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불협화음
아무리 그래도, 날이 밝아오는 시간에 그렇게 절제 없이 굴어서는 안 되었다. 웃기게도 그 생각은 한창 뒤엉켜 있을 때는 떠오르지 않다가 다 끝나고 날이 밝아 성 안에 사람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한 다음에 들었지만. 어쨌거나 전날 밤에 이미 한차례 시달린 다음 자고 일어나자마자 또 하는 건, 정말 안 되는 일이었다.
“으윽.”
이디스는 한숨을 쉬다가 헉 하고 허리를 부여잡았다. 과도한 움직임에 놀란 근육은 한숨 따위에도 놀라 통증을 호소했다. 머리를 빗어 준 하녀가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레이디 아가일, 그냥 쉬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괜찮아요, 앤.”
“하지만 후작님께서도 레이디를 쉬게 하라고 하셨는데…….”
“뭐라고 하시면 내가 말씀드릴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물론 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이 성의 지붕 아래에 있는 어마어마한 손님을 생각하면 등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따끔따끔했다. 더구나 할 일이 있었다. 드러누워 봤자 제풀에 불편해져 벌떡 일어날 판이었다. 이디스는 거울에 비친 스스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제 얼굴을 보고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잘 없지만 지금은 확실히 봐줄 만했다.
정성 들여 빗고 땋고 말아 가꿔놓은 머리와, 품명도 모르는 무슨 분을 톡톡 두드린 볼, 그리고 장미꽃잎색을 잘 펴 바른 입술이 보기 괜찮았다. 그녀는 크게 심호흡했다. 요동치는 가슴을 누르듯 길게. 부담감을 떨치기 위해서였는데, 남의 눈에는 근심 어린 한숨처럼 보인 모양이었다.
“걱정이 되셔서 그러세요, 레이디?”
“걱정이라니?”
“저기, 그게, 후작님께서 오늘도 수도의 아가씨와 선을 보신다고 들었어요.”
앤의 물음에 의아해하던 이디스는 픽 웃었다. 물론 앨피어스가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할지도 모르지만 오늘의 스케줄을 선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이미 지나간 순서의 둘이라면 모를까 캐서린 더릭과의 만남이다. 그 명칭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지난밤이 하도 강렬해 잊을 뻔했지만, 이디스는 앨피어스를 내보내기 전에 캐서린의 요청을 생각해내고 전달했다.
앨피어스는 혀를 찼지만 이야기를 해 보겠다고 했다. 출생의 비밀이라는, 지극히 사적이며 치명적인 약점을 내주면서까지 간곡히 청한 사람을 내치는 것은 너무하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니까, 그가 아니라 그녀가.
「이상한 데다 자선가 마인드를 쓰는 것 아닌가?」
「무슨, 이런 일에 선의를 베푸는 건 일종의 투자라고요.」
「지금 난 그냥 모조리 내쫓고 싶을 뿐이야.」
「안 돼요!」
「애초에 들이는 게 아니었어.」
「그건 거절할 수 있는 객이었어야 할 수 있는 말이고요, 아무튼 이야기는 들어 주세요.」
이디스는 휙휙 도느라 흘러내린 앨피어스의 옷깃을 여며주면서 권했다. 예전이었다면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그가 알아서 하도록 했을 텐데 무슨 용기인지 손이 나갔다. 그는 그녀를 떨치지 않고 바로 선 채 옷이 정돈되는 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정이었으므로 질투든 불안이든 느낄 이유가 없었다.
그와 그녀가 쌍방향의 마음을 확인하기 전이었다면 몰라도 각자 감춰왔던 속내를 들여다본 지금은 더군다나. 이디스는 조심스러워하는 하녀 앤에게 부드럽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신경 안 쓰니까.”
“그럼요, 후작님께서는 레이디만을 마음에 두셨잖아요!”
응? 그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낯간지러운 표현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디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작 당사자인 그녀는 아직도 얼떨떨한 느낌이 남아 있는데, 제삼자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확고한 태도였다. 의식하고 보니 희한했다.
“그, 런가요?”
“네!”
“난 잘 모르겠, 아니. 잘 몰랐었는데.”
“어머, 레이디도 참.”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라도 덜떨어진 소리를 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속말이 여과 없이 그대로 나갔다. 이디스는 자신의 실수에 놀라 입술을 꾹 물었다. 하지만 앤의 감상은 다른 듯, 활짝 웃으며 손사래를 치는 얼굴에는 아주 약간의 불순함도 없었다.
“저희들은 다 알았는걸요? 집사님이랑, 하녀들이랑, 특히 안채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전부 다 말이에요.”
정작 당사자는 전혀 모르는 이야기였다. 이디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 * *
앨피어스가 캐서린 더릭과 독대하는 동안 이디스는 후작성의 가신들을 소집했다.
소집이라 하기에는 살짝 어폐가 있지만 명목상 후작의 약혼녀이니까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각자의 집무실에 있던 측근 가신들이 지체 없이 모여든 까닭은 그녀가 자신들의 일원이기 때문이었지만. 이디스가 먼저 나서서 앨피어스와의 관계 변화를 고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자기 입으로 구구절절 읊기 쉬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후작이 그들과 상의할 일이 있고 그것이 레이디 더릭과의 면담 후에 있으리라고 예고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보다 더 오랫동안 후작성의 일원으로 살아온 이들은 얼마 안 가 핵심을 눈치챘다. 그녀라고 그들이 어떤 대답을 유도하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순간을 모면하려고 거짓말을 뱉기에는 그간의 정이 깊었다.
“아니, 뭐. 약혼이 가짜이긴 했지만.”
“하지만 지금은 아니시다?”
“…….”
“이제 진짜 축배를 들 수 있는 겁니까?”
“그건, 아직 몰라요.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요.”
“어쨌든 각하의 짝사랑이 결실을 맺었다 이 말이지!”
정말이지 당사자인 이디스 아가일만 빼면 모든 사람이 다 알았던지, 최고 관료들 중 누구 하나 놀라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없는 벽을 곁눈질하며 헛기침을 했다.
그래도 예의 바른 이들이라, 기사단장의 직설적인 감탄에 이디스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못 본 체해 주었다. 한 사람은 빼고.
“쯧쯧.”
후작의 수석 행정관이자, 실버글렌 제2의 독설가인 우터 남작이 혀를 찼다. 아예 남이 들으라고 내는 소리였으므로 거칠고 요란했다.
하지만 둘러앉은 누구도 그의 무례를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는 맞는 말만 골라서 기분 나쁘게 하는 데 도가 튼 인사였고 말로 싸워 이기려면 어마어마한 출혈을 고려해야 하는 상대였다. 최고 독설가인 로디언 후작 본인이 등장하지 않는 한.
“하여간 헛똑똑이야, 이디스 아가일.”
