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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타인의 시선 (5/9)

4. 타인의 시선

 로디언 후작성 곳곳이 정신없이 분주했다. 그곳에 속한 사람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평소보다 많은 일을 맡았다. 느긋하게 걸어 다니는 사람을 볼 수가 없었다. 신분 낮은 하인이라도 후작의 이름에 누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절대 요란하게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던 소어 집사조차 계단을 두세 개씩 뛰어넘으며 다녔다. 

“커튼과 카펫은 준비 끝났나?”

“20년산 과일주가 이게 전부란 말이야?”

“거기, 거기! 문장이 비뚤어졌다!”

 그리셀다 왕태후가 예고한 방문일까지 딱 하루 남았다. 무턱대고 이미 출발했으니 닷새 뒤에 도착하겠다고 했지만 무례를 꼬집으며 거절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무려 국왕의 모후였다. 갤러웨이 공작의 방문 요청도 내치지 못했는데 왕실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을 어떻게 하겠는가.

 더구나 왕태후의 결혼 전 이름은 그리셀다 로디언이다. 현 후작과는 고모와 조카 사이이기도 하니, 따지자면 완전한 외부인의 방문이 아니라 왕태후의 친정 나들이인 셈이었다. 왕태후의 방문 목적도 그와 관계가 있었다. 며칠 전, 이디스와 대치 상태로 불편한 침묵을 고수하던 후작은 별안간 들이닥친 왕실의 전령을 맞아야 했다.

 전령은 자못 공손한 태도로 왕태후의 친필 서한을 건넸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친애하는 로디언 후, 그대가 내내 미혼으로 지내 우리의 로디언이 후사 없이 위태로움을 걱정했는데, 듣자니 마음에 둔 여성과 약혼을 해 후작성에서 함께 기거하고 있다더군. 아마 왕도가 어수선한 터라 이 고모를 배려하여 알리지 않은 것이라 믿네. 그러나 이제 우리의 폐하께서 왕위를 찾으셨고 왕도는 평화로우니, 후의 고모이자 로디언의 일원 된 몸으로 모른 척할 이유가 없지. 마침 고향 실버글렌이 무척 그립던 참일세. 조속한 시일 내 방문하여 향수를 달래고, 조카와 예비 질부를 만나 혼인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네.

 이 고모의 호의를 부담 없이 받아들여도 괜찮으니, 과도한 손님 대접을 준비하지 말고 그저 기다리도록 하게. 애정을 담아, 그리셀다 헬렌 로디언 던켈드 전령이 가져온 것은 이 서한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후작의 어처구니없다는 눈빛을 못 본 척하며 왕태후가 그야말로 

‘곧’ 도착할 예정임을 시사했다. 

「그래서 며칠이라는 건가?」

「변수가 없다면 닷새 남았습니다.」

「……허.」

 후작은 즉시 측근들을 소집했다. 이디스도 엉겁결에 불려가 앉았다. 바로 직전까지 다 그만둔다는 말을 한 것치고는 뻔뻔스럽지 않은가 싶지만 나머지 자문 위원들이 당연하게 이디스를 챙겼다.

 그녀도 이 일이 대단히 궁금했으므로 입 싹 닫고 끼어 들어갔다. 머리를 맞댄 그들은 짧은 논쟁 끝에 이 사태의 원흉이 되었음직한 이름을 추정할 수 있었다.

 바이올라 갤러웨이, 그리고 갤러웨이 공작. 양심 없는 혼담을 대차게 퇴짜 맞은 부녀가 왕태후를 상대로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이 틀림없었다.

 갤러웨이 공작의 지난 정치적 행보는 왕태후나 국왕 레지나의 호의를 사기 힘들었다. 왕위를 두고 레지나와 경쟁하다가 패배한 트리샤 왕녀를 지원했으니까.

 그의 후계자, 혹은 그 다음 후계자가 공작위를 이을 때까지도 이전의 권세를 회복할 길은 요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갤러웨이 공작 가문 자체를 멸문시키기에는 국왕이 감수해야 할 부담이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새 왕에게는 보다 더 사이가 나쁜 숙적이 따로 있었다. 그쪽에 제대로 된 보복을 가하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갤러웨이에 자비를 베풀 필요가 있었다.

 갤러웨이 공작은 왕의 묵인 하에 이런저런 활로를 모색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왕의 외가인 로디언과의 혼인이라든가. 하지만 그건 다들 알다시피 로디언 후작 본인의 강경한 거부로 파토 났다.

 그것도 꽤나 민망한 사건으로 종지부를 찍으면서 말이다. 후작은 불쾌해하다 못해 이를 갈았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곱게 물러나지는 못할망정, 왕태후로 하여금 친정을 단속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다니. 가신들은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디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갤러웨이의 일은 일이고,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잡아야 했다. 후작은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 관자놀이를 짚었다. 

「왕태후 전하를 못 오시게 할 수는 없으니까.」

 말해 무엇하랴! 같은 가문에서 태어난 혈족이고 고모라고는 하지만 그리셀다 왕태후는 그리 포근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철혈의 왕녀를 낳고 키워냈으며 마침내 왕국을 제패하도록 만든 모친인 것이다. 그런 왕태후가 기다리라고 말한 이상 제아무리 로디언 후작이라도 순순히 따르는 수밖에는 도리 없었다. 특히 이번의 경우 서한에 적혀 있는 바와 같이 약혼녀와 함께여야 했다. 

「양해해 주면 좋겠군.」

「아니에요, 이건 어쩔 수 없지요.」

 즉 왕태후가 왔다가 떠날 때까지 후작에게는 약혼녀가 있어야 했다. 그러자면 이디스가 강경하게 원하고 주장했던 일은 당장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디스는 후작의 난처함을 이해했고 관대하게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어쨌든 후작은 아가일 가문을 봉신으로 거느린 대영주이기도 하고, 지금껏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이디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준 사람이기도 했으니까.

