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단증
프롤로그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이상했다. 서원이 하루 종일 전화 한 통 받지 않았다.
대체 뭐 한다고 연락이 안 돼.
분명 방송국 앞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약속 시간이 훌쩍 지나도 그녀가 오지 않았다.
만나기로 한 장소에 그녀가 나오지 않은 건 그야말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큰일이 있는 게 아니라면 그녀가 이럴 리가 없으니,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가 점점 걱정이 됐다.
곧장 그녀의 집으로 왔지만 서원은 부재했다.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부재중이라는 음성뿐.
“신서원!”
다소 신경질적으로 외친 그녀의 이름에 돌아오는 건 사방에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뿐이었다.
얇은 유리창 하나에 의지해 안과 밖의 경계를 짓고 있는 동네에서 방음을 기대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러게 이사 좀 하라니까. 안 그런 것 같으면서도 고집도 고집도 그런 고집이 없다.
선오는 다시 운전대를 잡고 골목을 나왔다. 그녀가 운영하는 피부 관리실에서도 일찍 퇴근을 했다고 하고, 서원이 요새 자주 가는 문화센터에서도 그녀는 오지 않았다고 했다. 결국 다시 돌고 돌아온 건 서원의 집 대문 앞이었다. 그에게 이렇게까지 걱정을 끼친 적은 없었는데, 어째 오늘따라 그게 더 불안했다.
벌써 시계는 저녁 8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다른 데다 연락을 해봐야 하나. 하지만 연락할 사람이라고 해봐야 서원의 친구들이 고작인데 그마저도 달리 연락처를 저장해놓지 않아 전화를 해볼 수도 없었다. 그녀가 말없이 사라진 적이 없어서 비상시 연락할 리스트를 따로 만들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담배를 지져 끄고 곧장 또 한 개비 꺼내 무는데 자박자박, 작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골목 끝에서 익숙한 얼굴이 걸어오고 있었다.
저걸 그냥.
“신서원.”
곱게 나갈 리 없는 목소리에 오다 말고 멈칫하는 그녀에게서 아차, 하는 기색이 보였다.
“뭐 한다고 전화도 안 받아. 만나기로 해놓고 전화를 안 받으면 어쩌겠다는 거야.”
“미안. 급한 일이 생겨서 깜빡했어.”
“뭐? 깜빡? 장난해?”
선오는 그녀가 마저 걸어와 대문을 여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대문 비밀번호? 진즉에 다 알고 있었다. 아까 이미 들어가 이것저것 들쑤셔댔다.
한바탕 집 안을 헤집어 놓은 흔적을 발견한 서원의 입가에 조그만 미소가 스민다. 제 걱정에 정신이 나간 그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절로 그려진다는 듯이.
선오는 헛웃음이 나왔다. 저 사라진 줄 알고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 지금 웃음이 나오는지.
“뭐하다가 이제 왔는데.”
“회식.”
“자꾸 거짓말해.”
“사실 급한 일이 있었어. 미안해.”
“뭔 헛짓거리 한다고 연락이 안 돼.”
“네가 싫어할 거 같아서. 들어가자.”
묻는 말에 애매하게 답을 하면서 은근히 피해 간다. 말 돌리는 데 일가견이 있다. 손을 잡고 집으로 이끄는데 하마터면 또 깜빡 넘어갈 뻔했다. 손을 뿌리치자 불안한 눈으로 올려보더니 그러지 말라고 고개를 젓는다. 저 촉촉한 눈동자에 넘어간 것만 수차례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그냥 넘어가기가 께름칙한 게,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딴 놈이랑 같이 있었어?”
“아니. 그냥 친구랑 있었어.”
“너 재미 보는 데 내가 방해한 거면 가고.”
“그런 거 절대 아냐. 알잖아.”
제 손을 잡아 오는 서원에게서 익숙한 향이 났다. 마사지를 하는 그녀가 늘 달고 다니는 스킨 냄새. 오늘은 상큼한 유자 향이 짙다. 혹시라도 딴 새끼가 이 향을 흡입했다고 생각하니 혈압이 거꾸로 솟는다.
서원이 몸을 부대껴오는데 그녀에게서 다른 남자의 흔적은 딱히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 향수 냄새라든가 하는 수상한 것들. 내심 다른 놈과 있다 온 건 아니라는 확신에 한심하게도 안도를 했다.
