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에필로그
계절이 바뀌었다. 실버글렌의 계곡을 꽉 채웠던 얼음이 녹아내려 경쾌한 물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지난겨울에 뜻밖의 큰일을 겪었던 로디언 후작령 사람들에게 새로운 봄은 아주 각별했다. 후작성의 하녀들은 모처럼 드리운 봄볕 아래에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난 후작가의 결혼식을 태어나서 처음 봐.”
“여기 누가 안 그렇겠어. 아, 정말 너무너무 기대된다.”
“버리 부인의 마차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드나들고 있다더라.”
“비밀인데, 후작님께서 부인 마님을 위해 왕도의 보석상도 부르셨대.”
“와아!”
그들의 화제는 영주인 로디언 후작의 결혼식이었다. 아가일 자작의 여동생인 후작부인은 지난겨울, 후작과 약혼하고 나서 공작 영애와 던켈드의 왕태후라는 어마어마한 인물들을 퇴치하고 명실공히 후작의 아내가 되었다. 후작이 아내에게 무척 후하다는 소문도 겨울부터 돌고 있었다. 급하게 결혼 서약을 했지만 식은 날이 풀린 다음으로 연기한 것이 그 소문을 더욱 키웠다.
놓치고 싶지 않아서 서약을 해 놓았지만 결혼식은 좋은 계절에 성대하게 치르려고 하다니, 그것이 애정의 증거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더구나 로디언 후작은 아주 잘생겨서 아름답다는 말이 어울리는 남자였다. 기사들 사이에서는 무시무시한 성격이라는 말도 도는 모양이지만, 먼발치에서 보는 것이 전부인 하녀들에게야 눈에 안 보이는 성격 따위는 대수롭지 않은 문제였다.
그런 남자가 사랑에 빠져서 가문의 막대한 재산을 쏟아부으며 애정을 표한다. 동화보다 더 동화 같은 이야기였다. 양뺨을 감싸쥔 채 꿈꾸는 듯한 눈빛을 짓던 하녀들 앞으로 문득 누군가가 지나갔다.
“어, 저기 앤 아냐?”
“앤, 앤! 어쩐 일로 여기까지 나왔니?”
후작성 안채에서 일하다가 후작부인의 전속이 된 하녀, 앤이었다. 일약 출세로 모두의 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그녀가 외성에 나타난 것이다.
하녀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자리에서 일어서서 앤에게로 몰려들었다.
“아, 응. 다들 오랜만이네.”
“정말 얼굴 보기 힘들어졌어, 앤! 오늘은 웬일이야?”
“얘도 참, 후작부인 마님의 심부름이겠지. 그보다도 바로 들어가는 길이니? 한참 만에 봤는데 이야기나 좀 하다가 가지.”
“맞아, 맞아.”
은근히 길을 막아서면서 안채 이야기 좀 해달라고 조르는 것이 밉지 않았다. 친구들을 쭉 보던 앤이 킥 웃으며 말했다. 실은 그녀도 자랑하고 싶었으나 안채에서는 말할 사람이 없어 입이 근질근질하던 참이었다.
“뭐가 궁금한데?”
앗, 정말 물어봐도 되나. 서로 눈빛을 교환하던 하녀들은 어느 순간 앞다투어 입을 열었다.
“어, 그러니까! 웨딩드레스는 어떻게 생겼어?”
“보석은! 보석은 어때? 다이아몬드 같은 것도 있고 그래?”
“왕도의 세공사가 왔다는 말 진짜야?”
“그리고 또…….”
무려 30년 만에 치러지는 후작의 결혼식이었다. 들은 것만 잔뜩이고 본 것이 없는 어린 하녀들의 호기심은 무궁무진했다.
* * *
바로 그 결혼식의 신부, 후작부인 이디스 로디언은 전투적으로 책상을 쾅 짚으면서 딱 잘라 말했다.
“마음에 안 들어요.”
“어떤 점이?”
“다 말해도 되나요?”
“한 가지도 아니라는 말이군.”
