓰고 계시나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지. 허구한 날 술에 여인에. 무능력하기까지. 대감께 기세가 기울어도 한참 전에 기울었다는 것을 세상천지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요.”
“이 나라를 대군의 것으로 만드는 데 도움을 드리겠다는 제 말이 결코 허황된 약조가 아님을 대군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차피 이 나라는 이제 대군이 아니면 안 되게 생겼습니다. 이제 일어서셔야 할 때입니다.”
언뜻 보면 대의를 위하고 있으나 김 판서 역시 제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대군을 이용할 뿐이었다. 서로를 이용해 아슬아슬 줄을 타는 권력 구도, 그런 정치판을 모르지 않았다.
“뭔가 착각하는 거 같은데.”
저놈의 세 치 혀는. 꼭 엄청난 힘을 실어 주겠다고 말은 하고 있으나 어차피 그의 도움 따위 없어도 이 나라는 그의 것이었다.
“당신 도움 따위 없어도 어차피 이 나라는, 내 것입니다. 그저 언제 마음을 먹느냐, 뭐 그런 것에 달린 일이겠지요.”
선오는 싱긋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귀찮으니 허수아비 임금을 세워두었을 뿐.
의정 대군의 말에 의하자면 이 세계에서 자신은 궁에서 사는 게 싫어 제 발로 왕 자리를 물리고 물러났다고 했다. 그때야 그랬겠지.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자신에겐 지켜야 할 여자가 있고 아이까지 있다.
처음에는 그녀와 함께 어디 멀리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 누구도 귀찮게 굴지도, 끼어들지도 않는 그런 곳으로. 하지만 그랬다간 언제까지나 지금의 저 임금이라는 작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겠지. 귀찮지만 언젠가는 벌여야 할 일이었다.
누군가는 대업이라 할 그 일.
‘이 아이가 제 팔자를 닮으면 어찌합니까. 어미의 신분을 이어받은 천한 출생이라 또 손가락질을 받으면 어찌합니까.’
대군과 천출의 자식이라면 그럴 수 있으나 아비가 왕이라면 말은 달라진다. 감히 어느 누구도 깔보지 못하는 자리. 어미가 누구라도 그저 왕의 승은으로 탄생된 아이일 뿐. 명주의 과거 세탁이든 신분 세탁이든 뭐든 그녀를 지키려면 더욱 힘이 필요했다.
그 누구도 업신여기지 못하는 막강한 자리가. 그러기에 더욱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져야 하고, 강력한 왕권, 그것이 필요한 것이다.
한낱 대군 나부랭이 따위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이게 운명이라면, 지금으로선 마주하고 있는 상황에 맞설 수밖에.
“제가 좀 필요해졌습니다. 그 자리.”
“대감.”
“뭐, 그 손을 잡을지, 말지는 더 따져봐야 아는 것이고.”
지금도 홀로 있을 명주가 걱정돼 온 신경이 그쪽에 가 있었다.
“저도 생각해둔 것이 있으니 서로의 패는 차차 내보이기로 하지요.”
조곤조곤, 나지막이 읊조리는 대군의 말에 의뭉스러운 미소를 짓는 김 판서가 흠 헛기침을 했다.
역사가 바뀌고, 순리가 역행하지 않는 한 그는 왕이 될 것이고 머지않아 이 나라의 주인이 될 것이다. 아니, 역사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다. 그까짓 정해진 운명 따위가 아니라도 제 힘으로 가져오면 되는 것이다.
“이틀 뒤, 좌찬성 대감과 이 시각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날은 긴히 할 일이 있어서, 시일을 조금 미뤄야겠습니다.”
“허면 연통 주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교환학생 시절, 한국으로 들어오기로 약속을 한 날보다 일주일 늦게 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래서 해바라기 꽃 축제에 같이 가기로 한 서원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었다. 통화상으론 전혀 신경 쓸 것 없다고 했지만 내내 마음에 걸렸다. 해바라기를 보고 싶다고 했는데, 때가 맞지 않아 해바라기는 없어도 벚꽃 정도는 있으니, 그거 하나라도 제대로 해줘야 할 듯해서.
서원은 괜찮다고 했지만 유독 길을 가다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보이면 유심히 보곤 했다. 제가 해바라기보다 더 예쁜 것도 모르고, 그렇게 사랑스레 쳐다보곤 했었다.
보여주고 싶다. 다시 한번 그 얼굴에서 피어오르는 사랑스러운 눈을 보고 싶다.
제 처지로 인해 지칠 대로 지친 명주에게 해줄 만한 게 그것뿐이라 속이 상했다. 어쩌면 이기적인 건 자신일지도 몰랐다. 웃는 그녀가 더 절실한 건 그일 테니.
다행스럽게도 명주 또한 꽃을 좋아하는 듯했다. 꽃구경을 시켜주겠다고 하니 저 담담한 얼굴에 살짝 웃음기가 돌았다. 이렇게 웃을 줄도 알다니. 며칠 뒤면 벚꽃이 져버릴 것 같아서 서둘러야 했다.