 그냥 그런 것뿐이었다. 그 정도만으로도 후작의 곤란함을 외면하지 못할 이유는 충분했다. 후작의 약혼녀로서 왕태후의 방문 준비를 지휘하는 동안 이디스는 계속해서 그렇게 되뇌었다. 

“레이디 아가일.”

“네, 집사님.”

 왕태후의 방을 비롯해 그녀가 데려올 수행원들의 방을 점검하고 나오는데 소어 집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소어 집사는 후작성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아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후작과 이디스 사이에 일어난 일들 또한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마디도, 표정이나 눈빛으로도 내색하지 않았다. 또한 이디스의 가짜 약혼녀 역할이 왕태후의 방문으로 연장되었다는 말을 듣고도, 그는 아무런 코멘트가 없었다. 대귀족의 집사다운 태도였지만 고마운 일이었다. 

“수선이 끝난 의상들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아, 네. 입어 봐야 할까요?”

“제 생각입니다만, 재봉사가 있는 동안 그러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녀를 진짜 약혼녀, 아니 그 이상으로, 그러니까 후작부인처럼 대하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집사가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니 아랫사람들이 똑같이 하는 것도 문제였다. 이디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후작부인의 방으로 향했다. 기다리고 있던 재봉사와 조수들이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했다. 

“레이디 아가일, 오랜만입니다.”

“그렇군요, 버리 부인.”

 사실은 오랜만이라는 표현조차 오랜만이었다. 버리 부인에게서 마지막으로 옷을 지은 때가 몇 년 전인지도 가물가물했다.

여태까지는 꾸미기에 신경을 쓸 시간도, 번듯한 옷이 필요한 행사도 없었기에 가진 옷으로 충분했었다. 그래서 후작성의 예비, 혹은 가짜 예비 안주인으로서 왕태후를 맞이할 때 입을 만한 옷이 없었다.

 이 문제로 여러 사람이 꽤 골치를 앓았다. 왕태후는 고작 닷새 후를 방문일로 지정했고 그 안에 새 옷을 짓기는 불가능했다. 이디스는 궁여지책으로 오랫동안 닫힌 상태였던 후작부인의 옷장을 열었다. 

“후작부인의 옷을 다룰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시간을 다투는 일을 맡아 줘서 고마워요.”

“확인하시지요. 이쪽은 레이디의 치수에 맞게 수선을 끝낸 옷들이고…….”

 그리고 사흘 전에 버리가 새벽부터 불려 들어왔다. 그녀는 조모 때부터 실버글렌에 뿌리를 내린 까닭에 아직까지 적은 수입으로도 버티고 있는, 후작 직할령 유일의 재봉사였다.

 하루 안에 왕래 가능한 지역 내에서는 가장 나은 실력이기도 했다. 해서 이디스는 고민 없이 모든 작업을 일임했다.

 선대 후작부인의 옷 중에서 유행을 타지 않는 것을 골라내는 일부터 그녀의 몸에 맞춰 고치면서 소소한 부분이나마 새롭게 바꾸는 일까지.

 돈을 가장 효과적으로 쓰는 방법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돈을 지불하는 것이라는 게 그녀의 지론이었다. 오늘 결과물을 보니 역시 그 생각이 옳음을 알 수 있었다. 새것처럼 손질된 드레스들이 가지런히 걸려 반짝거렸다. 이디스는 흡족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은, 일을 맡겨 주신 데 대한 감사의 표시입니다.”

 덤까지 받았다! 버리가 가리키는 쪽을 보니, 두 벌의 드레스가 걸려 있었다. 하나는 평상복, 다른 하나는 외출복. 옷감 자체는 고급이라고 하기 어렵지만 정성 어린 재단과 자수로 보완해 제법 괜찮아 보였다. 

“주문을 받고 만든 것이 아니라서 가봉만 해 두었는데, 레이디 아가일이 입으시면 잘 어울릴 것 같아 드리고 싶어요.”

“저런, 고맙습니다. 잘 입을게요.”

 물론 말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선의인 것 같지만, 실상은 거래를 튼 김에 제대로 잡고 싶은 상인의 속셈이 깔려 있었다.

이디스는 대번에 그 저의를 알아차렸지만 내색 않고 싱긋 미소 지었다. 그녀와 자주 마주친 적이 없어서인지 버리는 자기 생각을 간파당한 줄도 모르는 듯했다. 

“부족한 솜씨라 부끄럽습니다만, 혹 입어보시고 마음에 드시거든 다시 찾아주신다면 기쁘겠습니다.”

“아, 그렇게 된다면 좋겠지요.”

“레이디 아가일을 위해 봄 옷감을 들여 놓겠습니다.”

 이것 보라지. 언짢지는 않았다. 대놓고 내 옷을 사 달라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 영업은 충분히 할 만했다.

 그동안 실버글렌에서 큰 장사를 하지 못했다가 큰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니 상인으로서는 자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만 안타깝게도 버리가 잠재적 대형 고객으로 점찍은 이디스는 계절이 바뀌기 전에 실버글렌을 뜰 생각이었다. 아직 후작에게도, 다른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결정을 내렸다. 

“음, 그 말을 들으니 더욱 고맙고요. 일단 가져온 옷을 입어 보지요.”

“물론 그러셔야지요, 레이디 아가일. 환복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이디스는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고 버리의 말을 받아 넘겼다. 그리고 이것 역시 일이라고 되뇌며 후작부인의 옷을 입어 보기 시작했다.

 그녀가 미처 생각지 못한 점은, 버리는 물론이거니와 후작성의 하녀들에게도 이 시간이 매우 특별한 이벤트라는 것이었다.

 몸에 잘 맞고 불편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한 그녀와는 전혀 다르게 말이다. 

* * *

 이디스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후작부인의 방으로 돌아왔다.

 당연하지만 수선을 맡긴 옷은 모두 이디스의 몸에 완벽하게 맞았다. 버리가 직접 잰 치수로 수정한 새 옷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처음 한두 벌을 입어 본 뒤에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버리도, 후작성의 하녀들도 그녀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재봉을 맡은 버리 본인이 혹시 실수가 있으면 큰일이라고 하니, 하녀들 역시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모두 입어 보아야만 한다고 맞장구쳤다.

