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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관계의 향방 (6/9)

5. 관계의 향방 

 이틀 뒤. 짐작대로 이번에는 레이디 스펜서가 선을 볼 차례였다. 전날의 레이디 러셀과 다른 점이라면, 나갈 때부터 이디스의 눈에 어떻게든 띄려고 기를 썼다는 점일까. 

“레이디 아가일!”

“아, 레이디 스펜서. 그리고 각하.”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찬바람을 견디기 힘든지, 모피를 돌돌 만 채 마차 앞에서 종종거리던 레이디 스펜서의 볼이 빨갰다. 저렇게 추우면서 마차에 타지 않고 있었던 속내가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레이디 아가일.”

“그러네요, 레이디 스펜서. 남부에서 오신 분께는 좀 쌀쌀하겠지만요.”

“따, 딱히 그렇지도 않은데요.”

“그래도 조심하세요.”

 옆에 있던 후작이 눈썹을 삐딱하게 치켜세웠다. 뭔가 수틀린 것이 있는지 표정이 심상찮았다. 그러나 이디스는 차라리 그런 쪽이 마음 편했다. 그녀가 아는 그 후작 같아서, 이틀 전 낯선 얼굴로 고백하던 그 남자 같지 않아서. 그녀는 싱긋 웃었다. 그러자 후작이 한숨을 쉰 다음 말했다. 

“그대,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네? 아니요, 그다지.

각하께서는 레이디 스펜서와 함께 어딜 가시나요?”

 그 물음에 후작이 기분 나쁜 티를 대놓고 내자, 레이디 스펜서는 흠칫 놀라는 듯했다. 그래, 조각같이 생긴 남자라도 길들지 않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면 꽤 살벌하긴 하지. 하지만 이디스는 충분히 단련되어 그 정도로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왕태후 전하의, 명으로.”

 그는 짜증을 감추지 않고 뚝뚝 끊어 말했다. 

“레이디 스펜서를, 동반해, 버리의 의상실에.”

 왕태후가 지정했다면 어느 장소든 후작의 마음에 기껍겠는가만, 이번에 그의 입에서 나온 곳은 꽤 의외였다. 이디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는 더 설명하고 싶지도 않은지 진절머리 난다는 얼굴로 뚜벅뚜벅 걸어가 버렸다. 

“저기, 후작님…….”

“저기, 후작님…….”

 레이디 스펜서가 반사적으로 옷깃을 잡으려 했지만 후작은 재빠르게 몸을 피했다. 옷이 닿는 것조차 싫다는 매몰찬 태도였다.

 그는 슬쩍 돌아보는 일도 없이 바로 말에 올랐다. 덕분에 레이디 스펜서는 에스코트 없이 혼자 마차에 타야 할 처지가 되었다.

 아마 평생 한 번도 그런 홀대를 받아 본 적이 없을 소녀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고일 것 같은 표정이 되어서 손을 떨었다.

 그러나 레이디 스펜서가 뒤에서 눈물을 흘리든 땅을 치며 오열을 하든 후작이 말에서 내려오는 일은 없었다.

 이디스는 자기라도 레이디 스펜서에게 손을 빌려주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레이디 스펜서는 후작에게 무시당하는 모습을 남에게—정확히는 이디스에게—보였다는 사실이 무척 자존심 상한 듯 입술을 꾹 깨물고 스스로 마차에 올랐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잘못한 기분이 된 이디스는 슬슬 물러났다. 

“이디스.”

“어, 네?”

 말머리를 돌려 이디스의 코앞까지 다가온 후작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한껏 고개를 꺾어 올려다보는 것이 불편해 코끝을 찡그렸다. 그 모습을 본 그가, 어쩌면 살짝 웃은 것 같기도 했다.

눈을 깜박이고 나자 원래의 딱딱한 표정으로 돌아가 있어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레이디 스펜서가 옷을 얼마 가져오지 못했다고 하더군.”

“네. 뭐가 됐든 제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왕태후 전하께서 후작부인의 드레스 룸을 말씀하셨으나 거절했다.”

 왜? 이디스가 꽤 많은 옷들을 꺼냈지만 급한 대로 수선해 입을 만한 값진 의상들은 아직 많이 있었다. 이디스는 아예 건드리지도 않았던, 보석 달린 화려한 드레스들은 레이디 스펜서에게 잘 어울릴 터였다. 그녀는 멀뚱하게 눈을 깜박였다. 후작은 무엇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신경질적으로 혀를 차고 부연했다. 

“그건 다 그대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아니…….”

 아니잖아! 하지만 이디스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후작은 말의 옆구리를 걷어차 성 밖으로 달려 나갔고 레이디 스펜서를 태운 마차도 그런 후작을 따라 허겁지겁 출발했다.

 이디스는 이마를 짚었다. 절벽에 떠밀린 사람처럼 고백했던 후작은 처분을 기다리듯 기가 죽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도저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내쫓았다. 그리고 이틀 동안 열심히 그를 피했다. 또 방에 들이닥쳐서 기다릴까 봐, 집사에게 후작부인의 방 열쇠를 받아 잠그고 다니기까지 했다.

‘대체 어쩌자는 건지.’

 그가 자신의 말을 철회하거나, 혹은 잊은 것처럼 행동한다면 그녀는 바로 맞춰 줄 생각이었다. 그것이 서로에게 가장 이상적인 해결이라고 믿었다.

 그렇지만 이틀 만에 본 후작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의 말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조차 회피 중이었기에.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가 이디스를 불렀다. 

“레이디 아가일.”

 로디언 사람은 아니지만 들어 본 목소리였다. 돌아보니 캐서린 더릭이 잔잔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왕태후의 부름을 전하러 왔을 그녀가 반갑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안색을 굳히고 꺼릴 이유도 없었다. 이디스는 별 내색 없이 캐서린 더릭에게 묵례했다. 

“레이디 더릭.”

“무슨 말을 하러 왔는지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시는 것 같군요.”

“왕태후 전하께서 오늘도 저를 티타임에 초대해 주시기로 했으니까요.”

“네, 그렇지만 아직 준비가 덜 되었어요. 제가 조금 서둘러 왔지요.”

“왕태후 전하의 곁에서 모시지 않아도 괜찮은가요?”

“레이디 러셀이 잘한답니다.”

 새침하게 대답한 뒤 이디스에게 다가온 캐서린 더릭은, 목소리를 낮추어 은밀하게 속삭였다. 

“우리 중에서 왕태후 전하의 진짜 시녀는 걔밖에 없거든요.”

“……아.”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말할 줄이야. 이디스는 황당함과 흥미로움을 동시에 느끼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맞받으며 생글생글 웃는 보랏빛 눈동자에는, 최소한 적의라고 할 만한 것은 들어 있지 않았다. 

“티타임 전까지 저하고 이야기 좀 하실래요?”

 괜찮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디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캐서린 더릭을 후작부인의 방으로 안내했다. 정원을 거닐기에는 남부 사람인 캐서린이 너무 추울 것 같고 안 쓰는 응접실을 열자니 사용인들을 번잡스럽게 만들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후작부인의 방에는 훈기가 맴돌았고, 아침저녁으로 하녀들의 손길이 닿아 말끔했다. 며칠밖에 지내지 않은 가짜 주인이라도 맡아 놓은 사람이 있으니 확실히 방의 분위기가 다르기는 했다.

