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인연
납득하기는 힘들지만 정리를 해보자면 그랬다.
자신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어딘지도 모를 이곳으로 떨어졌다. 원영의 탈을 쓰고 있는 이는 스스로를 팔복이라 칭하며 그를 대군이라 부른다. 꿈이었으면 칼로 손을 그었을 때 진즉 깼을 테지. 잠자리가 예민해 누가 조금만 소란스럽게 굴어도 잠에서 깨던 그였다. 그래서 꿈 자체를 자주 꾸지 않는 편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정말 그 노인네 말대로 전생? 말도 안 된다. 전생이라니. 미치지 않고서야.
선오는 노인의 말을 떠올리며 그럴 리 없다고 조소했지만, 곧 차분하게 지금의 상황을 짚어보았다.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을 납득하는 것보다 그를 모른다고 부정하던 서원의 눈빛을 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8년을 곁에 있던 그녀였다. 자그마치 8년이다. 그에게 사랑을 고백한 그녀와 몸을 섞고 산 지 8년.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그녀를 떠날 수 있다고 자신하며 산 지도 8년.
오랜 세월 동안 그렇게 곁을 지키던 그녀였다.
“…신서원.”
저잣거리에서 보았던 그 여인이 어디서 사는 누구인지 알아오라 시켰는데, 그의 명을 받고 떠난 수족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서원의 얼굴을 하였으나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여자.
선오는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출궁한 대군의 일과는 참으로 따분했다. 반나절을 뒷짐만 지고 기다리려니 속이 뒤틀렸다.
선오는 손을 들어 흰 비단천이 감긴 손바닥을 보았다. 마치 모든 게 생시인 것처럼 선명하기만 했다. 칼을 그었을 때의 아픔과 시뻘건 피가 꿈이 아니라는 듯 아주 생생했다.
“너. 이리 와봐.”
원영의 생김새를 한 팔복을 부르자 냉큼 다가오는데,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예, 대군 대감.”
선오는 납작 엎드리다시피 허리를 접는 팔복의 정수리를 보며 자신을 지칭하는 호칭을 상기시켜보았다.
그가 아는 한 대군이라 함은 정실 왕후 소생의 적통 아들에게 부여되는 칭호였다. 뭐, 이게 꿈이든 생시든 아니면 그 노인의 말마따나 전생이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왕족이니 나쁠 건 없었다.
시대가 어떻든 누구에게 굽실거릴 만한 성격이 못되긴 마찬가지였다. 남을 짓밟았으면 밟았지 허리를 숙이며 살진 않을 팔자를 타고난 것이 그였다. 그것이 설사 전생이라 해도.
“더 가까이.”
머뭇머뭇, 다가오길 꺼리는 낯빛이 선연하다. 선오는 더 다가오라 턱짓을 했다.
“더.”
“…….”
“걱정 마. 뭐 설마 죽이기야 하려고.”
결국 코앞까지 다가온 팔복을 보며 선오는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근데 말이야, 내 모친이 누구냐.”
묻는 말에 연신 의문을 표하는 저 눈동자도 꼴 보기 싫었지만 어쨌든 답은 들어야 했다. 그가 재촉하자 의구심을 품은 눈가가 답하기를 주저한다.
“대, 대, 대감께서 어찌 소인에게 그런 것을 하문하시옵니까?”
“죽이진 않는다니까. 같은 말 두 번 해야 돼?”
더 입씨름할 여력이 없어 다소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화들짝 놀라며 튀는 어깨가 아련하게 떨고 있었다. 아무래도 협박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이게 어려운 질문도 아닌데 영 못쓰겠는 면상이 울상이 되어 연신 목울대를 움직이며 꿀꺽거린다.
“그야 당연히 구, 궁에 계시는, 조, 존엄하신 대비마마십니다.”
대비? 왕의 모친?
종놈은 그를 대군이라 부른다. 자신이 왕은 아니니 그의 형제들 중 누군가가 왕위에 올랐다는 뜻이었다. 그가 기거하는 집이라며 팔복이 그를 대궐이 아닌 이곳으로 데려왔을 때부터 눈치는 채고 있었다.
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너르고 좋은 기와집을 가졌다는 건 삼정승 정도는 되거나 혹은 그것에 못 미쳐도 최소한 조정에서 강력한 권력을 쥐고 있거나, 그도 아니라면 군왕과 혈통으로 얽힌 왕실의 종친.