 그녀들의 강경한 눈빛을 이길 재간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모든 옷을 한 번씩 입고 벗었으며, 이 옷을 입을 때는 꾸밈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한 조언을 들었다. 전문가의 조언은 돈 주고도 사기 힘든 것이라 듣긴 들었는데 기억은 거의 남지 않았다. 

“아이고…….”

 여기저기가 결렸다. 이디스는 푹신한 이불 위에서 몸부림쳤다. 후작부인의 방에서 가장 매력적인 것, 나중에 아쉬워질 것을 꼽으라면 단연 이 침대와 침구였다.

 시중을 들어주느라 계속 들락거리는 앤은 거울 달린 화장대나 옷장, 창가의 작은 티테이블 등이 너무너무 아름답다고 했지만 이디스에게는 관심 밖이었다.

 실사용자의 입장에서는 편한 것이 최고인 법. 그녀는 베개를 끌어안고 이리 굴렀다 저리 굴렀다 하며 지친 몸을 풀었다. 똑똑. 그러는 도중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맘때면 앤이 올 시간이었다. 이디스는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고 문 쪽으로 고개만 홱 틀어 외쳤다. 

“들어와요!”

 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벌써 자는 건가?”

“어머, 각하.”

 쑥 들어온 사람은 로디언 후작이었다. 이디스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가, 침대 위에 앉아서 그를 맞이하는 상황 자체를 견딜 수 없어 서둘러 뛰어내렸다. 

“차림을 보니 자고 있던 건 아니로군.”

“네, 시간도 얼마 안 되었고요. 무슨 일이세요?”

“내일부터의 일을 좀 이야기하러.”

“그런 거라면…….”

 집무실로 오라고 불러도 되지 않은가? 이디스가 고개를 갸웃하자, 후작이 왜 그러느냐는 듯 눈썹을 까딱했다. 하지만 그녀는 뒷말을 삼켰다.

재무관이 아니라 약혼녀이니 찾아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대답이나 돌아올 텐데, 무엇하러 곤란한 상황을 만들겠는가.

 그들은 현재 아주 애매한 상태였다. 로디언 후작의 재무관으로서 이디스는 사직을 요청했고 후작은 그것을 무시했다.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였다. 당연히 당사자 외의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여전히 재무관이라고 생각했다. 그런가 하면 이디스의 약혼녀 행세는 후작과 모의한 거짓이었고 가신들도 그렇게 알았지만, 후작성의 사용인들은 그녀를 예비 후작부인처럼 대우하고 있었다. 겉으로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갤러웨이 공작 영애가 오기 전의 여느 때처럼 지내고 있었다. 정말 전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 그대로라고 보이지 않는 것까지 완벽하게 원상태로 돌아가지는 않았으니까. 그저 명쾌하게 정리할 수 없어서 미뤄 두었을 뿐이다. 그러니 지금 이 시점에 괜히 그와 자신의 관계에 대한 말을 꺼내서 도로 논쟁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당장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해야 했다. 

“아니에요. 하실 말씀 하세요.”

“좀 앉아도 될까.”

“아, 죄송해요. 이쪽으로 앉아서 말씀하세요.”

 테이블 쪽으로 간 이디스는 후작과 마주 앉았다. 분명한 용건을 가지고 왔기 때문인지 후작은 뜸 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왕태후 전하를 모시는 동안 고생하게 될 거야.”

“아, 네. 괜찮아요. 각오하고 있는 일입니다.”

“얼마나 각오했든 그 이상이 될 거라고 확신한다.”

“음…….”

 도망가지 말라고 다짐하는 건가? 후작의 의도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살짝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얼마나 어려운 사람이든, 맡기로 한 일을 팽개치겠는가. 이디스는 약간 불퉁하게 물었다. 

“각하보다 더하신가요?”

“뭐?”

“무조건 제 각오 이상일 거라 하시니 그런가 해서요.”

 왕태후가 아무리 까다롭고 버거운들 당신만 하겠느냐는 뜻이었다.

 만약 로디언 후작의 자문 위원들이 함께 있었다면 그들 모두 이디스의 말에 동의했을 것이다. 그리고 후작성의 집사와 그 아래 사용인들도, 또 아가일 자작 같은 후작 휘하의 소영주들도, 아무튼 실버글렌 인근에서 앨피어스 로디언을 아는 사람 모두 말이다! 

“이디스.”

 하지만 남들이 다 똑같은 생각을 하더라도 자기 이야기가 되면 기분이 나쁜 걸까. 후작은 한쪽 눈썹을 휙 치켜들더니 아까보다 한 톤 낮아진 목소리로 이디스를 불렀다. 그녀는 약간 긴장했다. 어쨌든 불렸으니 대답은 해야지. 

“……네?”

“내가 그렇게까지 기준 이하인가?”

 그럴 리가 있나. 이디스는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가 서둘러 얼굴 근육을 풀면서 대답했다. 

“아니, 뭐. 딱히 그렇게 표현할 정도는 아니지요.”

“그렇지만? 문제가 있다?”

“그것도 아닌데요. 애초에 제가 왜 각하를 그런 식으로 평가해야 합니까.”

 한 쌍의 진녹색 눈동자가 이디스를 지그시 응시했다. 믿을 수 없게도 후작은 조금 의기소침해 보였다. 세상에, 앨피어스 로디언과 의기소침이라니. 보고 있으면서도 내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녀는 살짝 움츠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말이 없던 후작이 팔짱을 풀고 한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왜? 험한 말이 나올까 봐 저러는 건가? 이디스는 미간을 옅게 찌푸렸다. 기분이 상하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크흠.”

 그러나 후작은 모진 독설을 뱉는 대신 헛기침을 했다. 그답지 않은 행동이라 이디스는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애초에 그의 질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조차 몰랐기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는 생각나지도 않았다. 