책상에 앉아 있던 로디언 후작 앨피어스가 미간을 약하게 찡그렸다. 앨피어스는 자기 아내와의 설전에 익숙한 남자였다. 하지만 그 설전은 대부분 그들의 관계가 고용한 영주와 관료, 즉 상하관계일 때 발생한 것이었다. 그때의 그는 자기가 윗사람이라는 점을 아주 전략적으로 잘 이용했지만 이제는 서류상으로 완전한 부부가 되었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가 자기 통제에 철저하고 양심적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결혼 서류에 서명한 이래 아내에게는 계속 지기만 했고, 그 결과 과거의 찬란한 승률은 처참하게 깎여나간 지 오래였다.
스스로도 참 어처구니가 없다고 생각했다. 뭐라고 말하려다가도 혀에 무엇이 든 것처럼 덜컥 걸린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나 있을까. 아마 모를 것이다. 그러니 번번이 투지를 불태우는 것이겠지. 물론 논리로 무장하고 기어이 자신을 무릎 꿇리는 이디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즐겁지만…….
“일단 말해 봐.”
이번 일은 순순히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앨피어스는 모처럼 특유의 고압적인 표정을 지으며 전투태세를 가다듬었다. 그의 결의가 남다르다는 사실을 눈치챈 이디스도 따라서 턱을 치켜들고 입을 열었다.
“첫째, 가문에 대대로 전해지는 보석이 많아요. 종류별로 아주 셀 수도 없던데. 더 늘려봤자 의미가 없다고요.”
이 정도는 예상했다. 보석상과 세공인을 초대한다고 할 때부터 매일 입에 달고 살던 소리였으니까. 당연히 대답할 말도 준비해 두었다. 앨피어스는 지체 없이 말했다.
“그대가 오래된 보석을 착용하면 로디언의 재정 상황을 의심받을 수도 있어.
그런 인식은 사업에 영향을 준다고.”
“오래된 보석일수록 가치 있는 거라고요. 그리고 사업이라니 무슨 사업이요? 각하께서, 어머.”
방금은 이디스의 실점이었다. 그녀 스스로도 입 밖에 뱉자마자 알아차리고 눈썹을 찡그렸지만, 이미 나온 말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지난겨울, 혼인장에 서명한 두 사람은 몇 가지 조항을 만들었다. 법적 강제력은 없는, 그냥 단둘이서 한 약속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지켜야 할 항목과 그에 따르는 보상이 명명백백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사석에서의 호칭 문제였다. 앨피어스야 하던 대로 하면 그만이었지만 이디스는 그렇지 않았다.
입에 붙은 버릇이 그리 쉽게 떨어질 리 없는 법. 그녀는 의식하지도 못하고 부르던 대로 불렀다. 그걸 마음에 두었던 앨피어스는 약속의 첫 항목으로 호칭을 꼽았다. 그래서 이디스는 앨피어스를 각하라고 부를 때마다 그가 원하는 것을 한 가지씩 들어주기로 했다. 앨피어스는 씩 웃었다. 그러자 이디스가 손을 번쩍 들고 단호하게 외쳤다.
“이건 안 돼요!”
“뭐가?”
“이 문제로 보상 받으려고 하지 말라고요.”
“요구 범위에 따로 제한을 두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하필 논쟁을 시작하려다가 삐끗해 버려서 이디스 쪽이 아주 불리해졌다. 이디스의 의사를 묵살하고 밀어붙일 생각 따윈 애초부터 없었지만, 앨피어스는 일부러 심술궂게 말을 받았다.
지금까지
‘후작 각하’ 호칭의 보상은 대부분 침대 위에서 받아냈다. 이번에도 그럴 생각이었다. 몇 달이 지나면서 이름 부르는 데 익숙해진 이디스가 아주 오래간만에 한 실수였다. 즉흥적으로 써 버리면 아깝잖은가.
“나 아직 시작도 안 했거든요.”
“그래, 알았어.”
앨피어스는 속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선심 쓰는 척 한 발 물러섰다.
제법 잘 조절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디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수상한데.”
“억측은 사절이야.”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녀의 의심은 다른 쪽으로 뻗었다.
“사업이라니, 내가 모르는 사업이 어디 있다고 그래요.”