한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힘이 없어 보이기도 하고, 어깨가 축 처진 게 밖에서 무슨 일이 있긴 했던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인지 말을 안 하니 알 도리가 있나. 꼭 일이 있어도 속으로만 삭이고 통 내색을 않는다.
“라면 끓일 건데 괜찮지?”
“야.”
“응?”
“어디 갔다 왔는지 말을 안 하는 거야, 못 하는 거야.”
그의 채근에 서원이 라면을 찾다 말고 뒤돌아본다. 라면 하나 찾으면서도 찬장에 키가 닿지 않아 까치발을 해야 했다. 선오는 작은 한숨과 함께 성큼성큼 다가가 찬장을 들여다보았지만 라면은 없었다.
“친구가 급한 일로 만나자고 해서 얼굴 좀 보고 왔어.”
“친구 누구.”
“혜란이.”
“이 시간까지 같이 있었는데 집에 와서 저녁을 먹어?”
예리한 지적에 그녀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새 입맛이 달아났는지 라면을 찾다 말고 완전히 몸을 돌려 그와 마주 본다. 평소와는 다르게 가라앉은 얼굴. 확실히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선오는 조금 그림자가 진 눈 아래를 쓸어주었다.
“너 그 말 거짓말이었단 봐.”
“정말이야. 그냥 친구한테 좀 안 좋은 일이 있어서 나까지 기분이 그래. 그래서 그런 거야.”
“이리 와.”
그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폭 안겨 오는 서원이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어온다.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대학 시절 교환학생으로 한국을 떠났었던 1년, 그리고 군대에 있었던 2년을 제외하더라도 5년을 이리 부대끼며 살았는데 모르는 게 이상했다.
가까이 다가오는 그녀가 어쩐 일로 평소처럼 먼저 키스해오지 않는 게 걸렸지만 그래도 별 탈 없이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부슬부슬 오는 비를 맞았는지 옷이 젖어 가슴께가 비쳤다. 그게 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딴 놈들이 이거 보고 침이라도 흘리면 어쩌려고 조심성 없이.
쯧, 혀를 차며 블라우스 단추를 풀자 아슬아슬하게 단춧구멍에 걸려 있던 단추가 튕겨 날아간다. 보통 이쯤 되면 먼저 달려들어 입을 맞추든가, 아래를 빨아 달라며 팬티라도 벗는데, 어째 오늘은 지나치게 차분해 보였다.
“너 정말 오늘 이상해.”
“선오야, 저녁 안 먹어도 돼?”
“생각 없어. 그럼 쉬어. 피곤해 보이네.”
정말 기분이 좋지 않아 보여 그가 이만 가려고 몸을 일으키는데 서원이 다급히 허리를 껴안았다. 가지 말라며 안겨 오니 또 이렇게 그녀만 두고 갈 수 있을 리가.
“너….”
아무리 봐도 무슨 일이 있긴 있다.
“자고 가면 안 돼?”
“라면은, 먹는다며.”
“응, 나중에.”
섹스부터 먼저 하고 싶다는 그녀의 뜻에 선오는 스커트 속으로 쑤욱 손을 넣어 엉덩이를 잡아 당겨왔다. 하루 종일 저 때문에 열 오른 것만 생각하면 탱탱한 엉덩이를 깨물어 씹어놓기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겠으나 일단은 이리 무사히 살을 맞대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다행스럽게도 별일 없이 집으로 돌아왔으니.
콱 잡아채 주물럭거리자 금세 무게중심을 잃은 몸이 그에게 의지해온다. 출렁거리는 가슴이 탄탄한 그의 가슴팍에 뭉개졌다.
“신서원, 똑바로 안겨야지.”
그의 말에 금세 자리를 잡으려 몸을 버둥거린다. 완벽히 그가 길들여 놓은 몸이었다.
몸에 살집이라곤 없으면서도 희한하게 가슴은 그의 커다란 손안에서도 차고 넘친다. 제 엄마를 닮아 남자 후리는 데 타고난 몸이다. 집안을 박살 내고, 부친을 죽음으로 몰아넣다 못해 그를 망가뜨리고, 끝내는 모두를 파멸로 이끌었지만 놓지 못하게 만드는 여자.
“나 오늘, 하으, 위험한 날이야.”
꼭 먼저 유혹해놓고 한 발 빼려고 하는데, 그 의도 가득한 몸짓이 그를 미치게 만든다.
