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늦은 청혼 (8/9)

7. 늦은 청혼

 앨피어스는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지금 뭐라고 했나.”

 한창 사냥감을 탐색하느라 바쁜 중에 기사단장 다트가 사색이 되어 왔다. 처음에는 돌아보지도 않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는데 들려오는 음성이 심상치 않았다.

 별일이라고 생각하며 무성의하게 눈길을 주었다가 표정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다트의 뒤에는 그의 종자라고 소개받았던 어린애가 서 있었다.

 로디언 숲이 많이 개척되어 위험하지 않다지만 여전히 비밀스러운 땅이라, 제 몸 지킬 능력이 부족한 종자들은 대부분 밖에 두고 왔다. 그런데 여기까지 들어왔다면 성에 무슨 일이 생겨 전령이 온 것인가 했다. 해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는데 그 대답이……. 

“이디스가 여기 따라왔는데 지금은 행방불명이다? 그리고 

‘진짜 숲’에 들어간 것 같다?”

“죄송합니다, 각하.”

“말뿐인 사죄는 필요 없다.”

 싸늘하게 내뱉은 앨피어스는 이제 벌벌 떨기 시작한 다트의 종자에게 직접 물었다. 

“네가 마지막으로 함께 있었다고. 언제 떨어졌느냐.”

“그것이, 각하.

각하와 단장님이 숲으로 들어가실 때였습니다.”

“그 뒤로 목격자는 없나?”

“아는 대로 탐문했으나 모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미 두 시간 넘게 지났다고 봐야 했다. 앨피어스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불쾌한 빠드득 소리가 잇새로 흘러나왔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로디언 숲은 많이 개척되고 정돈되어 위험이 적은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몇 번 들어와 보면 길 찾는 요령을 금방 터득할 수 있는 만만한 장소 정도로 취급되어 온 것이다. 하지만 이 숲의 진정한 모습을 알고 있는 그는 수백 번을 들락거리면서도 두려움을 잊지 않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냥에 기사단장 이하 정규 기사단을 다 데려올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은여우 사냥은 그만큼 위험했다.

 차라리 발견하지 못해 허탕을 치는 쪽이 낫지, 잘못해서 큰 무리를 건드리면 곰이나 늑대 떼에 버금가는 힘을 들여야 살아나올 수 있었다. 그래서 주변부를 완벽하게 정리한 뒤 가장 짧은 길로 빠르게 들어갔다 나올 예정이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이디스가 

‘진짜 숲’으로 들어갔다니 차마 믿고 싶지도 않은 소리였다. 앨피어스는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다른 곳으로 빠졌을 가능성은?”

“오는 길에 샅샅이 훑었으나 그렇게 짐작되는 흔적이 전무합니다.”

“각하, 서둘러 찾아야 합니다.”

“나도 알고 있어. 경험자들을 불러와라.”

“알겠습니다.”

 한시가 급한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수 없었다. 앨피어스는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무기류만 남기고 몸을 가볍게 만들었다. 그러는 사이 다트가 

‘진짜 로디언 숲’의 경험을 가진 기사들을 모아 왔다. 저마다 긴장한 표정이었다. 

“이야기는 들었나?”

“다들 알고 있습니다, 각하.”

“좋아. 은여우가 나타났을 때의 지침은 숙지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들어간다.”

 지금까지 기사단은 다듬어진 길 주변을 훑으며 다녔다.

사람이 살고 있지는 않지만 맹수가 살기 좋지도 않았고,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눈여우 서식지 정도가 가장 위험했다.

 무장하지 않은 사람도 아주 운이 나쁘지 않은 한 큰일을 겪을 가능성이 낮았다. 하지만 이디스가 저도 모르는 새 끌려 들어갔고 앨피어스가 그녀를 찾고자 들어가려는 곳은 전혀 달랐다.

 그곳이야말로 천 년 이상 묵은 진짜배기 로디언 숲, 불가해의 신비가 살아 있는 곳이었다. 또한 모두가 반쯤 전설로 치부하는 은여우의 영역이기도 했다.

 은여우란 실버글렌의 영물이자 로디언 가문의 상징이면서 사람을 홀려 잡아먹는 아름다운 괴물이었다. 숨이 붙어 있어 피가 뜨거운 것만을 먹이로 삼는 사악한 마수 말이다.

 로디언이 로디언이라는 이름과 작위를 받기도 전부터 존재했던 그것은 인간을 상대로 꽤 고전했지만 악착같이 살아남아 포식자의 위치를 지켜 왔다.

 대체 어쩌다가 그쪽으로 들어가서는! 앨피어스는 초조함을 느끼며 걸음을 재촉했다. 무릎 위로 올라오는 덩굴 때문에 전속력으로 달릴 수가 없어 짜증이 났다.

