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1. 폭우 (2/20)

01. 폭우

“그 새끼 어디 갔어.”

분명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비가 마구 쏟아져 머리카락이 흠뻑 젖지 않았던가. 한데 하늘이 맑다 못해 푸르디푸르렀다. 천지가 개벽이라도 하지 않은 이상 이게 가능한 일인가.

분명 신서원이 딴 놈이랑 같이 있는 걸 보고 꼭지가 열려 차에서 내렸는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번개가 치고 섬광이 번쩍했다. 그 모든 게 생생한데, 제 눈깔이 미치기라도 한 건가.

선오는 옷자락이 축축하다는 걸 인지했다. 소매에 맺힌 빗물이 뚝뚝, 흙바닥을 적신다. 조금 전까지 밟고 있던 아스팔트 길이 아닌 흙길이다.

뭐지? 뭔가 이상하다.

걸치고 있는 옷부터 생소하다. 턱 아래에서 매듭지어진 갓끈, 손등까지 소매가 길게 내려오는 회색 도포에 보랏빛 답호, 입고 있던 흰 셔츠는 어디로 가고 낯설다 못해 괴이하게 느껴지기까지 한 차림새였다.

열이 받아서 잠시 회까닥한 건가.

“대군 대감!”

대감?

“대감. 옷이 흠뻑 젖으셨습니다. 그 잠깐 새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소인 놈이 곁을 꼭 지키고 있어야 했던 것인데 이를 어찌하면 좋습니까.”

옆에서 쫑알거리는 목소리가 거슬려 신경질적으로 돌아보았다. 쏘아봤다고 해야 맞겠다.

두 손을 모으고 있는 놈이 허리를 굽실거리며 둥그렇게 뜬 눈을 끔뻑거린다. 지저분한 수염과 바짝 올려 튼 상투. 저 차림새는 다 뭔지,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 누렇게 떴다. 어쩐지 낯이 익었다. 저 수염과 상투만 아니면….

“김원영?”

“예?”

이게 다 무슨 일인지. 갑자기 바뀐 날씨에, 이상한 옷을 입고 있는 김원영에.

꿈인가. 그래, 꿈이다. 분명 꿈일 거다.

꿈을 인식하고 있는 건가? 자각몽? 그렇지 않고서야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질 리가.

개꿈을 꿔도 유분수지. 꿈 한번 뭐 같네. 꿈에서까지 김원영을 보다니. 그럼 신서원을 찾으러 갔던 건, 그것 역시 꿈이었나. 그 남자도 그렇고, 자신이 빗속에서 보았던 그 모든 광경이 허상인가.

관자놀이가 다 지끈거렸다. 요즘 들어 영 이상한 서원 때문에 신경을 많이 쓰긴 했지만 꿈자리까지 뒤숭숭하다니.

“…씨발. 미치겠네.”

이마를 짚으며 뇌까리던 선오는 곁에 선 남자를 돌아봤다. 속 편한 얼굴이 해맑게 히죽거린다.

“공주마마께 선물할 대례복을 보러 간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한데 어찌 빈손이십니까?”

다시 눈을 뜨면 꿈에서 깨어날 것이다. 김원영도, 이 펄럭거리는 이상한 차림도, 눈을 다시 뜨면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다. 선오는 후, 짜증 섞인 심호흡과 함께 눈을 감았다. 속눈썹을 스치는 바람결에 흙냄새가 난다. 불어오는 이 낯선 향조차 짜증이 나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멍청하게 생겨 먹은 낯짝이 여전히 눈앞에 있었다. 꿈에서까지 꼰대 선배를 봐야 하다니. 속이 시끄럽고 피곤했다.

소란스러운 닭울음 소리와 덜그럭덜그럭, 술 항아리가 담긴 수레를 끄는 쇳소리, 시장바닥인지 물건을 파는 이와 사는 이가 어우러져 사방이 사람으로 득시글거렸다.

“뭔데 자꾸….”

후. 선오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서야 겨우 물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선배는 왜 자꾸 옆에서 알짱거립니까. 한가해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놈의 허리가 더욱 굽는다. 자세가 낮아지고 움츠러든다. 긴장을 했다는 뜻이었다.

“선배라니… 무슨 말씀이시온지. 그리고 대감, 어찌 소인에게 존대를 하시옵니까. 소인 팔복이옵니다.”

“뭐?”

“소인은 대감을 보필하는 팔복이 아니옵니까. 어찌 그러십니까?”