이 셋 중 하나겠으나 종놈이 그를 대군이라 불렀다면 답은 명확했다. 왕위를 잇지 않고 출궁한 왕의 아들.
차라리 잘 됐다. 보는 눈과 귀가 많은 대궐보다는 이편이 훨씬 움직이기 편할 것이다. 따돌릴 눈들의 수가 적다는 거 하나는 다행이었다. 뭔가 더 단서가 있다면 지금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로 온 것인지, 처한 상황을 보다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텐데.
자신이 누군지 좀 더 분명해진다면 돌아갈 방법도 빨리 알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너, 내가 누군지….”
“대감, 현검이 돌아왔습니다.”
급히 다가와 소식을 전달하는 남자 뒤로 길을 떠났던 그의 수족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명을 받고 집을 떠났던 현검이 돌아왔다.
답답한 마음에 대청을 서성이던 선오는 꾸벅 고개를 숙이는 현검을 당장에 불러올리었다.
가게 앞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는 서원이 보였다.
가게라고 해봐야 사람 둘이 들어가 앉으면 거의 들어차는 초가셋방이었다. 불이라도 났다간 그대로 타 죽으리만치 소박했다.
‘여자의 부군 되는 송학도라는 자는 이 일대에서 유명했던 장사친데, 여자의 부모가 쌀과 재물을 받고 딸자식을 송학도에게 팔아넘긴 일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제법 유명한 풍문이었습니다. 그 이후 곧장 혼인했으나 송학도가 노름으로 재물을 다 날리고 지금은 몇 년째 잡과를 준비 중이라 하옵니다. 워낙 재물욕이 많은 인간이라 요샌 수시로 청을 드나들며 다시 장사를 준비한다는 소문은 있었습니다만 그도 아직은 아닌 듯합니다.’
분명 그가 알고 있는 서원의 얼굴인데, 어쩌면 정말 전생의 그녀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묘했다. 이젠 정말 미쳤구나, 전생이라니. 자신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게 가능한 일인가.
‘대감께서 알아보라 명하셨던 여자는 저잣거리에서 옷감과 견직물을 팔고 있었사옵니다. 장사를 끝내면 대갓집을 돌며 바느질을 해주고 품삯을 받아 송학도의 뒷바라지를 한다 하옵니다. 한데 어찌 대군께서 직접 이 여인을….’
조막만 한 손이 야무지게 바느질을 한다. 섹스를 하고 싶을 땐 눈동자 가득 촉촉해져선 야살스레 귀두를 만지작거리던 그 손이었다. 작디작은 손바닥이 사정을 시키려 필사적으로 움직일 때면 끝내 그녀의 얼굴에 정액을 쏟아내며….
“…후.”
선오는 생각의 회로를 가까스로 끊었다. 도포 앞섶으로 가려놓은 성기가 꺼덕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유독 그의 좆이 흉물스럽게 생겨 먹은 탓에 한 번 발기를 시작하면 숨기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서원이 좋아하기도 했다.
그가 음험한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그녀가 바느질 하나를 끝냈다. 고이 접은 옷을 옆으로 놓아두곤 또 옷감 하나를 집어 든다. 저놈의 바느질은 때와 장소를 가리질 않는다.
그냥 내다 버리라 해도 이 정도는 기워 입어도 된다고 잠옷이며 셔츠며 온갖 것을 꿰매더니, 이젠 아예 가게를 차렸다. 여기서도 별반 다를 게 없는 모습이었다.
하아….
그도 모르게 한숨이 터졌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그와 했던 그 많은 음탕한 일들을 그녀가 서방이라 부르는 그 새끼와 했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가. 더 이상 상상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그칠수록 머릿속은 온통 그 남자와 서원이 뒹구는 형상들로 가득 찼다. 대체 이 좆같은 기분을 어떻게 터트려야 풀릴지 감조차 오지 않는다.
선오는 저벅저벅 다가가 바느질에 집중하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
놀란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얼마나 놀랐으면 눈동자까지 정적이다.
“그렇게 놀라지 마. 내가 더 돌아버릴 거 같으니까.”
흑요석 같은 신서원의 눈동자, 저 처연한 눈이 그를 향할 때면 밑바닥까지 가셨던 욕정이 단숨에 절정까지 치솟았다. 사랑, 살면서 그깟 것에 동요되어 본 적은 없지만 그거 하나만은 확실했다. 사랑이든 아니든 그녀는 그의 것이었다.