그런 이유로 면전에서 비난을 들어도 아니라고 할 수가 없었다. 이디스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래도
‘간이 부은’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달라서 작게나마 투덜거렸다. 몇 해 동안 부대끼며 지내, 심리적으로는 친형제인 아가일 자작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였다.
“말해 주지도 않았으면서 잘난 척은.”
“뭘 말이냐? 네 감정을, 아니면 각하의 감정을? 어느 쪽이든 제정신이냐는 욕이나 먹었을 텐데.”
“가짜 약혼녀 이야기가 나왔을 때도 구경만 하고 있었잖아!”
“가짜인 척하는 진짜려니 했지, 설마 정말 맹탕 모르리라고 어떻게 짐작했겠느냐?”
“아, 잘났어.”
“설마 이제 알았나?”
맥락으로는 분명 농담인데 어지간히 진지한 말투였다.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든 이디스는 우터의 눈이 웃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꽤 즐거워 보였다. 그럴 만한 일인가?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예요.”
“어쨌든 덕분에 꽤 벌었어, 이디스.”
“뭘 벌어, 설마…….”
우터를 노려보는데 뒤통수가 간지러웠다. 이디스는 어떤 의심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대치를 구경하던 다른 가신, 기사단장과 법무관 등이 화들짝 놀랐다. 그들은 눈만 옆으로 굴리거나 손부채질을 하는 등 어울리지 않는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당신들.”
이디스는 눈을 뾰족하게 뜨고 좌중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날 두고 내기를 했겠다?”
“정확히는 네가 아니라 각하와 너의 관계에 대해서였지.”
“그게 그거지!”
이디스는 잔뜩 찡그린 채 그들 하나하나와 눈을 맞추며 으르렁거렸다. 정말이지 친오빠보다 더 오빠 같은 인간들이었다.
물론 오빠 같다는 말에는 쌓인 유대와 믿음이 깊다는 의미도 들어 있지만, 잊을 만하면 한심한 짓을 하는 얼간이라는 의미도 함께 들어 있다.
이래서 주변에 제대로 된 남자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대외적으로야 번듯한 후작의 가신에다, 주군에게 변함없는 신임을 얻어 없던 작위도 생긴 입지전적 인물들이지만 이걸 보라. 자기들끼리 모여 하는 짓이라곤 이런 수준이니 어떻게 한심하지 않겠는가.
“나 원, 기가 막혀서.”
그래도 진심으로 화가 나지는 않았다. 한쪽은 주군이고 한쪽은 친동기처럼 가까운 동료이니, 지켜보는 쪽에서도 나름대로 애가 탔을 것이다.
그걸 내기로 풀었다는 점은 두고두고 우려먹어 주리라. 그녀의 기분을 재빠르게 포착한 남자들은 씩 웃거나 머리를 긁적이거나, 아무튼 각자의 방식대로 겸연쩍어하면서 한마디씩 보탰다.
“그래도 다행이야.”
“다트 경의 말이 맞습니다. 걱정했다고요.”
“그래. 도대체 눈치라는 게 없어도 정도가 있지.”
“그건 정말 놀라울 정도였지요!”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까.”
“이 인간들이.”
첫마디는 그렇지 않았는데 갈수록 이디스를 놀리는 쪽으로 흘러갔다. 그러나 끝없이 계속될 것 같던 놀림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왜 이렇게 소란해.”
예고 없이 문이 열리며 앨피어스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디스를 놀리듯 놀릴 수 있는 상대는 아니어서 모든 가신들이 하던 말을 멈추고 기립했다. 거기에는 물론 이디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각하.”
“자리에 앉아라.”
앨피어스는 불필요한 말 없이 비워 둔 상석으로 갔다. 언뜻 이디스의 자리를 보고 미간을 찡그리는 것 같기도 했다.
가신으로서 연차에 따라 앉았으므로 그녀의 위치는 그에게서 가장 멀었다. 하지만 그는 하고 싶은 말을 삼키듯 잠시 침묵했다가 즉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사실 그는 언제나 그랬으므로 의아해 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디스는 오히려 아주 편안한 기분이었다. 바이올라 갤러웨이의 등장이 예고된 뒤로 온갖 사건이 끊이지 않아 잊고 있었는데, 이 분위기야말로 그녀가 몸담고 있는 로디언 후작성 고유의 것이었다. 합리적이고 신속하며 기탄없는 발언이 용인되는 테이블.
“다들 이야기는 들었겠지. 캐서린 더릭이 내게 거래를 제안해 왔다.”
당연하지만 그럴 수 있는 것은 주인인 로디언 후작이 허락하기 때문이었다.
왕국 초창기부터 존재했던 유서 깊은 명문귀족답지 않은 개방성, 허례허식보다는 실리를 거의 강박적으로 중시하는 그의 성격이 새삼스러웠다.
애초에 이디스가 정식 관료로서 봉직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지 않던가. 몰랐던 것도 아닌데 이제 와서 왜 이렇게 감개무량한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막 안건을 꺼내는 앨피어스와 그에 응하는 이들로부터 살짝 물러나 감상에 젖었다. 다만 그것도 그리 오래갈 수는 없었다. 줄줄 나오는 이야기가 워낙 충격적인 탓이었다.
“예. 그런데 각하, 그 레이디가 정말 그 집안의 핏줄입니까?”
“본인으로부터 증거를 확인했다. 캐서린 더릭은 현 갤러웨이 공작의 자식이 맞다. 그리고 엄밀히 말해 혼외자이기는 하지만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겠더군.”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 모친이 갤러웨이 공작의 첫 번째 약혼녀였으니까.”
“어, 그럼 현 공작부인은…….”
“첫 번째 약혼녀를 버리고 더 큰 지참금을 가져다 줄 공국의 공주를 선택한 거지.”
오, 세상에. 이디스는 얼굴도 모르는 갤러웨이 공작이 역겨워졌다. 듣고 있던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인 듯했다. 찌푸린 얼굴들 사이에서 우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열하군요.”
“뭐, 약혼 상대를 버리는 것이 그 집안의 전통인 셈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아이까지 낳도록 했으니 질이 더 낮고 말입니다.”
“그래. 더구나 순수한 밀회도 아니었다더군.”
갤러웨이 공작은 공작부인에게서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버려진 채 어렵게 생활하던 약혼녀를 수소문했다.
왕국 제일의 귀족과 파혼한 데다 때맞춰 가문의 사업이 도산해 버린 여인은 친척의 저택에서 어렵게 살고 있었다.
혈통 자체는 갤러웨이 공작부인으로 선택되었을 만큼 귀한 몸이었으나 보살펴 줄 사람이 없으니 순식간에 몰락한 것이다.
태어났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풍파를 연달아 겪은 여인은 무척 약해져 있었다. 아들을 낳아준다면 공작부인과 이혼하겠다는 공작의 말을 믿어 버릴 정도로.