“저기, 각하.”

“아니다. 말하지 마.”

 뭘? 어쨌거나 말하지 말라니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선 후작 본인도 아무 말 않고 침묵하니 이디스만 답답해졌다. 할 말이 있어서 왔다더니 각오를 단단히 하라는 것 하나밖에 없었단 말인가?

 아니면 할 말이 더 있었는데 잊었, 아니지. 후작이 그럴 리는 없었다. 아, 머리 아프게. 이디스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그의 속내를 짐작하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그리고 할 말이 있든 까먹었든 빨리 하라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주 노골적으로 빤히 쳐다보았기 때문인지 후작은 얼마 안 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디스는 후작이 어지간히 싱겁게 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방 안에 단둘이 있는 상황 자체가 퍽 부담스러웠기에 그를 붙잡거나 할 말이 끝났냐고 묻지는 않았다.

 문간에 멈춘 후작이 했던 말 비슷한 것을 반복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각오가 되었다니 그렇게 알겠다.”

“네, 걱정 마시라니까요.”

“내일부터 강행군일 테니 일찍 자도록 해.”

 그녀는 자꾸 군더더기 같은 말을 붙이면서 미적거리는 그를 향해 단호하고 확고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가 잡고 있는 문의 고리를 잡아당겨 더 크게 열었다. 

“알았으니 각하께서도 일찍 쉬십시오.”

 후작은 빨리 나가라는 이디스의 제스처를 알아들었다. 그는 원치 않는 기색이었으나 그녀가 하도 단호했기에 어쩔 수 없이 문밖으로 완전히 나가 섰다.

 그녀는 그가 나가는 즉시 문을 밀어 닫았다. 문짝이 찰칵 맞물리는 소리와 거의 동시에 그런데, 라는 말이 들린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노크 소리, 즉 문을 열어주면 할 말을 하겠다는 의사 표시가 들려오지는 않았다. 대신 터덜터덜, 늘 절도와 기품을 유지하는 후작의 것 같지 않은 구둣발 소리가 멀어져 갔다. 

* * *

 왕태후는 화려하다 못해 장엄하게 등장했다. 여섯 대나 되는 왕실 마차의 앞뒤로 갑옷을 입은 왕실의 근위 기사들이 줄을 맞춰 말을 몰아 왔다.

 금실을 넣어 짠 왕실 문장을 사면에 단 마차는 금장으로 번쩍거렸고 기사들이 탄 말들까지도 값비싸 보이는 장식술과 매듭으로 치장했다.

 왕실의 부와 권위를 그대로 보여주는 행렬이었다. 대부분의 실버글렌 인들은 기가 죽거나 눈을 빛내거나, 아무튼 다들 굉장히 놀랐다.

 이디스가 넋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첫눈에 깜짝 놀란 이후 머릿속으로 주판알을 튕기느라 행렬을 제대로 뜯어 볼 틈이 없어서였다. 하지만 생각을 입 밖으로 고스란히 내놓은 것을 보면 그녀도 온전한 정신은 아니었다. 

“세상에, 저 기사들과 말은 얼마나 먹을까.”

 다행히 그녀의 혼잣말을 들은 사람은 후작밖에 없었다.

 후작은 기가 찬다는 듯 찡그리며 별 쓸데없는 걱정을 다 한다고 중얼거렸다. 그 말 역시 이디스만 들을 수 있었다.

 이디스는 살짝 부끄럽기도 하고,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후작이 얄밉기도 해서 반박하려 했다. 기사들도 기사들이지만 이 겨울에 말먹이로 삼을 건초가 보통 비싸냔 말이다.

 마차를 끄는 말만 해도 스물네 필인데 거기에 기사들의 말까지 더하면 최소 마흔다섯 필 이상이었다! 하지만 이디스가 입을 떼기 전에 행렬의 선두를 맡은 기사가 손을 들어 올리고 그에 따라 행렬이 천천히 멈춰서기 시작했다. 

“가지.”

 왕태후가 탄 마차는 앞에서 두 번째인 듯했다. 가장 크고 화려했으며, 맨 끝의 마차에서 뛰어내린 시종이 벨벳으로 싼 발받침을 가져다 놓았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소리도 없이 문이 열리고 은발을 우아하게 틀어 올린 중년 여성이 내려섰다. 대기하고 있던 기사가 팔을 내밀었는데, 에스코트를 한다기보다 바친다고 하는 것이 어울릴 만큼 정중한 동작이었다. 그것을 너그럽게 받아들인 여성, 그리셀다 왕태후는 기품 있는 걸음걸이로 마중 나온 이들에게로 다가왔다.

“로디언 후.”

“왕태후 전하.”

 가까이서 보니 왕태후는 조카와 많이 닮았다. 눈동자 색도 똑같았다. 그러나 앨피어스 로디언의 눈이 북부의 전나무라면 그리셀다 로디언의 눈은 남부의 에메랄드였다. 태어난 곳은 같은데도 저토록 다른 질감으로 완성된 까닭은 물론 살아낸 삶의 차이에 기인할 것이다. 

“실로 격조하였네.”

“그렇습니다.”

“12년, 길었지. 기억 속의 조카는 어린 소년이었는데, 지금 자네는 선대의 30년 전 모습 같군. 오라버니가 서 있는 줄 알았어.”

“왕태후 전하께서는 제 기억 속의 고모님 그대로이십니다.”

“하하, 그럴 리가.”

 왕태후는 활짝 웃었다. 주름진 눈매에 짓궂은 기색이 어렸다. 

“버려지기 직전이라 다 죽어가던 모습이었거늘.”

 그것은 전적으로 후작을 놀리기 위한 장난이었다. 정답이랄 것이 없고 어떻게 받더라도 대체로 민망해질 뿐인 말이었으니. 더구나 남의 귀에 듣기 좋은 말을 꾸며내는 데 취미가 없고 일생 직설만을 입에 올려 온 로디언 후작으로서는 답하기가 퍽 버거울 터였다.