 공간과 사람이 서로 익숙해지면서 안정을 이루는 것이다. 이디스는 캐서린에게 자리를 권하며, 더 익숙해지기 전에 빨리 이 방을 비워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필요하신 일이 있으시면 바로 불러 주십시오, 레이디 아가일.”

 하녀들이 깍듯하게 인사하고 물러났다. 그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던 캐서린이 감탄했다.

“성의 사람들이 레이디 아가일을 무척 따르는군요.”

“봐 온 시간이 있으니 그렇겠지요.”

“아니, 아니요. 방도 그렇지만, 이미 후작부인으로 대우받으시는 것 같은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대체 왜들 그럴까요, 할 수는 없었다. 입장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하루빨리 돌려보내야 하는 외부인이 알아서 오해한다면 그대로 두어야지. 이디스는 캐서린의 눈을 슬쩍 피하면서 애매하게 말했다. 

“충직한 사람들이라 약간 과한 감이 있기는 해요.”

“그래요? 제 눈에는 다들 진심인 것 같던데.”

 캐서린은 그냥 던진 말이 아닌 듯했다. 이어진 말을 들은 이디스는 눈을 크게 떴다. 

“실은 왕태후 전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신답니다.”

“네?”

“그래서 골치 아파하고 계시지요. 아, 이건 제 표현이니 전하께는 부디 비밀로.”

“레이디 더릭.”

 웃어넘길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디스는 자리에 앉아 생글생글 웃는 캐서린 더릭을 주시했다. 왕태후가 데려온 세 명의 레이디 중 가장 연상에, 옅은 밀빛 머리카락과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아가씨. 본래 왕태후의 시녀는 아니라고 본인 입으로 말했는데 백작 영애인 레이디 스펜서와 달리 어느 가문의 딸인지 짐작 가는 곳이 없었다. 물론 왕도의 귀족 사회에 통달하지 못해 모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보통 여자는 아니었다. 역시나 보통 여자가 아닌 이디스는 알 수 있었다. 

“그 말씀을 제게 해 주시는 이유가 무엇이지요?”

“레이디 아가일과는 서로를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돕는다고요.”

 확실히, 캐서린 더릭은 후작부인이 되기 위해 로디언에 온 것이 아니었다. 

“왕태후 전하께서는 당신 조카인 로디언 후를 유수 귀족의 여식과 결혼시키고 싶어 하세요. 아시는 바겠지만.”

“네.”

“아시나요? 왕도에 결혼 적령기인 레이디가 꽤 많아요. 스펜서와 러셀 말고도 더 있었지요. 뭐 켄트라든가, 웨일스라든가.

 그런데 왕태후 전하께서는 저를 고르셨어요.”

 그것은 이디스도 내내 의문을 가진 부분이었다. 더릭은 이름 있는 가문이 아니었고, 사실상 스펜서와 러셀에 비하면 많이 처지는 집안이었다.

 그런데 그리셀다 왕태후는 왜 캐서린 더릭을 세 번째 조카며느리 후보로 선택했을까? 이디스는 숨겨진 음모나 귀족사회의 정략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로디언 정도로 치우친 땅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의 기질은 그런 데 맞지 않고, 이디스가 좋아하는 것은 정확하게 답이 떨어지는 숫자와 계산 쪽이었다. 하지만 캐서린 더릭의 이야기는 묘하게 이디스의 관심을 끌었다. 

“있잖아요, 레이디 아가일. 우리는 며칠 전에 처음 봤어요.”

“그랬지요.”

“하지만 레이디 아가일, 

‘이건’ 처음 본 게 아닐 거예요.”

 그렇게 말하면서 캐서린 더릭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그녀의 눈이었다. 흔치 않은 보랏빛 눈동자. 어디서 봤더라? 무심코 고개를 갸웃하던 이디스는 섬광처럼 스쳐 가는 깨달음에 깜짝 놀랐다. 

“설마?”

 입으로는 의심을 말했지만 머리로는 확신했다. 그녀는 평생을 통틀어 저 눈동자와 같은 색을 두 번 보았는데 두 번 모두 최근 한 달 이내의 일이었다. 하나는 물론 눈앞의 캐서린 더릭이고 다른 하나는……. 

“알겠어요?”

“레이디…… 더릭.”

“네.”

“갤러웨이 가문과 무슨 관계지요?”

 캐서린 더릭은 산뜻하게 웃으며 긍정했다. 

“현 갤러웨이 공작이 제 친부예요.”

“오.”

 보통 타인의 비밀을 알게 되면 좋을 것 같지만, 그것을 거리낌 없이 이용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면 그저 짐만 늘 뿐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디스는 대귀족가의 사생아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고 마냥 기뻐할 수 있는 인간이 못 되었다. 그녀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낭패 봤다는 심정이 그대로 드러났는지 캐서린 더릭이 눈썹을 늘어뜨리며 놀라게 해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런 이야기를 제게 덜컥 하시면 안 되지요.”

“이 정도 열어놓고 시작하지 않으면 무슨 수로 도움을 받겠어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도 안 믿기는데요.”

“아, 그야 레이디 아가일, 제가 당신을 통해 얻고 싶은 것은 로디언 후작 각하의 조력이에요.”

 이디스는 납득했다. 그리고 어깨를 짓누르는 압박감에 몸서리쳤다. 후작의 약혼녀라는 이름을 단 이래 겪게 된 일들이 많았고 개중 무엇 하나 평범한 것이 없었는데 어째 갈수록 더했다. 이제는 국내 최고로 꼽히는 가문의 혈통에 얽힌 비밀 이야기까지! 

“오늘 레이디 스펜서가 후작 각하와 나갔으니, 내일이나 모레쯤 돌아올 마지막 차례는 제 몫이지요. 그 전에 레이디 아가일이 후작 각하에게 제 말을 전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잠깐, 잠깐만요.”

 왕태후의 티타임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서인지 캐서린 더릭의 말이 조급해졌다. 아니, 아니다. 충격이 완전히 가시기도 전에 훌쩍 뛰어넘어 본론을 들이미는 것은, 어쩌면 조급함이 아니라 의도적인 협상 기술일 수도 있었다.

 이런 페이스에 말려 넘어가면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디스는 손을 들어 캐서린 더릭의 말을 멈추고 헝클어진 머릿속을 정리하면서 느리고 차분한 말투로 질문했다. 

“레이디 더릭의 말을 각하께 전한다면 제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으음.”

 역시, 이것 보라지. 캐서린 더릭은 모종의 말을 반드시 후작에게 전하고 싶어 했다. 물론 왕태후의 입김으로 

‘시녀들’이 돌아가면서 선을 보게 되었으니 기다리기만 하면 후작과 만날 테지만, 그 전에 미리 알려 두어야 안심이 될 만큼 중요한 말을. 그건 이디스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캐서린 더릭이 접근할 수 있으면서 후작의 신뢰가 확실한 인물이라면 이디스가 유일하니까. 하지만 이디스에게 설령 그녀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어떤 필요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캐서린 더릭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확률은 희박했다.

결론, 더 아쉬운 쪽은 명백히 캐서린 더릭이었다. 그러니 사람을 정신없게 만들어 휩쓸어 가려고 했던 것이다.