“언제부터 퍽이나 신경 썼다고.”
“그래도….”
“그럼 밖에다 싸?”
평소엔 안에 싸달라고 난리면서 오늘은 곤란한 기색을 한다. 그것도 이상했다. 그녀답지 않게 주저하는데, 이상하게 거기서 열이 올랐다.
“아니.”
“네가 싫으면 나도 안 싸.”
“아니이, 싫지 않, 아.”
그녀를 끌어안고 정신없이 혀를 섞었다. 늘 촉촉하게 습기를 머금고 있는 아랫구멍을 벌리고는 다급하게 꺼낸 성기 끄트머리로 연방 입구 틈새를 문질러 달랬다.
“아흣, 선오야. 나, 후으.”
둥그런 원기둥의 페니스 첫머리가 구멍 초입을 꿰뚫었다. 마음이 급해 아예 그녀의 엉덩이를 들어 안고 낭창거리는 두 다리를 양팔에 걸었다. 서서 하는 섹스가 처음도 아니면서 어째 힘들어 쌕쌕거린다. 그는 보다 편하게 자세를 잡고 삽입에 몰두했다.
“정말 안에 싸지 마? 어? 콘돔 안 했잖아.”
두 다리로 단단히 버티고 선 선오는 허리를 앞뒤로 움직여 콱콱 처박으며 물었다. 그가 하는 말엔 거부하지 못하는 신서원. 앙증맞은 두 발이 덜렁거리고, 격한 반동에 젖가슴이 하릴없이 출렁거린다. 그녀와는 늘 전쟁 같은 섹스의 연속이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큰일을 볼지 모른다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도 먹고 있는 성기가 맛있다고 앙앙대는 신서원, 거의 8년을 함께해온 문선오의 그림자.
“다른 여자 안에다 싸? 응? 임신할지도 모르잖아.”
“으응. 절대 싫, 어. 내 보지 안에, 아흣, 싸, 줘. 아아!”
마음에 드는 답을 듣고서야 잘했다며 뒤통수를 끌어안았다. 찹쌀떡처럼 척 하니 제 품에 안겨 오는 그녀는 완벽한 그의 맞춤형이었다. 다른 여자가 문선오의 아기를 낳는 건 죽어도 싫다고 안겨 온다.
“나 다른 여자 만나지 마?”
“응. 아앙! 선오야, 아흐!”
“딴 여자한테 싸면, 그 여자 보지라도 핥아 먹을 거냐, 너.”
“시, 싫어. 절대, 선오야. 흐, 아!”
어서 여기 싸달라고 엉덩이를 흔들며 매달리는데 그제야 선오는 못내 흡족했다.
담배 연기를 뱉으며 땀범벅으로 엎어진 서원의 등을 어루만졌다.
정사 후에는 급격한 피곤함을 느끼던 그녀였기에 늘 그랬듯 기절하다시피 잠든 줄 알았는데 대뜸 그녀가 말을 건넨다.
“너는 어제 어디 갔었는데?”
“무슨 말이야.”
“여기서 저녁 먹는다 그랬었잖아.”
“못 온다고 전화하지 않았었나?”
“응.”
“근데.”
“아냐. 아무것도.”
순간 미묘하게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걸 감지했다. 하지만 다시 웃는 그녀의 얼굴엔 피로가 돌았다.
“뭐 다른 거 먹어야 하는 거 아니냐. 꼭 라면을 먹어야겠어?”
“으응.”
한바탕 정사로 축 늘어진 서원은 답이 느렸다.
“그놈의 라면은. 사 올 테니까 얌전히 있어.”
선오는 대충 콘솔 위로 담배를 지져 끄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셔츠를 집어 들어 몸에 걸치며 담배를 하나 더 물고 일어서는데, 아무래도 더 피우기가 그래서 문 담배를 빼냈다.
“라면 말고 또 먹고 싶은 건. 너 아이스크림 먹고 싶댔잖아.”
“필요 없어. 그냥 빨리 와.”
다 필요 없으니 빨리 오라고 보채는 말에 선오는 두말 않고 지갑을 들었다.
“있잖아, 선오야.”
“어?”
“나 정말 임신하면 너 나 안 버릴….”
“뭐? 뭐라 웅얼거리는 거야. 크게 말해.”
“아냐. 배고프다구.”