“근데 너.”
생각해보니 그렇다. 좋아한다고 말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왜 한 입으로 두말을 해.
“누구 허락 받고 여기서 다른 새끼 뒤치다꺼리야.”
그와 몸을 섞기 시작했을 때부터 아니, 낯짝 두껍게 그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을 때부터, 빠져나갈 수 없는 그물에 걸린 것처럼 엉킨 사이였다. 좋아한다고, 만나달라고 매달릴 땐 언제고. 몰라? 내가 누군지도 몰라?
이건 현실이고 아니고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감히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다.
“대체…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너 계속 나 모른 척 할래?”
“선비님께선 아까….”
“뭐? 서방님? 내가 그랬지. 딴 놈 만나고 싶으면 적어도 나랑 끝내고 만나라고.”
알아듣지 못할 말만 내뱉는다는 눈이다. 친절하게 사정을 설명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선비님께선 대체 누구신지요? 아까부터 사람을 잘못 보신 듯한데.”
“사람 잘못 안 봤고, 너 맞아. 신서원.”
“저는 그런 이름이 아닙니다.”
쥐고 있던 손을 놓아 달라 슬쩍 손목을 비튼다. 선을 긋겠다는 그녀의 속뜻을 대번 알아차렸다.
“…허.”
그녀가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점점 확신으로 바뀌자 선오는 뒷골이 땅겨왔다.
첩첩산중이다.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선오는 곤란해하는 그녀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오고 가는 이들의 눈을 의식한다. 뿌리가 단단해 보이지만 실은 연약한 잎사귀를 가졌다. 그녀는 그런 여자였다.
굳센 척하지만 내면 깊은 곳은 과육처럼 무른 여자, 하여 상처도 쉽게 받는다. 타인이 휘두른 칼날에 쉽게 베이지만 아닌 척, 담담해 하는 그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현생이 아니어도 저 성정까진 바뀌지 않은 건가. 짐작할 만한 게 그뿐이라 그 또한 답답했다.
“놔 주시지요.”
그의 노골적인 시선을 눈치챈 그녀가 살포시 고개를 돌려 눈을 피한다.
백색 치마에 먹색 무명저고리, 어느 여염집 여자와 다를 바 없는 차림새였다. 이 거적때기 같은 무명옷을 입어도 저 색기는 다 가려지지 않으니 그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학창시절에도 온갖 남자 놈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안줏거리가 되었었지.
“찾고 계신 분이 저와 비슷하게 생기셨나 봅니다.”
“너…. 신서….”
선오는 말을 다 잇지도 못하고 물밀 듯이 치밀어 오르는 울화통을 삼켰다.
펑퍼짐한 저고리 위로 풍만한 젖가슴의 윤곽이 뚜렷하다. 그가 주물럭거리면 저 앙증맞은 입술이 앙앙 신음을 토하며 울어댔었다. 오줌을 싸다가도 유두를 잡아 비틀면 엉덩이를 흔들곤 했다. 불가항력이란 걸 안다. 문선오가 길들여 놓은 몸이니 모를 리 없었다.
그가 기억하는 신서원이 확실한데, 모든 게 너인데. 정말 네가 아니라고.
그가 말없이 내려다보고만 있자 결국 다시 그녀의 시선이 올라왔다. 정면으로 서로가 눈을 맞닥뜨렸다. 폭풍전야 속에 단둘이 남겨진 것만 같은 기분.
서방을 골라도 생긴 것도 좆같은 꼭 그런 놈을 고른다. 밤낮없이 그 새끼와 떡을 쳤다고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대체 왜 자신이 이깟 천잡한 감정이나 느끼고 있어야 하는지.
돌아서면 그뿐인 사이에, 대체 왜.
스스로에게 물어도 답을 찾을 수가 없으니 더 환장할 노릇이었다.
“아앗!”
바늘에 손이 찔렸는지 그녀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떨어뜨렸다. 손끝에 선홍빛 피가 맺혀 있다. 등신 같은 서방 뒷바라지하느라 내내 바느질만 했을 손이었다. 서방 뒷바라…. 피가 거꾸로 솟는 건 솟는 거고 또 다친 손에 눈이 갔다. 등신은 저일지도 몰랐다.