“그렇지만 결국 딸을 낳아서 버려졌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해. 캐서린 더릭은 모친의 사망 후 모계의 6촌인 더릭 자작가에 입양되어 자랐다. 성년이 되었을 때 양모로부터 생부가 누구인지 들었고.”
“안타까운 이야기로군요.”
“이후 갤러웨이 공작에게 복수할 기회를 찾으려 왕성으로 들어갔는데, 중립을 지키면서 살아남았다 하니 꽤 수완이 있는 것 같다. 왕태후 전하를 따라 실버글렌에 온 것도 다른 여자들과 달리 자원했다더군.”
최대한 사실만을 간략하게 전달하는 것인데도 감탄이 나왔다. 이디스는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았다. 캐서린 더릭의 삶을 연민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경외감이 드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자원한 이유는 각하를 뵙기 위해서였다는 말씀이군요.”
“그래. 자신만큼이나 갤러웨이에 대한 적개심이 큰 사람을 찾다 보니 내가 나왔겠지.”
“제대로 찾기는 했습니다만, 그래서 그 레이디가 뭘 요청했습니까?”
“후견인이 되어 달라더군.”
“아, 역시.”
우터가 탄식했다. 이디스도 미간을 좁혔다. 한 방울의 피도 섞이지 않은 이의 후견을 맡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일단 어떻게 그 관계가 성립되었는가를 놓고 온갖 추문이 들끓을 테고, 후견 관계의 적법성도 공격받을 테니까. 그럼에도 캐서린 더릭이 굳이 앨피어스 로디언을 점찍은 이유는 딱 하나였다.
“정말 생부를 싫어하나 봅니다. 자기가 피해를 보든 말든 가장 엿 먹일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걸 보니.”
“싫어한다는 말로는 충분한 표현이 안 돼.”
앨피어스가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그리고 나도 그렇지.”
그는 이미 캐서린 더릭을 지원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오랫동안 봐온 가신들은 대번에 알아차렸다. 이디스 역시 그랬는데, 그가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웠다. 그리고 그 내심이 얼굴에 드러난 모양이었다.
“왜 그런 표정이지, 이디스.”
“어, 제가 뭘요.”
그는 묘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말을 돌렸다.
“됐다. 나가서 일 봐.”
“제가 일이라고 해 봤자, 그리고 레이디 더릭 이야기가 덜 끝났잖아요.”
그러더니 아주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했다.
“이후의 일은 다트, 우터, 머로우와 상의하면 돼. 베리건, 너도.”
이디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앨피어스가 하나하나 짚은 이름은 후작성의 최고 관료 전원이었다. 딱 하나 재무 책임자인 이디스 아가일만을 빼고 말이다.
“잠깐, 그거 저만 나가라는 말씀인 것 같은데요?”
“맞아.”
설마설마했는데 아주 당연하다는 듯 긍정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가라고? 그녀는 황당해서 바로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지금 이 대목에서 어떻게 그녀를 나가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다행히 이게 말이 되냐는 표정을 짓기로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디스가 어안이 벙벙한 채 말을 않는 동안 그들이 그녀 대신 이의를 제기했다.
“레이디 아가일이 왜 나갑니까?”
“각하, 그녀는 저희와 함께 이곳에 있을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저희들을 불러 모은 사람도 레이디 아가일이고요.”
하지만 앨피어스는 눈썹을 꿈틀할 뿐 자신의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누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는 내가 결정한다.”
“하지만 각하.”
“입 다물어, 머로우.”
이디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에는 황당했지만 그렇게 되자 울컥, 화가 치밀었다. 그가 그녀를 내쫓으려 하고 있었다!
6년째 그녀의 자리였던 후작성 최상층의 이 탁자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상상해 본 적도 없을 정도인데 너무나 당연하게 퇴장을 요구하는 태연한 얼굴이 미웠다. 사랑을 말하며 키스를 나누는 사이라도 용납할 수 없는 선이 있었다. 아니, 그렇기에 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관계의 성질이 변화했다고 해서 이전까지의 관계가 청산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그는 이래서는 안 되었다. 그녀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전혀 모르는 듯 태연한 얼굴이었다. 가신으로서 그의 그런 면면을 자랑스러워한 적이 많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저는 이 일에 참여할 권리가 있어요.”
자격을 따지는 대화라니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냥 순순히 쫓겨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왜 제가 여기서 나가야 하나요?”
“그대에게 자격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앞으로의 일을 그대가 알게 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
“방금 말씀하신 두 문장이 논리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그답지 않은 억지였다. 그 스스로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 더 기가 막혔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정말로 앨피어스 로디언답지 않게 그녀를 달래며 타협을 시도했다.
“사흘만 기다리면 그대도 알게 될 거야.”
“그때 가서 알게 될 일이라면 왜 지금은 허락하지 않으시는데요?”
“이미 말했듯이 그대가 미리 알아서는 안 되니까.”
“하.”
이디스는 코웃음을 쳤다.
앨피어스는 살짝 찡그렸으나 그녀의 불손하기 짝이 없는 태도를 지적하지는 않았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가 그녀를 자신의 관료로 대우하고 있다면 모를까, 내밀한 일을 알아서는 안 되는 여자로 취급하면서 무례를 꾸짖을 수는 없었다.
만약 그 비슷한 소리를 했다면 정말 후작이든 애인이든 상관 않고 물어뜯었을 것이다. 실은 잔뜩 약이 오른 상태라 오히려 뭐라고 하지 않는 것이 아쉬웠다. 이디스는 앨피어스를 쏘아보았다.
“왜요? 왜 제가 알면 안 되지요?”
“이디스.”
“그렇게 말씀하실 작정이었다면 처음부터 저를 들이지 마셨어야죠.”
“아, 그렇잖아도 그랬어야 했다고 생각 중이야.”
그 말에는 울컥했다.
“……진심이신가요?”
“물론.”
“제가 나가야만 한다는 말씀이죠, 각하.”
“그래, 나가.”
다른 사람들 앞이기는 했지만 이름 대신 경칭을 불러가며 정색했으니 그녀의 기분이 모두의 눈에 보였을 것이다. 나가고 싶지 않아서 마지막까지 다시 한번 물어보는 꼴이 우습기도 우스웠으리라. 그럼에도 이디스는 거듭 확인했다. 정말로 그 자리에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간절한 눈빛을 알아주길 바랐다.
여기에 있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쌓아 온 시간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과 같았으니까.
“몇 번을 확인해도 내 대답은 같아.”
그러나 앨피어스는 확고했다. 그는 정말로 갤러웨이 공작을 공격하는 일에서 그녀를 배제하려고 들었다. 그가 한 말 그대로, 몇 번을 다시 묻더라도 대답이 달라지지는 않을 터였다.
“좋아요.”