보필? 뭐, 몸종 같은 건가? 자신이 높은 지위라도 되는 건가. 여기가 대체 어디야. 어딘지를 알아야 화를 내든 따져 묻든, 뭐든 방법을 찾을 텐데 어딘지조차 모르고 있으니 손을 쓸 방도가 없다. 벌써부터 종놈인지 팔복인지 하는 놈이 그를 이상하게 보고 있었다.

“대감, 소인이 잘못했습니다. 어떤 게 마음에 드시지 않아서 이러시는지 알려주시면 바로 고치겠습니다. 그러니 소인에게 그러지 마시옵소서.”

이젠 허리가 굽다 못해 땅으로 꺼질 기세다. 하는 꼴이 한심한 건 현실이나 꿈이나 똑같구나. 선오는 어쩔 줄을 모르고 발을 동동거리는 원영, 아니 팔복을 보며 혀를 찼다. 그나저나 대체 이 황당무계한 꿈은 언제 깨는 거지.

선오는 방법을 알지 못해 하릴없이 서 있었다.

“바빠 죽겠는데 이딴 꿈이나 꾸고 앉았고.”

머리로 벽을 한 번 박으면 꿈에서 깨어날지도 모른다. 이 시답지 않은 옷차림은 다 뭐며, 저 좆같은 면상까지 보고 있어야 하다니. 평소에는 별로 꿈도 꾸지 않는데 하필 오랜만에 꾼 꿈에 나타날 게 김원영일 건 뭐야.

어디든 벽이 나타나면 머리를 갖다 박을 심산이었다. 그가 걷기 시작하자 집으로 향한다 생각했는지 팔복이 집까지 모시겠다며 먼저 나서서 길을 잡는다.

분명 서원에게로 향하던 중에는 비가 땅을 뚫을 것처럼 쏟아졌었는데…. 봄의 기운을 머금고 있는 따스한 바람이 분다.

흩날리는 바람결을 따라,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여자가 당나귀를 타고 지나간다. 다홍 노리개에 황금빛 저고리, 한껏 높게 꼬아 올린 가체, 살포시 치맛자락을 말아 쥔 여자는 요란하게도 치장을 하였다.

여인이 지나가자 물기 가득한 손으로 생선 대가리를 내리치는 아낙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엔 포목상들이 줄지어 있었다. 선오는 낯선 광경을 눈 안에 담으며 팔복을 따라 걸었다. 미덥지 않긴 해도 일단 지금은 의지할 곳이 팔복뿐이었다.

서원의 곁에 딱 붙어있던 그 새끼를 잡아 족쳐야 하는데, 여기서 이렇게 시간을 축낼 여유가 없는데, 선오는 답답했다. 한가롭게 꽃구경이나 하고 있을 게 못 됐다.

그저 꿈이라 치부하기엔 자꾸 이 모든 게 불쾌할 정도로 생생하게 느껴진단 말이지. 서원과 함께 있던 그 남자도 어딘지 모르게 신경이 쓰이고.

“…신서원.”

늘 자신에게 거슬리는 존재였다. 열여덟, 그녀를 처음 만났던 그때부터. 괴롭히고 싶기도 했고, 안아주고 싶기도 했으며,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기도 했던 여자. 어떤 한 가지 감정으로 결론을 내리기 힘든 관계가 두 사람의 사이였다.

우선은 이 환상인지 꿈인지 모를 것부터 깨어나야 한다. 보통 꿈에서 깨기 위해 몸을 꼬집지 않나. 신변에 변화가 일어나면 자각몽에서 깰 수 있다는 내용을 본 기억이 있다. 어쨌든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자극은 필요했다.

마침 멀지 않은 문전에 칼과 농기구를 파는 대장장이가 보였다. 선오는 곧장 그곳을 향해 걸었다. 가지런히 놓인 칼 중 가장 크기가 작고 칼날이 예리한 것을 들어 손바닥을 서슴없이 그었다.

“아니!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뚝뚝, 시뻘건 선혈이 고일 틈도 없이 흙바닥으로 낙하한다. 느닷없이 불쑥 나타나 손을 그어버린 양반의 등장에 대장장이가 비명을 질렀다. 넋이 나간 얼굴로 팔복이 소리치며 달려왔다.

“대, 대군 대감!!”

금세 주위가 시끄러워졌다. 하나 상황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 여전히 자신은 저잣거리 한복판에 있고 이 황당무계한 옷을 입고 있다.

선오는 피가 흐르는 손을 꽉 쥐었다. 쉬이 깨지 않을 꿈일지도 모른다. 깨려 애쓰지 않아도 때가 되면 알아서 깰 꿈.