“왕태후 전하께서 주선해 주시기로 했어.”
“어머? 그럼 더더욱 내가 모를 수가 없잖아요. 왕태후 전하께서 하신 약속이 그랬는데!”
지난 겨울, 셋이나 되는 후작부인 후보를 거느리고 왔던 그리셀다 왕태후는 그들 모두를 데리고 돌아가야 했다. 왕실에서 보증하는 혼인장을 쥐고 이디스와 결혼하겠다고 하는 앨피어스의 뜻을 꺾지 못한 것이다.
그렇지만 왕태후는 웃는 낯으로 돌아갔다. 로디언 숲에서 돌아온 앨피어스와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한 덕분이었다. 앨피어스가 자청해서 독대한 것은 아니고, 이디스가 뒤에서 꾹꾹 찔러 밀어 넣었다.
「그대가 바란다니 자리는 마련하겠는데, 기대는 갖지 말도록.」
「알겠고요, 일부러 분위기 망치고 일찍 빠져나오려고만 하지 말아 주세요.」
「결혼을 방해받을 일이 없다는데 왜 그러는 거야?」
「아, 그게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이디스는 두 사람이 잘 지내길 바랐다. 왕족과 대귀족에게는 순진해 빠진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볼 때마다 얼굴 굳히는 사이로 남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왕도와 실버글렌,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각자의 삶을 살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남이 될 수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리셀다가 쫓겨난 왕비였던 시절과 국왕의 모후가 된 지금, 로디언 후작을 향한 다른 귀족들의 태도가 얼마나 다른지 보라.
무엇보다도 그들은 고모와 조카였다. 같은 가문에서 태어나 같은 이름을 받은 사이이며, 상대의 얼굴에서 자신의 오빠 또는 부친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매일 볼 사이도 아닌데 웃으면서 보는 쪽이 훨씬 좋은 것은 당연하다.
다행히 두 로디언은 앙금을 잘 풀어냈다. 피차 겪은 풍파가 많아서 이번을 놓치면 다시 기회가 없으리라는 생각을 똑같이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고운 말이 오가지는 않았지만…….
「제 결혼은 제 일입니다.」
「로디언 가문의 일이라면 내 일이기도 하네.」
「그건 전하의 생각일 뿐입니다. 지난 세월 동안 로디언이 전하로 인해 겪은 일을 제 입으로 일일이 거론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는 후는 왕도에서 있었던 일을 짐작이나 하나? 아니, 됐네. 자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 그래서 늦게나마 보상해 주려는 것 아닌가!」
「보상이요? 필요 없습니다. 게다가 제 결혼을 강제하시는 것이 보상은 무슨 보상입니까.」
기나긴 대화 끝에, 그들은 서로가 견뎌냈던 험난한 세월을 인정하고 앞으로 기댈 곳이 되어 주기로 약속했다. 무슨 확약을 한 것은 아니었다. 앨피어스는 끝까지 퉁명스럽게 굴었다. 풀었다고는 해도 잔잔하게 남아 있는 불만이 반, 십수 년 만에 마주한 집안 어른에 대한 쑥스러움이 반이었다.
「……폐하께선 로디언이 당신의 외가이기에 감내해야 했던 일들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계시네. 후가 중앙귀족 가문과 연을 맺고 왕도로 올라오면 환대하기로 약속하셨네.」
「괜히 나섰다가 폐하의 기반을 흔들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저는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이곳을 지키고 싶습니다.」
「그렇더라도 해마다 한두 번은 얼굴을 비춰 주면 좋겠네.」
「그 정도라면, 일단 고려해 보겠습니다.」
「바로 그러겠다고 하지 않는군.」
「큰일일수록 잘 따져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심이야. 자네가 남의 감언이설에 흔들릴 일은 없을 테니까.」
「물론입니다.」
독대가 끝난 뒤 방에서 나온 왕태후는 한결 편안한 표정이었다. 앨피어스도 마찬가지였다.
마음 졸이며 기다리고 있던 이디스는 속으로 안도했다.