 그럼에도 거칠게 땅을 걷어차며 숲 안쪽으로 파고드는 속도는 그가 가장 빨랐고, 기사들은 주군을 놓치지 않기 위해 속도를 높여야 했다. 한참을 말없이 들어가던 일행은 발밑이 푹신해지면서 은근한 향기가 올라오는 지점에 잠시 멈춰 섰다. 

“받으십시오.”

 앨피어스는 다트로부터 손바닥만 한 주머니를 건네받았다. 가죽 주머니 안에는 박하 잎과 천이 들어 있었는데, 박하는 입 안에 물고 두꺼운 천으로는 코를 가렸다.

 모두 같은 행동을 했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꽃을 피우는 야생화는 은여우의 영역임을 알 수 있는 표시이자 환각과 수면을 유발하는 독초였다.

 사전 정보가 없는 상태로 들어온 이디스는 이 향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었으리라. 생각이 그에 닿자 마음이 급했다. 앨피어스는 기사들을 앞질러 안쪽으로 들어가며 목청을 높였다. 

“이디스! 이디스 아가일!”

“레이디 아가일! 어디 계십니까!”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미리 말해 줄걸 그랬다고, 그는 뒤늦게 후회했다. 은여우에 관한 것도, 이 사냥의 진정한 목적에 대해서도 그녀에게 말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후회라는 것을 해 본 일이 드문 인생이었으나 이디스를 만난 뒤로는 그녀와 관련된 일마다 번번이 후회가 들었다. 변명하자면 일이 꼬인 것이 전적으로 그의 책임은 아니었다. 왕태후가 그를 압박했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자신이 데리고 온 레이디들 중에서 후작부인을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셋 중에 마음에 드는 아이가 없다면 다른 후보도 있으니 말하고.」

「왕태후 전하, 아니 고모님. 그만하시지요.」

「난 내 뜻을 철회할 생각이 없어. 그리고 자네 이디스와 진짜 약혼한 것도 아니잖나.」

「……무슨 말씀이신지.」

「날 우습게 보지 말게, 조카님. 샅샅이 파헤쳐 자네를 망신 주고 싶진 않으니. 그리고 레이디 아가일에게 해코지하고 싶지도 않다네.」

「…….」

 그 대목에서 왕태후가 이디스를 거론하는 바람에 그만 멈칫했다. 왕태후의 어조는 우아하고 부드러웠지만 말의 내용은 노골적인 협박이었다. 

「왕족 기만에 대한 처벌은 가볍지 않아.」

 숙이고 들어갔다는 뜻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앨피어스 로디언의 지난 인생을 부정하는 꼴이 되었을 테니까. 그는 딱 한 발 물러섰다. 캐서린 더릭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얻어 둔 결정적인 패가 손에 있었다.

 그것을 공개하고 사용하는 순간 왕태후의 뒤통수를 치게 되겠지만, 어쨌든 이디스와의 관계를 확실하게 보호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눈속임을 할 작정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청혼하겠다는 말이지?」

「예.」

「좋아. 폐하께 대영주의 성혼을 승인하는 특사를 보내 주십사 하겠네.」

「뜻대로 하시지요.」

 갑자기 순순해진 조카의 태도에 의심을 품을 만도 하련만, 왕태후는 충분히 만족했는지 이야기를 더 끌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정확히 누구에게 청혼할 생각이냐고 물었다면 본격적인 거짓말을 했어야 할 테니. 왕태후의 방에서 나와 문을 닫으면서 그는 확고하게 결심했다.

 이디스에게 청혼하기로.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도록 가문의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자신의 옆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녀뿐임을 주장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청혼을 받을 사람에게 미리 알려주고 기다리라는 것은 아무래도 모양새가 이상했다. 

「저렇게 마음 상하게 두셔도 됩니까?」

「곧 알게 될 일이야.」

 이디스의 서운함이 훤히 들여다보이는데도 부득불 나가 있으라 한 이유는 그것이었다. 정중하고 성대하게 청혼하면서 놀라게 해 주고 싶었다.

그저 그뿐이었는데…….

 일이 잘못되어도 어지간히 잘못되었다. 이렇게 될 줄이야. 그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누르며 아름드리나무를 돌았다.

 은여우가 둥지를 틀면서 숲이 생겨났다는 전설을 다 믿지는 않았으나 주위의 나무들은 모두 엄청난 거목이었다.

 수령 천 년에 육박하는 나무들이 지켜보는 듯한 느낌도, 장화 밑창에 밟혀 질척하게 으스러지는 야생화의 감촉도 불쾌했다.

