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금단증
선오는 사랑방에 앉아 복잡한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그렇게 그를 뿌리치더니 그녀는 다시 낡아빠진 초가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송학도는 그날 밤,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간을 노름판에서 보내거나, 무슨 볼일을 보는 건지 자주 청나라로 떠난다고 했다. 일단 눈에 걸리적거리는 송학도부터 차근차근 해치워야겠지.
신서원.
“…….”
선오는 가만히 앉아 잔 안에 담긴 차를 내려다보았다.
찻잔 속 차는 고요하기만 한데 그의 심신은 말도 못하게 심란했다.
그녀 때문에 이성이고 나발이고 생각 자체가 정지됐다. 천하의 문선오가 모양 다 빠진다.
여자에 미쳐 눈이 돌아가는 것만큼 추한 것도 없다 여겼다. 부친의 영향이었다. 결단코 여자에 미쳐 못 볼 꼴은 보이지 말자며 다짐한 제가 등신 같으리만치 꼴이 한심했다.
하물며 그를 이리 만든 여자가 서원이라니.
새삼 서원과의 관계에 대해 큰 의미부여를 하지 않으려 애를 써 봐도, 그럴수록 그녀와의 관계를 곱씹게 된다.
생각해보면 자신의 20대는 전부 서원과 함께였다. 그 사실을 현실도 아닌 낯선 세계에서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는 것조차, 기가 막혔다.
명주의 어미는 젊은 시절 기생이었다고 하고, 아비는 기방을 지키던 기둥서방이었다는데 아비는 명주가 혼인을 하고 나서 실족사를 했다고 했다. 현검은 천한 출생의 여인이 그리 사는 것이 그리 놀라울 것도 아니라는 반응이었다. 맞아 죽지나 않으면 다행인 게 천출인 것이다.
신서원. 전생까지 이리 기구해야겠냐.
꼿꼿하게 허리를 세워 앉아 있지만 그녀에 대한 생각에 마음이 번잡한 선오는 뒤늦게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대감, 귀빈께서 오셨습니다.”
몸종 한 놈이 손님이 왔다, 고했다. 누가 온들 아는 이도 없고, 귀찮기만 할 뿐이었지만 무작정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일단 사랑으로 들라 했다. 여전히 선오에게는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이 난항이었다.
“우리 이연 대군이 아니신가. 아, 우리 대군께서는 농을 싫어하셨지.”
그를 부르는 얼굴이 활짝 웃는다. 적어도 원수는 아니란 소리였다. 이건 뭐, 어떤 사람과 어떤 사이였는지 알 길이 없으니 뭐라 불러야 할지 감도 잡지 못하고 있는데 고맙게도 상대가 먼저 신분을 밝혀왔다.
“형이 뜸하게 찾으면 아우라도 자주 얼굴을 비쳐야지 너마저 소원하면 어찌하느냐.”
“안 그래도 머리 복잡….”
복잡해 죽겠는데 크게 볼 일 없으면 돌아가라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랬다간 미친놈 취급당하겠지. 그의 머릿속은 온통 서원의 생각뿐이었으므로 다른 것들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어찌하였든 감히 자신이 품었던 여자를 건드리다 못해 애 낳아주는 첩 취급한 그 새끼는 용납하지 못한다.
송학도인지 나발인지 하는 그 개자식을 두 손으로 갈기갈기 찢어 죽일 때까지는 적어도 정상으로 살아야 했다. 미쳤다고 소문이 나 봤자 귀찮아지고 고달파지는 건 선오, 본인이었다.
어떻게 찢어 죽이고 말려 죽일지는 찬찬히 고민해보도록 하고 우선은 대화를 이어가기로 했다. 이 세계에서 문선오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파악을 해둘 필요가 있었다. 모든 싸움에서 지피지기는 기본 전술이지 않은가.
“좀… 바빴습니다.”
“바빠? 별일이구나. 검 쓰는 것 외엔 별달리 관심도 두지 않는 네가 바빴다라.”
차를 들며 남자가 의아하다는 듯 웃었다.
흘러가는 말론 대비 소생의 아들이 셋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자신이 막내아들이라는 말인가. 추측건대 적자가 왕권을 손에 쥐었으니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대비 소생의 둘째 아들이어야 말이 맞았다.
“왜 이곳까지 내방하신 것인지 궁금, 합니다만.”
방문한 저의를 말하라는 그의 간결한 어투에 남자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늘 몸조심 하거라. 요즘 들어 주상이 너에 대해 더욱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그건 네가 더 잘 알지 않느냐.”
“제가요.”
“아바마마께서 살아생전에 너를 보위에 앉히려 얼마나 애쓰셨느냐. 주상의 마음도 이해는 한다.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던 게지. 멀쩡한 적자를 두고도 더 명민하다는 이유로 너를 더 귀히 여기셨으니 말이다. 지금의 주상에겐 네가 위험요소일 테니 눈엣가시가 아니겠느냐. 두고두고 화근이 되는 것은 뽑으려 들 게다. 그러니 늘 몸조심을 하라는 게야. 그러게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나처럼 튀지 말고 적당히 잘나야 한다고.”
재미없는 농을 던지면서도 대군은 따스하게 웃었다. 그냥 보아도 심신이 유약한 사람이었다. 왕이 그를 견제대상으로 삼지 않는 데에는 저 천성이 큰 몫을 했다는 사실을 선오는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역모를 꾀할 만한 심성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잠깐 이연 대군.
눈앞에 이 남자가 자신을 이연이라 불렀다.