 밀어붙이던 힘이 의외의 저항을 받아 멈추자 캐서린 더릭은 아깝다는 듯 미소 지었다. 이디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응시하다가 픽 웃어 버렸다.

 그들은 이제 서로가 서로에게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디스는 캐서린 더릭을, 캐서린 더릭은 이디스를 꿰뚫을 듯 바라보았다. 서로를 탐색하면서 말없이 이어가던 대치가 깨어진 것은 이디스가 능청스럽게 던진 말 때문이었다. 

“더 하실 말씀이 없다면 이제 왕태후 전하께 가야…….”

“알았어요, 알았어요.”

 원하는 것이 더 크고 확실한 캐서린 더릭 쪽이 불리하다는 사실은 확실했다.

 그녀는 졌다는 듯 두 손바닥을 펼쳐 흔들며 일어나는 척하는 이디스를 잡았다. 이디스는 씩 웃으며 도로 자리를 잡았다. 캐서린 더릭은 한쪽 눈을 찡그렸다가, 살짝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절실한 사람을 좀 가엾게 봐 주면 안 되나요?”

“물론 그럴 수 있지만, 짚을 것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지요.”

“레이디 아가일, 당신 무슨 베테랑 무역상 같네요.”

“…….”

“아, 칭찬이에요.”

“기분 상하지 않았으니 계속 말씀하세요.”

 이디스가 상인 같다는 말에 멈칫한 것은 오히려 듣기 좋아서였다. 그러니까, 너무 듣기 좋아서. 후작의 소영주 가문 출신 운 좋은 약혼녀가 아니라, 후작의 재정을 책임지는 재무관인 본연의 그녀에게 캐서린 더릭의 말은 꽤 급 높은 찬사였다.

 하지만 그걸 티 내서는 안 되니까 그냥 놀란 척하고 넘어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디스는 표정을 갈무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캐서린 더릭은 그런 이디스의 반응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조금 더 은밀한 어조였다. 

“저는 후작 각하께 거래를 제안하려고 해요.”

“거래라고요.”

“맞아요.

 그 거래가 성공한다면 저는 제가 원하는 것을 얻고, 레이디 아가일은 다음날 당장이라도 후작 부인이 될 수 있어요.”

“네?”

“그런 방법이 있어요. 어쨌든 왕태후 전하께 방해받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에요.”

“그런가요.”

“아, 인정해요. 내 쪽이 훨씬 절실하지요. 하지만 나쁜 제안은 아니잖아요?”

 캐서린 더릭의 오해를 정정해 줄 수 없었던 이디스는 떨떠름한 얼굴로 상대의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들려온 말에 기겁했다. 

“당신을 사랑하는 후작 각하에게도, 그를 사랑하는 당신에게도.”

 맞는다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지라, 침묵만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그러나 캐서린 더릭은 이디스의 묵묵부답을 다르게 해석한 듯했다. 그녀는 후작과 이디스의 사랑을 애틋하고 극적인 그 무엇으로 각색해 칭송하기 시작했다.

 작정한 달변가의 입에 오르자 앨피어스 로디언과 이디스 아가일의 관계는 가히 세기의 사랑이라 부르기에 손색없는 무엇으로 탈바꿈했다.

 신분 격차를 못마땅하게 여긴 집안 어른—그리셀다 왕태후—의 반대, 후작의 겉모습과 재산과 지위—그 모든 것을 제외하면 도대체 무엇이 남는지 모르겠지만—를 탐내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으려 하는 악녀들, 그럼에도 서로의 손을 놓지 못해 시련을 꿋꿋이 버텨내는 연인. 나름대로 근거도 있었다.

 후작은 그리셀다 왕태후에게 도리를 다하면서도 세 명의 레이디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변경의 후작이라고 꺼렸다가 그 미모에 혹한 레이디 러셀은 큰 무안을 당했다고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냉랭했다고 들었어요.

에스코트는커녕 일행으로도 안 보일 만큼 뚝 떨어져 걸어야 했다더군요.”

“그건 다른 이와 닿는 것을 꺼리셔서…….”

“그렇다고 무슨 전염병자처럼 멀리하는 건 일반적이지 않잖아요?”

 이디스는 반사적으로 후작을 비호했지만 캐서린의 말이 맞았다. 캐서린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 후작을 차지한 레이디 스펜서도 비슷할 거예요. 똑같은, 혹은 더한 무시를 받을 텐데 돌아와서 울까 봐 걱정이 크답니다.”

“그러시군요.”

“어머, 물론 저는 아니에요. 약혼이야 할 수도 있고 깰 수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보자마자 알았지요. 후작께는 당신밖에 안 보이는 것 같더라고요.”

‘누구 이야기야?’ 

“저는 귀족 사회에 드문 그 애정에 감명을 받았답니다. 그러니 부디 그런 당신들을 도울 수 있도록 해 주세요.”

 마지막 맺음까지 그야말로 유려했다. 캐서린 더릭의 말은 참으로 우아하고 매끄러운 데다 진실성 넘치는 호소였다.

 그러나 이디스는 상대의 말에 감동하지 못했다. 그녀는 뻣뻣하게 굳은 채 캐서린 더릭의 이야기를 들었다. 타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후작과 자신의 관계가 

‘반대에 부딪쳐 마땅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 *

 왕태후와의 티타임이 끝나도록 후작은 돌아오지 않았다. 보나마나 레이디 스펜서가 무리수를 두었으리라고, 이디스는 거의 확신했다. 눈치로 본 소녀의 각오가 대단해 보였던 것도 있고, 왕태후가 지나가듯 흘린 말도 그녀의 추측에 근거가 되어 주었다. 

「그 애는 스펜서 가문의 금지옥엽이라 아침저녁 같은 옷 입는 것만 해도 괴로울 거야.」

 정작 본인은 선왕에게 홀대받으며 어려운 시절을 버텼다던데, 레이디 스펜서가 부리는 사치는 당연하게 비호하다니 역시 아무나 왕태후까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인사를 하고 물러나온 이디스는 온몸에 돋은 소름을 털어내듯 몸서리쳤다. 

“무슨 일이십니까, 레이디 아가일.”

“어? 아, 집사님. 아무것도 아니에요. 왕태후 전하의 식사 준비 때문에 오셨나요?”

“그렇습니다.”

“고생이 많으시네요.”

“아닙니다.

레이디 아가일이야말로 노고가 크십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소어 집사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데, 캐서린 더릭과의 일 때문인지 여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말들이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이디스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의아한 듯 바라보는 소어 집사에게 작게 속삭였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진실만을 담은 말이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남들에게 들리지는 않을 정도로. 

“저야 시한부니까 버틸 만하지요.”

“예?”

 그러나 소어 집사는 이보다 더 충격적인 말이 또 없다는 투로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반문했다. 

“아니, 저, 집사님.”

“집사, 왕태후 전하께서 들어오라 하시네.”

 덩달아 놀란 이디스가 더듬거리며 할 말을 찾지 못할 때 왕태후의 방문이 열리고 레이디 러셀이 소어 집사를 불렀다. 왕태후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노릇. 소어 집사는 평생을 그리 살아온 사람답게 바로 자세를 가다듬고 눈빛을 달리했다. 하지만 걸음을 떼기 직전 소어 집사는 빠르고 간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레이디 아가일. 왕태후 전하를 뵙고 난 다음에 찾아뵙겠습니다.”