 실버글렌 사람들을 해치는 은여우를 토벌하러 나섰다는 로디언 가문의 개조(開祖)도 같은 생각을 했으리라.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걷던 앨피어스는 무엇에 붙들린 듯 멈춰 섰다. 앞쪽에 무엇인가 보였다. 사람이었고, 제대로 서 있질 못하고 주저앉은 상태였다.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는 데다 복장도 평소와 달랐지만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녀였다. 

“이디스!”

 커다랗게 불렀다. 하지만 그녀가 약간 움찔할 뿐 돌아보지 않자 불안이 엄습했다. 그는 다시 한번 부르면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그녀의 어깨 너머로 달갑잖은 것이 쑥 올라왔다. 뾰족하고 큰 귀, 괴괴하게 빛나는 진녹색 눈동자, 눈부신 털. 그는 눈을 부릅떴다. 은여우가 이미 이디스를 홀려낸 것이다.

 영역 안에서 우연히 마주쳤는지 한 마리밖에 없는 것이 다행이었으나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과연, 그와 눈이 마주친 은여우가 보란 듯이 주둥이를 쩍 벌렸다.

 귀염성 있게 생긴 외모와 달리 두 겹으로 돋은 이빨은 날카롭고 흉포했다. 앨피어스는 눈을 크게 떴다. 그 이빨에 물리면 상처로 마비독이 들어갈 터였다.

 수준 있는 기사도 한 달을 앓아눕는 독이었다.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 앨피어스는 달려들면서 석궁의 방아쇠를 당겼다. 날카로운 파공성을 내며 날아간 화살은 이디스의 근처에도 닿지 않았지만, 놀란 은여우가 잠시 멈추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어딜!”

 그것이 멈칫하는 사이, 거리를 좁힌 그는 한 손으로 이디스의 어깨를 잡아채 그녀와 은여우의 사이로 파고들었다.

 펄쩍 뛰어 물러난 은여우는 이디스에게 접근할 때와는 딴판으로 사납게 돌변했다. 공격성을 띠자 눈 색도 새빨갛게 물들면서 그 진면목이 드러났다.

 크르릉. 같은 산짐승과 가축은 물론 인간까지도 포식하는 것이 은여우였다. 그리고 먼 옛날 은여우가 창궐하던 시절, 실버글렌 인들을 보호하고 사람의 터전을 닦은 자가 바로 로디언 가문의 시조였다.

 많이 알려진 이야기는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은여우의 개체수는 줄어들었고 앨피어스가 어릴 때 마지막으로 발견된 이래 지금껏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때를 같이하여 로디언의 몰락이 시작되었지만, 기원을 따져 보면 은여우와 가문은 목숨을 걸고 적대해 온 관계였다. 어쨌든 그런 덕분에 은여우를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도 잘 알았다. 앨피어스는 자세를 낮추면서 날이 두꺼운 단검을 빼들었다. 

“덤벼라.”

 상대가 마주친 이상 결판을 내야만 하는 인간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탓이었을까. 털을 부풀리고 흉악한 이를 드러낸 은여우는 앨피어스의 목을 노렸다. 은빛이 쇄도했다.

앨피어스는 이디스의 몸을 제 뒤로 감추며 단검을 휘둘렀다. 있는 힘껏 휘두른 칼날에 은여우의 목이 반 넘게 베여 나갔다.

 튕겨 나간 짐승에게서 피가 끓어 넘쳤다. 몸에서 빠져나간 은여우의 혈액은 바닥에 닿으면서 독성을 드러내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를 피워 올렸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성질을 가진 흉악한 생물이었다. 앨피어스는 채 숨이 끊어지지 않고 들썩거리는 은여우로부터 물러나면서 한숨을 쉬었다. 품에 안은 이디스는 다친 곳 없이 말짱했다. 

“각…… 하? 각하!”

“후작 각하께서 여기 계신다!”

 멀지 않은 곳에 흩어져 있던 기사들이 앨피어스를 찾아내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손을 들어 흔들었다.

 장갑의 팔뚝 부분이 찢겨 너덜거리는 것을 그때 알았다. 생명의 위협을 감지하고 독하게 할퀸 은여우의 발톱이 단단하게 무두질한 가죽을 뚫고 그의 살을 갈랐던 것이다.

 꽤 깊이 베인 상처인데도 피가 흘러나오지 않고 점액처럼 뭉친 탓에 늦게 깨달았다. 물론 발톱에도 독이 있었다.

 알아차리는 순간 이미 얼얼하게 마비된 팔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앨피어스는 이미 죽은 은여우를 향해 혀를 찼다.