서원 때문에 정신이 나가 제 이름 하나 물어볼 여력이 없었다. 대감이라는 허울 좋은 존칭으로 더 많이 불리었으니. 왕족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도 없었을 것이고, 누가 자신을 불렀다 해도 돌아볼 정신이 있었나, 어디.
선오는 새삼 이곳에서의 제 이름을 곱씹어 보았다.
그가 아는 이연 대군은 왕 이휼의 동생이자, 자신을 시해하려는 이휼을 처단하고 왕위에 오른 다음 국왕의 왕자 시절 군호였다. 휘는 이선.
이선.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갖은 지식을 동원해 추측해 보았다.
그가 아는 인물이 맞는다면 눈앞에 이 남자는 의정 대군이어야 했다. 이연 대군의 형이자 훗날 왕이 된 동생을 지지하고 보필한 조력자로서 역사 속에 기록된 인물.
“난 네가 제 발로 궁을 나올지는 몰랐다. 하긴 넌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 유독 궁을 답답해하지 않았느냐. 하긴 궁 돌아가는 사정이 네 눈에 훤히 다 보였으니 속이 시끄러웠겠지. 그 자리는 너보다 지금의 주상께 더 어울려. 적당히 조정 대신들에게 놀아날 줄도 알아야 하고, 그들을 너무 훤히 꿰고 있는 것이 독이 되기도 하니, 지나치게 총명해선 피곤하기만 한 자리인 것을.”
선오는 지금 자신의 주변에서 돌아가는 상황이 예삿일이 아님을 직감했다. 무슨 놈의 전생이 이렇게 스펙터클 하냐. 미치겠네. 지금 자신은 정치싸움에 개입할 여력도 정신도 없었다.
물론 그쪽에서 먼저 싸움을 걸어오면 순순히 목숨을 내놓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지금은 그의 골머리를 썩이다 못해, 그를 괴롭히고 있는 저 신서원 하나 감당하기도 벅찼다.
“김 판서가 너를 자주 찾는다는 이야긴 들었다. 뱀처럼 교활한 인간이야. 몸조심 하거라.”
차는 입에도 대지 않으면서 찻잔만 손안에서 굴리고 있자니 그 모습을 보던 의정 대군이 슬며시 미소 지었다.
“아바마마께서 네가 이리도 한량인지 모르고 승하하셨기를 천만다행이다 싶구나. 한량 놀음은 그만하고 어서 혼인이나 하거라.”
이제야 현검이 왜 그토록 주위를 경계하였는지 이해가 갔다.
멍청한 왕이 제 스스로 자리를 지킬 그릇이 못 되니 왕좌의 주인이 되고도 남을 만한 제 동생을 두려워하고 경계했던 거다. 한심한 인간이 하나 더 있었다.
서원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골이 아픈데, 귀찮은 일이 하나 더 늘었다.
섬세하게 깎아 만든 듯, 잘 뻗은 그의 눈매가 무참히 일그러졌다.
“차를 새로 내어오겠습니다.”
팔복은 수심이 깊은 대군의 눈동자에 잔뜩 긴장했다.
원래도 천성이 차고 냉철한 분이셨지만 근래 들어 더욱 그 성정이 냉랭해졌으니, 아랫것들은 그저 납작 엎드릴 뿐이었다. 차디찬 얼음처럼 인간미라곤 없는 분이시지 않나.
귀찮게 구는 모든 것을 싫어하시고 멍청히 구는 이들을 경멸하는 분이셨다. 해서 팔복은 제 주인이 무서웠다. 타고나길 이리 태어났는데 늘 한심하다는 듯이 굽어보시니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저 같은 종놈이 무얼 알겠냐마는 팔복의 생각건대 대군이 보위를 노렸다면 치밀한 저 성격에 일찌감치 그 자리를 차지하고도 남았으리라.
대군께서 군주의 자리에 오르지 않는 것은 단지 그가 마음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아는 팔복은 이빨을 감추고 있는 제 주인이 두려웠다.
“대감께서는 사랑에 계시오?”
한참 동안 집 밖을 나가 있던 현검이 돌아왔다. 요새 부쩍 현검이 바삐 움직인다 싶더니 아무래도 대군의 특명을 받잡아 밖에서 볼일을 보고 온 듯싶었다.
무슨 중한 일이 있긴 있는 듯했다. 팔복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저 저 같은 아랫것들은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그리 사는 것이 목숨 줄을 오래 보존하는 길이었다.
저 이연 대군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범인은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 * *
훗날에 왕씩이나 될 인간이 저잣거리에서 바느질하는 여자 뒤꽁무니나 쫓고 있다니, 선오는 자조했다. 자괴감까지 들었다. 하지만 신분이 어떠하든 전생의 저일 뿐. 지금 그의 가슴 안에 들어앉아 관심을 앗아가는 건 저 여자, 신서원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서원이 아니라 했지만, 그녀가 아니라고 부정한다 해서 모든 게 끝날 일이었다면 얼마나 편하고 좋을까.
냉담한 그녀의 외면에 허물어지는 이 가슴은 자꾸 그녀만 좇고 있었다.
대학 시절, 서원 혼자 밤길을 걷다 큰일 날 뻔한 적이 있었다. 이곳에서의 그녀는 그때의 기억이 없을 것이기에 그 일을 들먹거리며 혼자 다니지 말라 단속을 해봤자 저만 미친놈이 될 게 뻔했다.
저잣거리에서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뒤를 지키며 걷는데 어쩐지 저 작은 등을 마주하고 있는 게 어색했다. 이렇게 서원의 뒤통수만 보며 걸어본 적은 한 번도 없는 듯해서.