김 판서가 돌아가자마자 팔복을 불렀다. 비어있는 행랑채도 있을 텐데, 드디어 눈치란 걸 챙긴 팔복이 안채에다 그녀를 안내했다.
선오는 곧장 명주가 있을 안채로 건너갔다. 방문을 열자 모로 누워 잠든 그녀가 보였다. 고단했는지 선오가 들어왔는지도 모르고 눈을 붙이는 얼굴을 보자 그제야 안심이 됐다. 비단 담요를 가져와 잠이든 명주에게 덮어준 선오가 한참 만에 안채를 나왔다.
내내 기다린 현검이 그에게로 다가섰다.
“어디야, 거기가.”
“대감께서 자주 가시던 사냥터 근방입니다.”
선오가 검집을 고쳐 잡았다. 이제 정말 모든 걸 끝낼 차례였다.
명주를 그리 울려 놓고 속 편하게 퍼질러 자고 있는 걸 강제로 끌어냈다고 전해 들었다.
짐승 같은, 아니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었다.
다 제 잘못이었다. 관아에서 풀려나오는 그 길로 죽였어야 했는데, 조금 더 생을 연명케 허락해 준 것이 결국 명주의 상처로 이어졌다.
선오는 눈물을 흘리며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송학도를 굽어보았다. 손바닥에서 불이 날 정도로 묶여 있는 두 손으로 비는데 정말 같은 사내가 맞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이런 걸 서방이라고.
입가엔 터진 피가 흐르고 바닥에 갈린 이마빡엔 시뻘건 살점이 보인다.
“어찌 대군 대감께서 소인에게 이러시는지 정말,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래. 네가 왜 죽어야 하는지 직접 알려주려고 여태까지 널 살려둔 거야.”
“대, 대, 대감.”
산속으로 향하는 입구에선 흔들리는 나무와 함께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송학도가 엉금엉금 기어와 도포 자락을 콱 쥐는데 선오는 친히 자세를 낮추어 눈높이를 맞췄다.
“널 어떻게 죽일까 좀 생각해 봤어.”
어떻게 죽여야 후회가 없을까, 많은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명주의 태교를 위해 송학도는 소리 소문 없이 죽어야 했다. 그녀가 알아 좋을 게 하등 없으니, 되도록 조용하게.
“능지처참도 생각해 봤는데, 그러면 너무 요란스러울 거 같아서.”
“대, 대감!”
“근데 뭐 하나만 묻자. 명주는 왜 때린 거야?”
익숙한 이름이 나오자 그제야 송학도의 눈동자가 커진다.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걔를 때려.”
“며, 명주와 어찌 아시옵니까?”
인기척이라곤 그를 호위하는 현검 뿐, 아무도 없는 어둑어둑한 주위, 선오는 송학도를 향해 조용히 뇌까렸다.
“어찌 알긴 뭘 어찌 알아. 내가 걔 애인인데.”
여태 쥐 잡듯이 그녀를 잡으며 외도를 의심해 온 송학도를 잘 알고 있었다. 사랑으로 맺어진 혼인이 아니었으니, 의심병이 도질 만도 했다. 천한 신분의 여인에겐 이 정상적이지 않은 혼인이 흔하디흔한 일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사랑으로 맺어진 인연이 뭐 얼마나 있으려고. 꼴에 양반이라고 권세가 비슷한 집안끼리 혼인을 약속하고, 천출이라 물건처럼 팔리듯 혼인했다.
하지만 모두가 다 그래도 그의 여자는 안 된다. 그러니 그녀를 욕심낸 순간부터 송학도는 죄를 지은 것이다.
“너를 좀 더 일찍 죽였어야 했는데.”
계속 두었다간 또 무슨 수작을 꾸밀지 모르니 이쯤에선 죽이는 게 옳았다. 더 두었다간 그녀만 상처를 입을 것이다.
“대감께서 그럼 명주의….”
“너 걔한테 다른 사내와 밤을 보냈냐고 물었었지. 보냈지. 네가 없는 동안에도, 아니. 네가 명주를 만나기 전부터 내내 내 여자였지.”
부들부들 떨고 있는 저 손이 분노로 비롯된 것인지, 두려움으로 비롯된 것인지 모르겠으나 하나는 확실했다. 그는 죽어 마땅했다.
“널 이렇게 곱게 죽이는 건 다 명주 덕분이니까 임신한 명주한테 고마워하고.”
“며, 명주 그 계집 드리겠습니다. 드릴 테니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대감.”
“명주가 물건이야?”
선오는 차오르는 분노를 삭이려 무던히도 애써야 했다. 끝까지 사람 같지도 않은 새끼.
“명주 그 계집이 다른 건 몰라도 살맛은 끝내줍니다. 그러니 제발 그 계집을 가지시고 저를 사, 살려….”
선오는 가차 없이 검을 휘둘렀다. 모가지가 떨어져 나가고 솟구치는 피를 그대로 맞고 있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역겹다. 죽음까지도 더러운 남자. 죽을 때까지 명주를 욕보인 사내. 명주가 저를 살리려 얼마나 애썼는데. 저 금수만도 못한 놈도 서방이라고 제게 와 그리 살려 달라 빌었는데.