 독한 것. 기사들이 모여들었다. 누군가는 은여우의 사체를 거두었다. 썩 보기 좋은 형태는 아니었지만 오늘 사냥의 목표였으니 가져가는 것이 맞았다. 그리고 누군가는 주군인 앨피어스의 상태를 살폈다. 

“다치셨습니까?”

“괜찮다.”

“응급 처치하셔야 합니다. 레이디 아가일은 제게 맡기시지요.”

 다트가 비상약을 꺼내 들며 말했다. 하지만 앨피어스는 이디스를 안은, 멀쩡한 팔에 힘을 주며 고개를 저었다. 

“됐어. 반대쪽 팔이니 그냥 해.”

“많이 고통스러울 겁니다.”

“상관없다.”

 오랫동안 모셔 왔기에, 다트는 앨피어스가 그렇게 잘라 말할 때 토를 달아 봤자 소용없음을 잘 알았다.

 그는 앨피어스의 팔을 받쳐 들고 보기 흉하게 갈라진 긴 장갑을 잘라내 떼어냈다. 

“상처가 생각보다 깊군요. 은여우에 대해 누구보다 해박하신 분이 어쩌다 이렇게 다치셨습니까.”

“머리로 알아 봤자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잖나.”

“그렇기는 합니다만……. 저놈, 갓 성체가 된 정도인 것 같은데 위력이 대단합니다.”

“그러니 겁도 없이 사람을 홀려 잡아먹으려 드는 거다. 윽.”

 소독약 병의 마개를 뽑은 다트는 그것을 망설임 없이 뒤집어 상처 위에 들이부었다. 대화 도중에 자연스럽게 취한 동작이었기에 각오할 틈이 없었다. 앨피어스는 엄습하는 고통에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이디스를 안은 팔에는 힘을 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꽉 끌어안았다.

 그녀가 약한 신음을 내며 뒤척였다. 

“레이디 아가일이 무사하니 다행입니다.”

“그래…….”

 앨피어스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관성적인 대답이 아니라, 정말로 그녀가 무사하니 다른 모든 일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무것도 따지고 싶지 않았다. 

* * *

“괜찮다니까.”

“그렇게 말씀하실 때가 아니잖아요.”

 앨피어스가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하루 종일 반복되는 이야기가 지겹다는 뜻이었다. 물론 이디스는 그의 심중을 짐작했지만 그렇다고 제 주장을 철회하지는 않았다. 

“이 외진 곳까지 의사가 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아깝다고요.”

“이디스.”

“저 때문에 그렇게 됐는데…….”

 그녀는 정신을 잃은 상태로 구출되어 로디언 숲에서 나온 뒤, 인근의 별장에서 눈을 떴다.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모양으로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 있던 앨피어스가 의식을 되찾은 그녀를 발견하고 사람을 불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후작성으로 귀환하지 않은 까닭은 자기 때문인 줄 알았다. 밖에서 대기하던 하녀가 끔찍한 냄새가 피어오르는 약을 들이밀었기에 더욱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이 많은 인원이 좁은 별장에 몸을 욱여넣은 채 날을 샌 이유는 따로 있었다. 

“며칠 있으면 회복될 거다. 지금도 어제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고.”

“그래도 그 팔, 아주 마음대로 쓰실 수는 없잖아요.”

 앨피어스는 팔을 들어 보이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팔은 마비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피부가 기이하게 딱딱해져 보통 때처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응급처치 덕분에 영구적인 손상은 피했다고 하지만 언제 원래대로 돌아올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당연한 결과로 그는 통증을 느끼고 윽 하는 소리와 함께 팔을 떨어뜨렸다. 이디스는 눈썹을 모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후작성으로 돌아가면서 중간 지점에서 의사를 만나시는 쪽이 나아요.”

“됐다니까. 그냥 휴가라고 생각하고 며칠 있지.”

“아니, 여기서요? 기사들에 종자들까지 터져 나갈 것 같은데?”

“그게 문제라면 먼저 귀환시키면 돼. 밖에 누구 있나!”

 앨피어스는 이디스가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벽을 두드리며 경비 비번을 호출했다. 즉각 대답이 들려왔고 몇 초 만에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기사는 앨피어스를 향해 먼저 인사한 뒤 이디스를 향해서도 짧게 묵례했다. 그녀는 마주 묵례하면서 살짝 당황했다. 안면은 있어도 이런 식으로까지 예의를 차릴 사이는 아니었는데, 기사의 태도는 마치 후작부인을 대하는 듯 정중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각하.”

“음, 기사단을 먼저 돌아가게 해야겠다. 다트 경에게 들어오라고 해.”

“명 받들겠습니다.”