「레이디 아가일. 나 개인은 물론 로디언 가문까지, 자네에게 두루 빚을 졌네.」
그렇다고는 해도 이어진 왕태후의 언행은 꽤 당혹스러웠다. 왕태후는 이디스에게, 약식이지만 절까지 하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희끗희끗한 머리칼이 눈앞으로 숙여졌다가 떠나는 동안, 이디스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얼어붙었다. 지금 생각해도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은 자신이 기특할 지경이었다.
「아니, 그,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왕태후 전하.」
「그럴 것 없네. 정말이니까. 전부 다 갚기에는 너무 힘들어. 그러니 편법으로 탕감함세.」
「……예?」
왕태후는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그 장난기 어린 눈짓으로 보건대, 레이디 로디언이었던 시절의 그녀는 지금과 아주 많이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자네가 로디언이 되면 로디언의 빚은 없어지는 게지.」
「예?」
「속히 로디언 후와 결혼해 주길 바라네.」
이디스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눈을 깜박였다. 그러니까 이게 결혼해도 좋다는 말이지? 그녀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있자 왕태후가 웃으며 덧붙였다.
「결혼 축하 선물은 왕도에 돌아가는 대로 준비해 보내겠네. 듣자니 재정 감독에 재주가 있다지? 로디언 후작부인의 명의로 사업을 해 봐도 좋을 거야.」
대답을 듣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듯, 왕태후는 옆으로 손을 내밀었다. 때마침 도착해 있던 캐서린 더릭이 그 손을 받아 부축했다.
이디스에게 향한 보랏빛 눈동자가 의미심장하게 반짝였다. 아마 왕태후에게 이디스에 관해 말한 사람은 그녀였을 것이다.
후작성의 사람들이 그리 녹록하지 않은데 언제 그 정도로 알아냈는지, 하여간 여러모로 놀라운 사람이었다. 그만한 수완이 있으니 왕위 계승 분쟁 시기에 왕녀 레지나, 현 국왕의 눈에 들었던 것이겠지만.
「축하드려요, 레이디 아가일.」
「감사해요, 레이디 더릭.」
왕태후는 딸의 책사이자 옛 친구의 딸인 캐서린을 퍽 아꼈다. 그녀의 외가는 명문이니까 조카며느리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해서 데리고 올 정도로. 하지만 캐서린은 열악한 처지의 왕녀를 모시고 승리를 쟁취하는 경험을 해 보았다. 로디언 후작과의 결혼은 생부에 대한 복수로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이디스를 통해 앨피어스와 거래를 하고자 했던 것이다.
「왕도에 오시면 꼭 다시 뵙길 바라요. 그때는 후작부인이시겠지요.」
「레이디 더릭은…… 어떻게 되어 계실지 모르겠네요.」
「후후.」
이제 왕도에 돌아가면 본격적인 행동에 나선다고 했으니, 다시 볼 때도 레이디 더릭일지 아니면 레이디 갤러웨이일지는 알 수 없었다.
혹은 갤러웨이 공작일지도 모르고. 어쨌거나 그 후 왕태후는 바로 짐을 꾸려 떠났다. 그리고 겨울이 지나는 동안에는 연락을 취하지 않았는데……. 앨피어스는 품속에 손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이 이야기가 끝나면 말하려고 했었어.”
“뭘요?”
그가 꺼낸 것은 고급스러운 편지봉투였다. 황송하게도 모서리마다 금 박편을 입히고 가운데에는 왕태후의 인장이 커다랗게 찍혀 있었다. 이디스의 눈이 커졌다.
“언제 온 거예요?”
“어젯밤에.”
“일단 그것부터 좀 읽어 볼게요.”
앨피어스는 불만스럽게 눈썹을 까딱했다. 수신인이 로디언 후작부인이라고 되어 있었기에 먼저 뜯어 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결혼식보다 왕태후의 소식을 더 기다리는 것 같은 그녀가 못마땅하던 참이라, 바로 건네주고 싶지가 않았다.
“안 돼.”
“내 편지잖아요. 줘 봐요.”
“하던 이야기부터 마저 하자고. 아니면 저 목록대로 결제해도 난 상관없어.”
“와, 말도 안 돼!”