 허락을 구하는 물음이 아니었고, 그의 어조가 하도 급박했기에 이디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천천히 돌아선 그녀는 걸음 걷는 방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어색하게 발을 들어올렸다.

 간신히 후작부인의 방으로 돌아간 이디스는 정신적, 육체적 피로에 떠밀려 푹 엎어졌다. 침대에 모로 누운 채 끙끙 앓는 그녀를 본 앤이 놀라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지만, 대답할 기력도 모자랐다.

 겨우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은 이디스는 그대로 잠들었다. 

* * *

 깃털 따위가 뺨을 간질이는 감촉에 눈을 떴을 때는 사위가 캄캄했다. 이디스는 눈을 깜박였다. 뺨과 턱 근처를 맴돌던 간지러운 무엇인가가 아쉬운 것처럼 한 번 더 살짝 닿았다가 떨어져 나갔다.

눈에 힘을 주어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자 흐리던 시야가 또렷해졌다. 

“……깼나.”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진녹색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후작이었다. 이디스는 헛숨을 들이켰다.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문을 안 잠갔던데.”

 열쇠 사용하는 습관이 안 들어서 잊어버렸다. 그녀는 혀를 차며 자책했다. 

“소어에게 이상한 소리를 했다기에 왔는데 피곤해 보여서 깨우지 않았다.”

“제가 뭐라고 했지…… 아무튼 그런 거라면 깨우시지 그랬어요. 지금 몇 시예요?”

“여덟 시, 아니, 아홉 시쯤 되었겠군.”

 이디스는 으악, 하고 짧게 탄식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너덧 시간을 내리 잤다는 뜻이었다. 모두 자는 시간도 아니고, 다들 할 일이 있을 때 팔자 좋게 늘어져 있었다니! 

“내가 못 살아…….”

“꽤 피곤해 보이던데.”

“이렇게 자야 할 정도는 아니었어요.”

“그렇다면야.”

“각하는 언제 돌아오셨어요?”

 그 말은 어쩐지 바가지를 긁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잠에서 깨자마자 머리를 팽팽 돌리기 시작한 이디스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후작만 미묘하게 반응했다가, 아무렇지 않은 그녀의 얼굴을 살핀 다음 퉁명스럽게 뱉었다. 

“일곱 시 반 정도.”

“저런, 레이디 스펜서가 어지간히 작정했나 봐요.”

 후작은 말도 말라거나, 정말 끔찍했다거나 하는 식으로 표현하는 대신 이를 드러내며 눈을 찡그렸다. 열 살 정도 차이 나는 어린 여자아이라는 것부터 꺼려졌을 텐데, 질질 끌려 나가 여자아이의 옷 이야기로 반나절을 죽이고 왔으니 그럴 만했다. 그래도 오늘의 비극 속에서 한 사람 정도는 행복했을 것이다. 이디스는 졸지에 이득을 봤을 버리 부인을 생각하고 빙긋 웃었다. 

“재미있나?”

“아니, 각하 때문에 웃은 건 아니에요.

버리 부인이 돈 좀 벌었겠구나 싶어서.”

 이디스의 표정을 보고 시비조로 나왔던 후작은, 대답을 듣고 나서는 그녀를 따라하는 것처럼 히죽 웃었다. 그의 생김새에는 정말 안 어울리는 표정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거의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 돈이 누구 돈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가 다음 말을 하지 않았다면. 

“설마, 각하께서 지불하셨어요?”

“내가 안 내면 누가 내나.”

“왕태후 전하께서…….”

“내 주실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스펜서 가문에 청구서를 쓰세요.”

“이미 어음으로 끊어 줬어.”

“세상에!”

 핏기가 가신 얼굴로 어물거리던 그녀는 거의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레이디 스펜서가 두르고 다니는 옷은 하나하나가 초고가였다. 물론 버리의 의상실에서 왕도의 수준에 댈 정도로 어마어마한 재료를 쓰지는 못하겠지만, 부족해도 그 눈에 맞출 정도라면 만만치 않을 터. 심지어 한 벌도 아닐 텐데, 그 돈이 후작의 주머니에서 나갔다니. 

“미치겠네.”

“내 돈을 그대가 왜 아까워하나.”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이디스는 도끼눈을 뜨고 후작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기분을 확 상하게 만든 말을 뱉은 주제에, 정작 후작은 유쾌해 보였다. 

“이제 재무관 아니니 상관 말라 이 말씀이세요?”

“내가 언제 상관하지 말라고 했나. 상관해. 하고 싶은 만큼 하라고.”

 원래 하려던 행동도, 남이 박수치며 자리를 내 주면 어쩐지 망설이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이디스는 경계하는 눈빛을 띄었다. 

“대단히 의심스러운 말씀을 하시네요, 각하.”

“그대가 제발 저려 한 말에 발목 잡히고선 내게 뭐라고 하는군.”

“제가 뭘요. 분명히 각하께서 먼저!”

“난 그대가 내 돈을 아까워하는 이유를 물었던 거다. 그러지 말라고 한 게 아니라.”

 그 말이 그 말이지, 굳이 구별할 만큼 결이 다른가? 이디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의아해하는 것을 본 후작이 혀를 차며 부연했다. 

“표현을 약간 바꿔 보지. 그대가 내게 신경 쓰는 이유가 뭐야?”

“잠깐만요, 그렇게 비약하시면 안 되지요. 각하가 아니라, 엄연히 각하의—.”

“내 돈? 좋아, 반드시 그렇게 말해야겠다면 그렇게 해.”

“…….”

“내 돈에 신경 쓰는 이유가 뭐지, 이디스?”

 이디스는 입술을 다물고 눈을 깜박였다. 맨 처음 떠오른 대답은 습관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몇 년째 그의 재정을 맡았고 그것이 인생의 전부인 양 열정을 쏟았다. 그러니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자 당연히 반응할 수밖에. 하지만 정말 그것이 전부인가?

당연하게 습관이라고 대답하려던 이디스는 집요하게 들여다보는 후작의 눈빛을 보고 멈칫했다. 후작은 그녀가 입 밖에 내지 않은 말까지 다 꿰뚫고 있는 듯했다. 정말 그게 다야? 다 알고 있으니 다시 생각하고 말해. 

“그건.”

 이디스는 말문이 막혔다. 마땅한 답이야 있었다. 당신이니까, 당신이 내가 마음에 둔 사람이니까. 그러나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이미 후작으로부터 고백을 들었기에 더욱.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면서 나 역시 같은 마음이라고 말하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된단 말인가?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행복하게 끝나지는 않는 법이다. 더구나 지금은 왕태후라는 예상 밖의 거물이 개입해 판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다. 일말의 희망을 품고 끝까지 가기에는 결말이 너무 뻔했다. 

“…….”

 후작은 한참 동안 인내심을 갖고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디스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그는 피식 웃고 침대 위로 올라와 앉았다. 그녀는 대경실색했다. 

“뭐 하시는 거예요!”

“언제까지 서서 기다릴 수가 없군.”

“아니, 아, 네. 됐습니다.

그럼 제가 내려갈 테니, 꺅!”