 어어 하는 사이에 기사가 나가고 다트가 들어왔다. 이디스가 일어나 앉은 모습을 본 그는 반갑게 눈썹을 찡긋하고 앨피어스에게 말했다. 

“그렇잖아도 돌아가라고 하실 듯해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바로 출발할까요?”

“그래.

 이 시간부로 기사단 전원의 주둔지 복귀를 명한다.”

 예상하고 있었다던 다트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디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원이요?”

“왜?”

“각하의 호위 인력도 안 남긴단 말이에요?”

 앨피어스는 한쪽 뺨을 찡그리며 말이 없었다. 대신 경례를 붙이고 일어서던 다트가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 

“딱히 위험할 일도 없는걸.”

“그래도…….”

“정 그러면 별장 입구에 몇 명 두고 가지, 뭐. 각하, 그래도 되겠습니까?”

“음.”

 별장은 후작성에서 제법 거리가 있는 데다, 인근 농가와도 꽤 동떨어진 언덕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떠들썩하게 들어와 있던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빠져나가자 본연의 외로운 풍경이 바로 드러났다.

 더구나 겨울이었다. 벽난로에서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가 들리자 기분이 이상했다. 이디스는 괜히 창틀을 짚고 아무것도 없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디스.”

 그가 불렀지만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낯선 공간에 단둘이 남았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어색했다. 이디스는 손을 올려놓고만 있던 창틀을 꽉 움켜쥐었다.

 긴장으로 힘이 들어간 어깨가 뻐근했다. 어떻게 하지? 이대로 못 들은 척해 봤자 그가 또 부르면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곁눈질로 방문까지의 거리를 가늠했다. 가진 뻔뻔함을 힘껏 끌어 모아 뒤집어쓰고 저기까지 달려가면 어떻게 될 것도 같았다……. 

“이디스.”

“헉.”

 하지만 수상쩍은 기색을 눈치챈 앨피어스가 성큼 다가오는 쪽이 더 빨랐다. 그는 멀쩡한 팔을 뻗어 창틀과 이디스의 손을 한 손에 움켜쥐었다.

 그녀는 얼어붙었다. 꼼짝없이 잡히고 말았다. 그가 등 뒤로 바싹 붙어선 탓에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반면 귓가에 닿을락 말락하는 입술의 느낌이 지나치게 뚜렷했고, 그에게서 뿜어지는 열기가 그녀의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덮었다.

“왜 대답이 없나.”

“그…….”

“짚고 넘어갈 일들이 있지?”

“……그렇긴 하지만.”

 앨피어스가 낮게 웃었다. 그것만으로는 그의 기분을 정확하게 짐작하기 어려웠다. 낮은 웃음소리와 숨결이 귀를 적시고 목덜미로 뚝뚝 떨어지는 것 때문에 다른 데 신경을 쓸 수도 없었다. 뒷목을 따라 소름이 돋는 것과 동시에 앞쪽에서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디스는 목을 움츠리며 자유로운 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좀 떨어져서 말씀하시면 안 될까요?”

“싫은데.”

“제가 불편…… 꺅!”

“어디로 튈지 모르니 잡고 있어야겠거든.”

“……신중하지 못하게 행동한 건 할 말 없긴 하지만요.”

“인정이 빠른 건 그대답군.”

 말을 주고받을 때마다 각자의 몸에서 나는 울림이 맞닿은 부분을 통해 전달되었다. 그 느낌은 기묘하면서도 마음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상황이 아주 편한 것은 또 아니었지만 평소의 페이스대로 시원스럽게 말할 정도는 되었다. 

“그야 지은 죄가 있으니까요.”

“음?”

“정상 참작을 바라려면 빠른 인정이 중요하지요. 어리석은 행동을 해서 위험을 자초했으니 할 말도 없고.”

 그는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을 덮은 그의 손이 조금 더 강하게 죄어들었다. 그녀가 할 말을 다 하도록 기다려 주는 것이었다. 

“제가 생각해도 그때는 확실히 정신이 나갔었어요. 기다렸어도 되는 일인데 대체 왜 그랬나 몰라. 아니다, 모르는 건 아니네요. 당신이 제게 숨기는 일이 뭔지 직접 보고 싶었거든요.”

 덕분에 이디스는 속에 억눌러 두었던 말을 다 할 수 있었다. 

“후작성의 일을 몰라야 한다는 것도 속상한데, 앞뒤를 맞춰 보니까 그게 당신이 레이디 더릭에게 청혼하는 일하고 관계가 있고. 진짜 청혼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로디언 가문의 전통까지 이행하면서 제대로 한다니까 당황스러웠어요.

언제 알아도 기분 좋지는 않은 일인데 늦게 알아서 좋을 것도 없잖아요. 그대로 있으면 내 자리가 없어질 것 같았어요.”