“지금 이게 다 뭐하는 짓인지.”
헛웃음이 나와 자조하다가도 그녀가 멀어지면 덩달아 걸음이 빨라졌다.
선오는 혼자만 초조한 게 야속했다. 현생 따윈 기억하지 못하는 저 여자는 저 혼자 속 편하지, 혼자.
“해가 다 졌는데 쟨 어딜 저렇게 가는 거야.”
어딜 가는 건지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웬 기와집 대문 안으로 쏙 들어간 그녀가 잠시간 뒤 옷가지가 든 광주리를 안아 들고 나왔다. 대갓집에서 일감을 받아온 듯 보였다. 저럴 거면서 그의 집에 와 일을 하라는 제안은 거절했다. 돈은 너 원하는 대로 얹어준다고 했는데, 아니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다 주겠다고까지 했는데.
저게 진짜.
만나달라고 쫓아다닐 땐 언제고.
생색이나 내자고 제안한 건 결코 아니었다. 곁에서 얼굴이나 좀 더 보려고 했던 거지. 아니, 송학도를 서방이랍시고 옆에 붙어있는 그 꼴도 보기 싫은 데다….
그래, 곁에 두고 보고 싶어 그랬다. 보고 싶어서.
어떤 변명도 필요 없던 사이에서 이젠 이유를 붙여야 하는 사이가 됐다. 핑계가 있어야 만날 수 있는 사이.
선오는 부글거리는 가슴을 쳤다.
그녀에게 딴 놈이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속에 천불이 나는데, 거기다 한술 보태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려 든다.
송학도 대가리부터 따놓는다면 당장에 그녀를 데려오는 일이야 수월하겠지만 그만큼 그녀의 마음이 멀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신분을 이용해 냅다 일부터 저질렀다간 자신을 다신 안 보려 들지 몰랐다. 은근히 고집스러운 구석이 있어서 마음을 돌리려면 애를 좀 먹어야 할 거다. 살아온 세상은 달라도 외모나 갖추고 있는 성정은 판박이였다. 그런 그녀의 면모를 모를 리 없었다. 당연했다. 몸을 섞은 세월만 8년인데 모를 리가.
신서원이 그를 보지 않으려 든다는 생각만으로도 그야말로 가슴이 쾅쾅 곤두박질친다.
겪어 보지 못했던 일들이 거듭 일어나는 것도 짜증스러운데 거기다 서원까지 애를 먹인다.
그런 그의 속도 모르고 총총총 집으로 향하는 그녀의 뒤통수가 밝아 보였다. 일감 하나 얻었다고 저렇게 좋을 일이냐고. 선오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쟤를 어떡한다. 막무가내로 데려와 안는다고 마음을 열 여자였으면 이리 머리가 복잡하지도 않았다.
단 한 번도 저 마음을 열어보겠다, 마음을 먹은 적도, 고민을 한 적도, 그러니 당연히 시도를 해 본 적도 없어서 대체 어찌 해야 저 가슴을 열 수 있을지 방법조차 감이 오지 않았다.
원할 때면 언제든지 그녀를 떠날 수 있다 자신했다. 그녀가 일방적으로 구애를 하여 시작한 관계이니 끝도 쉬울 거라 생각했다. 분명 그랬는데, 대체 왜 자신이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하고 있는지. 이제는 자신이 그녀에게 매달리는 꼴이지 않은가.
“대감!”
갑작스러운 현검의 외침에 선오는 그를 돌아보았다. 심상치 않은 그의 표정에 주변을 살펴보았다. 낯선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현검에게 칼을 겨누고 있는 자가 셋, 아니 넷. 시커먼 복면을 쓴 사내들의 눈이 그에게로 향해 있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러 온 자들이다. 이런 일이 종종 있었는지 그의 호위무사는 당황하는 기색도 없었다. 그보다 명주가 괜찮은지 휙 뒤를 돌아보는데 새파래진 얼굴이 돌덩이처럼 굳어선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다.
복면을 쓴 자들은 아무런 말도 없이 지체 않고 공격해왔다.
빠르게 부딪치는 칼날에 명주의 안위가 걱정됐다.
자신에게로 달려와 칼을 들이미는 남자 하나를 걷어차고 그녀를 등 뒤로 숨겼다.
그의 호위무사가 빠르게 자객들을 제압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떨고 있었다.
“너 괜찮아?”
선오는 그녀가 꽉 끌어안고 있는 광주리를 앗아들고 오들오들 떨고 있는 어깨 한쪽을 붙들었다.
“신서원.”
그녀는 저더러 서원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에겐 장명주든 누구든 이 얼굴에, 이 몸을 한 여자는 서원뿐이었다. 그의 인생에서도 그의 세상에서도 오직 하나뿐인 여자.
“피가….”
그의 도포 자락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어리어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도포 아랫자락엔 피가 묻어있다. 현검이 칼을 휘두를 때 튄 모양이었다. 여전히 등 뒤에선 칼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괜찮다고 막아서며 시야를 가려주는데 올려다보는 눈과 마주쳤다. 이곳에 와 제대로 눈을 마주하는 건 처음인 듯싶었다.
처음 이곳에 온 날도 그녀는 마지못해 그를 올려다보았는데. 그녀가 먼저 봐준 것에 감격이나 하고 있다니. 미쳤구나, 문선오.
좁아터진 초가 셋방 안은 곳곳에 그녀의 흔적이 가득했다.
그녀의 손이 닿았을 옷가지와 널어놓은 걸레, 말려놓은 대추. 작은 방 안이 살림살이로 꽉 찼다.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던 선오는 남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양말을 발견했다.