그가 왕도에서 온 보석상의 권유에 따라 작성한 구매 리스트는 대충 이랬다.
보석 빗 열두 개, 목걸이와 귀걸이 세트 열 개, 팔찌 열 개, 정장용 허리띠 다섯 개, 브로치 다섯 개, 미처 주지 못했던 약혼 예물 세트, 에메랄드 액세서리 세트, 사파이어 액세서리 세트, 다이아몬드 액세서리 세트, 그리고 대대로 물려지는 후작부인의 반지와 함께 낄 반지 다섯 개. 왕도에서 명성 자자한 세공인이 제작한 것이라지만, 이름이 따로 붙을 만큼 값나가는 보석은 몇 개 되지도 않았다.
대영주 가문의 혼인 예물로는 딱 평균 정도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디스는 기겁을 하고 손을 내저었다. 앨피어스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야 적은 액수는 아니지만, 결사반대할 정도로 후작가의 재정이 위태로웠던 적은 없었다. 뭐, 돈이 아깝다고? 그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소리였다.
더구나 그녀야말로 후작가의 재정을 건실하게 만들어 놓은 장본인이 아닌가!
“도대체 왜 안 된다는 거야?”
“그러니까 그걸 말하려던 참이잖아요.”
앨피어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왕태후의 편지에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보석 구매 건을 양보하지 않겠다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디스는 턱을 치켜들면서 말을 이었다.
“둘째, 쓰는 사람은 나 하나잖아요. 그런데 내가 보석으로 치장할 일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해요? 아, 다다음 달에 왕도에서 쓰게 될 거라는 말은 하지 말아요. 보름 일정에 아침저녁으로 바꿔 달아도 남을 거라고요.”
“지금 산 걸 이고 지고 갈 생각이라면 관둬. 왕도에서 필요한 만큼 사면 되는데 무슨 소리야.”
“뭐가 어째요?”
“그 목록은 로디언에서 사용하라고 고른 것들이야.”
이디스는 기가 막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앨피어스는 피식 웃었다. 그녀는 그가 과한 농담을 한 것처럼 반응했지만 방금 한 말은 전부 다 진담이었다. 잘 어울릴 것이다. 그녀가 걸고 있는 모습을 생각하면서 그의 안목으로 엄선한 보석들이니까. 사실 고르는 과정 자체가 즐거웠다.
하도 깐깐하게 따진 탓에 보석상의 눈 밑에 그늘이 지고 안색이 창백해졌지만 그거야, 팔아 준다잖은가. 그래, 하나도 빠짐없이 사들여 그녀의 방에 쌓아 줄 테다. 그는 오만한 표정을 가다듬고 준비했던 회심의 일격을 날리기로 했다.
“분명히 세 번째 이유도 있겠지만, 이디스.”
“다섯 번째까지 있어요.”
“……알았어, 어쨌든. 그대가 던켈드 버밀리온을 받고 싶은 게 아니라면 오늘 중에 목록 그대로 결제하는 게 좋을 거야.”
협박 아닌 협박에 이디스가 입을 떡 벌렸다.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발언이라 대비도 못 해 놓은 모양이었다. 던켈드 버밀리온이란 전설적인 토파즈로, 보석류에 관심이 없는 이디스조차 알 만큼 유명했다.
왕가의 이름을 떡하니 단 것은 이백여 년 전에 왕가에 진상되면서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왕가에서 계속 소유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 많은 사연이 붙게 되었다. 보석은 가진 이야기가 많을수록 특별해지는 속성이 있어서, 왕국은 물론 바다 건너까지 다녀온 이 토파즈의 현재 가치는 과장 없이 천문학적이었다.
“뭐, 뭐, 뭐라고요?”
“아, 말 안 했나. 갤러웨이가 가지고 있다가 내놨는데 부르는 값이 너무 비싸서 아무도 사려 들지 않았다더군.”
“네? 무슨 말도 안 되는, 아니 어쨌든. 당신이 갤러웨이 공작 좋은 일을 하겠다고요?”
앨피어스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당황했으면서도 재빨리 상대의 말에서 허점을 찾아 반박하는 이디스가 사랑스러웠다.