“잘한다. 웬만한 건 버리랬지.”
눈물이 찔끔 맺힌 눈가가 그를 올려다본다.
“어디 봐.”
선오는 작은 한숨과 함께 그녀의 손가락을 당겨왔다. 새빨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저 얇고 가는 손가락도 익숙했다.
선오는 저도 모르게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8년을 함께한 세월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거의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이성적인 남자를 무방비하게 흔들어놓는다. 늘 그래왔던 습관만큼은 그 역시도 어찌하지 못했다.
저답지 않았다. 이런 한심한 짓은 그녀가 먼저 했으면 모를까, 제 쪽에서 먼저 한 적은 없었다.
그녀는 자주 그랬다. 바늘에 찔린 손가락이 아프다며 다짜고짜 그의 입 안으로 밀어 넣었었다. 처음엔 섹스도 하지 않는데 그의 입으로 손가락을 넣길래 저 역시 당황했었다. 여기를 빨아주면 아프지 않을 거 같다며 팬티를 살살 벗는데, 그 더웠던 여름날 통풍 하나 되지 않는 방 안에서 짐승처럼 떡을 쳤었다.
‘선오야아, 아앙, 선오, 야, 흐으, 앙!’
애교 섞인 콧소리를 내며 방아를 찧는데 자지가 달아올라 미칠 것 같이 황홀하다며 울부짖었었다.
선오는 혀를 모아 검지를 감싸고, 그녀가 늘 원해왔던 것처럼 손가락 마디마디를 켜켜이 핥아주었다. 비릿한 피 냄새와 서원의 체향이 느껴진다. 고초와 같은 바느질로 굳은살이 밸 법도 한데 혀끝에서 감기는 살결은 심히 부드러웠다. 서원의 손가락이었다. 지금은 다른 차림을 하고 있어도, 그녀가 맞다.
그는 입 안에 착 감기는 손가락을 빨고 혀를 아래위로 놀렸다. 흡사 터트리지 않은 노른자를 가지고 놀 듯 그녀가 예민해 하는 지점을 구슬려 빠는 데 집중했다. 서원의 성감대라면 눈 감고도 찾는 그였다. 이 손가락을 빨고 있는 남자가 문선오임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실렸다. 그를 알아봐 주었으면 하는 유치한 마음.
이래도 내가 기억이 안 나?
하는, 한심스러운 마음.
그 와중에도 집요한 시선은 그녀에게 박아둔 채였다. 사실 그녀의 표정을 관찰하기 위해서였는데 본의 아니게 수치심을 느끼게 한 모양이었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그녀의 뺨이 벌게졌다. 수치와 모멸감, 그도 아니면 굴욕감.
확, 손가락을 잡아 빼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 대체 누구신데 이런 무례를 범하십니까? 저는 기녀가 아닙니다. 더구나 지아비도 있습니다.”
“뭐? 지아비?”
다시 현생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여기서 화병으로 죽는 건 아니겠지.
당황으로 얼룩진 얼굴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다. 그가 그 자리에서 계속 그녀를 바라보며 돌아갈 기색이 없자, 집으로 갈 생각인지 분주히 짐을 정리했다. 그러고는 그와 마주 섰다.
“저는 나리를 모릅니다. 나리 같은 분과 교분을 쌓을 만한 지체 높은 규수도 아닙니다.”
“알아, 네 처지에 가당치도 않은 거.”
“…하면 소인은 드릴 말씀을 다 드린 거 같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서둘러 자리를 피하는 그녀가 등을 돌리고 길을 걸어간다. 조금 걷는다 싶더니 저잣거리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초가 한 채로 들어섰다.
이게 정말 전생이라면, 구질구질하게 사는 건 현실이나 전생이나 달라진 게 없구나. 그녀답다 싶다가도 저 방에서 함께 몸을 비빌 그 남자를 떠올리면 다시 피가 끓었다.
저 몸뚱이에 다른 놈의 좆을 들이는 건 결단코 허락한 적 없었다. 한 여자 갖고 딴 놈과 돌려먹는 취미는 더더욱 없었다.
아니, 제 입으로 문선오가 아니면 그 어떤 남자도 싫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 않았던가. 한데….
당장에 문짝을 뜯어내고 안으로 들어가려다 새어 나오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정말 김헌식 그놈과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란 말이오?”