급속도로 기분이 가라앉았다. 이곳에 온 이후 그녀에게 그의 심복을 심어놓았다.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라 했더니 그날 먹은 반찬까지 읊어주는데, 청나라로 떠난 송학도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다고 했다. 덕분에 서원이 독수공방을 하고 있으니 일단은 계획의 절반이 성공한 셈이었다.
방 안이 좁다. 둘이서 누우면 딱 좋을 크기의 방.
이 안에서 둘이 떡을…. 선오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려 주먹을 꽉 쥐었다.
송학도, 이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새끼. 죽인 다음에 꼭 그 새끼 좆을 도려내어 두 눈으로 보고야 말겠다. 감히 누굴.
“저….”
천국과 지옥을 번갈아 오가는 통에 그녀가 눈앞에 있단 걸 깜빡하고 있었다.
꼭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인 그녀가 숨죽이고 있다.
촛불이 꺼질 듯 말 듯 흔들리면서도 그녀를 비추는데 선오는 목이 탔다. 이게 애가 타는 건가. 감질이 나고 목구멍 안이 가렵다.
“…감사합니다. 구해주신 거….”
엄밀히 말하면 자객은 그를 노렸던 거고, 그녀는 우연히 곁에 있었을 뿐인데 서원은 감사하다 고개를 숙였다.
때가 묻어 꼬질꼬질한 치맛자락을 조심스레 쓸어 모으는 그녀는 고개 한번 제대로 들지 못했다.
그가 알고 있는 서원이라면 단둘이 남겨진 지금 가슴에 안기기부터 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팬티 먼저 벗고 다가오거나. 이렇게 얌전한 서원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꼭 그를 어렵사리 대하던 하인들을 보는 기분이었다. 신분 차이로 인해 감히 마주 보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라는 걸 선오는 그제야 인지했다.
“딱히 감사 인사 들을 만한 일을 한 게 없는데.”
서원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서원이 아닌 여자.
‘선오야, 나 좀 답답한 거 같아. 넌 안 더워?’
그렇게 손부채질을 하며 팬티를 살금살금 내리던 그녀가 떠오르자 자연스레 입가에 웃음기가 스미었다. 알면서도 당했었다.
온기 가득한 손으로 팔을 살살 쓰다듬어 오는데 받아줄 수밖에. 문득 서원의 생각으로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데 눈앞의 그녀가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서원을 보고 있으면서도 서원을 떠올리다니. 정신 나간 새끼. 돌았구나, 네가.
이젠 부정할 수가 없다.
그래. 자신 역시 그녀가 단순히 섹스파트너만은 아니다. 친구는 더더욱 아니고, 그렇다고 감정 없이 몸만 섞는 사이도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이라고만 하기에는 아쉬운 그 이상의 무언가. 그게 아니라면 지금의 이 감정을 무어라 설명을 한단 말인가.
서슴없이 그를 사랑이라 정의 내리는 그녀에게 답 한번 시원하게 해준 적 없었다. 그의 묵묵부답에 그녀가 상처 받는 걸 알면서도 답해주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이 마음을 확신하지 못했었다. 사랑이 아닐 거라 부정해왔었다.
자신은 그런 하찮고 추잡한 감정 따위에 좌지우지되지 않는다고, 마음을 닫아걸고 있었다.
“대감께서 은애하시는 분이 저와 닮으셨나 봅니다.”
“뭐?”
“저를 보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시지 않으셨습니까.”
“…너, 말이야.”
선오는 순간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던 팔복이 떠올랐다. 낯선 어조에 순간 의아해하던 표정. 현실에선 누구 못지않게 잘나가는 아나운서지만 이곳에선 낯선 시대에 떨어진 이방인일 뿐이었다.
아무리 학창시절에 역사에 대해 공부를 했다고는 하나 일일이 구색을 맞춰 대화를 할 정도로 온전한 정신이었다면 지금 자신이 여기, 이 장명주를 쫓아 이 허름한 방까지 들어오지도 않았을 거다. 미친놈 취급하지 않을 정도로만 모양새를 갖추기로 했다. 일단은.
하여튼 신서원. 어딜 가든 그를 쥐고 휘두른다.
현생에 이어 전생까지. 그녀와의 이 얄궂은 인연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어찌 그러십니까?”
실소가 샜다. 그의 웃는 모습에 의아해하는 저 눈은 영락없이 현실에서의 서원이었다. 저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 그의 우뚝 선 성기를 처음 보았을 때도 눈을 떼지 못하고 침을 꿀꺽 삼키던 저 눈.
“뭐, 이것도 나쁘지 않네.”
“무슨… 뜻이온지.”
“이런 너도 나쁘지 않다는 말이었다.”
저 고개, 겨우 좀 들게 해놨더니 다시 푹 숙인다. 평소 같았으면 이미 한창 섹스 중이었을 텐데, 이 초가집이 무너져라 엉덩이를 흔들고, 앙앙댔을 입이 고상한 말만 하고 있는 걸 보니 기분이 미묘했다.
평소처럼 하던 대로 몸을 섞자고 손을 뻗으면 기겁을 하겠지. 치욕과 수치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바르르 떠는 얼굴이 보고 싶어지기도 했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가학심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너 그 새끼랑 이혼….”
“예?”
“아니다. 됐다.”
죽일 때 죽이더라도 확실히 관계를 정리해두고 싶었다. 서원과 호적으로 엮인 남자라니.
하지만 그가 아는 한 이 왕조 어디에도 여자가 남자에게 먼저 이혼을 고하는 것이 허락된 적 없었다.