“안 될 것도 없지. 후작부인에게 어울리는 물건이라면.”
“미쳤, 아니. 미안해요.”
“괜찮아. 나도 근래 내가 미친 것 같다고 생각해.”
“앨피어스,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책상 옆을 돌아 그녀에게 다가가는 걸음걸이가 조급했다.
“어머.”
허리에 팔을 감아 끌어당기자 이디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금세 발개지는 얼굴을 보니 낯간지러운 말이 매끄럽게 튀어나왔다.
“그대에게 미친 것 같거든.”
“네에?”
“그러니까 그냥 받아 줘, 이디스. 부탁이다.”
이디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앨피어스는 그녀가 내적 갈등을 저울질할 때 그런 표정을 짓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흔들리기 시작했으니 더 밀어붙여야 할 때였다. 그는 얼굴을 들이밀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정말 안 받아 줄 건가? 응?”
“으…….”
앓는 소리까지 내면서 고민하던 이디스는 결국 패배를 인정했다. 신랑이 결혼 예물을 주고 싶다는데 거절하는 신부라니, 스스로도 찔리는 부분이 없지 않았다.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그렇게 해요.”
“번복하지 않겠지?”
“그래요. 대신 왕도에서 또 사들이는 일은 없다고…….”
촉. 얄미운 말을 듣고 싶지 않았던 앨피어스가 이디스의 입꼬리에 입을 맞추는 소리였다. 부드럽게 눌리는 입술의 감촉에 이디스의 말이 뚝 멎었다.
그리고 방 안에는 앨피어스의 웃음소리만 남았다. 머리 좋은 후작은 단 한 번의 경험만으로 아내에게 승리할 수 있는 수단을 완벽하게 습득한 것이다.
* * *
로디언 후작령의 모든 사람들이 고대했던 결혼식이 끝났다. 성대하게 치러진 영주의 결혼식은 축제나 다름없었다.
모두가 결혼식을 즐기면서 후작 부부의 행복을 빌었다. 결혼식을 마친 후작 부부는 며칠 동안 후작부인의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실로 대단한 애정으로…….
“이거 왜 이렇게 작년하고 차이가 나지?”
“뭔데요? 아, 그거. 예산 회의 때 제안서가 있었던 것 같은데. 어디 있더라.”
집무에 여념이 없었다. 다음 주가 되면 실버글렌을 떠나 왕도로 갈 예정이라, 영지의 중요한 일들을 미리 처리해 두어야 했다. 이디스는 자기 몫의 재무관 일을 끝냈지만 전 분야의 최종 결정권자인 앨피어스의 일은 해도 해도 줄어들지 않았다.
결국 보다 못한 이디스가 옆에 붙어 앉아 거들기 시작했다.
“아, 여기 있다. 이거 봐요.”
“미안한데 좀 읽어 줘.”
“그러니까 이게 외부인 출입하고 교역 허가증에 관련된 건데, 어? 이게 뭐야?”
“왜?”
“숫자가 안 맞아요. 우터가 일을 이렇게 처리할 사람이 아닌데.”
서류에 파묻혀 있던 앨피어스가 고개를 들었다. 뭔가 단단히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에 골이 패여 있었는데, 이디스는 서류에 집중하느라 미처 보지 못했다. 중얼중얼 읽어 내려가는 그녀를 노려보던 앨피어스가 툭 뱉었다.
“이봐, 이디스 로디언 후작부인.”
“네? 왜요?”
“침실에서 다른 남자 이름을 말해야겠나?”
이디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으로 남편을 쳐다보았다. 짙은 녹색 눈이 뻔뻔스러울 정도로 당당하게 불만을 표시하고 있었다.
“우터가 남자는 무슨 남자예요?”
“여자는 아니잖아.”
한 달 반의 일을 앞당겨 닷새 안에 끝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살인적인 업무에 짜증이 났다면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웬만큼 들어 줄 만한 소리여야지. 이디스는 들고 있던 문서를 앨피어스의 눈앞에 갖다 대고 팔락팔락 흔들었다.
“당신 가신이거든요. 그리고 침실에 일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은 어디의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아무래도 안 되겠어, 오늘은 이만 하지.”