이디스는 억지로 웃으며 일어났다. 안쓰러워하는 눈길들이 따라붙었다. 속이 상했다. 표정도 엉망일 것이다. 그래도 최소한의 품위는 지키고 싶었다. 그녀는 어느 누구와도 다시 눈을 맞추지 않고 그곳에서 나왔다.
“레이디 아가일?”
문을 열자 소어 집사가 하인 두어 명을 데리고 대기 중인 모습이 보였다. 그는 이디스가 먼저 나온 것, 혼자 나온 것, 그리고 직접 문을 열고 나와 걷어차듯이 쾅 닫는 것 중에서 무엇에 놀라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늘 진중한 사람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평상시였다면 변명을 하거나 별일 아니라는 틀에 박힌 말이라도 했을 테지만, 이때의 이디스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고개만 까딱한 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높지도 않은 구두굽으로 카펫을 뚫을 기세라, 아래층에서 오가던 사람들이 놀라 올려다보았다.
* * *
주인과 주인의 가짜—인지 아닌지 당사자도 주변인도 확정할 수 없는—약혼녀 간에 불화가 있다는 소문은 나지 않았다.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전부 함구한 까닭이었다. 이디스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분했다. 본래 그 믿을 수 있는 사람들에는 그녀 자신도 포함되었는데 무리에서 쫓겨나 전전긍긍하려니 답답했다. 더구나 그녀의 심기가 어지럽든 말든 왕태후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귀하신 분께 아침저녁으로 불려가 상대하려니 피곤하기 그지없었다.
“레이디 아가일, 자네도 괜찮은 상대를 만나 보면 어떻겠는가?”
“예?”
“앨피어스에게는 사흘 안으로 청혼하라고 해 두었네. 말을 한 지 이틀 지났으니 바로 내일이겠군.”
“…….”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선선히 그러겠다고 대답했네.”
이디스는 무례라는 것도 잊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태연자약한 얼굴의 왕태후가 탐색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누구인지는 아직 나도 모르지만 아마 캐서린이 아닐까 해.”
왕태후의 옆에 앉은 캐서린 더릭은 애매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후작과의 선에서 탈락을 예감한 레이디 스펜서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고 레이디 러셀은 비교적 덤덤했지만 그린 듯 걸고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그리고 이디스는 뜻밖에 들끓는 속을 느끼고 당황했다. 앨피어스가 캐서린 더릭에게 청혼한다면 그건 상호 거래를 이행하기 위한 전략의 일부가 틀림없었다.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캐서린 더릭은 그 청혼을 받아들이는 척만 할 것이고 둘의 결합은 갤러웨이 공작을 열 받게 만들 것이다.
‘이것 때문에 날 배제한 건가.’
만약 그렇다면 이해할 수 없는 억지를 쓰던 것도 말이 되었다. 그녀가 듣기에 좋은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래, 그럴 수 있지.
이디스는 속으로 읊조렸다. 최소한 앨피어스가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방식이 탐탁찮아도 그녀를 위한 배려이기는 했다.
아마도……. 그렇지만 머리로 하는 이해와 심정적인 수용은…… 별개였다. 그의 판단이 틀렸다고 할 수 없어서 더 화가 났다.
눈앞에서 다른 여자에게 청혼하는 그를 멀쩡하게 볼 자신이 없었다. 그의 약혼녀는 그녀이니까! 그 약혼이란 것이 절차를 다 뛰어넘어 특별 근무에 준하는 계약서로 성립되었다는 사실은,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이디스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질투임을 인정했다. 그녀로서는 장족의 발전이었다.
자존심 때문에 앨피어스에게 대놓고 말할 일은 죽어도 없겠지만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와 캐서린 더릭이 손이라도 잡는다면 그녀는 그 자리에 머물지 못할 것이다.
이런 방법밖에 없었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텐데. 하지만 서두르려면 주어진 상황을 이용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왕태후라는 대단한 인물이 낀 이상 더욱. 이디스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속이 뒤틀리는 와중에도 머리는 민첩하게 돌아갔다.
“어떤가, 레이디 아가일.”
따질 것도 없었다. 왕태후가 건넨 제안의 의미는 단순했다. 조카에게, 나아가 친정 가문에 도움이 될 부인을 얻어주려고 왔으니 달갑잖은 여자를 완전히 떼어내겠다는 뜻이겠지.
“아무나 붙여 주겠다는 말이 아니네. 자네는 꽤 눈이 높으니까 잘생기고 유능한 청년으로 골라 주지. 다만 자네와 격이 맞는 정도로, 이를테면 왕궁의 친위기사라든가. 어떤가?”
“왕태후 전하, 외람되나 그런 말씀은 나중에 하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무슨 말을 그리 하니, 캐서린. 레이디 아가일은 너보다 연상이고 혼기도 많이 넘겼어요.”
캐서린이 뜨악한 표정을 채 다 감추지 못하고 이디스에게 눈짓했다.
적당히 끊으려다 더한 소리가 나오게 만들었으니 미안한 것이다. 그러나 이디스는 지금 왕태후가 하는 말을 한참 전에 이미 지겹도록 들었다.
듣기만 했겠는가. 일일이 반박하고 물리쳤다. 따끔거리기는 했어도 그녀에 신상에 실제로 영향을 끼친 경우는 하나도 없었다.
충분히 익숙해진 지 오래이니, 화자의 신분이 높다고 새삼스럽게 더 아프지는 않았다. 그녀는 보는 사람들이 놀라워할 정도로 동요 없이 왕태후의 말을 받았다.
“말씀 감사합니다, 왕태후 전하.”
“인사는 됐네. 이런 것은, 궁정의 귀부인이 마땅히 베풀어야 하는 은사이기도 하니까.”
“예, 그렇지요. 하지만 제게는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라고?”
“저는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 말 앞에는
‘앨피어스가 아니라면’이라는 전제가 붙는 건가?”
얼마 전까지였다면 왕태후의 질문을 단호하게 부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이올라 갤러웨이로부터 시작된 후작성의 폭풍 속에서 이디스가 겪은 일이 꽤 많았다.
그에 따라 그녀의 생각도 상당히 바뀌었다. 때가 되어 하는, 해야만 하는 결혼에는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그렇지만 함께하고 싶은 남자는 있었다. 이디스는 저를 꿰뚫을 듯 응시하는 왕태후의 눈빛을 받으면서도 의연하게 대답했다.
“그런 셈입니다.”
“내가 허락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 텐데. 자네는 영리하니까.”
이디스는 입을 열어 대답하는 대신 옅게 미소했다. 왕태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래도 필요 없다?”
“죄송합니다, 왕태후 전하.”
“내가 잘못 보았군.”
“…….”
“말귀를 잘 알아들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뭐라고 대답해도 무례한 말대꾸가 될 것 같았다. 이디스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왕태후는 그녀가 지금이라도 말을 바꾸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잠시 침묵했으나 그녀는 끝까지 버텼다. 결국 다시 입을 연 사람은 왕태후였다. 그리고 이번의 말은 조금 더 매섭고 노골적인 비난조였다.