“…….”

“죄송해요.”

 숨도 쉬지 않고 정신없이 털어놓다 보니 마지막 말에는 한숨이 반이었다. 정말이지 심경이 복잡했다. 스스로 말하면서도 한심해서 견딜 수 없었기에, 말을 마친 이디스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리고 돌려 세워졌다. 거칠지는 않지만 확고한 의지가 느껴지는 힘이 그녀의 허리를 안아 뒤돌게 만들었다. 

“왜, 왜요.”

“이제 내가 말할 차례 아닌가?”

“그냥 하셔도…….”

 앨피어스는 어림도 없다는 듯 이디스의 등허리를 단단하게 받쳤다.

 그녀의 자세와 각도가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아야 하는 상태로 고정되었다. 이렇게 부담스럽게 나올 것까지야!

 그녀는 어떻게든 눈을 피하려고 했지만 그의 시선이 먼저 그녀를 붙들었다. 거의 새카맣게 된 녹색 눈동자의 강렬한 빛. 이디스는 속절없이 그 안에 있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했다. 바닥까지 드러내고 힘이 빠져, 부끄러움을 감추지도 못하고 울 듯한 얼굴을. 

“이디스.”

 그러나 그는 전혀 다른 말을 했다. 

“그대가 사과하게까지 만들어서 미안하다.”

“……네?”

“내가 생각을 잘못했어. 그렇게까지 속이 상할 줄 몰랐다.”

 이런 분명하고도 순순한 사과라니. 이디스는 눈을 몇 번 깜박였다. 그제야 앨피어스의 표정이 보였다. 한편으로는 어떤 결의에 찬 듯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간신히 억누른 감정을 꾹 참고 있는 듯도 한 얼굴. 미간에 깊은 골이 져 그의 심정이 평탄하지 않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대가 한 행동을 나무랄 생각은 조금도 없어.”

“그렇지만 다치셨잖아요. 계획한 일도 어그러졌고요. 그런 거 싫어하시면서…….”

“다 괜찮다.”

 이디스는 그가 진심으로 말하고 있음을 알았다.

수년간 그의 의사 표현을 가까이에서 봐 왔기에 알 수 있었다. 그는 정말로 다 괜찮다고, 그녀가 마음에 두고 있는 거리낌은 아무 상관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대가 무사하기만 하면 아무것도 따지지 않을 생각이었어.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고.”

“그렇지만.”

“마음이 앞서 잘못을 저지른 쪽은 나다. 그러니 아무것도 개의치 마.”

“……뭘 하셨는데요?”

 늘 당당하게, 고압적으로 보일 정도로 자기 페이스를 지키던 남자가 그렇게 나오자 당황스러웠다. 그녀에게 따지려는 의도가 없었는데 불구하고, 툭 내뱉은 말이 쌀쌀맞은 어조로 나온 것은 그래서였다. 

“그건.”

 놀랍게도 앨피어스는 조금 주저했다.

 세상에 거칠 것이라곤 없이 사는 사람이 말을 고르면서 시간을 버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이디스는 재촉할 생각 따위 하지도 못한 채 그의 입술만 빤히 쳐다보았다.

 그가 그 시선을 느끼고 초조한 기색으로 입술을 핥는 바람에, 그녀는 또 놀랐다. 그리고 내심으로는 조금 뿌듯했다.

 그녀가 아는 한, 더불어 들은 한 앨피어스 로디언으로 하여금 이렇게 자신 없는 태도를 이끌어낸 사람은 없었다.

 어린 소후작을 기억하는 연로한 소영주조차도 그의 오만은 태어날 때부터 갖고 나온 것으로 여길 정도였다.

 그런 그가 그녀에게만 유독 별난 모습을 보였다. 무심코 지나치기에는 너무 눈에 띄는 일이었다. 몇 년째 손꼽히게 가까운 위치에 있으면서 속속들이 알아 온 사람이기에 그 의미가 각별함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뭐지, 그 표정은.”

“제가 뭘.”

“특별 포상금을 받았을 때 같은 표정인데.”

 물론 앨피어스 역시 이디스의 표정을 손쉽게 읽어냈다. 그녀는 저절로 올라간 입꼬리를 슬그머니 내리며 얼버무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뭘 하셨는지 안 알려 주실 건가요?”

“……우선 이것부터 봐.”

 앨피어스가 꺼내 보인 것은 가죽 재질로 된 고풍스러운 두루마리였다. 

“뭔가요?”

“캐서린 더릭이 거래를 제안하면서 내놓은 것.”