죽여도 속이 후련하지 않은 건 그 때문일 테다.
“다신 보지 말자, 제발.”
이 짐승만도 못한 놈 때문에 그녀가 아플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되었다.
“뒷정리해.”
그러니 이 더러운 죽음만은 그녀가 모르길 바랐다. 더 이상의 상처는 자신 하나면 족했다.
* * *
“어…!”
풀썩 중심을 잃고 무너진 몸을 일으키려는데 대군이 주저앉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배 속에 든 아이 때문인지 요즘 자주 머리가 어지러웠다.
명주는 그가 내미는 손 하나에도 많은 생각을 했다. 이 손을 잡는다 한들 자신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을까. 기방의 기녀처럼, 그저 팔자 한번 펴보고자 두 눈 감고 첩으로 들어간다 해도 제 인생이 불행하기란 매한가지였다. 끊어내도 끊어내도 끊어내지 못할 팔자였다.
천한 것으로 태어난 이상 바꿀 수 없는 생.
명주는 그가 내미는 손을 잡고 일어섰다. 팔자를 고쳐보려는 야심이기보다는 이 구질구질한 생만 아니면 뭐든 따르고 싶어서였다. 살고 싶어서였다.
대군을 따라 그의 집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녀의 임신 사실을 안 대군은 32첩 반상부터 맛있는 화과자까지 내어주었다. 태어나 생전 처음 받아보는 환대를 모조리 이 대군에게 받는다. 의아하고 이해 안 되는 것투성이지만 왜 그의 곁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한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송학도 말이야. 청으로 떠났다.”
“예?”
“돈 몇 푼 얹어주니 다시는 네 얼굴 안 보겠다고 떠나던데. 넉넉히 쥐여 줬으니 걱정 말고.”
선오는 가만히 깜빡이는 그녀의 눈을 감상했다. 원래 촉촉한 눈동자지만 오늘따라 더 그렁그렁하다.
“그런 놈하고 살아봤자 너만 힘들어. 이제 잊고 살아.”
저 풀죽은 마음을 더 뭐라고 달래줘야 하나. 선오는 결국 머릿속에서 떠다니는 것들 중 멋없는 말 하나를 골라야 했다.
워낙 표현을 않으니 그의 말을 믿는지, 믿지 않는지 알 길은 없었지만 곤히 생각에 잠긴 저 눈 하나만은 예뻤다.
음식을 꼭꼭 씹어 넘기는 게 어여뻤다. 말없이 그 모습만 뚫어져라 보고 있자 고개를 드는데 선오는 이상하게 가슴이 시큰거렸다.
라면은 그렇게 맛있게도 먹더니, 왜 지금은 그보다 더 진수성찬을 두고도 죽지 못해 먹는 얼굴인지. 그게 또 이렇게도 가슴이 아플 일인지. 마음 한편이 미어지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신서원.”
“…….”
“내가….”
“…….”
“좋아했던 여자 이름이 서원이었다.”
가만히 고개를 드는 그녀가 먹던 과자를 내려놓았다. 체면이고 뭐고 더 이상은 이딴 짓 못 하겠다. 그녀가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터져 나오는 이 마음을 숨길 수도 없었고, 숨기고 싶지도 않았다.
“등신같이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두려웠어. 너한테 빠져서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될까 봐. 나도 내 아버지처럼 그런 추한 모습을 보일까 봐. 사랑, 그까짓 열등한 감정에 휩싸여서 이 꼴이 날까 봐.”
숨길 수 없는 걸 알면서도 숨겼다. 사랑이란 결코 감출 수 없는 걸 알면서도 마음 깊숙이 속마음을 넣어둔 채 단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그의 곁을 단 한 번도 변함없이 지킨 게 그녀였다.
“네가 싫었고, 네가 좋았어. 널 사랑했지만 네가 싫었어.”
자신을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만든 그녀가 싫으면서도, 그녀가 좋았다. 좋아한다 고백하던 풋풋했던 열여덟의 그녀도, 문선오의 말이라면 다 따라주던 스물의 신서원도, 어느 한순간도 그녀가 아닌 적 없었다. 알면서도 마주하기 싫었고, 인정하기 싫었다.
왜 항상 깨달음이란 후회와 함께 오는 것인지, 그게 원망스러웠다.
삶의 의지가 한 줌도 깃들지 않은 명주의 눈을 보며 선오는 뒤늦은 마음을 전했다.
현실의 신서원이 듣지도 못할 마음을.
“내 종놈이 그러는데 내일 사냥이 있단다. 같이 가자. 산책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너나 나나 바빠서 그럴 시간도 없었잖아.”
“대감께서는 항상 소인이 알아듣지 못할 말씀만 하십니다.”
“알아.”
“근데도 이상하게….”
그녀는 더 이상 어떠한 말도 잇지 않았다. 알아듣지 못하는 그녀에게 선오는 제 할 말을 전했다.
돌아간다면, 다시 서원과 마주한다면 그땐 반드시 이 마음을 전하겠다고, 그리 다짐하며.
다시는 이 뜨거운 감정을 외면하지도, 사랑이 아니라 부정하지도 않겠다고.