“그렇게 후작부인이 되고 싶은가?”
“왕태후 전하.”
“조용히 있어라, 캐서린. 대답해 보게, 레이디 아가일.”
그냥 참고 넘기는 것이 최선임을 알았다. 그게 아니라면 밑도 끝도 없이 사죄하거나. 하지만 둘 중 어느 쪽도 탐탁지 않았다. 왕태후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상관없지만 가만히 있다가 왕태후의 생각이 진실인 것처럼 되어버린다면 너무 끔찍할 터. 늦은 뒤에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디스는 등을 곧게 세웠다.
“왕태후 전하의 말씀이 부귀와 신분 상승을 원하느냐는 뜻이라면, 아닙니다.”
“그럼 자네에게 남을 만한 말이라곤 하나뿐인데. 설마 사랑이라고 주장할 작정인가?”
“그러면 안 됩니까?”
그리셀다 왕태후는 메마르게 웃었다. 일부러 이디스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는 비웃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좀 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허무맹랑한 전설을 들은 사람의 허탈한 웃음에 가까웠다. 왕태후가 겪은 삶에 비추어 보면 사랑이란 확실히 신기루 같은 것일 터였다.
“내가 사람을 너무 잘못 봤구나. 결혼할 생각은 없지만 사랑하니 앨피어스 옆에 있고는 싶다고? 레이디 아가일, 자네 정말 지독하게 촌스럽군!”
윗세대의 사람으로부터 구식이라는 말을 듣는 것은 생경한 경험이었다. 이디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로디언이 지닌 명예와 앞으로 더 늘어날 재산이 욕심난다고 했다면 이해했을 걸세. 그런데 뭐, 사랑이라고.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레이디 아가일, 참 나! 그래, 자네가 내 조카 앨피어스 로디언을 사랑한다 이 말이지?”
그러나 짤막한 비난으론 성에 차지 않은 듯, 왕태후는 계속해서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말하는 속도가 빠른 데다 완벽한 수도 억양으로 구사되는 던켈드 어를 놓치지 않고 들으려니 귀가 아프고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마지막에 앨피어스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다면 정말 넋이 나갔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간신히 왕태후의 말을 받을 수 있었다.
“……하문하신 것인가요?”
“오, 그래. 다시 한번 정확하게 듣고 싶으니 말해 보게.”
정작 들어야 하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처음으로 하기에는 아까운 말이었다. 그렇지만 왕태후의 심기를 크게 거슬러 놓고 이제 와서 못 하겠다고 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디스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왕태후의 눈동자를 곧게 응시했다. 그래도 그 진녹색 눈빛만큼은 앨피어스와 꼭 닮아 있어 황망한 중에 반가웠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다. 저는 그를 사랑합니다.”
왕태후가 눈을 부릅떴다. 각오했던 바와는 달리 비웃는 말이 바로 나오지는 않았다. 스스로는 몰랐지만 이디스의 대답은 단순한 확인이 아니라 일종의 선언처럼 들렸다.
담담한 목소리는 물론 평온한 미소가 그녀의 말을 굳건히 받쳐, 의심하는 사람을 도리어 우습게 만들었다. 왕태후의 곁에 있던 레이디들은 경외에 근접한 눈으로 이디스를 바라보았다. 예상 밖의 반응에 목이 뻣뻣해졌다. 이디스는 마른침을 삼키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이만 나가게.”
한참 만에 축객령이 떨어졌다. 계속 시달리느니 차라리 쫓겨나는 편이 나았으므로 이디스는 두말 않고 일어섰다.
몸을 굽혀 절하고 나오는데 등에 꽂히는 시선이 꽤 따가웠다. 왕태후 혼자만은 아니고 캐서린 더릭과 나머지 두 레이디들까지 모두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듯했다.
* * *
이디스는 바로 돌아가지 않고 성을 한 바퀴 돌았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 찬 바람을 맞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일부러 외진 길을 골라 다녔다. 후작성의 구조는 물론 사용인들이 오가는 경로와 시간대까지 완벽하게 꿰고 있었으므로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성의 외벽과 종탑 사이로 길고 좁은 길이 나 있었다.
냉엄한 성벽과 높다란 탑이 두 겹의 그늘을 드리워 여름에도 서늘한 길이었다. 이디스는 그 길을 음미하듯 천천히 걸어 통과했다.
차디찬 겨울 공기가 그녀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밝은 곳으로 나왔을 때, 이디스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싸늘하게 식은 상태였다.
그래도 기분은 많이 진정되어서 머리가 제대로 돌아갔다. 차분해진 상태로 아까의 일을 되새겨 보니 조금 민망하기도 했다.
왕태후에게 그렇게 대서지 않는 편이 좋았을까? 이미 엎지른 물이니 어쩔 수 없지만……. 아니, 아니다. 만약 똑같은 말을 다시 듣게 되더라도 이디스가 달리 반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왕태후의 말은 그만큼 억압적이고 불쾌했다.
앨피어스와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디스가 지금껏 살아온 삶을 송두리째 뒤엎으려는 것이었으니까.
면전에서
‘작작 하십시오’라고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디스는 충분히 예의를 차렸다.
‘정말이지, 내가 왜 그런 소릴 들어야 하냐고.’
무슨, 선을 보라고? 잘생기고 유능하지만 신분상의 격차는 없는 누군가와? 당신의 조카와는 어울리지 않으니 조건이 맞는 상대에게 치워 버리겠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아무리 왕태후라도 이건 너무 지나친 처사였다. 만에 하나 앨피어스와 더 이상의 진전이 없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끝날 일이었다.
타인을 위해서 생면부지의 남자에게 자신을 넘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식으로 살 수 있는 부류였다면 지금 여기에 있지도 않을 것이고. 이디스는 눈썹을 찡그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손해 배상이라도 청구할까.’
물론 청구 대상은 로디언 후작 앨피어스 로디언이다. 애초에 이 모든 일이 그로 인해 일어났던 것이니까. 더구나 이틀째 냉전 아닌 냉전이 지속되는 원인도 그가 그녀에게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해서였다.
사직을 하네 마네, 약혼녀로만 남네 마네 온갖 소리를 했어도 수년간 이디스가 후작성의 일원으로 살아오면서 가졌던 이름은 후작의 재무관이었다.
그 사실을 잘라내는 것은 이디스의 지난 삶을 잘라내는 것이요, 나아가 앨피어스와의 세월까지도 잘라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식으로 자신을 무안 주고 내쫓을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난 아직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도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몸부터 붙고 마음도 있었던 것까지 확인했지만, 그 뒤는 여전히 미확정 상태였다.
떠나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다가 갑자기 너무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래, 그렇지. 떠날 생각도 했었다. 이도 저도 아닌 채 애매하게 매여 있느니 다 버리고 떠나는 쪽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여겼으니까.