 이디스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척 보아도 값진 티가 나는 두루마리를 받아들어 펼쳤다. 상당히 우아하고 격조 있는 필체로 대여섯 줄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천천히 그 내용을 읽던 그녀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거 진짜예요?”

“당연하지.”

 그렇게 말해도 믿을 수 없었다. 이디스는 손에 든 두루마리의 내용을 소리 내어 읽었다. 

“국왕의 이름으로 이들 남녀의 결합이 신성하고 공정하게 이루어졌음을 증언하며, 이 혼인은 귀족 연감 편찬국과 법무부의 권한 위에서 성립됨을 확인한다……. 이게 진짜라고요?”

“공식 문서 맞고, 분류되는 명칭도 있어.”

“뭔지는 저도 압니다. 이거 혼인 승인서잖아요. 다른 말로는 혼인장이라고 하는 것.”

 그녀의 말이 옳았다. 그것은 국왕 명의로 발급되어 귀족들이 혼인에 도달하기까지의 제반 과정을 생략하는 특례가 보장되는 문서였다. 

“여기 서명하면 즉시 정혼, 왕도에 제출하면 혼인 성립인 거지요?”

“그래. 그리고 아래쪽을 잘 봐.”

“아래에 뭐가…….”

 이디스는 눈을 부릅떴다가, 아예 두루마리에 코를 박을 기세로 얼굴을 갖다 댔다. 법률상 던켈드 왕국의 귀족은 상위 영주로부터 승인받아야 결혼할 수 있었다.

 공작이나 후작 등 대귀족의 결혼을 승인하는 것은 물론 국왕의 권리였다. 귀족사회의 풍토가 바뀌면서 승인을 거절하는 일은 사라졌지만 번거로운 과정은 여전히 잔존했다.

 그리셀다 왕태후가 앨피어스의 결혼을 강경하게 반대할 수 있었던 것도 혼인 제도와 무관하지 않았다. 혼인장 등 특수한 방법을 쓰지 않는 한 로디언 후작인 그는 반드시 왕도로 올라가 혼인을 신고해야 했다. 왕태후는 그 과정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혼인하는 남녀 두 사람의 이름 칸이 비워진 혼인장에 서명한다면 그 즉시 혼인은 성립된다. 왕태후는 이미 끝나 버린 조카의 결혼 문제에 왈가왈부할 수 없는 것이다. 

“이걸 레이디 더릭이 줬다고요? 어디서 났대요, 이런 게.”

“맨 밑에 찍힌 인장 옆을 봐.”

“지금의 폐하가, 아니네요. 오, 세드릭 4세?”

 세드릭 4세는 국왕의 조부로서, 그 왕비가 갤러웨이 가문의 딸이었다. 이디스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캐서린 더릭은 갤러웨이 공작의 혼외자이고 갤러웨이 공작은 세드릭 4세의 처조카이며 캐서린 더릭의 어머니와 갤러웨이 공작은 혼인하려다가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갤러웨이 공작이 이걸 레이디 더릭의 어머니에게 주었나요?”

“정확히 말하면 주겠다고 한 다음 빼돌렸지만 결국 그 딸의 손에 들어간 거야.”

“오.”

“그래, 역겨운 인간이지.”

 갤러웨이 공작은 혼인장에 이름도 적지 않았다. 캐서린 더릭의 모친은 순진한 아가씨였기에 혼인장의 존재만으로도 그를 믿고 휘둘리다가 버려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디스는 몸서리치듯 부르르 떨었다. 얼굴도 모르는 공작의 행태에 소름이 끼쳤다. 

“대귀족들이란.”

“…….”

“아, 각하께 하는 말은 아니고요.”

“알아. 그보다도, 방금 뭐라고 부른 거지?”

“……글쎄요? 앨피어스.”

 앨피어스가 이런 분위기에서 그때처럼 낯 뜨거운 말들을 늘어놓지는 않겠지만 겪은 일의 기억이 워낙 강렬했다. 이디스는 서둘러 그의 이름을 불렀고 그는 만족한 빛을 띠었다. 

“그런데 이거…….”

“아, 캐서린 더릭은 이 문서에 관한 권리 일체를 내게 양도했어. 난 당장 사용할 생각으로 받아들였고.”

“네?”

 이디스가 앨피어스의 말을 못 알아들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함의가 그녀에게 대단히 의미 깊은 것이어서 되묻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녀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겸연쩍은 듯 반쪽짜리 미소를 짓는 그를 바라보았다. 한 시간 안에 평생 못 볼 줄 알았던 표정을 참 많이도 보는 중이었다. 

“……도대체 순서를 지킨 것이 없어서 이것만은 잘하려고 했는데.”

 앨피어스는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물론 앞에 있는 이디스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해서였다. 