“아니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사내새끼들한테 죄다 홀릴 듯이 눈길을 주면서 정말 아닌 게 맞소? 김헌식 그놈이 부인만 보면 침을 흘리는데 내 어찌 믿고. 그리 음란한 모양새로 돌아다니니 파리가 꼬이는 게 아니오! 그게 아니라면 왜 아이가 들어서질 않는 게요. 우리가 혼인을 한 지가 언젠데. 셋은 낳아도 낳았어야 하는 거 아니냔 말이오. 하긴, 싫다고 그리 내빼는데 애가 들어서는 게 이상하지. 이게 다 부인이 조신하지 못해 생긴 일 아니오?”
선오의 눈가에 싸늘한 한기가 스미었다. 비틀린 입가에 차가운 분노가 깃들었다.
언제부턴가 그의 뒤를 말없이 지키고 선 현검이 가까이 다가와 붙었다.
출궁하기 전, 대궐에서부터 그를 호위하던 호위무사라 했다.
“남자가 의심병이 도져 틈만 나면 안사람을 추궁하고 손찌검을 한다고 합니다. 잘 모르는 소인이 보아도 대단한 미색이니 더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천하의 상종 못 할 잡놈입니다.”
선오는 현검의 허리춤에 있는 검집을 곁눈질했다. 그의 뜻을 눈치챈 건지 현검이 다소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이내 조용히 읊조렸다.
“대감, 예서 일을 소란스레 키우시면 상황이 복잡해질 수도 있습니다. 저 여인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사오나 지켜드려야 할 여인이라면 은밀히 처리하심이 좋으실 듯합니다.”
“네가 내 손발이라 했지.”
“하명 하시옵소서.”
“해야 할 일이 있다.”
“뭐든 하명만 하시옵소서. 명 받들겠습니다.”
선오는 아직도 미심쩍은 구석은 있지만 전생일지도 모를 이곳을 일단 받아들이기로 했다. 현생으로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현생이든, 전생이든 서원을 다른 놈의 손아귀에 둘 수는 없었다. 전생이라고 넋 놓고 있을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현검에게 은밀히 할 일을 지시한 선오는 초가삼간을 다 태워버릴 듯 집을 노려보았다.
성인이 되던 그해, 그녀의 처음을 가진 이후 그녀에게 남자라곤 자신뿐이었다.
아무리 몸정으로 눈 맞은 사이라지만 서로가 암묵적으로 다른 이에게 눈을 돌리진 않았었다. 딴 놈과 한 여자를 나눠 먹을 만큼 마음이 너그러운 남자가 결단코 아님을, 그녀 스스로가 모를 리 없으니까.
그랬다간 문선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신서원은 누구보다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근데 지금 저 새끼가 뭐라고 지껄이는 거지. 셋은 낳아도 낳아야 했다고?
다른 남자의 씨를 품어 자식을 낳아?
문선오 정액은 제 보지만 먹을 수 있다고 그렇게 울어놓고.
선오는 뼈가 으스러지도록 주먹을 쥐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그때 다시 집에서 흘러나오는 그녀의 소리가 들렸다. 그에게 좋아한다, 속살거렸던 서원의 목소리가.
“시장하실 텐데 저녁이라도 지어 올리겠습니다.”
분명 어제 자신과 함께 라면을 끓여 먹었었다. 편의점까지 손수 가 라면도 사 왔다. 그녀가 요즘 너무 마른 것 같아서 살 좀 찌우려 국물에 밥까지 말아 먹였다. 근데 그 손으로 누구 밥을 차려?
“지금 그깟 밥이 중요하오? 아직 말 다 안 끝났는데 어딜 가는 것이야!”
서로를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의 그림자를 찢어발길 듯 쳐다보고 있는데 문을 열고 그녀가 나왔다. 창호지를 덧대어 바른 목문이 삐거덕거렸다.
선오가 집에 불이라도 지를 듯이 그 앞에서 노려보고 서 있었으니, 문을 나온 그녀와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건 당연지사였다. 동그란 그녀의 눈매가 더욱 뚜렷해졌다.
“…나리께서는 아까 저잣거리에서….”
“부인!”
집 안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녀가 뛰듯이 달려와 차마 붙잡지는 못하고 애원했다.
“어서 여기서 나가셔요.”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고 쳐다만 보고 있자 다급해진 그녀가 결국 그의 손을 이끌고 토담 뒤로 몸을 숨겼다.