 침대 머리맡에 등을 기대고 앉은 후작은 팔을 쑥 뻗어 이디스의 허리를 낚아챘다. 그녀는 속절없이 끌려가 후작의 가슴에 등을 기대게 되었다.

 이제 보니 후작은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건너온 것 같았다. 각자 걸친 옷이 얇아서 체온이 바로 맞닿는 느낌이었다. 이디스는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후작의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그녀는 자기 힘의 반동으로 후작의 품 깊숙이 안겨들어 버렸다. 

“왜, 왜, 왜 이러세요.”

“방금은 내가 할 말인 것 같은데.”

“이번 말고요!”

“아아.”

 후작은 그야말로 건성으로 대꾸하고는 고개를 숙여 이디스의 목 언저리에 입술을 눌렀다. 말캉한 살점이 꾹 눌리는 느낌에 그녀가 놀라 바르작거렸으나 그는 태연했다.

“그냥 두면 도대체 답 근처에도 못 갈 것 같으니 힌트를 주려는 거야.”

 그는 돌아보려는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냥 손을 얹기만 한 것 같은데 그 힘을 이길 수가 없었다. 

“생각해. 그대가 왜 내게, 뭐 내 돈이든 뭐든, 신경 쓰는지. 왜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대로 있는지. 왜 여기에 있는지.”

“흐윽.”

“모르겠다는 대답은 불가.”

“각하, 제발.”

“알아내라고 돕는 거라니까. 정말 모르겠거든 내가 왜 이러는지부터 시작해 봐.”

 도통 알 수 없는 소리뿐이었다. 하지만 후작은 그것으로 그녀에게 해줄 말은 끝이라는 듯 본격적으로 행동을 개시했다. 

“읏, 각하.”

 옷 위로 가슴을 움켜쥐는 손은,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신사적이었다. 아랫가슴을 부드럽게 받치면서 긴 손가락을 리드미컬하게 놀리는 움직임은 꼭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 같았다. 아프게 쥐어짜는 대신 손바닥으로 문지르면서 윤곽을 희롱했다. 자극으로 천천히 고개를 든 유실도 감질날 정도로 옅게 비틀렸다. 

“흐으.”

 이디스의 잇새로 억눌린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작고 여린 소리였다. 하지만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후작의 손은 그녀의 옷 안으로 파고들었다.

단추가 뜯기고 천이 흘러내리면서 어깨와 등이 차례대로 드러났다. 맨살에 서늘한 공기가 닿자 그녀는 파르르 떨며 애원했다. 

“하지 마세요, 각하. 제발, 그만해요.”

“그대가 맞는 답을 찾아낸다면 생각해 보지.”

“무슨, 으응, 안 된다니까요.”

 후작은 그녀를 앞으로 숙이게 하고 새하얗게 드러난 등에 입을 맞췄다.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으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더 짐작하기 어려웠다. 

“어서 생각해, 이디스.”

 꽃비가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등 위로 입맞춤이 쏟아졌다. 등으로 성적 자극을 느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그의 손이나 입술이 닿을 때마다 저릿한 느낌이 들면서 다리가 꼬였다. 

“으흣, 아…….”

 이제 후작은 그녀를 완전히 엎드리게 만들고 위로 올라탔다. 침대 시트를 구기며 몸부림치는 그녀의 허리를 무릎 사이에 끼워 고정시키고 희미하게 뼈가 도드라진 모든 부분에 이를 세웠다. 얇은 피부에 잇자국이 남는 느낌이 선연했다. 그러나 고통스럽다고 느끼기도 전에 뜨거운 혀가 그 자리를 핥고 지나갔다. 이디스는 붙잡힌 허리를 뒤틀며 끊임없이 소리를 흘렸다.

“이디스.”

“아응, 아, 나, 아아.”

“이디스 아가일.”

“왜, 앗…….”

 한동안 그녀를 자극하는 데 집중하던 후작은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이름을 불렀다. 

“답을 생각해.”

“무, 슨.”

“내가 네게 왜 이러는지, 너는 또 왜 여기 있는지.”

 이틀 전에 들었잖아? 하고 이죽거리듯 덧붙인 후작은 다시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다만 아무 말 없이 애무하던 전과 달리, 간헐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의식을 깨우는 행위를 끼워 넣었다.

 그리고 그게 훨씬 더 힘들었다. 이디스는 눈물이 뺨을 적시는 것을 느꼈다. 후작이 그녀의 등을 타고 내려가 엉덩이의 말랑한 살을 깨물고 이미 습한 열기로 젖어 있는 다리 사이에 손을 밀어 넣을 때였다. 

“아응!”

“이디스, 아직도 모르겠나?”

“아, 아으, 으으응! 모, 몰라, 아…….”

 척척한 비부를 휘젓는 손가락이 여실히 느껴졌다. 녹아내리는 감각은 눈 깜짝할 새 머리로 옮겨왔다. 애써 생각의 가닥을 잡으려던 그녀를 진탕 뒤흔들었다. 후작의 말을 애써 되짚어나가던 이디스는 허리를 들썩이며 울었다.

 왜? 왜 이러고 있지? 그는 나에게 왜 이러고 있지? 그리고 나는 왜? 그녀는 어떻게든 답을 찾으려고 했다. 살 틈에 감춰졌던 곳이 벗겨져 드러났다.

 그곳을 더듬어 찾은 후작은 자비 없게도 손가락으로 꼬집듯이 꾹 잡아 눌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번개에 꿰뚫리는 것 같은 전율이 그녀를 찾아왔고, 다리 사이가 울컥 젖어들었다. 

“아아앙!”

 절정에 올려진 이디스는 덜덜 떨었다. 그러나 후작은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안더니 가뿐하게 몸을 뒤집었다. 위를 보고 눕게 된 그녀는 흐무러진 숨을 간신히 내쉬며 흐린 눈을 깜박였다. 

“이디스, 여길 봐.”

 그 말에 따르자 그녀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은 채 옷을 벗는 그가 보였다. 불끈거리는 근육의 움직임이 묘하게 눈을 끌었다.

 하지만 벗은 상체보다도, 열기를 흘리며 모습을 드러낸 후작의 남성이야말로 시선을 뗄 수 없는 것이었다. 냉정하게까지 보이는 얼굴과는 딴판이었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니지만, 이번에는 특히 더 무서웠다. 벌겋게 물들어 꺼덕거리는 움직임이 흉흉해서일까. 보는 순간 배 속이 확 조여들었다. 이디스는 아까보다 밭은 호흡을 하며 몽롱한 시선을 던졌다. 그녀의 달뜬 얼굴을 본 후작이 약간이지만 누그러진 투로 말했다.

“내가 한 말을 기억하나?”

“무슨, 으응.”

 기억을 더듬기도 전에 허벅지를 문지르는 손길이 주의를 흩었다. 이디스는 신음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 어요…….”

“그러면 곤란하지. 잘 생각해 봐.”

 어르듯이 말한 후작이 늘어진 이디스의 손을 잡고 자신의 중심을 들이밀었다. 손가락과 손바닥에 뜨겁고 단단한 것이 닿자 그녀가 흠칫 놀랐지만 그가 놓아주지 않았기에 손을 뗄 수는 없었다.