아침 일찍, 급히 부른 의원이 다녀갔다. 회임 중이라는 말과 함께 아이는 무사하다는 확인도 직접 들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복중의 아이는 결코 축복이 아니었다.
그래도 몇 년을 얼굴 맞대고 살았던 제 남편을 곱씹는 건지, 외간 남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를 걱정하는 건지. 어느 쪽이든 그녀에겐 근심거리일 것이다. 외간 남자.
선오는 스스로를 그리 칭해놓고도 속이 쓰리고 화가 차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믿고 싶지 않게도 이곳에선 그저 외간 남자일 뿐이라는 사실이 그를 분노케 만들었다.
선오는 터져 나오려는 상스러운 욕지거리를 가까스로 눌러 삼켰다. 겨우 이곳에 데려다 놨는데 놀라 겁을 집어먹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꼴사납다 못해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되돌릴 방법도 없었다.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안심이 되고 좋으니, 달리 방도가 있을 리가.
가지 않겠다는 말도 없이 명주가 따라나섰다.
사냥은 핑계고 실은 소풍이었다. 임신한 그녀의 손을 잡고 함께 말을 탔다. 그녀를 껴안고 있으니 다시금 서원이 생각났다. 그리웠다. 문선오의 이름을 불러 주는 서원이.
대체 왜 정신 멀쩡해 보이는 대군이 생판 일면식도 없던 자신을 끌고 와 이러는지 모르겠지.
그래도 좋았다. 명주든 서원이든 그녀는 그녀였다.
임신 중에 말 타는 건 안 되는 건가? 그저 그녀와 이리 앞뒤로 틈 없이 딱 달라붙어 있는 것이 좋았지만 그리 안전한 거 같진 않은데. 뭔, 말을 타봤어야 알지. 선오는 잠시 시름했다.
승마도 어렸을 때나 몇 번 모친을 따라 배웠었지 이렇게 제대로 타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틀 전에도 비에 쫄딱 맞아선 함께 말을 탔었지. 아무래도 돌아갈 땐 가마를 준비해야 될 듯싶었다.
언감생심, 신분이 낮은 자는 타지 못하는 것이 가마라지만 그 모든 법도도 다 거스를 수 있는 것이 그의 신분인 것을 역시 알고 있었다.
“어디 아프면 말해. 또 혼자 앓으면서 숨기지 말고.”
그녀는 꼭 나들이를 처음 와본 사람처럼 펼쳐진 들판과 푸른 하늘에서 눈을 뗄 줄 몰랐다. 내내 고개만 숙이고 있던 그녀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해맑은 눈이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꼭 어린아이처럼, 태어나 처음 세상에 나온 사람처럼, 다행히 그의 바람대로 들꽃은 그녀의 관심을 앗아갔다.
선오는 그녀의 손을 잡고 푸른 초원을 지나 봄꽃이 흐드러지게 핀 들판으로 나왔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폭포가 있다고 하던데. 팔복아.”
“예, 대감.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습니다. 가히 절경입죠. 뫼실까요?”
팔복이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여자라곤 도통 관심도 없던 제 상전이 여자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니 분위기가 더없이 좋았다.
그 여자가 동네 아랫골에서 바느질이나 하는 천출, 거기다 유부녀라는 게 걸렸지만 어차피 서방도 도망가고 없는 마당에 그게 대수랴. 신분이 맞지 않는 거야 첩으로 들이면 되는 것이고.
무엇보다 대군이 저리 행복해하는 얼굴은 처음 보는지라.
권력 싸움에 진절머리가 나 스스로 궁을 나온 이후론 어찌 저 빛나는 용태에 빛 한 줌 든 꼴을 못 봤으니. 더구나 여인이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는 대군께서 무려 여인과 즐거운 한때라니.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할까. 아랫것들은 그저 좋았다.
“이 앞이옵니다.”
폭포수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점점 가까워지고, 선명해지고, 이윽고 온몸 위로 쏟아져 내릴 듯 사나워졌다. 조금만 더 가면 폭포수였다.
한데 어찌 주위가 수상하다. 아까 들판을 지날 때와는 또 다른 분위기, 고요해도 께름칙할 정도로 고요하지 않은가. 폭포가 보고 싶어 눈을 반짝이는 그녀를 내려다보면서도 선오는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 말머리를 멈추었다.
“대감, 어찌 그러십니까?”
팔복이 의아한 듯 물었다. 선오는 불안한 예감이 적중하지 않길 바라며 명주를 감싸 안았다. 아무래도 이곳을 돌아가는 게 좋을 듯싶었다.
“팔복아, 길을 바꿔 잡아야겠다.”
“예?”
“대감!!”
화살이 날아든 건 그때였다.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던 그때.
선오의 곁에 붙어 서서 걷던 팔복이 화살을 맞고 쓰러진 순간, 순식간에 말이 좌우로 고갯짓을 하며 푸드덕거렸다.
“대감! 피하십시오, 화살이 계속 날아옵니다!”