그런데 그 사이에 앨피어스가 앞뒤 다 떼고 저돌적으로 머리를 들이밀어서 떠나느니 마느니 하는 생각을 홀라당 잊었던 것이다. 이디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나씩 되짚어 볼수록 무엇 하나 확실하게 고정된 것이 없었다. 망연해하는 그녀의 얼굴로 찬 바람이 덮쳤다.
“으, 추워.”
이디스는 빨개진 귀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종종걸음 쳤다. 사실 실버글렌의 겨울 날씨에 아주 익숙한 사람이라도 오래 나와 있는 것은 좋지 않았다.
그녀는 바로 들어가 후작부인의 방으로 직행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 결심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성의 뜰로 나가는 길목에서부터 심상찮은 소란이 느껴졌다.
많은 사람이 분주하게 움직일 때 특유의 어지럽게 뒤섞인 소음이 들렸다. 뜰로 나가 보니, 과연 말을 부리고 짐을 옮기며 힘껏 고함을 질러 의사소통을 하는 장정들로 온통 떠들썩했다.
후작성의 하인이란 하인은 죄 나와 있었다. 뿐만 아니라 평소에는 별관이나 개별 근무지에 흩어져 있는 기사들까지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심지어 갑옷과 무기 등을 챙겨 옆구리에 낀 채로. 쇠붙이의 절그럭절그럭 소리가 제법 살벌했다. 이디스는 당황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눈앞에서 오고 가는 사람 모두 면식이 있었지만 불러 세울 만한 얼굴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더구나 다들 바빠서인지 두리번거리는 이디스에게 눈길도 안 주고 쌩하니 지나쳐 갔다.
약간 짜증이 났다. 그러나 이 어이없는 광경을 놓아두고 떠나기에는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고, 장마철의 급류처럼 제 갈 길만 휘몰아치는 남자들 한가운데로 헤치고 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그 틈바구니에서 만만한 사람이 하나 보이기는 했다. 평소에는 속 터지는 소리나 일삼는 위인이지만 모처럼 아주 반가웠다. 이디스는 손을 높이 치켜들어, 주로 기사들에게 명령하는 중인 그 사람이 자신을 볼 수 있도록 휘저었다.
“다트 경!”
“어, 레이디 아가일.”
기사단장은 약간 놀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바로 이디스에게 다가오는 대신 좌우로 눈을 굴리면서 뭔가를 찾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 어째 도망가려고 틈을 살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물론 이디스는 무시했다.
“다트 경! 나 좀 봐요!”
시선을 고정한 채 콕 찍어 부르자 더는 버틸 수 없었는지, 다른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투구와 검, 석궁 등을 바리바리 든 다트가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이디스에게 왔다.
“레이디 아가일, 왜 여기 나와 있어?”
“그거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요. 경은 여기서 뭐 해요?”
“그, 나야 내 일을 하고 있지.”
그러니까 그 일이 무슨 일이냐고. 언변도 모자란 사람이 말을 돌리려고 하니 오히려 의심을 부추겼다. 이디스는 노골적인 의심의 눈초리로 기사단장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색하게 하하 웃으며 뒷걸음질 치는 것을 따라붙었다. 극소수의 인원이 오래 부대끼며 지내 온 까닭에, 로디언 후작성의 가신들은 가능한 모든 조합으로 의견 충돌을 경험한 바 있었다. 당연히 이디스와 다트 역시 이런저런 문제로 적지 않은 말다툼을 했었다.
돈을 관리하는 사람과 돈 쓸 일이 많은 사람 사이에는 사시사철 트러블이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들의 언쟁 전적은 이디스와 다른 가신들에 비해 아주 약소했는데, 어째서인가 하면…….
“빨리 말하지 그래요.”
“뭘? 뭘 말해?”
“눈동자 흔들리는 거 다 보이거든요.”
이디스의 승률이 9할에 육박하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그녀가 최고 재무관이 되고 나서 한 해가 채 되기 전에 고정된 승률이었다. 다트는 숫자에 약했고 이디스는 즉석에서 큰 금액을 계산하는 데 능했다. 몇 번 붙어 본 기사단장은 후작령 최강의 기사로서 질 게 뻔한 싸움을 먼저 붙지 않는 현명함을 찾기 시작했다. 아주 바람직한 선택이었다.
계속 지기만 해서인지 숫자가 끼지 않은 일이라도 이디스와 붙으면 말려들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이번에도 그는 상대가 그녀라는 것만으로 스스로 패색을 찾아 둘렀다. 온몸으로 나 지금 너에게 떳떳하지 않은 일을 하던 중이라고 표시 내고 있는데 어떻게 그냥 넘어가겠는가! 이디스는 다트를 노려보았다.
“경, 이실직고하고 평화 찾읍시다.”
“…….”
어지러울 정도로 눈을 굴리던 기사단장은 결국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각하께서 사냥 준비를 지시하셔서.”
“사냥? 무슨 사냥?”
“그게 그러니까 올해는 사냥제 시즌도 애매해졌고 겸사겸사 말이지.”
“무슨 겸사예요, 무슨 사냥을 무슨 일에 겸해서 해.”
“그으게 말이야…….”
그러고도 한참을 빙빙 돈 끝에 원하던 정보가 나왔으나 이디스는 웃을 수 없었다. 웬만해야 웃고 말지, 다트가 말해 준 전말은 너무 어처구니없었기 때문이다.
“레이디 더릭에게 청혼하기 위해 은여우 사냥을 간다고요?”
은여우를 잡아 바치면서 하는 청혼은 로디언 가문의 전통적인 방식이었다. 초대 후작이 그렇게 했다고 전해 내려왔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저 옛이야기로만 남았고, 보통은 은여우 표식을 넣어 만든 세공품으로 대체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그걸 되살리다니 기가 막혔다. 애초에 진짜 존재하는지도 불분명하지 않나? 혹시 로디언 가문 출신인 그리셀다 왕태후가 그러라고 주문하기라도 했을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디스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아니, 레이디 더릭에게 청혼하신다는 건…….”
“가짜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알거든요.”
“어? 레이디 아가일, 그게 말이야.”
“됐어요.”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상대의 말을 잘라먹었다. 엄연히 무례였지만 체면 차릴 여유가 없었다. 본래 깐깐하게 격식을 따지지 않는 데다 그녀에게 관대하기도 한 다트도 뭐라고 지적하지 않았다.
아마 그녀의 살벌한 표정도 그의 침묵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로부터 대여섯 시간 후. 앨피어스는 기사단을 이끌고 사냥을 떠났다. 아예 한밤중에 길을 나섰다. 성의 손님이자 귀부인인 왕태후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기사단은 미리부터 성 밖에서 대기했고, 앨피어스와 다트가 마지막으로 나와 합류했다.
“출발하지.”
“예.”