이혼에 있어 발생하는 모든 죄는 여자에게서 비롯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었고, 그마저도 쫓겨나듯 내쳐졌다고 해야 맞았다. 모든 것이 남성 중심이었던 계급 사회. 그러니 그녀가 원한다고 해 이혼이 될 리가 없지.
어차피 남자 쪽이 먼저 뒈지면 끝이니.
송학도가 돌아올 때도 됐으니 생각해둔 건 차차 진행하기로 하고.
성급하게 다가갔다가는 동굴로 숨어들지도 모를 여자였다. 이마저도 서원을 잘 알기에 계획 수립이 가능한 것이지, 아니었으면 손에 쥐기도 전에 잃을 뻔했다.
“너 그 새끼랑 몇 번이나 떡쳤는데.”
“…예? 떡을 직접 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저잣거리에서….”
“뭐? 그 시장통에서 떡을 쳤다는 거야, 지금? 그 새끼랑 둘이?”
“사, 사 먹거나 서방님께서 가끔 구해오셨습니다. 근데 그건 왜 물으시는지요?”
아차했다. 이성이 흐릿해진 까닭에 그답지 않게 멍청한 실수를 했다.
그녀는 먹는 떡을 생각한 모양이었다. 현대에 와 만들어진 속어를 아는 게 이상하지.
그가 아는 신서원은 먹는 떡은 관심도 없었다. 몸으로 치는 떡이야 늘 좋아했지만.
아니 지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닌데. 선오는 진심으로 뒷골이 울렸다.
“대감. 현검이옵니다.”
급한 일이 있는지 현검이 그를 찾았다.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서원이 화들짝 놀라 덩달아 엉덩이를 든다. 대군이 자리를 뜨는데 신분이 낮은 이가 앉아있는 모양새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림인 것이다.
“아!”
아까 자객으로부터 습격을 받을 때 발목을 삐었는지 그녀가 일어서다 말고 주춤했다.
무의식적으로 서원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돌아보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데 놀란 눈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8년을 볼 꼴 못 볼 꼴 다 보고 살았는데 이게 뭐 그렇게 놀랄 일이라고. 제 앞에서 오줌을 싸대고, 그 와중에 소음순을 벌려 보여주고, 소변을 뿜어내느라 벌름거리는 요도까지 숨김없이 깐 사이였단 걸 알면 저 조신한 장명주가 무슨 표정을 지을지, 내심 흥미로운 상상이었다. 서원의 탈을 쓴 명주.
기억이 없으니 뭐라 말도 못 하겠고.
“소, 송구합니다.”
“아니 뭐, 송구할 거까지야.”
손이 닿자 놀라 몸을 물리는데 남녀 간의 색사라곤 모르는 순진한 얼굴이다. 모른다기보다는 금기시해야 할 것을 맞닥뜨린 표정.
아무리 전생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뭐 현생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니.
닿기가 무섭게 떨어져 나간 그녀를 보자니 씁쓸했다.
그리도 좋다고 살살 몸을 비벼왔으면서. 닿는 것도 조심스러워하는 서원이라니. 가슴 한편이 아리다.
“그렇게까지 학을 떼고 피할 일이냐?”
“…송구하옵니다.”
“그렇게 송구하면 앞으로 집에 와서 일해.”
“대군 대감 댁 말이옵니까?”
“그래.”
또 답이 없다. 제집처럼 그의 집을 드나들며 몸을 비빌 땐 언제고, 오라는데도 께름칙해하는 그녀를 보자니 다시 뒷골이 뜨끈뜨끈해진다. 이미 한 침대 쓴 세월이 얼만데 그 숱한 기억들은 다 잊어버렸다.
“왜, 또 싫어?”
“…….”
“서원, 아니 명주야.”
천천히 고개를 드는 뺨이 조금 상기되어 있다. 처음 불러보았다. 전생의 그녀를.
“네 대답 기다리다가 해 뜨겠다. 계속 서 있으랴?”
그러하겠다,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답하는데 선오는 비로소 만족스러운 웃음이 스몄다. 차디찬 얼굴에 퍽 다감한 미소가 돌자 빤히 바라보고 있던 명주가 시선을 흐린다. 이리 수줍어하는 그녀는 또 처음이라 느낌이 색다르기도 했다.
“대답 한번 참 듣기 힘들다, 너. 어?”
평소처럼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주려다 말고 뒷짐을 지었다.
그랬다간 간신히 들어 올린 저 머리가 다시 바닥으로 처박힐 거 같아서였다. 이 답답한 짓을 현생에서의 그녀도 했을 거란 생각을 하자 작은 한숨이 흘렀다.
“그래. 이번엔 내가 기다려보지 뭐.”
그의 눈을 제법 오래 쳐다보고 있던 그녀의 시선이 다시 아래로 내려간다.
“눈 피하지 마.”
“예?”
“너 눈 피할 때마다, 됐다. 말한다고 알아들을 것도 아니고.”
그래도 이만해도 만족스러웠다. 송학도 이 개새끼가 신서원과 내내 한집에 살았다 이 소리지. 좆 잘못 놀린 대가가 뭔지 깨닫게 해줄 필요가 있다.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아 송학도가 청나라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서원은 그날 이후 그의 집으로 와 일했다. 집안 노비들과도 잘 어울려 지냈고, 허드렛일을 도맡아 관리하는 팔복과도 크게 문제없이 지내는 듯 보였다.