“왕태후 전하께 청혼하겠다고 했지만 

‘누구에게’라고는 하지 않았어. 그때부터 그대에게 할 생각이었다.”

“……오.”

“그게 아니었다면 여우 사냥 같은 걸 할 이유가 없잖나.”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요.”

“아주 신의 없는 놈으로 여기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애매하게 웃었다. 이 시점에서 입을 여는 것은 적절하지 않았다. 

“……그래, 뭐.”

 앨피어스 역시 자신이 말할 때임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지금부터는 손톱만큼의 흠도 없이 제대로 해야 할 때였다.

 그는 그녀로부터 한두 걸음 물러나 자세를 바로 했다. 후작성에서 지낼 때처럼 옷깃에 각이 잡힌 차림새는 아니어서 부족한 감이 있었지만 그의 결의만큼은 눈에 보일 정도로 뚜렷했다. 덩달아 긴장한 이디스는 숨을 죽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레이디 이디스 아가일, 실버글렌의 영주인 저 앨피어스 로디언은 당신을 위해 은여우 숲을 안전하게 만들었습니다. 허락하신다면 앞으로도 북쪽 땅의 평화를 당신께 드리고 싶습니다.”

 가문을 시작한 첫 후작 때부터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청혼의 말은 위엄 있고 로맨틱했다. 첫 번째 로디언이 마음에 둔 여인을 위해 척박하고 위험했던 실버글렌을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바꾼 이래 역대의 후작들을 통해 이어진 전통. 영지에 위협이 되는 맹수를 물리친 다음, 사랑하는 이에게 무엇이든 해 주려는 마음을 표현하는 말이었다.

“부디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이디스는 뻐근한 감각이 느껴지는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바란 적이 있었던가? 글쎄, 그와의 결혼에 대한 환상은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다만 그가 좋은 것은 사실이니 쭉 함께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 자작 집안 출신으로 후작부인이 되어 대영주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살아간다든가 하는 것은 더더욱 상상조차 하지 않았었는데. 힘든 일이 많을 것을 알았다. 당장 돌아가서 왕태후의 분노와 맞닥뜨려야 하고 거기에 예상 못 한 난관이 더 있을 가능성도 많았다. 그래도……. 

“해 드릴게요.”

 이디스는 앨피어스의 손을 잡았다. 살짝 차가워진 그의 손가락 끝을 감싸듯이 붙잡자 그가 천천히 일어섰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손에 깍지를 껴 맞잡은 채로. 그리고 바로 그녀를 당겨 품에 안았다. 

“고맙다.”

 앨피어스의 가슴에 얼굴을 묻게 된 이디스는 촉촉해진 눈을 깜박였다. 그렇다고 감격의 눈물을 흘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 말인데요, 앨피어스.”

“음?”

“가짜 약혼녀 역할은 이렇게 끝나는 거고…….”

“물론이지.”

“제 수당은 어떻게 계산해요?”

“…….”

“이걸 행위 기준으로 보면 안 될 것 같아요. 저한테 너무 부당하다고요.”

“이디스.”

“원 계약은 바이올라 갤러웨이가 떠날 때까지였잖아요. 그런데 왕태후 전하께서 오셔서 연장하게 됐고, 그럼 원 계약이 완료된 뒤에 동일 조건으로 재계약한 건데…….”

“이디스 아가일.”

“계약이 두 건이니 수당도 두 배가 되어야 합당하지 않아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재무관 해고되고 싶나?”

“아니, 무슨 그런. 그거하고 이거하고는 별개지요.”

 이디스는 씩 웃었다. 앨피어스의 협박 아닌 협박에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그의 말인즉 아직 해직 처리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였으니까. 후작부인이 되고 나서도 관직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실질적으로는 손을 놓지 않더라도 법적으로는. 하지만 후작 본인이 그렇게 말한다면 어떻게 자치령의 규정이라고 우겨 볼 수도 있으리라. 

“어쨌든 저…… 으응.”

 신이 나서 떠들던 그녀였지만 말을 채 끝맺지는 못했다.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그가 얼굴을 내려 입을 맞춰 버린 까닭이었다.

 키스는 입술과 입술이 닿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혀를 섞는 단계까지 곧장 나아갔다. 야릇하게 젖은 소리가 오고 가는 동안, 이디스가 하려던 말은 앨피어스에게 먹혀 사라지고 말았다.

 잠시 놓여났을 때 그녀가 발갛게 된 얼굴로 항의하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그는 픽 웃고 다시 입술을 겹쳤다. 창을 통해 황혼의 눅진한 햇살이 비쳐 들어, 우여곡절 끝에 기어이 결혼하기로 한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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