 미끈한 살갗과 툭툭 두드러진 핏줄, 그리고 따로 살아있는 것 같은 맥동. 완전히 일어선 후작의 것이 이디스의 손에 문질러졌다. 그와 동시에 후작의 다른 손이 그녀의 젖은 틈을 길게 비볐다. 그녀는 신음하면서 기억을 반추했다. 그는 아주 분명하게 말했다. 

「그대를 좋아해.」

 그랬다. 너무 직설이라 다른 뜻으로 들을 여지조차 없었지. 

“앗, 각하, 아!”

“생각났지?”

 그게 아니라면 쓸데없는 말은 말라고 하면서, 후작은 그녀의 손에 노골적으로 허릿짓을 했다. 잔뜩 곧추선 남성이 손바닥에 비벼지는 감각만으로 몸이 떨렸다. 그런 데다가 그의 손가락이 다물린 곳을 지분거리며 흘러나오는 애액을 찰박거리고 있었다. 이디스는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은 정신을 애써 다잡았다. 그리고 안간힘을 써서 목소리를 쥐어짰다. 

“아응, 그, 각하, 아아, 앗, 당신이, 절, 좋아하, 아, 한다고.”

 반은 신음이었지만 어떻게든 뜻이 전달되기는 한 모양이었다. 후작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맞아, 그랬지. 그게 내가 그대에게 이러는 이유야.”

“아앙! 하, 지만, 으, 응, 그, 나, 몰라앙, 왜, 왜 저, 아!”

 맞는다고 했다! 그 반응에 고양된 이디스는,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허리를 들썩이면서도 떠오르는 말을 뱉었다. 후작은 신음이 섞여 귀가 뜨거워질 것 같은 목소리를 주의 깊게 경청했다. 그러나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이 

‘당신이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하지만 왜 나야?’임을 알아들은 그는 확 찌푸렸다.

이디스는 전조 없이 푹 찔러 들어오는 손가락에 꿰여야 했다. 

“아아아, 아, 잠깐, 아아, 앙.”

 그는 갈고리처럼 구부린 손가락으로 그녀의 안을 사정없이 긁어냈다. 오돌토돌한 살점이 바들바들 떨며 밀어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이 되어 헐떡였다. 

“왜, 아앙, 아아!”

“왜냐고, 이디스. 왜냐하면, 너여서 그렇다.”

“모르, 겠, 아! 각하, 앙, 아응.”

“너여서. 내가 발정하는 여자가, 내가 좋아하는 여자가, 너 하나라서.”

 이디스는 눈을 크게 떴다.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어서였다. 그러나 고개를 든 후작과 눈이 마주쳤을 때 이디스는 알았다. 진녹색 눈 안에 들끓는 열기가 그의 말이 진심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정말로 그가 그녀를 원했다. 그저 가까이 있는 어떤 여자가 아니라 정확하게 이디스 아가일을. 그녀는 전율했다. 이미 잔뜩 달아오른 몸도 그녀의 감정에 반응해 더욱 격렬하게 떨렸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야지.”

“흐으…….”

 후작은 입술을 핥으며 이디스의 다리를 열었다. 움찔움찔 떠는 허벅지 안쪽의 피부를 조물거리며 한계까지 밀었다.

 결국 부끄러운 부분이 다 보이도록 다리가 벌어졌다. 이디스는 그곳에 꽂히는 시선을 느끼며 고개를 모로 돌렸다. 하지만 보지 않는다고 해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완전히 바닥까지 가라앉은 후작의 목소리는 그녀의 귀에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이디스.”

 질척하게 젖은 곳 위를 따뜻한 손이 덮었다. 위협적이지 않은 동작이었지만 손이 닿는 지점부터 불이 붙는 것 같았다. 

“그대는?”

“읏.”

“그대는 어떤지 말해줬으면 좋겠군.”

 살살 쓰다듬으면서 불이 줄어들지 않도록 하는 후작이 얄미웠다.

“알아야 다음을, 하지 않겠어.”

 그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던가? 그녀는 열로 흐려진 눈을 치떠 위를 바라보았다. 진녹색 눈, 북부의 엄혹한 기후를 이기고 높이 자라난 상록수의 빛깔은 틀림없이 그였다. 하지만 눈을 맞추며 빙긋 웃는 얼굴이 낯설었다. 이렇게 그녀를 몰아붙이고 그녀의 내면에 숨은 무엇인가를 끌어내려는 정복자가 정말 그인가? 그녀의, 그 후작인가? 

“말해, 이디스.”

 오래전에 그녀가 원했던, 그러나 차마 바랄 수 없어 포기했던 남자. 

“……각하.”

“그래.”

 이디스는 손을 뻗었다. 후작은 그녀의 손을 피하지 않고 얼굴을 대 주었다. 손바닥에 따뜻한 살갗이 닿자 이상하게 눈이 뜨거웠다.

 무심코 눈을 깜박이자 눈물이 주르르 흘러 뺨을 타고 내려갔다. 

“왜 울지?”

“제가, ……해도 되나요?”

“잘 안 들리는데.”

 후작은 자기 얼굴에 닿은 이디스의 손을 감싸 쥐면서 고개를 숙였다. 몸이 맞닿으면서 미끈거리는 느낌이 자극을 주었지만 그는 그쪽에 반응하지 않고 그녀에게 집중했다.

 달싹거리는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훑으며 귀를 기울였다. 아, 이제는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되살아난 불씨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이디스는 코앞에 와 기다리는 후작의 귀에 애처롭게 속삭였다. 

“각하를 좋아해도 되나요?”

 후작이 웃었다. 그를 알게 된 이래 거의, 아니 확실히 최초로 보는 환한 웃음이었다. 그가 기뻐하는 것은 꽤 많이 보았지만 이 정도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상상도 못 해 봤는데. 이디스는 멍한 눈으로, 심지어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웃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단번에 파고들어오는 그에게 꿰뚫렸다. 

“흐윽……!”

 어째서인지 지난번보다 더 크고 버거운 느낌이었다. 그녀는 그야말로 그로 가득 차 허덕였다. 맞물린 결합부가 저리고 부풀어 오른 아랫배가 뜨거웠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되지, 당연히.

안 될 리가.”

 그가 웃으면서 하는 말이 아주 먼 곳에서부터 오는 울림처럼 들렸다. 이어진 정사는 격렬했다. 후작은 이디스의 한쪽 다리를 껴안고 빠르게 왕복했다.

 젖은 소리가 갈수록 진해지다 급기야 물이 튀는 수준으로 철벅거렸다. 그녀는 흔들리고 흐느끼며 그를 받아냈다. 서로의 체모가 비벼지고 한계까지 달아오른 피부가 마찰할 때마다 울음인지 신음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소리가 흘러 넘쳤다. 

“이디스.”

“으응, 응, 응.”

 후작이 크게 허리를 돌리자 안쪽의 볼록한 살점들이 짓눌렸다. 그녀는 허리를 띄우며 도리질 쳤다. 이름을 불린 것을 알아도 제대로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이디스.”

 대답을 종용하듯, 슬쩍 물러났다가 깊이 찔러 들어오는 그가 벅찼다. 두 번째로 이름을 불렸을 때, 이디스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바르르 떨었다.