그녀가 집으로 돌아갈 땐 그가 늘 따라붙었다. 한낱 집에 허드렛일이나 거들어주는 여자를, 그것도 유부녀의 뒤를 쫓아 매번 집까지 동행하는 대군의 행색이 이상한 건 당연지사였다.
대체 왜 그러는지 서원은 늘 궁금한 눈을 했지만 물어도 제대로 답해주지 않을 그를 아는지 더 묻지 않았다.
어김없이 그의 집에 일을 하러 온 서원의 얼굴이 어느 순간부터 처참해지리만치 그늘지기 시작했다.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저 수심에 원인 제공을 한 건 그였으니, 당연했다.
오늘도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겠다, 인사를 하러 온 그녀를 모른 척 불러올리었다.
“앉아.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애처롭다.
서방과 어미가 청나라 상인과 밀무역을 하다 관아로 붙잡혀 갔다는 소식은 이미 이 고을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삽시간에 퍼졌다.
‘최근 송학도의 재물이 급작스레 늘어난 것이 괴이해 이에 대해 조사하던 중 장명주의 어미와 송학도가 청나라 상인과 밀무역을 한 정황이 포착됐습니다. 밀무역 거래 물목에 대해서는 아직 더 조사 중에 있으나 확실한 건 그중 나라에서 엄히 금하는 가짜 화폐가 있었다고 합니다. 가짜 화폐를 만드는 놈은 잡아다 엄히 죄를 물어 본보기로 삼겠다는 어명까지 떨어진 마당에 밀무역이라니. 죽으려고 작정을 한 것이 아니 옵니까. 대감, 어찌할까요. 하명만 하신다면 소인이 흔적을 지우겠습니다. 송학도와 거래한 청나라 상인만 죽여 없애면 일단 급한 불은….’
그의 명을 받잡아 뒷조사를 하고 돌아온 현검의 말이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굳이 왜.’
‘예?’
‘넌 시키는 대로 하기나 해.’
마시던 찻상을 물리고 술상을 들이라 명했다. 서원은 두 손을 모은 채 눈물을 꾹꾹 참고 있었다. 서원은 속상한 일이 있을 땐 술도 곧잘 마시곤 했으니 여기서도 통하지 않을까 싶었다.
“땅 꺼지겠다.”
“…대감.”
“가까이와 앉아. 잔 들고.”
내내 넋이 나가 있던 것도 그 때문이란 거 알고 있었다. 송학도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도 있었지만 누구 좋으라고.
이용할 가치는 있어 잠시나마 살려둔다는 걸 알릴 필요는 없었다. 아닌 척해도 마음 여린 그녀는 모르는 편이 나았다.
“네 문제를 내가 해결해줄 수도 있는 거 아니냐. 음?”
낮은 한숨과 함께 빨리 가까이와 앉으라 턱짓을 하자, 그제야 반응을 보인다.
곁에 앉는 그녀의 손안에 술잔을 쥐여주었다.
“네 서방이 뒤에서 뭐하는지도 모르고 계셨어? 그렇게 대놓고 헛짓거리를 하는데도.”
“대감! 살려주시어요. 이제 곧 의금부로 압송된다고 하옵니다. 죽어서야 나올 것이에요. 해명이라도 할 기회를 주세요.”
내내 말도 잘 않던 서원이 다급해진 걸 보니 어지간히 애가 타는 모양이었다.
“네 어미를 말하는 거야, 서방을 말하는 거야.”
“…예?”
“구해달라는 게 누구냐고.”
뜻밖의 질문이었는지 이슬이 맺힌 속눈썹이 빠르게 깜빡거린다. 그가 아는 서원이라면 아무리 팔려와 강제로 맺어진 혼인 관계라 할지라도 제 입으로 서방을 죽여 달라는 소린 못한다.
“둘….”
“둘 다는 곤란하고.”
그녀가 할 말이야 뻔했다. 쓸데없이 착하기만 해선 정작 영악해야 할 땐 조금도 수를 쓸 줄 모른다. 그게 서원이었다. 오랜 세월 함께 지내온 만큼 그녀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었다. 그게 이곳에서도 통할지가 의문이었지만.
“마셔.”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주는 잔을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신분, 감히 대군이 한낱 천한 신분의 여자에게 술을 따르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에게 지금 그딴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술을 다시 제 입으로 빨아오고 싶다. 입을 맞추고 혀를 섞고, 한껏 그녀의 향을 마시고 싶다.
금세 울상이 되는 뺨을 만지고 싶다. 안아주고 싶다. 열기가 서려 뜨끈뜨끈하고 촉촉하겠지. 어떤 감촉인지 다 알기에, 더 괴로웠다.
독한 술에 눈이 일그러지는 그녀가 또륵 눈물을 떨군다.
‘선오야. 해주면 안 돼?’
애교 섞인 그 비음이, 안아 달라 손을 뻗어 오던 그 온기가, 서원이 그리워 괴로웠다.
그녀의 뺨을 향해 손을 뻗자 조금은 두려움이 서린 눈동자가 그를 경계했다. 천천히 닿아오는 살결이, 부드러운 뺨이, 눅눅한 눈물이, 모든 게 그녀였다.
“신서원.”
유치하다는 것쯤은 진즉 알고 있었다. 유치한 것도 정도껏이지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이딴 개수작이나 부리고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그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돌아섰으면 돌아섰지, 누굴 곁에 붙여두겠다고 뒤에서 수작이나 부리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게 문선오였다.
한번 매듭을 지은 관계라면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는 그를 서원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서원은 그가 자신을 떠날까 내내 불안해했었다.
이런 구질구질하고 추잡한 짓거리는 그와는 맞지 않았다.