요동치는 말 때문에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와중에도 명주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또다시 화살이 날아들자 주위가 아수라장이 됐다. 날뛰던 말이 옆으로 자빠졌다. 낙마한 대군이 바닥에 엎어진 여인을 먼저 챙겼다.
“명주야.”
소중히 머리를 안아 들고 어디 다친 곳이 없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그녀는 크게 다친 곳이 없어 보였다. 그녀를 돌볼 새도 없이 누군가 커다란 목소리로 명을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연 대군을 죽여라. 이곳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야 할 것이다.”
순식간에 이연 대군을 노리는 자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눈에 보아도 수가 꽤나 많았다. 호위무사들이 그를 둘러싸고 검을 휘두른다. 시꺼멓게 뒤덮은 자객들은 모두 복면을 쓰고 있었다. 가리고 있다 한들 정체는 분명했다.
제 동생의 능력을 두려워한 상감이 보낸 자객이었다. 현검이 호위를 하는 동안 선오는 그녀의 곁을 지키며 검을 빼들었다. 학창시절 배운 검도를 이런 식으로 써먹게 될 줄이야 꿈엔들 알았을까.
명주를 지키기 위해 사방에서 날아오는 검을 막아 휘둘렀다.
그를 에워싼 자객들을 모조리 베어 없앤 선오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멀리서 또다시 자객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감!”
“현검, 명주를 데려가.”
“하면.”
“곧 따라붙을 테니까 어서 가.”
함께 붙어 있으면 자신을 노리는 자객에게 그녀 역시 위험에 노출된다. 그녀를 자신과 떨어뜨려 놓는 게 우선이었다. 언젠가 오늘 같은 날이 있을 것을 대비하여 현검과 말을 맞춰 놓은 것이 있었다.
달려드는 자객과 대치하고 있는 그 찰나의 순간, 폭포수 너머, 숲속에서 빛에 반사된 화살촉이 번쩍거린다. 완벽하게 대군을 저격한 화살이었다.
그의 곁에 있던 호위무사가 화살을 맞았다. 또 어느 방향에서 화살이 날아올지 모를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모든 이들이 주위를 경계하며 잠시 주춤하는 사이 현검과 함께 몸을 피하던 그녀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명주야, 안 돼! 그냥 가. 돌아가!”
때마침 저 멀리서 또다시 화살촉이 번쩍거리는 것이 보였다. 오지 말라는 그의 명을 어긴 명주가 끝내 품 안으로 안기어 들었다. 동시에 뾰족한 활촉이 그녀를 찌르고 몸 한가운데에 박혔다. 화살이 그에게 닿는 것보다 명주가 조금 더 빨랐다. 마치 그를 대신하여 화살을 맞기라도 하려는 듯이. 선오는 명주의 등으로 와 꽂힌 화살을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를 향해 온몸으로 막아선 명주는 악 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그저 명주만 지키면 그뿐이었는데, 명주는 이 혼란스러운 순간에도 저보다 타인을 위한 선택을 내린 것이다.
자신이야 어떻게든 살아남을 인간이었다. 칼에 찔리고 화살을 맞아도 명이 질겨 불사신처럼 살아날 독종이었다. 하지만 태생이 약한 명주에게 저 화살은 곧 죽음이라는 사실을 그녀 역시 모르지 않을 텐데.
그녀의 눈가에 눈물방울이 맺혔다. 꼭 자신의 죽음에 미련이 없는 사람처럼, 차라리 이 죽음을 잘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초연히 무너지는 그녀를 받쳐 안았다.
“왜, 대체 왜!”
“소인에게… 꽃구경은 너무도 과분한… 호사입니, 다.”
“명주야.”
“저 때문에 다치시는 건, 싫습, 니다. 저로 인해….”
“넌 대체….”
“더 이상 누군가가… 저로 인해 다치는 건, 보고 싶지 않….”
“안 된다, 명주야. 안 돼.”
“이제 어느 누구도… 다치는 건….”
저 때문에 제 서방이 그리 죽은 걸 알 리가 없는데, 그녀는 어렴풋이 짐작을 한 것일까. 미련스럽게 착해선 제 서방이 그렇게 된 것까지도 자신을 탓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저 때문에 다치는 건 싫다니, 바보같이, 이 착해 빠진 게. 왜 저 생각은 안 하고 남 걱정만 해, 왜.
그 모든 것이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리게 보였다. 세상이 온통 먹색이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끄럽게 그를 쫓는 목소리도, 폭포수가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도. 오로지 죽어가는 명주만이 보일 뿐이었다.
동시에 모든 세상이 무너졌다. 문선오의 모든 세상이.
어서 이 자리를 피하라는 듯 그녀가 피를 흘리면서도 제 손을 밀었다.
너 없이 내가. 내가 어떻게.
“서원아.”
그녀의 숨이 멎어가고 있었다. 네가 죽어서야 알다니. 내 모든 세상은 너였음을.
“아니, 다신 네 손 안 놔, 나는.”
절대 혼자 죽게 두지 않는다. 그래, 죽더라도 같이 죽어. 선오는 그녀의 머리통을 가슴 안에 끌어안고 폭포 아래로 몸을 던졌다.