며칠 전에 두고 간 티셔츠는 빨았는지 보이지 않았다. 버린 건 아니겠지. 추궁할까 하다 섹스 후 곤하게 늘어진 그녀를 보고 있으니 더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아 관뒀다. 거기다 그의 물건을 버릴 그녀가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선오야.”
그녀의 부름에 그가 턱짓을 하며 부른 이유를 묻자 서원이 눈을 느리게 깜빡인다. 정사 후 노곤함에 취한 것이다.
능숙하게 단추를 잠그는데 잠결에 가라앉은 서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생에서 악연이면 현생에서 부부로 만난다잖아. 우린 부부는 아니지만 전생에서 악연이었을까? 아니, 전생에서도 우리 만났을까?”
“갑자기 무슨 말이야.”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
“무슨 말을 하려고 또 서술이 길어.”
“아냐. 어서 다녀오라구.”
“좀 자고 있어, 라면 다 끓이면 깨울 테니까.”
“응. 빨리 와야 해.”
“왜. 너처럼 떡볶이라도 사 먹으러 다닐까 봐?”
픽 웃으니 대번 뺨이 발개져선 베개에 얼굴을 묻어버린다. 하여간 귀엽긴. 선오는 방을 나와 대문을 열었다.
조금씩 땅을 적시던 보슬비는 어느덧 빗줄기가 거세져 있었다. 현관 바닥에 금세 물이 살짝 고여 축축해진다.
그는 팡, 우산을 펴고 빗속으로 들어갔다.
* * *
“어, 문 아나. 왔어?”
선오는 대본을 보다 말고 엎어 두었다. 요새 들어 그의 신경을 살살 건드리는 서원 때문에 집중이 안 된다.
새벽부터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려는데, 평소 같으면 아침잠에 취해 일어나지도 못했을 서원이 언제 깼는지 주방에 앉아 있었다.
‘아, 목이 말라서 잠시 일어났어.’
말은 그렇게 하지만 무슨 일이 있는 건 분명했다. 다시 자겠다고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는 그녀의 뒤통수는 어딘가 불편한 기색이었다. 도통 말을 않으니 알 수가 있나.
선오는 출근길에 서원에게서 온 문자를 다시 열어보았다. 할 말이 있으니 오늘 퇴근하고 만나자는 간략한 내용의 문자였다. 지금 전화를 걸어 추궁할까 하다 결국 이 또한 못난 짓 같아 말았다. 꼭 여자 하나에 절절매는 거 같잖아. 모든 게 도통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김원영이 대기실까지 찾아와 알은척이다. 아침 뉴스 때문에 새벽 댓바람부터 나온다고 커피 한 잔도 못 마셨는데 보기 싫은 얼굴까지 보자니 속이 울렁거렸다.
“우리 후배님만 떴다 하면 하여튼 방송국이 시끄러워요.”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되짚어 보아도 달리 추측할 만한 거리가 없었다.
새벽까지 이어진 섹스 도중, 보짓물을 사방으로 질질 지리면서도 끝내 속 시원히 말을 하지 않던 그녀가 떠오르자 머리꼭지가 뜨끈해진다.
선오는 툭, 툭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옆에 방치해 둔 대본을 노려봤다.
“후배님 듣고 있어? 어? 너는 선배 말을 듣는 척도 안 하냐.”
“뉴스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더 대거리하기도 귀찮았다. 노골적으로 귀찮은 속내를 드러내며 일어섰다. 김원영을 지나쳐 대기실을 나온 선오는 곧장 목을 축이곤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온에어 불이 켜지고 늘 그랬듯 카메라를 향해 마주 앉았다.
“안녕하십니까. 7시 아침 뉴스입니다.”
자신은 부친을 닮아 감정과 표정을 숨기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따르지 않았다. 사업으로 성공했던 부친은 그런 그의 성격을 자랑이라 여겼다. 딱히 내세울 만한 건 아니었지만 살아가는 데 이득인 건 분명했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다. 그러다가도 문득문득 말도 없이 입을 다물고 있는 그녀를 떠올리면 가슴에서부터 뜨거운 불덩어리가 올라와 목구멍을 턱, 하고 막아 알 수 없는 화가 끓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마치 신서원 손안에서 놀아나는 듯한 이 좆같은 기분.
대체 요즘 왜 이러는지.
그녀의 우선순위는 언제나 그였다.
그녀로부터 좋아한다는 고백을 받은 이후로, 단 한 번도 서원에게 자신이 2순위인 적 없었다.