그런데, 왜 자신은 이토록 추태를 보이고 있는가.
그녀에게 서방이 있든 말든 그냥 보지 않으면 될 일을 대체 왜 이다지도 신경을 쓰고 있는 건지.
결론은 하나였다. 이제야 받아들이는 그의 운명.
여태 부정해오던 그의 사랑.
“송학도를 죽이고 싶지 않아? 감히 너한테 그렇게 대했잖아. 너한테….”
그녀는 그냥 늘 당연하게 제 옆에 있었다.
유학을 떠났다 돌아왔을 때도, 방송국 입사로 바빴을 때도, 늘 그림자처럼 곁에 있었다. 사랑해 달라 조르지도 않았고, 친구 이상의 것을 요구하며 귀찮게 굴지도 않았다. 물론 섹스할 땐 둘 다 눈깔이 돌아가 예외였지만 어쨌든 대부분이 그랬다.
서원 역시 그에게 다른 여자 같은 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항상 말하지 않아도 그의 곁에 있었고, 말없이 마음의 위안이 되어주곤 했었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서로를 아는 사이, 웃기지만 그래서 그녀가 편하기도 했다. 제 영역 안으로 들어온 그녀를 굳이 밀어내지 않았던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힘들여 손을 뻗을 필요가 없었던 건 늘 그녀가 당연하게도 곁에 있었기 때문에.
서로 지켜주니 마니, 사랑하니 마니, 손가락을 걸고 유치한 약속 따위 하지 않아도 늘 옆에서 그림자가 되어주던 여자였다.
“네 입으로 직접 그 새끼를 버려.”
송학도 따위의 여자가 아닌 제 여자다.
“그럼 네 어미는 살려줄 테니까.”
문선오의 여자. 전생이든 현생이든 그의 여자.
씁쓸하고 외로운 마음을 어찌할 줄을 모르겠다. 그녀가 없어 처음 겪는 이 감정은, 그러니까 몰아치는 풍파 한가운데 저 혼자 외로이 서 있는 기분이었다.
선오는 다시 그녀의 빈 잔에 술을 채웠다. 속상한 일이 있으면 자연스레 맥주를 한 캔씩 따서 마시곤 했으면서, 지금은 어찌 자꾸 술을 주냐는 저 의아한 시선도 화가 난다.
“…왜. 어찌해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
“없으면 못살 것처럼 굴지 마.”
“…….”
“꼭, 씨발, 무슨 진짜 사랑이라도 되는 것처럼.”
왜 이러지 진짜 취했나. 선오는 잔을 놓고 이마를 짚었다. 후끈거리는 눈두덩을 문지르며 뇌까렸다. 섹스할 때나 눈물을 보이지 잘 울지도 않는 앤데, 그 남자 때문에 우는 거 같아서 좆같다. 저 눈물을 볼 때마다 그의 세계 어느 한 곳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꼴 같지도 않은 사랑을 한답시고 정신 나갔던 부친을 비웃었는데, 그보다 더한 꼴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네 어미는 네 앞에 갖다 놔줄 테니까 그만 우시고요, 장명주 씨.”
후, 취기가 든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드는데 말없이 빤히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바로 보였다.
또륵,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눈가가 이지러진다. 좀 전과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 느낌. 그녀가 말없이 가슴 한쪽을 눌렀다.
명주는 기분이 이상했다. 가슴이 욱신거리고 따끔거리는 기묘한 기분. 독주를 마셔서 그런 건가.
왜, 이 남자를 보면 기분이 이상해지는 건지, 이유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신서원.
그 이름도 그랬다. 들어보지 못한 이름인데도 자신을 부르는 것 같은 괴이한 기분.
독주 때문에 가슴 안이 뜨거운 건지, 이 답을 찾지 못할 묘한 감정 때문에 속이 뜨거운 건지, 가슴 안에 불이라도 난 것 같았다.
명주는 뚝, 뚝 흐르는 눈물을 채 닦지도 못하고 애틋하게까지 느껴지는 대군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자신은 지금 울고 있는 걸까.
“네가 그렇게 서럽게 울면 내가….”
골이 아프다는 듯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그의 잇새로 한숨인지, 자조인지 모를 시름이 샜다.
“오해란 걸 하거든. 명주야.”
그녀는 뒤늦게야 턱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눈물방울을 닦았다. 이 눈물의 원인이 제 어미는 아니었다. 분명.
바늘을 쥐고 있어야 어울리는 자신의 손에 가당치도 않은 청자기 찻잔이 쥐어져 있다. 저 같은 것은 일평생 한번 쥐어보지도 못할 도자기. 자꾸만 자신을 때 묻은 무명치마가 아니라 부드러운 비단옷을 입은 여인을 대하듯 그가 다가온다.
자꾸 대군께서 저를 은애하는 여인 대하듯, 그리 바라봐서 그런 것이다. 그래, 그런 것이야. 명주는 혼란스러운 이 마음을 납득해 보려 무던히도 애썼다.
“그러니까 저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휙 당기는 그 때문에 하릴없이 가까이 맞붙어야 했다. 데굴데굴, 굴러간 찻잔이 상다리에 닿아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천천히 뒷목을 감싸는 커다란 손, 따뜻한 온기에 부드러운 감촉, 사내라 거칠지만 만지는 손은 다정했다. 알고 있었다. 제 낭군인 송학도와는 완벽히 다른 감촉이니까. 늘 폭력적이고 우악스럽기만 한 그와는 다른….
“저는 지아비가 있습니다. 이러시면 안….”
“뭐가 그렇게 안 되는 게 많아. 그렇게 된다고 할 때는 언제고.”