철썩, 등을 때리는 물속으로 끝도 없이 끌려 들어갔다. 그의 손을 놓지 않은 그녀를 끌어안고서, 죽음 속으로. 우리 둘만 남겨질 세상으로. 그곳에선 다신 네 손을 놓지 않겠다고.
* * *
쏴아아아.
떨어지는 빗줄기가 어깨를 적셨다. 손을 축축하게 적시는 빗물에 선오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번쩍, 번개가 쳤다.
다시 돌아온 것이다. 서원이 있는 현실로.
손바닥에 선명히 남은 흉터가 그 일이 꿈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건물 앞에 서 있는 서원의 모습이 환상인 건 아니겠지. 하지만 정말 그녀였다.
신서원.
선오는 성큼성큼 빗속을 걸었다. 다가오는 그를 발견한 서원의 두 눈이 동그래진다. 자신은 이 얼굴이 그리워 뒈질 뻔했는데 그녀는 네가 여긴 웬일이냐는 눈이었다.
“선오야.”
“신서원.”
다가가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죽지 않았다. 현실의 신서원은 살아있다. 이렇게 눈앞에 버젓이 그녀가 있다. 화살을 맞지도 않았고 피를 흘리지도 않았다. 부드럽게 감기는 살결이, 선오야, 하고 부르는 저 목소리가 그가 알던 서원이었다.
“너 어디 다친 곳 없어? 어디 봐.”
작은 몸을 끌어와 이리 보고 저리 돌려봤다. 다치지 않고 무사해 다행이었다.
뺨에 묻은 물기를 닦아주자 조금은 놀란 눈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근데 너 왜 이렇게 다 젖은 거야? 나 보러 온 거야? 아니, 아침 뉴스 분명… 끝내자마자 온 거야?”
“그걸 말이라고 해? 내가 여기 너 말고 보러올 사람이 누가 있어. 너 정말 괜찮은 거지?”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등을 돌리는데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그녀와 마주 보며 서 있던 남자.
“송학도, 이 새끼.”
서원을 그의 뒤로 숨기고 남자와 마주 섰다. 서원과 살림을 차리다 못해 싫다는 걸 억지로 범하고 애까지 낳으라 종용한 새끼였다. 저 낯짝을 다시 만나니 그야말로 속이 뒤집혔다. 분명 칼로 모가지를 잘라냈는데 살아있다. 현실에서 서원이 무사한 것처럼 저 남자 또한 멀쩡하게 살아있었다.
“이 새끼 뭐야. 어?”
정제되지 않은 날 선 경계에 등 뒤에서 그녀의 난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만으로도 안도했다. 서원이 뒤에 있다는 것은 일단 무사하다는 뜻이니.
“선오야, 왜 그래? 이분은 우리 가게 건물주분이셔.”
송학도의 얼굴을 한 남자는 갑자기 저에게로 쏟아진 비난에 당황하다 못해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이어 굳어지는 눈매가 따져 물을 듯 가늘어진다.
“당장 건물부터 옮겨. 알아봐 줄 테니까.”
남자가 서원을 볼까 싶어 선오는 철저히 그녀를 숨겼다.
“서원 씨, 이분은 누구신데 왜 갑자기….”
뭐? 서원 씨? 선오는 열이 받아 쏘아붙이려다 등 뒤에서 난감해 하는 그녀를 인지했다.
가만히 그의 뒤에서 숨만 쉬고 있던 서원이 그의 허리춤으로 고개를 내미는데 선오는 문득 가슴이 찡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그녀가 무사해 천만다행이었다.
꿈이 아닌 게 분명한지 다시 한번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만져보았다. 생생한 촉감, 따뜻한 온기,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동자. 현실을 알려주듯 모든 것이 그가 알던 그대로.
“무슨 일… 있었어?”
“이리와 봐.”
황당해 얼굴이 울긋불긋한 남자를 돌아볼 여유도 없이 그녀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 숍으로 들어왔다. 로비에 있던 직원들이 깍듯하게 인사를 했지만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빈 룸 안으로 들어서자 향긋한 냄새가 확 풍겼다. 샤워가 끝나면 그의 얼굴에 자주 발라주던 스킨 향이었다. 서원의 흔적이 잔뜩 묻어있는 가게.
가게 건물 앞으로 그녀를 데리러 온 적은 있어도 안까지 와본 건 처음이었다. 개업할 때 화분이며 개업 선물까지 안 보낸 게 없었지만 이렇게 그녀가 일하는 공간까지 발을 들인 적은 없었다. 새삼 그 사실이 미안해졌다.
그래도 두 눈으로 확인을 해야 했다. 블라우스 단추를 풀었지만 그가 하는 대로 가만히 보기만 하는 그녀는 그 잠깐 사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보는 듯했다.
다친 상처가 있는지 살펴보며 그녀가 무사하다는 사실이 확인되자마자 혹시 딴 놈이 강제로 그녀를 어떻게 해보려 물고 빤 흔적이 남아있지는 않은지도 꼼꼼히 찾아보았다.