모닥불을 피워 놓고 기다리던 이들이 추위에 뻣뻣해진 몸을 풀며 말에 올랐다. 실버글렌에서도 최북단에 있는 로디언 숲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되므로 한시가 아까웠다.
기동성이 떨어지는 마차는 한 대도 가져가지 않고 짐말조차 훈련된 군마로 대체했다. 때문에 기마에 익숙하지 않거나 말을 무서워하는 하인들은 대거 제외되었다. 하인이 해야 할 역할은 기사의 종자에게로 갔다. 기사만큼 능숙하게 말을 몰지는 못해도 떨어지지는 않을 테니까.
“윽.”
단 선두의 속도에 맞추려면 필사적으로 말을 몰아야 했다. 후미에서 간간히 억눌린 비명과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물론 앨피어스는 그런 것 따위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말을 재촉했다.
“이랴.”
“각하, 각하! 천천히 가십시오!”
옆에서 달리던 다트가 순식간에 뒤처졌다. 깜짝 놀란 그가 뒤늦게 자기 말의 속도를 올려 도로 따라붙었다.
“너무 빠릅니다, 각하. 따라오는 사람이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대가 훈련을 게을리 했다는 뜻이겠지. 시간이 많지 않아.”
“기사들만 가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종자들을 레이디 모시듯 하라는 말은 아니겠지?”
앨피어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홱 돌아보았다. 갑자기 인원을 차출해 급히 사냥을 나서는 이유를 이미 설명했는데 서두르지 말라며 이상한 핑계를 대니 거슬린다는 뜻이었다. 주군의 심기 불편함을 읽은 기사단장은 차마 더 말하지는 못하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속도도 느려. 서두르게 해라.”
“하지만…….”
앨피어스는 더 듣지 않았다. 그는 정면으로 시선을 돌리고 말의 옆구리를 찼다. 또 다시 앞서 나가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다트의 한숨이 쏟아졌지만, 매서운 칼바람과 사나운 말발굽 소리가 그 한숨을 깨끗이 묻어 버렸다. 그리고 이디스는 엉덩이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말에 매달렸다.
“괜찮으세요, 레이디 아가일?”
“안, 괜찮, 그래도, 윽! 어쩔 수 없잖아요.”
그녀를 뒤에 태운 소년은 다트의 친척이자 종자로, 여리여리해 보이는 생김새와 달리 강단이 대단했다. 이디스가 끼어든 것을 들키지 않으려 본래 자리보다 훨씬 뒤로 빠져 거의 맨 끝에서 달리는데도 뒤처지지 않고 말을 몰았다. 하지만 그가 멀쩡한 데 비해, 그냥 남이 모는 말에 얻어 탔을 뿐인 이디스는 죽을 맛이었다.
“말씀하지 마세요, 잘못하다 혀 깨물면 다치니까.”
“이미, 으윽, 알았어요!”
마차를 탔을 때와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폭주였다. 이가 딱딱 부딪치고 귀가 윙윙 울렸다. 그녀는 거의 혼이 나간 상태로 실려 갔다. 이디스가 앨피어스 몰래 사냥에 따라가기로 한 것은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청혼을 하려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자신을 빼 놓고 벌이는 일의 규모가 생각보다 커 오기가 나기도 했다. 그녀는 질색하며 말리는 다트에게 할 수 있는 모든 회유와 협박을 던졌다. 절대 안 된다던 그는 실랑이 끝에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 험한 곳에 꼭 가야겠어?」
「뭐라는 거예요. 위험하지도 않잖아.」
로디언 숲에는 맹수가 드물었다. 은여우의 서식지로 유명하지만 그 은여우도 몇 년째 나타난 적이 없고, 기껏해야 은여우 비슷한 눈여우가 가장 그럴듯한 사냥감이었다. 정식으로 사냥제를 할 때 부득불 우겨 따라 들어가 봤기에, 이디스는 그런 사실들을 제법 잘 알고 있었다.
“다 왔습니다, 레이디 아가일.”
다트는 기사단장으로서 내내 후작의 곁에 있어야 했기에 다트가 이디스의 신변을 돌볼 수는 없었다. 그녀가 눈에 띄지 않으려면 다트 대신 다른 사람과 함께 있어야 했다.
기사단장을 신봉하다시피 하는 종자 소년은 다트가 맡긴 임무 아닌 임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녀에게 자신의 옷도 빌려 주었다.
비슷비슷한 옷을 입은 소년들 틈에 섞인 그녀는 그냥 종자들 중 하나처럼 보였다. 이디스는 땅에 발을 디디며 참았던 한숨을 푹 쉬었다.
비슷하게 행동하는 소년들이 많아서 튀지는 않았다. 굳이 자세히 들여다보면 선이 더 부드럽고 움직임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도 있겠지만 그럴 일은 없을 터였다.
그래도 혹시 몰라 앨피어스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들키면 난리가 날 테고 자존심도 엄청나게 상할 터였다. 그도 장비를 챙기고 지시하는 데 바빠 먼 쪽으로는 눈길을 주지 않았기에 목소리나 겨우 들을 수 있었을 뿐이다.
“뒤에서 할 일은 맡겨두고 바로 출발하지.”
“알겠습니다, 각하.”
숲 입구에서 무리가 나뉘었다. 종자들 중에서는 몇몇만이 숲으로 진입하는 그룹에 선발되었고, 나머지는 입구에서 말과 짐을 지키며 대기하도록 명령받았다.
시간이 지난 뒤에 사냥의 결과물을 거둬들이러 들어가겠지만 그때도 모든 인원이 들어가지는 않을 예정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다트는 이디스가 바깥에서 기다리기를 바랐다. 또한 말할 것도 없이 이디스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갈게요.”
“예? 어딜 가십니까?”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숲으로 들어가는 그룹의 꼬리에 따라붙었다. 처음 와 본 것도 아니고 대충 길도 알고 있는 터라 겁 없이 달려갔다.
기겁한 소년이 말릴 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 * *
로디언 숲은 꽤 넓었지만 지형은 단순했다. 길을 잃을 일이 거의 없을뿐더러, 사람의 발로 다져진 큰길도 여러 개 있어서 그대로 따라가다 보면 어디로든 나갈 수 있다고 했다.
이디스가 후작성의 가신들과 함께 왔을 때 안내해 준 숲지기는 로디언 숲만큼 착하고 품위 있는 숲은 없다고 장담했었다.
그러나 숲은 숲이었다. 사냥이 시작되고 기사들과 종자들이 여기저기 흩어지면서 이디스는 결국 길을 잃었다.
혼자 떨어진 초반에는 여기저기서 기사들의 소리가 들렸지만 앨피어스와 마주칠까 봐 무턱대고 아무 곳으로나 갈 수가 없었다.