평소 안 하던 짓을 하니 괜스레 신경이 쓰인다.
“다음 소식입니다. 지난 7일 뇌물수수 의혹으로 국정조사를 받던 김정국 시장이 모든 혐의를 전면부인하고 나섰습니다.”
신서원.
신서원.
그를 향해 있는 조명 불은 환하지만 속은 시꺼멓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반듯하게 앉아 있었지만 답답해져 오는 가슴을 몇 번이나 억눌러야 했다.
언뜻 보면 두 사람 사이에서 그녀가 ‘을’ 같지만 언제부턴가 그를 손아귀에 넣고 마구 주무르는 신서원,
“뉴스 마칩니다. 고맙습니다.”
널 어떡하지.
아까만 해도 빗줄기가 약했는데 방송국을 나오자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다.
끽해야 오전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인데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 먹구름 때문인지 사위가 어둑어둑하다. 불꽃이 시커먼 구름 사이를 가르더니 번쩍, 천둥 번개까지 친다.
차에서 내린 선오는 우산도 없이 방송국 맞은편에 위치한 약국 안으로 들어섰다.
“편두통 약 아무거나요.”
“이거, 받아요.”
“이게 뭡니까?”
접힌 3단 우산을 내미는 약사가 옅은 미소를 띠며 웃었다.
“그쪽이 내 아내에게 빌려줬다던데.”
며칠 전, 예상치 못한 비가 내리던 날, 약국에서 나오는데 웬 할머니 한 분이 비를 맞고 걸어가시기에 드리고 간 적이 있었다. 어차피 자신은 오며 가며 차로 이동하니 딱히 필요 없어 쥐여 주고 간 우산이었다.
“저란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문선오 아나운서 아니요? 뉴스 나오는 양반이니 당연히 알지. 요즘 티브이에 자주 나오던데.”
별 새삼스러운 걸 다 묻는다는 표정의 약사는 약을 줄 생각을 않고 한참이나 자신을 눈여겨보았다. 사람 빤히 쳐다보는 건 실례라는 걸 모를 연배가 아닌데. 조금 기분이 언짢아지려던 차에 약사가 약 하나를 꺼내 들었다.
“좋은 약이 있는데 사시겠다면 드리죠. 이 약 아무한테나 잘 안 드리는 거요.”
“아무거나 잘 드는 걸로 주세요.”
선오는 서원의 생각으로 정신이 없어 약사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자리에서 바로 받은 약 한 알을 털어먹은 선오는 흐트러진 어깨춤에 묻은 비를 털어낼 여유도 없이 운전대를 잡고 방향을 틀었다.
그의 차가 하늘에서 쏟아붓다시피 하는 폭풍우 사이를 마구잡이로 갈랐다.
차머리가 익숙한 골목 안으로 진입했다. 그녀가 일하고 있는 가게 건물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천천히 목표지를 향해 서행하며 좁은 골목을 지나는데 건물 앞에 낯익은 얼굴이 서 있었다. 가슴까지 내려오는 구불구불한 머리에, 작달막한 체구, 신서원. 서원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옆에 웬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사람을 집어삼킬 듯이 쏟아지는 비 때문에 형체는 흐릿하게 보였지만 분명 남자였다.
선오는 탁, 탁 핸들을 치며 그들을 관망했다. 남자가 그녀의 머리칼 위에 묻은 물기를 털어주며 좀 더 가까이 붙는다. 저래서 요즘 통 정신이 딴 데 나가 있었던 건가. 회식이니 뭐니 하면서 뒤로는 온갖 남자를 만나며 헤프게 보지나 벌렸는지 누가 알아. 서원이 절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심장이 따끔거렸다.
더 이상 보지 말자는 뉘앙스라도 풍기면 제게 달라붙어 엉엉 울며 안길 거면서, 은근히 사람을 쥐었다 폈다 갖고 놀고 애를 태운다.
사람을 갖고 노는 것도 자유자재, 꼭 영악했던 제 어미를 닮았다.
그래서 좋았고, 또 그래서 싫었다.
선오는 우산도 없이 차 문을 열고 나왔다.
순간, 머리가 몽롱해졌다. 아까 약사가 약 기운에 그럴 수도 있다고 한 거 같은데, 그 때문인지.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서원을 향해 걸었다.
번쩍, 또 한 번 번개가 친 건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