“그게 무슨….”
“좋다며, 내가 좋아서 다른 놈은 생각도 안 난다며.”
“그건 또 무슨….”
“생긴 건 똑같은데. 하는 짓이 영 딴판이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만지는 것도 싫대고, 안아주는 것도 싫대고, 키스, 는 당연히 싫겠지.”
“…소인은 대감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말해준다고 알았으면 진즉 둘러메고 데려왔지. 이제 그렇게 내숭 떨어도 소용없어.”
끌어안는 몸이 뜨겁다. 지금의 그녀처럼. 어딘가 익숙한 체향에 익숙하게 느껴지는 커다란 품. 그녀의 인생에 남자라곤 송학도 하나뿐인데. 그의 옹졸하고 좁은 품과는 명백히 다른 이 가슴이 낯설지 않다.
“대감, 노, 놓아주, 아.”
순간 취기에 머리가 핑 돌았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허우적거리자 대군이 허물어지는 허리를 단단히 받쳐 안는다. 쓰러지지 않으려 저도 모르게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내의 눈이 깊고 그윽하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살아생전 아비가 알려준 그 깊은 바다라는 것을 닮은 듯도 했다. 일렁거리는 저 눈, 꼭 어디서 마주친 적이 있는 것만 같은 눈동자를 보지 않으려 눈을 감는데 부드럽고 촉촉한 것이 입술로 와 닿았다.
그가 입술을 겹치는데, 가슴에 물안개가 들어찬 듯 마음이 먹먹했다. 명주는 이유도 모르고 그만 펑펑 울고만 싶었다. 가슴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아, 눈을 뜨면 그만 울음이 걷잡을 수 없을 터질 거 같아서, 그의 도포 자락을 콱 쥐고 있었다. 대체 왜. 왜. 대군만 보면….
맞닿았던 입술이 찬찬히 떨어지는데 온몸이 다 후들거렸다. 낯선 사내건만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촉감이 그녀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너 정말 날 기억 못 하는 게 맞아?”
“…….”
“왜 나는 네가, 날 모르는 거 같지가 않지?”
“분명 모른다고 답을….”
“알아, 아는데.”
후우, 깊은 한숨 섞인 숨에서 사내의 고뇌가 느껴졌다. 더불어 불어오는 강인한 사내의 욕정이 너무도 선연해 명주는 사지가 떨리기까지 했다.
허리를 천천히 어루만지는 손길이 조금 거칠어진다 싶더니 이내 저고리 속을 파고들었다.
“앗, 대, 대감. 이러지…!”
“기억을 잘 더듬어봐. 어?”
봉긋한 젖가슴 아래를 연신 쓰다듬으며 타고 올라오는 손이 놀랄 새도 없이 솟아 있는 젖무덤을 움켜쥐었다. 화들짝 놀라 바동거리는데 머리가 핑핑 돌았다. 그녀가 자신을 뒤덮은 술기운에서 벗어나려 헤매는 사이 그의 손이 뱃가죽을 쓸어내리며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안, 안 되옵니다. 정말 저는 서방님이, 앗.”
“네 서방이랑은 달라. 잘 생각해봐. 네 서방은 이렇게 안 만져줬어. 네 성감대는 나만 알아.”
확신에 찬 어조는 애원인가 싶을 정도로 절실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도 확고하여 정말 자신이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건가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툭, 그녀의 이마에 대군의 이마가 닿는데 순간 명주는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눈을 감고 있는 대군의 만면에 수심이 깃들어 있었다.
제발, 꼭 그렇게 간청이라도 하는 듯한 얼굴에 명주는 다시 가슴 한쪽이 시큰거렸다.
왜지, 왜.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는 물음을 던지는데 순간 닫혀있던 사내의 눈꺼풀이 열렸다. 보는 시선이 너무도 절실해 순간 불쑥, 감히 저 얼굴을 만져 달래주고 싶다는 생각이 치솟았다. 정말 대군의 정인이라도 된 듯한 착각에 휩싸였다. 제 주제도 모르고.
‘어디 감히 네년 따위가 나리께 꼬리를 쳐. 언감생심 가당키나 하더냐? 왜, 첩 자리라도 얻어 팔자라도 고쳐보려고? 그런다고 천한 태생이 달라지기라도 할 줄 알고.’
어릴 적 기방에서 살았을 때 자신에게 마음을 품었던 대갓집 자제의 정혼녀가 그녀를 찾아와 했던 말이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신분이 맞지 않는 사내와 얽히면 곤혹스러워지는 일이 늘 생겼으니. 하물며 이번엔 대군이었다.
“이번엔 안 물어봐?”
“…….”
“손잡아도 되나, 키스해도 되나, 보지 벌려도 되나, 너 자주 묻던 것들 말이야.”
코앞에서 읊조리는 그 감미로운 목소리에 취해, 정말 자신이 대군의 정인이라도 된 양 착각이나 하고 있을 주제가 못되었다. 저 눈동자에 가슴이 아리고 자꾸 눈물이 나는 데에는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번엔 되는데.”
“…….”
서원아.
“명주야.”
벗어나려 단단한 가슴을 미는데 놀랄 새도 없이 다시 입술이 부딪힌다. 다정한데 사납고, 사나운데 애틋했다.
“으응, 음.”
용의 꼬리처럼 거세게 요동치며 입 안을 파고 들어오는 대군의 혀가 뜨거웠다. 밀어내려 할수록 깊게 얽히어 든다. 팔을 꽉 붙든 그의 손아귀가 말도 못 하게 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