 이디스는 햇빛이 눈부신 척하면서 눈을 찡그렸다. 왕태후는 로디언 가문의 사람이라기보다는 완벽한 궁정 귀족다운 모습이었다.

 등장부터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본인의 말대로 12년 만에 만난 조카인데 얼굴을 보자마자 곤란한 상황에 빠뜨리다니. 처음부터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았지만, 왕태후의 방문 목적도 그리 순수하지는 않을 듯했다. 

“그때보다 더 높은 명예와 권위를 얻으셨으니, 지금이 더욱 눈부신 듯싶습니다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모든 가신들이 동시에 가졌을 비관적 예측과 달리 후작은 매끄러운 대답으로 왕태후의 심술을 회피했다. 이디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후작을 쳐다보았다. 어젯밤부터 이상하더니 오늘도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오, 그런가?”

 웃기게도 왕태후 역시 이디스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했다. 그녀는 눈썹을 치켜든 채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불리한 상황에서 정쟁에 승리하고 딸을 왕좌에 올린 여걸답게 사소한 동작에도 지켜보는 사람들을 긴장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조카가 야인처럼 거칠다는 말을 내 믿지는 않았네.”

“그러셨습니까.”

“그래. 허나 이런 쪽도 의외로군.”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 왕태후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후작을 바라보았다. 후작은 한겨울 언 호수처럼 표정 없는 얼굴로 왕태후의 눈길을 받아냈다. 

“흐음.”

 두 사람의 공방은 꽤 길었고 당사자들 외에는 아무도 감히 끼어들 수 없다는 점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거북했다.

 그런고로 왕태후가 전조도 없이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려 이디스를 바라보았을 때 그녀는 기절할 뻔했다. 펄쩍 뛰어오르지 않고 등에 힘을 주어 꼿꼿이 선 자신이 기특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그래서, 이쪽 레이디인가?”

“제 약혼녀냐고 물으시는 것이라면, 그녀가 맞습니다.”

“물론 그렇다네. 레이디 아가일이라 들었네만.”

 숨만 쉬어도 체할 것 같았다. 이디스는 뻣뻣해진 손으로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왕태후 전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 역시 반갑네, 레이디 아가일. 퍼스트 네임은 어떻게 되지?”

“네, 이디스입니다.”

“이디스. 예쁜 이름이구나.”

“감사합니다.”

“앨피어스와 이디스. 이름은 나름 잘 어울린다만.”

 이디스는 억지웃음을 머금었다. 보편적으로 저런 말 다음에 올 어구로는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비록 그렇더라도, 따위가 있을 터. 존엄한 왕족답게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왕태후의 의도는 명백했다.

왕태후는 조카의 약혼녀를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약혼을 깨기 위해 온 것이었다! 뒤쪽 마차에서 차례로 내려 부름을 기다리던 이들이 왕태후의 손짓에 따라 다가왔을 때 이디스의 판단은 더욱 확실한 근거를 얻었다. 

“내 시녀인 레이디 스펜서, 레이디 러셀, 레이디 더릭이네. 이 애들이 없으면 불편해서 데려왔지.”

 말은 그렇게 해도 후작에게 선을 보이기 위해 데려왔음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딱 혼인 적령기로 보이는 십대 후반부터 이십대 초반까지의 연령, 정성 들여 차려입고 꾸며 꽃처럼 사랑스러운 모습, 후작을 흘긋 바라보고는 금세 상기되어 버리는 볼. 마치 연습이나 한 듯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소녀들은 후작의 약혼녀 후보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왕태후의 마음에 차는. 스펜서와 러셀은 국왕 직속의 백작 가문이었다. 더릭은 처음 들었지만 앞의 둘보다 처지는 가문은 아닐 것이다.

 왕태후가 친정의 안주인으로 삼고 싶은 이유가 있으리라. 아가일처럼 하잘것없는 집안은 댈 수도 없는, 그런 뭔가를 가진 가문임이 틀림없었다.

 이디스는 후작을 곁눈질했다. 그녀가 알아차린 사실을 그라고 모를 리 없으니까. 과연 후작은 미간이 깊이 패도록 찌푸린 채 한껏 불쾌해 하고 있었다.

 그럴 만했다. 기나긴 세월 동안 곤란이나 끼쳤던 고모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인생사에 간섭하려 드니 그 성질에 어찌 견디겠는가. 얼마간 꽤 고달픈 날들이 이어지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좋겠지만. 

* * *

 안타깝게도 불길한 예감은 어김없이 맞아떨어지는 법이었다. 

“부담이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네, 레이디 아가일.”

“물론입니다, 왕태후 전하.”

“다행이로군. 이쪽으로 앉으시게.”

 이디스는 왕태후의 티타임에 초대받았다. 물론 왕태후가 갤러웨이 공작 영애와 같이 무도한 짓을 할 사람은 아니지만 외부에서 온 손님이 마련한 티타임 자체에 트라우마 비슷한 것이 생긴 터라 속이 편치 못했다. 그런 사정이 없더라도 그리셀다 왕태후라는 인물 자체가 마주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기도 했다.

 어쨌든 지금은 이디스가 후작의 약혼녀이기 때문인지 왕태후의 대우는 그리 박하지 않았다. 스스로가 가짜임을 인식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도리어 황송할 정도였다.

 왕태후가 데려온 시녀들은 인형 같은 모습으로 서 있고, 왕태후와 이디스만 티테이블 앞에 앉았다. 레이디 스펜서가 왕태후의 잔에, 레이디 더릭이 이디스의 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레이디 러셀은 보이지 않았다. 

“앨피어스가 없는 자리에서 자네와 말을 나눠 보고 싶어 불렀네.”

“황공합니다, 왕태후 전하. 뜻하시는 바를 하문하십시오.”

“음, 사실 특별한 이야기는 없어. 그 정도는 짐작하고 있으리라 생각하네만. 안 그런가?”

“예?”

 왕태후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우아하게 웃었다. 