그가 유륜 주위에 빼곡히 남겨놓은 자국 말고는 달리 보이지 않는다. 보드라운 서원의 살결을 이리저리 만지며 주물러보던 그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이리 몸을 겹치는 것조차 낯설어하던 명주, 그러니까 전생의 서원이 떠오르자 미간에 주름이 졌다. 가슴이 따끔거렸다.
“왜 그래?”
선오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폐부 깊숙이 파고드는 서원의 체향. 그녀의 향기.
됐다. 돌아왔어. 서원의 곁으로, 신서원의 옆자리로, 자신의 자리로. 모든 게 돌아왔다.
가까스로 그녀를 떼어내고 얼굴을 보는데, 어쩐 일인지 그녀의 눈에 곤란한 기색이 깃들어 있었다.
“오늘은 조금 일찍 퇴근하려고. 근데 저 선오야.”
“왜.”
“나… 이따 할 말이… 있어.”
그 말을 하면서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서원의 눈가가 발갰다. 자세히 보니 울었던 것도 같고, 한동안 울음을 참고 있었던 것도 같았다.
선오는 불길한 예감을 했다. 여태껏 서원을 보아온 그의 동물적인 감이었다.
그녀는 커피숍이 떠나가라 울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집으로 가서 얘기하자 했더니 그녀는 근처 커피숍이 좋을 거 같다며 그를 이끌었다.
뭔지는 몰라도 어제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았던 것도, 평소답지 않게 연락이 뜸해지고, 분위기가 축 가라앉아 있었던 것도 같은 이유인 듯 보였다.
좋아하는 커피를 주문해놓고도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는 그녀는 내내 테이블만 쳐다보고 있었다.
“할 말이란 게 뭔데.”
“아무래도 우리 이제 더 못 볼 거 같아.”
그 말 한마디를 하면서도 눈물을 꾸역꾸역 삼킨다.
더는 만나지 않겠다는 저 말, 떠나고 싶지 않다는 눈, 대체 무엇이 진심인지 모르겠다.
“내가 일방적으로 따라다녔으니까 이 말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이제 놓아줄게. 선오야. 너 사랑하는 동안 나 행복했어. 많이.”
우린 연인 사이도 뭣도 아니었으니 이별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그녀.
서원의 말처럼 둘은 남들과 같은 일반적인 관계는 결단코 아니었다.
여태까지 사랑을 속삭여 온 건 신서원 혼자였으니. 더 그랬다.
“다른 새끼 생겼어? 그래서 이래, 너?”
“아냐. 그런 건 절대 아냐. 단지….”
다른 놈이 생겼냐는 질문에는 펄쩍 뛰면서, 우리는 이제 더 만날 수 없다 못을 박았다.
“우리한테 예상했던 일이 조금 일찍 다가온 것뿐이야.”
처음부터 이런 날이 올 것이라 예상이라도 한 사람처럼 그녀는 당연한 일이라 했다.
왜 그게 당연한지 납득하지 못했다. 웃겼다. 그녀가 떠난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겠다고 오만하게 굴었던 건 그였다. 그런 그를 알기에 더 목을 매고 그에게 구애했던 것도 서원이었다.
한데, 막상 떠나겠다는 서원을 눈앞에 두니 목이 타들어 가고 속에 불덩어리가 들어앉은 듯 애가 끓는 건 문선오, 자신이었다.
“왜. 왜 끝내야 하는데.”
“우리 엄마….”
그 입에서 나온 건 예상치 못한 이름이었다. 대체 저 마음속이 무엇 때문에 그토록 괴로웠나 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존재가 튀어나왔다.
“가석방 심사 통과됐어. 2주 뒤에 출소할 거야.”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그녀의 눈꼬리를 타고 끝내 뚝뚝 눈물이 흘렀다.
“8년 전엔 널 선택했지만 이번엔 그렇게 못 해. 내가 아니면 엄마 인생엔 아무것도 없거든. 나는 지난 8년 동안 행복했지만 우리 엄만 아니었잖아. 이젠 내가 옆에 있어 줘야 돼.”
“그러는 넌. 넌 네 엄마만 옆에 있으면 행복해?”
“…….”
“나는 없어도 돼?”
“…노력해야지.”
잔 안에서 천천히 녹아가는 얼음처럼 그녀는 아주 천천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엄마를 위해 문선오를 떠나갈 준비. 그를 떠나 원래 있었던 제자리로 돌아갈 준비.
“원망했었어. 왜 하필 엄마가 만나는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남자의 아버지인지. 엄말 많이 원망했었어. 내가 나빴어. 나쁜 걸 알면서도 네가 너무 좋아서… 내가 그랬어.”
그것도 모르고 그녀가 귀찮게 달라붙지 않고 질척거리지 않아 나쁘지 않다고, 속 편한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저 작은 머리통으로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염치없게 이런 내 곁에 있어 달라고 못 하겠어. 내가 엄마 곁에 있겠다고 선택한 이상, 이런 과거를 가진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리란 건 잘 알아.”
무심했다. 그녀는 늘 제 곁에 그림자처럼 있는 것이 당연했기에, 홀로 하고 있을 외로운 생각들을 한번 보듬어 주지 못했다. 그녀가 떠나갈 때까지도 그 마음 한번 헤아리지 못했다.