이제는 바람소리와 사람의 목소리가 구별되지 않았다. 해의 방향으로 어떻게든 해볼까 싶었지만 숲의 나무들이 너무 길고 빽빽해 그림자를 구별하기가 불가능했다.
‘나침반 정도는 가져올걸.’
뒤늦게 탄식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디스는 무턱대고 따라온 스스로를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답지 않게 정말 멍청한 짓을 했다. 이렇게 따라와서 뭘 확인하고 싶다고, 확인하면 무엇이 그리 대단하게 바뀐다고 무모하게 굴었을까. 지금 생각하니 정말 이성을 잃고 고집을 부렸다. 곤란해 하면서도 데려와 주고, 안전하게 기다리라고 당부했던 다트에게도 미안한 일이었다.
그가 자신의 실종을 알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돌아가면 사과해야 할 것이다. 물론 상황이 버겁기는 했다.
제 자리라고 생각했던 가신들 사이에서 앨피어스에 의해 쫓겨난 것, 연이어 왕태후와 만나 강압적인 말에 시달린 것, 거기다가 앨피어스가 지나치게 성의를 다해 레이디 더릭에게 바칠 거짓 청혼을 준비하는 것까지 중첩되었으니…….
‘스트레스로 제정신이 아닐 만했지, 아무렴.’
어려운 상황에서 자기 자신에게 가혹하게 구는 취미는 없었다.
낙심은 잠시였다. 이디스는 며칠 동안 겪은 일들을 찬찬히 떠올리며 자신을 다독였다. 일부러 쾌활한 척 허리에 손을 얹고 발을 탕탕 구르기도 했다. 아직 체력이 있을 때 어떻게든 길을 찾아 나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녀는 사방을 둘러본 뒤 자기 발자국이 있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온 길을 더듬어 가다 보면 어떻게 큰길 근처로라도 갈 수 있으리라. 재수가 없어 깊은 곳으로 떨어져 들어왔으니 사람 흔적이 없는 쪽으로 더 가지 않는 것이 옳고, 겨울 숲에서 가만히 있으면서 체온을 잃기보다는 움직이는 쪽이 훨씬 나았다.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안타깝게도 북쪽의 겨울 숲이 비상식적인 존재라는 데 있었다. 이디스는 창백한 얼굴로 두리번거렸다.
체감으로 두 시간 넘게 걸었는데 인적을 찾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그녀가 후작성 사람들과 정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하더라도 지금쯤 숲의 바깥으로 나왔어야 했다.
그녀가 아는 한 로디언 숲의 규모는 사람의 걸음으로 충분히 가로지를 수 있는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몰랐지만 주변의 풍경도 사뭇 이질적이었다.
로디언 숲의 초입부터 쭉 이어지던 덤불은 흔적도 없고 저마다 족히 백 년은 됨직한 거목들만 빼곡했으며, 바닥에는 납작한 풀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다. 이 계절에 풀꽃이 말이다! 이디스는 그때까지 바닥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상태였다.
일단 걸음을 멈추고 관찰했다면 자신이 통상의 로디언 숲이라고 할 수 없는 어떤 공간으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길을 잃었다는 사실 자체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저지른 일이 너무 지나친 실패로 이어졌다는 충격 때문에 그녀는 한참을 더 헤맸다. 낯선 향기, 실은 그녀의 발밑에 깔려 있는 풀꽃들로부터 나는 향기가 느껴질 때까지.
“어?”
풀꽃을 발견한 그녀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했고 잠시 후 소스라쳤다.
“이게 무슨…….”
한겨울에 향기 나는 풀꽃이라니.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목덜미가 오싹했다. 이디스는 의심의 여지없는 현실을 선호하고 사람살이를 결정하는 금전을 신봉하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신화도 전설도 믿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별안간 턱 던져진 신비는 전혀 반갑지 않았다.
길을 찾아 나가면 그만인데 왜 이런 것을 목격해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그것으로 끝난 것도 아니었다. 이디스는 헉 하며 뒷걸음질 쳤다.
분명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살아 움직이는 무엇이 나타난 까닭이었다. 비슷하게 하얀 색이지만 우유처럼 뽀얗게 보이는 눈여우와는 전혀 달랐다.
빛이 드문 숲에서 별처럼 반짝거리는 풍성한 털, 그리고 로디언 가문을 연상시키는 짙은 초록색 눈동자. 문헌과 구전으로만 접해 왔고 보는 것은 평생 처음임에도 헷갈릴 수가 없었다.
이디스의 앞에 나타난 것은 실버글렌의 은여우였다. 그것의 이름을 떠올린 그녀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환상이라면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사라지고 없으리라 여긴 까닭이었다.
눈을 질끈 감고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금방 돌아오는 깨끗한 시야에 계속 빛무리 같은 것이 걸렸다.
다시 눈을 감았다. 얼얼할 정도로 꽉 감고 아까보다 더 세게 심호흡을 한 뒤 눈을 떴다. 그래도 여전히 있었다! 몇 번을 반복해도 그녀가 원하는 광경, 즉 아무것도 없는 숲을 볼 수는 없었다. 이디스는 기막혀하며 탄식했다.
“맙소사.”
처음부터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은여우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다가왔다. 사람을 겁내는 기색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친근하게 머리를 들이밀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동물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이디스였으나 저도 모르게 손이 움직였다. 놀랍도록 부드러운 털이 손에 착 감기자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손가락 사이로 넘실거리는 은빛 털은 여전히 환상 같았다. 하지만 손으로 느껴지는 감촉은 너무나 진짜였다. 이디스는 은여우 앞에 쪼그려 앉은 채 멍하니 읊조렸다.
“실존하는 동물이었다니.”
누가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사람이라고는 그녀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은여우가 그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고개를 흔들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아무리 전설적인 동물이라도 설마 사람 말을 하지는 않겠지? 다행히 은여우가 인간의 언어를 유창하게 말하지는 않았다.
앞발을 이디스의 무릎에 얹고 애교를 떠는 모양은 영락없는 개과의 짐승이었다. 다 자란 성체가 아니어서인지 제법 귀엽기도 했다.
그녀는 완전히 경계를 풀고 은여우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실수였다.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있다가 마음을 놓자 급격한 피로가 몰려들었다.
이디스는 묵직하게 뒤덮어 오는 피로에 당혹했다. 기사로 단련하지도, 사냥꾼으로 훈련받지도 않은 육체는 한번 긴장이 풀리자 속절없이 흐물흐물해지기 시작했다.
추위에 장시간 노출되었던 몸은 이미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특히 외부 상황을 파악하는 감각이 급격히 둔해졌고 시야가 좁아지면서 어두워졌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주시하는 위협적인 시선을 감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녀는 가물가물한 의식의 끈을 붙든 채 애처롭게 휘청거렸다.
“이디스!”
의식을 잃기 직전에 들려온 목소리는 귀에 익었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 생각해내는 것보다 그녀의 의식이 닫히는 쪽이 조금 더 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