“앨피어스는 지금 아이린, 그러니까 레이디 러셀과 함께 있다네.”

“아, 예. 그렇습니까.”

 이디스는 여상스럽게 대답했다. 실버글렌은 물론 북부 지역 자체가 초행일 레이디 러셀이 혼자서 어딜 갈 것도 아니지 않은가.

 더구나 왕태후의 시녀 자격으로 왔으면 주인의 허락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는 법. 왕태후의 명으로 후작과 시간을 보내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후작이 참 안되었다. 그로서는 하기 싫은 일을 강제당하는 경험이 거의 처음일 테니까. 왕태후가 그만큼 대단한 인물이기는 했다.

 왕실의 귀인이거나 로디언 가문의 어른이거나, 둘 중 하나만이었다면 무시할 수도 있었으련만 국왕의 모후이면서 후작의 고모이니까 차마 집어치우라고 막 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아, 안되기는 레이디 러셀도 마찬가지인가. 이디스는 레이디 러셀의 보송보송한 뺨을 떠올렸다. 이제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대대로 왕도에 뿌리내리고 산 명문가의 어린 영애가 일대일로 상대하기에, 로디언 후작은 그리 사근사근한 상대가 아니었다. 울리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다.

“……자넨 그래도 괜찮은가?”

“무슨 말씀이신지요?”

“약혼자가 다른 아가씨와 함께 있다는데 아무렇지도 않으냔 말일세.”

 아, 뭔가 원통하거나 분한 표정을 지었어야 했나. 태평하게 있던 이디스는 뒤늦게 아차 했다. 하지만 그녀가 후작과 그의 옆에 있을 아가씨에게 질투를 느끼기에는 너무 많은 요소들이 부족했다.

 일단 그들 두 사람이 각자 겪고 있을 끔찍한 기분부터가. 아무리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상상해 보려고 해도 후작과 레이디 러셀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다든가, 듣기 좋은 말을 주고받으며 장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은 그려지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이디스는 약혼녀 행세가 너무 허술했다고 반성하면서 어물어물 주워섬겼다.

“그게, 그러니까.”

“그게 뭐? 말해 보게.”

 원래 그녀는 재기발랄하고 임기응변이 빨랐다. 그러나 상상조차 안 가는 장면에 없는 감정을 끌어올리기는 힘들었다.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그리셀다 왕태후를 속여 넘겨야 한다고 생각하니 더욱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왕태후 전하께서 명하신 일일 터인데 제가 달리 무슨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아하, 어차피 내가 시켜 만나는 것일 뿐이니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가?”

“예?”

“보기보다 대범하군, 레이디 아가일.”

 이디스는 질겁했다. 별 생각 없이 얼버무렸을 뿐인데 왕태후가 보이는 반응이 심상찮았다. 로디언 후작은 어차피 내 남자이니 누구를 갖다 붙여도 상관없다는 식의 호기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게, 그런 뜻이 아닙니다. 왕태후 전하.”

“괜찮네. 어쨌든 아직 앨피어스의 약혼녀는 자네다 이 말이지.”

‘전혀 아닙니다만!’ 왕태후 면전인 것도 잊고 미간을 찡그리던 이디스는 공교롭게도 마침 그녀 쪽을 곁눈질하던 레이디 스펜서와 눈이 마주쳤다. 이디스는 레이디 러셀 다음이 그녀 차례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소녀의 파르르 떠는 푸른 눈에 도전적인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정확히 무엇을 향한 도전 의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레이디 스펜서의 결의가 대단했다. 굳이 이디스에게 그럴 것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점이 안타까울 정도로. 

“탓하는 것이 아니네. 그만한 패기는 있어야지.”

“심기를 상하게 하려는 뜻은 없었습니다. 사죄드립니다.”

“칭찬이라니까. 난 기죽지 않는 사람을 좋아한다네. 그렇지 않느냐, 캐서린?”

“예, 왕태후 전하.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레이디 더릭, 그러니까 캐서린 더릭이 빙긋 웃으며 장단을 맞췄다. 그러더니 이디스와 눈이 마주치자 피하는 대신 친근하게 눈짓했다.

 레이디 스펜서보다는 이쪽이 훨씬 더 고단수였다. 어쩌면 왕태후가 조카와 선을 보이기 위해 데려온 진짜 비장의 수는 캐서린 더릭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좋네. 이디스, 자네가 꽤 달리 보이는군. 재미있을 것 같고. 어차피 시간을 보내야 한다면 재미있게 보내는 편이 낫지.”

“어머? 전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드문데. 운이 좋으시네요, 레이디 아가일.”

 하하. 이디스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웃음을 지었다. 운이 좋기는 무슨, 하는 반박이 뱃속에서 튀어나가려는 것을 꽉 찍어 누르면서. 이후로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왕태후는 이디스가 무슨 말을 해도 아주 재치 있고 듣기 좋다는 듯 반응했다.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 의도적인 행동임을 눈치챘기에, 이디스는 먹기 싫은 약을 꾸역꾸역 삼키는 기분으로 왕태후와의 티타임을 버텨내야 했다.

 그래도 왕태후가 아주 끔찍한 대화 상대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목이 꺾일 정도로 드높은 신분임을 감안한다면 왕태후는 꽤 소탈했고 가끔씩은 이디스가 즐겁게 이야기할 만한 화제를 꺼내기도 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었다. 

“곧 사냥철이로군.

자네는 실버글렌 사냥제에 나가본 적 있나?”

“사냥꾼으로 참가한 적은 없습니다만 준비와 실행을 도운 적은 있습니다.”

 사실 재무관이 된 이래 매년 겨울철마다 여는 사냥제는 이디스의 소관이었다. 그런 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예 모른다고 하기도 뭣해 알은척을 하자 왕태후가 반색했다. 

“오, 그래? 그럼 로디언 은여우를 본 적도 있는가?”

“아니요, 이십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그 은여우는 아름답고 연약해 보이지만 실상은 엄청나게 위험한 맹수라는 것을 아는가?”