담 아래 숨어 남자의 동태를 살피는 그녀는 몹시도 고단해 보였다. 이런 삶이 일상인 것이다.
가까이 붙어선 그녀에게서 익숙한 서원의 향이 났다. 그녀의 체향.
한참만에야 담 아래로 고개를 돌린 그녀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후다닥 잡았던 손을 놓는다.
노름을 하러 가는지 돈이 든 주머니를 짤랑거리며 송학도가 문을 나왔다.
“이놈의 여편네는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서방한테 밤마다 아양을 떨어도 모자랄 판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그녀를 찾자 서원은 들키지 않으려 필사적이기까지 했다.
남자가 완전히 집을 나선 후 멀어지는 것을 보고서야 그녀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겨우 입을 연다. 그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다른 새끼 눈치를 보는 것도 배알이 꼴린다.
“나리께서 어찌 여기 계신 겁니까? 설마 저를 미행하신 것입니까?”
“내가? 너를? 네 주제에 대해선 네가 더 잘 알더니, 왜.”
차가운 음성이 연거푸 터졌다. 다른 놈이랑 살림까지 차려놓고 그에 대한 것은 전혀 기억하지도 못하는 게 괘씸했다.
절로 떨어지는 그녀의 목덜미가 제 신세를 곱씹는다. 정말 자신이 대군이라면 감히 면전에 대고 대화를 나눌 처지가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보아도 그의 차림새는 양반의 매무새였고, 반상의 법도가 엄연한 이 나라에서 그를 업신여기는 소행은 죽어 마땅한 죄였다.
“소인이 무례를 범했다면 용서하십시오.”
“대군 대감, 아무래도 미행하는 자가 붙은 듯합니다.”
현검이 은밀히 속삭였다. 대군이라는 칭호에 그녀가 고개를 치켜드는데 그 큰 눈이 놀라 껌벅거린다. 누가 미행한다는 사실보다 그녀의 표정에 변화가 있다는 사실이 더 신경 쓰였다. 저 눈이 다른 놈에게로 향할까 그게 미치도록 거슬렸다.
“신서원.”
선오는 좆같고도 기묘한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그녀를 알고 지낸 세월 동안 이런 적나라하게 발가벗겨진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마음속에 자신이 한 톨도 들어있지 않은 그녀의 모습을 보게 되리라고는….
여전히 그녀는 문선오가 누군지 모른다는 눈으로 그를 본다.
선오는 말 못 할 좌절감에 빠졌다. 꼴사나웠지만 사실이었다.
그녀가 곁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지금은 대체 왜.
왜 젖 잃은 어린애처럼 그녀의 주위만 맴돌고 있는가.
선오는 스스로에게 답을 구하지 못할 질문을 했다.
“이름이 뭐야, 너.”
정말 이게 너와 나의 전생이라면….
“이름, 내가 널 뭐라고 불러야 해.”
괜찮으니 말해보라 달래자 붉은 입술이 서서히 열린다.
“…장가 명주라 하옵니다.”
장명주.
그게 전생의 너였구나.
장명주.
“우리 집으로 가. 가서 팔복이 거적때기든 바둑이 걸레쪽이든 옷이란 옷은 죄다 줄 테니까 꿰매든가 다리든가 네 마음대로 해.”
“말씀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소인은 지금이 편합니다.”
“그거 몇 개 꿰매서 입에 풀칠이라도 하겠어?”
“…제 서방님께서 좋아하지 않으실 겁니다.”
“너, 그놈의 서방님 소리…, 후, 그래. 네 서방 노름 밑천까지 대려면 위고 밑이고 놀리지 말아야 할 거 아냐.”
서방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아 선오는 몇 번이고 성질을 눌러 죽여야 했다. 그의 말이 성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건지 몇 번이고 그녀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항변을 하고 싶어 입술을 삐죽이는 것도 훤히 꿰뚫었다. 신서원을 잘 알고 있었다.
대군씩이나 되어 어찌 말본새가 그러하냐는 눈빛이다. 현생에서는 두 사람이 8년 동안 갖은 떡을 다 쳐댄 걸 알면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어찌 그런 말씀을….”
남녀의 색사에 대해선 입에 올리기도 거북해하는 저 고아한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며칠 전의 그녀가 떠올랐다.