삽시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람들 틈으로 들어가 얼굴이 가려지고, 보이지 않는다 싶으면 다시 나타나는 눈. 말간 눈동자, 섹스할 땐 시뻘겋게 짓무르곤 해 내내 그의 손길이 닿았던 눈이었다. 그녀였다.

“신서원?”

별다른 일이 없는 듯하자 사람들은 금세 흩어지기 시작했다. 덩달아 그녀 또한 등을 돌렸다.

선오는 대강 소맷자락으로 피를 닦아내곤 빠르게 걸음을 옮겨 인파를 헤치고 들어갔다. 그러고는 탁,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돌려세웠다.

“신서원, 너.”

“누, 누구신지요?”

그녀가 누구냐 묻는다. 처음 마주하는 얼굴을 대하는 듯 표정엔 경계심이 가득했다. 좋다고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물고 늘어질 땐 언제고. 그를 생전 본 적이 없다는 얼굴이다. 그 표정이, 눈동자가, 저 입술이, 너를 모른다는 명백한 부정에 순간 가슴이 내려앉았다.

“장난해?”

꽉, 잡은 손에 힘을 주자 고운 복사빛 뺨이 일그러진다. 그녀의 손엔 옷감이 든 광주리가 쥐어져 있었다. 이 익숙한 감촉, 늘 떡을 칠 때면 손에 착착 감기던 서원의 살결이다. 배 맞춘 세월이 얼만데 그녀가 그를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선비님은 누구신데 어찌 이러십니까.”

불안한 목소리로 누구냐 묻는데 순간 목구멍이 턱 막히는 듯했다. 한때는 네 오빠였던 남자, 10년째 알고 지낸 사이, 8년째 친구이면서 섹스파트너, 아니면 연인. 어느 것 하나 쉽게 선택하여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새삼 그녀와의 관계를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음에 충격을 받고 있는 자신이 꼴사나웠다. 그것도 어디인지도 모를 이곳에서.

그녀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이 풀리는데 먼발치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인, 거기서 뭐하오.”

“예, 서방님, 지금 갑니다.”

탁, 뿌리치듯 놓은 손으로 광주리를 고쳐 안은 그녀가 멀어져갔다.

웬 남자 곁으로 다가가는 그녀가 힐끔 뒤를 돌아본다. 분명 신서원이 맞는데 그녀는 자신을 모른다고 한다. 맑고 고요한 눈망울이 그를 부정했다.

서원의 곁에 서 있는 남자가 그녀에게 물었다.

“뉜데 거기서 그러고 있었던 게요.”

“처음 뵙는 분인데 사람을 착각하신 듯합니다.”

그녀와의 사이를 곱씹어 보면 뭐라 정의를 내려야 할지 온통 애매한 것들뿐인데, 서원은 다른 남자를 보며 서방이라 칭했다. 그 단어 하나만으로 어떤 설명도 필요치 않은 확실한 관계. 그것도 다른 남자와.

황당함과 당황으로 넋이 나간 사이,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손에 피가 흐르는 채로 그녀를 찾으려 뛰어가 보았지만 이미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그녀가 사라졌다. 그것도 다른 남자와 단둘이.

“…뭐, 서방님? 처음 뵙는 분?”

그녀가 사라진 거리를 바라보며 황망하게 서 있었다.

관자놀이를 짚고서 아픈 골을 싸매고 있는데 화상을 입기라도 했는지 눈두덩이가 짓이겨진 노파 하나가 지팡이를 짚으며 그를 스쳐 지났다. 허리가 굽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

“골상이 아주 비범해 보이는 게 이 세계 사람은 아니구만 그래.”

천천히 가던 길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는 노인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분명 어디서 본 얼굴인 듯은 한데 정신이 없어 생각의 회로가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는다. 온통 먹통이 되어버린 머릿속엔 오로지 그를 떠나가 버린 서원뿐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천하를 손에 쥘 상이구먼. 하나 전생이란 아무리 부귀의 팔자를 타고났다 한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빠져나갈 수 없는 법. 인연이란 이토록 무서운 것이거늘.”

“저기, 이봐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때가 되면 다 알 게 될 것이요.”

노인은 알 수 없는 말만 던질 뿐이었다.

선오는 이제 뭐라 대꾸할 여력도 없었다. 다시 길을 재촉하는 노인은 서원이 사라진 그 길 끝자락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전생에서 악연이면 현생에서 부부로 만난다잖아. 우린 부부는 아니지만 전생에서 악연이었을까? 전생에서도 우리 만났을까?’

맑은 눈망울만큼이나 고요한 목소리로 읊조리던 그녀의 목소리가 떠오른 건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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