“들은 적은 있습니다만 직접 본 일은 없어 잘 모릅니다.”

“그렇군.”

 왕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날 레이디 로디언이었던 왕태후이니, 지금은 반쯤 전설 비슷해진 은여우를 본 적도 있는 모양이었다. 

“로디언이 은여우를 가문의 상징으로 삼은 것은 그 위험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네. 사나운 만큼 영악하니 반드시 어딘가에 숨어 있겠지.”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계속 보이지 않으면 다행이고. 그럼 최고 사냥꾼에게 주는 상금은…….”

“계속 누적되고 있습니다.”

“저런, 왕도에서 사냥으로 유명한 이들을 데려올걸 그랬나.”

 진지하게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디스 역시 가볍게 대답했다. 

“왕태후 전하, 로디언 은여우를 잡을 수 있는 사냥꾼은 실버글렌 인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 말을 들은 왕태후가 돌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디스는 자신이 뭔가 말실수를 했나 싶어 긴장했다. 그녀가 생각해 낸 말은 아니었다. 지역적 자부심을 표현하는 말이자, 로디언 후작령에 오래전부터 전해지는 격언이었다. 하지만 왕태후가 받아들이기에 따라 무례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

 걱정이 무색하게도 왕태후는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얼굴로 선선히 웃었다. 

“그래, 그렇지.”

“…….”

“자네 말이 맞네.

나도 알고 있어.”

 그렇게 말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왕태후의 옆얼굴은 꽤 쓸쓸해 보였다. 이디스는 감히 말을 붙이지 못한 채 혼잣말처럼 흘러나오는 왕태후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맞아. 로디언의 은여우는 실버글렌 인만이 잡을 수 있지. 다들 그렇게 말했어…….”

 그 말을 끝으로 왕태후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이디스는 난감한 기분으로 불편한 침묵을 견디다가 방을 나왔다. 그리고 후작부인의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으며 한숨을 쉬었다. 

“왜 한숨이지?”

“깜짝이야!”

 그녀는 펄쩍 뛰었다. 불도 밝히지 않고 앉아 있었던 주제에 후작은 뻔뻔했다.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뭘 하고 있었겠나. 방 주인을 기다렸지.”

 그걸 몰라서 물었겠는가. 그러니까 왜 여기서 몰래 숨어든 사람처럼 기다리고 있었느냐는 의미였는데, 후작은 싹 무시하고 그렇게만 대답한 뒤 말이 없었다.

 이디스는 방 여기저기의 등잔에 불을 밝히면서 그를 힐끔거렸다. 겉보기에 흐트러진 구석은 없는데 피곤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디 러셀과의 하루가 고되었던 걸까? 다시 보니 나갈 적에 입었던 옷을 싹 갈아입었는지 재킷이며 바지에 날이 서 있었다. 

“왜?”

“아니, 옷 갈아입으셨나 해서요.”

 훑어보는 눈길을 알아차리고 뾰족하게 물었던 후작은 이디스의 말을 듣고 혀를 찼다. 

“하도 들러붙어서 분가루가 묻었더군.”

 생략된 주어는 물론 레이디 러셀이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곱게 끝나지는 않은 모양이지. 이디스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급히 화제를 돌렸다. 

“돌아오셨으면, 왕태후 전하께 인사 드리셔야죠.”

“실버글렌의 주인은 나야.

혈족이라도, 그분은 손님이시고.”

“아, 네.”

“그러니 너무 오래 붙들고 계시면 적당히 빠져나와도 괜찮아.”

“갑자기 왜 제 쪽으로 이야기가 튀나요.”

“그대는 안주인이잖나.”

“각하.”

 이디스는 질겁했다. 왕태후 앞에서 주의를 기울이는 것도 힘들었는데 후작까지. 로디언 가문에게 시달리는 날인 모양이었다. 

“시한부로 합의되지 않았던가요?”

 그녀는 자기가 듣기에도 좀 매몰차다 싶게 잘라 말했다. 당연하게도 후작은 그녀의 말투가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결론을 내지 않았다고 해야겠지.”

 왕태후가 들이닥치는 바람에 유보되었으니 그의 말이 더 합당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고 들어서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디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가뜩이나 왕태후가 저를 일종의 걸림돌로 여기게 된 상황에 머리 복잡한 이야기를 질질 끌고 싶지 않았다. 

“언제 말씀하셔도 제 결론은 같아요.”

“왜지?”

“왜냐니요.”

 마지막으로 후작이 앉은 테이블 위의 등을 밝혔다. 불그스름한 빛이 확 피어오르면서 후작의 표정이 제대로 보였다.

 그는 잔뜩 참고 있었다. 미간을 좁히고 굵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을. 이디스는 조금 위축되었다.

 겁주려는 의도가 없어도 타고난 용모와 신분이 후작을 한층 고압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만둬 봤자 내일, 혹은 이틀 뒤에 똑같은 이야기를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고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각하와 약혼할 생각이 없어요.”

“같이 잤는데도?”

“……그게 약혼의 이유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내가 그대에게 발정해서 키스하고, 옷을 벗기고, 애무하고, 이걸 그곳에 넣은 게 이유가 안 된다고.”

 빠르게 씹어 뱉는 목소리에는 한 점의 열기도 없었다. 오히려 차갑게 뚝뚝 떨어졌다. 그래서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바로 깨닫지 못했다.

한 박자 늦게 그 냉정한 음담을 알아들은 이디스는 비명처럼 그를 저지했다. 

“맙소사, 각하!”

 후작은 한 조각의 부끄러움도 없는 듯했다. 그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약혼할 수 있다는 건가?”

“아니, 언제부터 그렇게 약혼녀가 필요하셨다고 갑자기 이러세요.”

“약혼녀가 필요했던 적은 없어.”

“지금 제게 밀어붙이고 계시는 건 뭔가요?”

“약혼만 한 상태로 평생을 살 건 아니잖아. 그 다음 단계가 최종 목적지라고.”