“행복하길 바랄게. 나는 너 때문에 지난 시간 행복했으니까 너도 행복했으면 좋겠어.”
카페 문을 열고 나가는 동안에도 서원은 위태로워 보였다. 그녀의 외로운 등을 직접 마주하는데 선오는 말 못 할 기분에 사로잡혔다. 멀어져가던 명주의 등이 겹쳐 보였다. 가슴 한쪽이 무언가와 충돌해 부서지듯 덜컥 내려앉았다.
선오는 돌아보지 않고 가는 서원을 잡아 돌려세웠다.
“뭐, 그냥 가겠다고 하면 다 끝이야?”
잡히는 어깨에 힘이 없었다. 미리 말이라도 할 것이지, 그저 혼자 끙끙.
10년 전 그때나 지금이나, 말도 않고 혼자서 해결해보려고 머리를 싸매는 건 똑같다.
“네 마음대로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고. 그냥 떠나면 다 끝이냐고.”
쌩- 지나가는 차가 그녀의 등을 스쳐 지났다. 선오는 서원을 제 품으로 확 끌어당겼다.
그녀의 말이 맞다. 8년 동안 그녀가 그의 곁에 있을 수 있었던 것도 서원의 모친이 교도소에 수감 되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서원의 곁에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도 부정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 그녀 없이 살아갈 자신이 없다.
영악한 신서원.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주 천천히 문선오를 그녀에게 물들여놔 버렸다. 처음에는 몸을 장악하더니 이젠 마음까지 오도 가도 못하게 만들었다.
아니다. 이 또한 변명이었다.
서원과 본격적으로 몸을 섞기 시작하고 8년, 그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그녀의 마음에 답한 적 없으니, 뻔뻔하고 이기적인 건 그였다. 이렇게 잡을 자격조차 없다는 걸 알면서도 선오는 어쩔 줄 모르겠는 이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떠날 거면서 왜 좋아한다 그랬어.”
“…….”
“네 멋대로 끝낼 거면 왜 사람 마음을 흔들어놔, 왜.”
그가 아는 그녀가 맞는다면, 흘리는 저 눈물의 의미는 아직 사랑이었다. 단 한 번도 변한 적 없는 진심이었다. 제 의지대로 어찌해 볼 수 없는 마음.
“넌 나 안 보고 살 수 있어?”
평소의 그녀라면, 너 없인 단 하루도 살 자신이 없다고 와락 안겨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그녀는 이미 모든 결심을 굳힌 사람처럼 답이 없었다.
이제야 겨우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는데, 저 손을 잡을 마음이 생겼는데, 그녀는 떠나간다고 한다. 이제야 그를 떠나간다고. 곁에 있었던 지난 시간이 꿈처럼 행복했다고.
그녀가 말하는 이별의 이유는 분명했으나 선오는 납득하지 못했다. 머리로는 이해하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자신이 이런 적이 있었던가. 이성을 배반한 감정에 치우쳐 괴로운 적이 있었나.
선오는 서원의 손을 잡고 그녀를 조수석으로 밀어 넣었다. 차는 그녀의 집이 아닌 오피스텔로 향했다. 말이 없는 서원은 그저 마주 잡은 제 손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주차를 하자마자 좌석의 공간을 확보하고 그녀의 몸을 끌어와 앉혔다. 이 조그만 손이 다칠까 그마저도 힘주어 쥐지 못했다.
“키스하자고 난리 칠 땐 언제고, 이젠 단물 다 빠졌어?”
“선오야.”
엉덩이를 더 끌어와 몸을 갖다 대는데, 명주가 떠올랐다. 전생의 그녀, 죽는 순간까지도 마음 놓고 울지 못했던 그녀가 생각나자 차마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이 마음 그대로 그녀를 안았다간 서원이 다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지금 안는다면 힘 조절이 될지도 의문이었다. 그 여린 밑구멍이 다 찢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안아 달라고 애원하는 듯하게 느껴지는 건 정말 그의 착각인 걸까.
“그럼 어떡해. 사랑하는 여자가 헤어지자 한다고 그냥 보내?”
처음이었다. 8년 만에 처음 뱉어본 고백. 모양 빠지게 조금 억눌린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사랑하는 여자가 떠난다는데 그냥 보내는 등신이 어디 있어. 어?”
“…선오야.”
“어쩌지. 난 그렇게 못 하겠는데.”
여태 답 한 번 해주지 않던 그의 고백에 놀랄 만도, 아니 당황할 만도 한데 그녀는 빨개진 눈으로 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마치 네 진심은 애초에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아니, 그녀는 이미 그조차 자각하지 못했던 그의 마음을 알고 있었던 거다. 이 눈치 백 단에 영악한 신서원이 그것을 모르고 곁에 있을 리 없었다. 다 알면서도 오늘을 위해 입을 닫고 있었던 거다.
그는 이제야 겨우 자신의 마음을 마주 볼 용기가 생겼는데, 서원은 이 길고 지독한 사랑을 원 없이 하고 이제야 마침표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