서원의 숍을 자주 들락거리는 남자 하나가 있어 그녀를 추궁했더니, 옛 회사 동료였는데 고백을 받았더랬다.
하지만 자신은 거절을 했고, 정말 별 사이가 아니라고 하면서 살살 곁에 붙어 오던 그녀였다. 신서원. 아무리 현생이 아니라지만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 거지.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다른 남자와의 관계를 의심스러워하는 그에게 눈물을 흘리며 매달리던 그녀였다.
정말 다른 남자랑은 아무 일도 없었다고, 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해보라 애원해 밤낮없이 흘레붙어 먹었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그를 사정시키기 위해 위로 올라타 방아질을 하고, 허리를 돌려대고, 엉엉 울며 제 항문까지 벌렸다는 사실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겁을 할까.
이 구멍은 아무래도 그게 들어갈 구멍이 아니라고 다시 보지를 활짝 펼쳐 우뚝 선 자지를 밀어 넣는데, 제발 싸달라고 울며 빌었었다.
‘선, 하응, 오야. 제발, 이제 그만, 싸, 응? 나 보지 아, 파. 아아! 앙!’
그의 물건이 좋다고 음부가 헐도록 엉덩이를 놀렸다는 걸 저 맑은 눈은 알까 싶었다.
‘나, 나 정말 소변, 제발, 하윽!’
‘그냥 싸. 뭘 새삼스레 내외하고 그래.’
그렇게 몇 시간째 이어진 섹스로 화장실 가는 타이밍도 놓친 그녀였다.
대체 언제부터 섹스 중에 화장실 가는 걸 따로 챙겼다고. 빨리 싸라고 찰싹 엉덩이를 때리자 결국 좆을 타고 뜨끈뜨끈한 물이 샜다.
보짓살 깊숙한 안쪽까지 성기를 끼워놓은 상태로 소변을 보는데 누런 액체를 질질질 싸대면서도 엉덩이를 흔들어댔다. 제 추태가 결국 쾌감으로 이어질 것을 그녀 스스로도 잘 아는 것이다.
특히나 오줌을 쌀 때 탁, 탁 엉덩이를 때려주면 질벽이 귀두 끝을 꽈악 물어 서로가 극치감에 몸서리쳤었다. 자지 뿌리에 잔뜩 고인 소변을 두 눈으로 확인하면서도 이 섹스가 맛있다고 우는 그녀가 제정신일 리 없었다.
‘선오, 야아. 아흣, 맛있, 어, 아앙!’
‘어디다 싸. 똑바로 말해야 알아듣지.’
‘내, 보지, 하으으, 안에, 많, 이, 으응! 앙!’
‘안 되겠다. 못 믿겠어. 너는 그냥 너 좋다는 그 남자한테 가. 이렇게 더는 서로 보지 말자. 나는 다른 여자한테….’
‘시, 싫어어! 싫어, 선오야. 제발, 허으.’
제발, 다른 여자만은 안 된다고 눈물로 애원을 하던 그녀였다.
‘목 안아. 싸게.’
‘밖에 싸지, 흑, 마. 응?’
‘그럼.’
‘내 보지, 하앗, 안에, 잔뜩. 아앙!’
날름 안겨 오던 그 몸뚱이가 눈앞에 있는데, 그녀는 불과 며칠 전 일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선오는 발기의 조짐을 보이는 앞섶을 무시하고 다시 그녀와 마주 보았다.
그의 속내를 알 리 없는 그녀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앙다물고서 쏘아본다.
“어찌,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으십니까? 대감께서 소인에게 왜 그러시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이제 좀 쳐다볼 마음이 드나보다, 너.”
내내 눈도 안 마주치려 들더니.
그녀는 여전히 그가 왜 이러는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기색이었다. 정말 지금의 서원이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대군이라는 웬 미친놈이 절 찾아와 피가 나는 손가락을 입에 넣어 빨고 집으로 들어오라는 둥 개수작을 부리고 있는데 황당하지 않을 리가.
어느 날 갑자기 낯선 땅에 떨어져 난데없이 왕의 동생이 된 자신 역시 당황스러운데, 그녀라고 오죽할까 싶었다.
물론 그렇다고 순순히 그녀를 놔줄 마음 따위는 눈곱만치도 없었다.
가만히 있는 그를 먼저 건드린 것도 그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