빈말이 아니었다. 앨피어스는 정말로 펜을 던지고 여기저기 널려 있는 서류를 모으기 시작했다. 이디스는 기막혀 하며 그 꼴을 바라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빼앗겼다.
“그리고 그대.”
“또 왜요?”
“아직 받지 않았던 보상을 지금 받겠어.”
이디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후작 각하라는 호칭을 쓸 때마다 적립되는 보상 이야기였다.
결혼 예물을 줄이네 마네 할 때가 마지막이었는데, 그 뒤로 각별히 신경을 써서 더는 실수하지 않았다. 결혼식 전날 그걸 어쩔 셈이냐 넌지시 묻자 귀중한 것이니 아껴 두겠다는 대답이 돌아왔었다.
“벌써 쓰려고요?”
“그래. 도저히 안 되겠으니까.”
스트레스가 심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앨피어스는 그 와중에도 삐져나온 것 없이 정리한 서류 더미 위에 문진을 올리더니, 손을 털며 단호하게 말했다.
“금방 올 테니 침대에 가 있어.”
그러고는 자기 방으로 갈 줄 알았는데, 후작부인의 침실에 딸려 있는 곁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디스는 의아해하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앨피어스가 무엇을 바랄지는 몰라도 무척 야릇한 일이리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지금까지 번번이 그랬으니까. 입 밖에 내어 말하기에는 부끄럽지만 그녀도 싫지는 않았다. 부부관계의 쾌락은 겪을수록 새로웠고,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에게 몰두한다는 것 자체도 고양감을 주었다.
가끔씩 입이 떡 벌어지게 기상천외한 짓을 생각해 내서 황당할 때가 있기는 했지만……. 그녀가 깊이 생각하기 전에 곁방의 문이 다시 열렸다.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지. 이디스는 웃으며 돌아보았다. 그리고 어리둥절해졌다.
“그건 왜요?”
앨피어스는 결혼 예물인 에메랄드 액세서리 세트를 케이스째로 들고 왔다. 한 번 열어보지도 않았던 걸 들켰나. 이디스는 켕기는 내심을 들키지 않으려 눈을 깜박거렸다.
손을 타지 않은 케이스의 잠금쇠가 반짝거렸다. 그녀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앨피어스는 잠금쇠를 젖히고 케이스를 열었다.
수십 알의 큼지막한 에메랄드들이 휘황찬란한 빛을 내뿜고, 녹색 광채가 앨피어스의 얼굴을 물들였다. 흡족한 표정을 지은 그가 말했다. 아, 놀랍게도 그의 진녹색 눈이 에메랄드보다도 더 강렬하게 빛났다.
“내가 바라는 건 그대가 이걸 걸어 주는 거야. 지금, 여기서.”
“……그게 끝이에요?”
이디스는 미심쩍은 눈으로 물었다.
전적에 비춰 봤을 때 너무 싱거운 요구였다. 굳이 보상 운운하지 않아도 한 번쯤 못 해 줄 것 없는 일인데, 직접 들고 오기까지 하면서 하는 요구라기에는 어쩐지.
“아, 물론.”
역시 더 있었나.
“이것만 걸어야 해. 다른 것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뭐라는 거예요!”
순식간에 얼굴을 확 붉힌 이디스가 베개를 던졌다. 그러나 앨피어스는 날아오는 베개를 가볍게 피하고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를 덮쳤다.
“꺅!”
후작은 기어이 자기 소원을 이루었다. 그로부터 하루가 더 지난 뒤에 방에서 나온 그는 한결 온화한 기색으로 가신들에게 서류와 인장을 건네며 부재 시의 일을 당부했다.
할 말을 끝내자마자 후작부인의 방으로 돌아가는 주군의 뒷모습을 보며, 충성스러운 가신들은 신혼의 낙이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진지하게 토론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들의 추측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후작이 사흘 내리 아내를 품에 안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후작 부부가 놀랍도록 잘 맞는 짝이라는 점은 사실이었고, 그로부터 얼마 후 만나게 되는 왕과 궁정 귀족들 모두 후작 부부의 합에 감탄하게 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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