 몸속 깊은 곳의 예민한 부분이 문질러지자 호흡이 어긋났다. 하지만 후작은 작정한 듯했다. 그는 팔로 얽어매고 있던 그녀의 다리를 내려놓고 허벅지 안쪽의 말랑한 곳을 양손으로 밀었다. 열려 있던 다리가 더 크게 벌어지도록. 그리고는 그녀의 허리 양쪽을 짚고 강하게 밀어붙였다. 

“아응!”

“이디스, 하, 대답.”

“……아, 아! 네!”

 이디스는 발끝으로 시트를 밀다가 헛발질을 했다. 그녀에게 들어온 후작의 것이 뜨겁게 맥박 치면서 내벽을 휘저은 탓이었다. 후작은 죽 미끄러지는 그녀의 종아리를 잡으며 말했다. 

“잊어버리거나, 아니라고 말하면, 안 돼. 알겠나?”

 그러면서 또 슬쩍 나갔다가 강하게 치고 들어왔다. 무르녹은 내벽을 짓이기듯 문지르는 것은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이디스는 헉 하며 고개를 뒤로 꺾었다. 자신의 안을 완전히 점령한 그의 것 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자극적이면서 동시에 충족된다는 느낌이었다.

 그런 종류의 감각이 존재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이디스는, 직접 겪음으로써 비로소 알게 되었다.

* * *

 아직 해가 뜨기 전의 새벽, 파르스름한 빛이 새어 들어오는 시간이었다. 이디스는 눈앞에 남자의 벗은 가슴이 있는 것에 깜짝 놀랐다가, 자신이 그 탄탄한 가슴에 꽉 안겨 얼굴을 묻고 있다는 데 더 놀랐다.

‘으악.’

 이디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뺐다. 하지만 딱 붙어 있는 몸을 떼어내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그녀가 꿈지럭거리며 물러나려 하자 후작의 팔이 확 조여들었다. 품 안의 여체가 달아나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는 듯 끌어안았다. 결국 두 사람의 몸은 본래 상태보다 더 밀착되었다. 이디스는 당황했다.

 단단하고 따뜻한 몸이 싫지는 않았지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얽혀 있는 것은 너무 부담스러웠다. 

‘어째서 아무것도 걸쳐 주지 않은 거야!’ 살 냄새와 날것의 온기가 그녀를 자극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격렬하게 정사를 치른 상대의 몸이었다. 후작이 퍼부은 자극의 기억이 되살아나자 견디기 힘들었다.

 더구나 그 도중에 주고받은 대화까지, 힘들여 기억하지 않아도 차례대로 떠올랐다. 어쩌면 꿈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먹먹한 순간들이었다. 눈을 떴을 때 그가 보이지 않았다면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만해.”

“헉!”

 그 순간 머리 위에서 한숨과 함께 오싹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이디스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았는데, 본의 아니게 후작의 가슴에 이마를 꾹 누르게 되었다. 후작에게서 앓는 듯 웃는 듯 묘한 소리가 났다. 이디스의 몸을 두른 팔에서도 가느다란 떨림이 전해져 왔고……. 

“각하. 이, 이거.”

“그대 때문이니 가만히 있어.”

 불끈 일어나 그녀의 허벅지 사이를 찌르는 그 무엇의 존재도 뚜렷했다. 예민한 살갗에 툭툭 닿으며 갈수록 부피를 더해가는 열기.

이디스는 다리를 꼬아 후작의 침범을 밀어내려고 했으나 몸이 얽혀 있는 상태에서는 역효과였다. 그녀의 말랑한 살 사이에 끼어 꾹 눌린 후작이 신음했다. 단지 몸을 붙이기 위해 조이고 있던 팔이 느슨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숨 돌릴 수 있게 된 것은 아니었다. 이디스는 등허리를 쓸고 내려가 엉덩이를 쥐는 손에 기겁했다. 

“하지 마세요!”

“그러게 가만히 있으라니까.”

“그건.”

 후작은 손안 가득 쥔 부드러운 살을 꽉 눌러 쥐었다. 이디스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틀었고, 동시에 힘주어 닫고 있던 다리가 살짝 벌어졌다.

 그는 그러기를 기다렸다는 듯 한쪽 다리를 그녀의 다리 사이로 밀어 넣었다. 탄탄한 허벅지가 비부를 넓게 눌렀다. 

“각하!”

“좋아해도 돼, 이디스.”

“대체 뭘 말이에요.”

“나를, 그리고 내가 지금부터 그대에게 할 일을.”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평소에도 제법 괜찮은 음성이지만, 잠에서 깬 직후의 잠긴 저음은 그야말로 치명적이었다.

 저릿한 느낌이 몸을 관통했다. 이디스는 윽 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런 그녀를 보고 후작이 낮게 흘리는 웃음마저 관능적이었다.

 분명 이른 새벽의 차가운 기류에 잠이 깼건만, 야릇한 분위기가 그녀를 다시 몽롱하게 만들었다. 이디스는 결국 그를 뿌리치지 못했다.

 후작은 그녀의 귓불을 빨며 애무를 시작했다. 엉덩이를 주무르던 손은 그녀의 허리를 안아 바로 눕힌 뒤 가슴으로 올라갔고, 무릎은 그녀의 다리 사이를 문질렀다. 그의 손안에서 부드러운 살이 이지러지고 볼록해진 유두가 비벼지는 동안, 다리 사이는 급속도로 뜨거워지면서 젖어들었다. 

“으응…….”

 나신과 나신이 뒤엉킨 상태에서 자극이 쏟아지니 젖어드는 것은 금방이었다. 흥분한 비부에서 미끈한 액이 나왔다.

발갛게 달아오른 곳을 적시다 못해 허벅지와 엉덩이 쪽으로 흘러내렸다. 

“응, 앗!”

 가슴을 얕게 깨물리는 순간, 또 왈칵 터지는 느낌이 찾아왔다. 몇 번째인지도 모를 작은 절정이었다. 이디스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들며 신음했다. 높이 휜 허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척척하게 젖은 비부가 무엇인가를 원하듯 오물거리는 감각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침대 시트를 움켜쥐며 다리를 들썩거렸다. 

“흐으.”

 후작이 몸을 슬쩍 물렸다. 무릎으로 버티고 선 그는 상체만 바싹 들이밀며 속삭였다. 

“마음에 들어.”

“무슨, 읏.”

“그대가 좋아하는 모습이.”

 이 인간이 대체!

 이디스는 눈에 힘을 주었다. 미지근한 눈물이 넘쳐 뺨을 내리긋는 것을 후작이 손가락으로 닦아냈다. 그러든 말든 그녀는 뾰족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지만. 

“왜 그렇게 보나?”

“그러는 각하는 왜 그러세요?”

“내가 뭘.”

“각하.”

“그것보다도.”

 그는 개의치 않고 그녀의 눈을 마주 보다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순간적으로 굵게 주름졌다 사라지는 언짢은 기색. 그런 사소한 습관이 그대로인 것을 보면 틀림없이 그 후작이 맞건만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아주 두꺼운 옷을 훌훌 벗어던진 듯 거리낌 없는 그의 태도가 어려웠다. 그녀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주저했다. 그러는 사이 후작이 자기 말을 이었다. 

“호칭을 정정했으면 좋겠군.”

 무슨 호칭? 눈으로 묻자 후작은 이디스의 입술에 살짝 입 맞추고 대답했다. 

“이름으로 불러.”

“네?”