 그야 그렇지. 이디스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후작이 말한 다음 단계가 무엇인지 떠올리고 팍 찌푸렸다. 

“설마 결혼 말씀이세요?”

“약혼한 다음에 할 일이 그것 말고 또 있나?”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이디스의 언성이 높아졌다. 

“결혼할 생각 없다고 하셨잖아요!”

“그건 그대 얘기지.”

“어머, 어처구니없어라. 각하께서 제게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고 있거든요?”

 몇 년 전이었지만 똑똑히 기억했다. 당신을 흠모하는 여자들이 꽤 있지 않느냐 물었을 때, 후작은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왜 그런 여자들 따위에게 신경 써야 하나. 딱 질색이니 다시는 말도 꺼내지 마.」

“끔찍하다고 하셨잖아요.”

“뭐? 내가 언제?”

“제가 첫 연말결산 보고 끝내고, 잡담하다 결혼 이야기 나왔을 때 그러셨어요.”

 이디스는 턱을 치켜들었다. 어디 앞뒤 안 맞는 소리를! 아무것도 모르는 소영주 집 딸이라면 모를까, 그의 측근으로 일하며 볼 꼴 못 볼 꼴 모조리 본 그녀였다.

 더구나 그녀의 독신주의—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많이 다른 결혼관—가 싹튼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결정적 순간. 그녀는 그때 오고 간 말들을 다 복기하래도 할 수 있었다. 

“나야말로 어처구니가 없군.”

“각하가 뭘요?”

 하지만 의기양양하게 바라보는 그녀를 향해, 후작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건 결혼 이야기가 아니었어.”

“제 기억력을 의심하시는 거라면 다른 사람을 불러 보셔도—.”

“정확하게 하자고. 결혼이 아니라, 정략결혼 이야기였지.”

“그게 그 말이지 뭐가 다르다고 그러세요.”

 후작부인이 계시면 좋겠다는 말에서 이어졌으니, 맥락상 결혼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맞았다. 하지만 후작은 진심으로 동의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디스를 노려보았다. 

“…….”

 그러더니 여태껏 서 있던 이디스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녀는 어어 하는 사이에 딸려가 후작과 나란히 앉게 되었다.

“달라. 더구나 정략결혼 상대로 날 노리는 여자들에 관해 말한 사람이 그대였어.”

“그게 뭐 특별한 문제라는 말씀이세요?”

“당연하지. 다른 사람이 물었으면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을 거다.”

 이건 또 무슨 소리람. 이디스는 기막혀하며 잡힌 손목을 뿌리쳤다. 그러나 그는 손아귀 힘을 풀지 않았다. 

“그대여서 그렇게 대답했다니까.”

 꽉 막힌 목소리로 덧붙이는 말은 얼핏 간절하게 들렸다. 이디스는 멈칫했다. 하지만 즉시 고개를 흔들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간 탓이었다. 

‘그럴 리가 있나.’

 그녀는 자신이 이성적인 생각을 하기 어려운 상태라고 판단했다. 자꾸 말을 돌려가며 우기는 후작에게 짜증이 나서 그렇든가, 아니면 왕태후에게 시달린 후유증이 이제 오기 시작했든가. 

“이디스, 모르겠나.”

“아, 대체 뭘요.”

 후작과 실랑이하는 데도 지쳤다. 그녀는 될 대로 되라고 생각하며, 아니, 실은 후작이 자기 말을 듣고 비웃으며 가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툭 뱉었다. 

“각하께서 저를 좋아하기라도 한단 말은 아니시죠?”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손목이 자유로워졌다. 이디스는 눈을 크게 떴다.

후작은 그녀에게로 기울였던 몸을 뒤로 물리면서 고개를 외로 꼬았다. 한 마디 대꾸 없이 달아나는 옆얼굴이, 목덜미가, 귓불이 붉었다. 단지 조명 때문이라기에는 보는 그녀의 눈이 뜨거울 만큼 시뻘겠다. 

“……각하?”

 후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얼굴을 감싸 쥔 채 말이 없는 그의 모습이 당혹스러웠다. 이디스는 혀끝을 씹을 뻔하고 간신히 말을 할 수 있었다. 더듬더듬, 흔들리는 눈을 어쩌지 못한 채로. 

“지, 지금 이 상황에서 대답을 안 하시면. 그게, 긍정, 이 되지 않을까요?”

 후작은 날카로운 데 푹 찔린 사람처럼 앓는 소리를 냈고, 이디스는 뜻밖의 반응에 더욱 동요했다. 

“각하. 그냥 화를 내셔도 되고요, 하다못해 아니라는 말이라도 하셔야.”

“아니야.”

“네? 아, 역시 아니었던…….”

 횡설수설하느라 그녀까지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렇지, 역시 아니었던 것이다. 너무 황당한 말을 들어서 할 말을 찾느라 그랬겠지.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아닌 게 아니라는 말이야.”

 하지만 그녀와 눈을 마주친 후작이 이상한 말을 했다. 취한 것처럼 벌건 얼굴로, 전혀 평소의 그답지 않은 꼴을 하고서는. 목에 걸린 말을 하나씩 끄집어내듯 힘겹게 뚝뚝 끊어가며 그는 말했다. 

“나는, 그대를, 이디스. 그대를 좋아해.”

 그 순간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니 틀림없이 그래서는 안 되었지만. 머리가 마비되는 바람에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

 벌떡 일어난 이디스는 후작을 잡아끌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순순히 움직여 주는 그를 돌려세워 등을 떠밀었다.

 문밖까지 밀려나간 그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문을 쾅 닫았다. 잊지 않고 걸쇠도 잠갔다. 그녀에게 쫓겨난 후작은 다시 문을 두드린다거나, 말을 건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혹시나 그의 소리가 들릴까 봐 부리나케 문에서 멀어졌다. 멀찍이 달아난 이디스는 두 손으로 자기 입을 틀어막고 주저앉았다.

심장이 터질 듯 쿵쿵거렸다. 기뻐서인지 두려워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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