 이디스는 그때까지 무엇을 하는 중이었는지도 잊고 화들짝 놀라 반문했다. 후작이 굵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렇게 놀랄 말은 아닌데. 당연하잖나.”

“그건 각하 생각이시고요.”

“또.”

“아니, 그러니까, 왜 갑자기.”

 그는 그 말에 기분이 상한 듯했다.

“갑자기라니.”

 이디스의 허리 아래로 후작의 손이 쑥 들어왔다. 그녀를 당겨 안은 것이다. 그리고는 몸을 굴려 휙 뒤집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그의 위에 엎드린 자세가 되었다. 아직 흥분이 다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아랫배에 후작의 것이 눌리자 수그러들던 불이 도로 붙었다.

 그녀는 확 피어오르는 열감에 허둥지둥했다. 물론 그럴수록 그와 맞닿은 몸이 마찰되면서 호흡이 가빠졌고, 그 역시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찡그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일어나 앉자, 핏줄까지 선 딱딱한 남성이 튕겨 오르며 투명한 물방울이 튀었다. 

“윽.”

“죄송해요, 아니지, 제가 죄송할 일은 아닌데.”

“뭐라고?”

“사실이 그렇잖아요.”

“……그래, 그대 말이 맞아.”

 후작은 기가 차다는 듯 으르렁거렸지만, 그래도 이디스의 말에 반박하지는 않았다.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는 듯도 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그의 시선이 어디로 향했는지 알아차리고 얼굴을 붉혔다. 

“눈 돌리세요.”

“더 아래로도 괜찮다면.”

 흔들리는 가슴보다 더 아래라면 당연히 안 되지! 이디스는 가슴과 비부를 가리려고 했다. 하지만 후작이 조금 더 빨랐다.

 그는 다리를 세워 그녀의 등을 받치면서 양 손목을 틀어쥐었다. 그녀는 꼼짝할 수 없는 상태로 그의 시선을 받아야 했다.

 아까보다도 훨씬 더 노골적이고 뜨거운 시선이 그녀의 전신을 느리고 집요하게 훑었다. 진녹색 눈동자가 거의 새카맣게 물든 채 이디스의 가슴을, 배꼽을, 그 아래의 어둑어둑하게 그늘진 수풀을 응시했다. 

“보는 것보다 더한 일도 했는데.”

 단지 그것만으로 허리가 떨렸다. 

“그래도 부끄러운가.”

“이렇게, 이렇게 보는 건 이상해요.”

“괜찮아, 예뻐.”

 더구나 날이 거의 다 밝았다. 맨 처음 깨어났을 때보다 훨씬 빛이 늘어나, 주위의 명암뿐 아니라 색도 확실하게 구별될 정도였다.

이디스는 후작의 시선을 좇다 못해 눈을 감아 버렸다. 하지만 그는 그만두지 않고 다시 그녀를 샅샅이 보기 시작했다. 무엇 하나 놓칠 수 없다는 듯 들여다보는 시선이었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느껴질 정도로. 

“그만해요, 각하.”

“미안하지만 안 되겠어. 계속 보고 싶거든.”

 애처로운 간청을 단칼에 거절한 그는 급기야 보이는 것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예쁜 가슴이야. 만질 때도 느낌이 좋아. 아, 유두도. 주위를 살살 돌려주면 금방 일어나서 볼록해지지. 입에 넣으면 더 통통해지는 것 같은데, 그때는 볼 수 없으니 아쉽더군.”

“각하, 제발!”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밑가슴 쪽이 깨무는 맛이 좋아서 흔적을 남기게 돼. 하얗고 우아한 곡선이 그대의 움직임에 따라서 흔들리면 참기 어렵거든. 알고 있나? 지금 거기 내가 남긴 자국이, 다섯, ……여섯 개 있어.”

 이디스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후작의 속삭임을 듣는 것만으로 호흡이 가빠지고 열기가 치달아 괴로웠다. 하지만 그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계속했다. 손목을 쥔 손아귀는 여전히 꽉 죄고 있었다. 

“그 아래로 내려가면, 코르셋도 잘 안 하면서 지나치게 가느다란 허리지. 예쁘다고 생각하는데 가끔은 제대로 버틸 수 있나 걱정도 되더군.”

“……각하, 그만하세요.”

“싫다니까. 배꼽 아래를 쓸어주면 솜털이 곤두서는 것 아나?”

“흑.”

 믿을 수 없게도 말에 희롱당해 다리 사이가 축축해졌다. 그리고 몸을 붙인 상태의 후작과 이디스는 그 사실을 거의 동시에 알아차렸다. 

“다음에 이야기할 참이었는데.”

“그만…….”

“곱슬곱슬한 음모를 걷으면 보일 듯 말 듯하게 불거진 게 귀여워. 지금 그대 얼굴보다도 훨씬 빨갛게 피가 몰려서는, 꿀에 젖어 반들거리는 걸 살살 구슬리면 조금씩 고개를 들지.”

“그만해요, 각하.”

“아니, 그대나 그만해. 거기 키스하면 그대가 신음하는데, 들여다보고 있으면 아래쪽 입이 흐느끼는 것처럼 보여. 발갛게 된 꽃잎 같은 속살들이 뻐끔거려서.”

 소름 끼치도록 음란한 말에 휩싸여 헐떡거리면서 이디스는 뭔가를 깨달았다. 그는 의도적으로 아주 낮은 음성을 내고 있었는데, 그녀가 애원할 때마다 툭 던지는 대답만은 퉁명스러운 악센트였다. 그가 무엇을 바라는지는 명확했다. 

“그 안으로 열고 들어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인데, 혀나 손가락을 물려도 꽉 물지만 역시 가장 좋은 건…….”

“그만, 그만해요, 앨피어스!”

 이디스는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지금껏 그것을 요구하며 바쁘게 움직이던 후작—앨피어스의 입술이 뚝 멎었고, 다음 순간 양 끄트머리가 치켜 올라갔다. 이름 하나를 듣자고 어마어마한 음담패설을 술술 읊은 사람답지 않게 산뜻한 웃음이었다. 

“그렇게 말한다면.”

 분통이 터진 이디스는 눈을 모로 떠 앨피어스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어떤 눈빛을 보내든 그는 아주 만족스러워 보였다. 눈이 마주쳤다. 앨피어스는 이디스를 붙든 채 일어나 앉았다. 조금도 힘 들이지 않고 가뿐하게 자세를 바꾸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엉덩이를 받쳐 들어올렸다.

 점액질의 액체가 길고 가느다란 선을 그리며 흘러내렸고 그녀는 허리를 비틀며 앓는 소리를 흘렸다. 그는 신중하게 서둘러서 그녀로 하여금 자신을 삼키도록 했다. 

“흑…….”

 이디스는 몸서리치며 앨피어스의 것을 받았다. 눅진하게 젖어 있던 곳으로 치고 들어오는 남성의 느낌이 적나라했다.

 자세 때문인지 결합했다는 느낌이 이전까지의 어떤 정사보다도 벅찼다. 그녀는 차마 위에서 움직여 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들릴 듯 말 듯하게 흐느끼며 달달 떨고만 있는 몸을 그가 전적으로 지탱하고 얕게 추삽질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얼마 못 가 기진하는 바람에 결국 위치를 바꾸었고, 그녀는 누운 채 절정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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