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오해와 오해 (4/9)

3. 오해와 오해

 처음 만났을 때는 여러모로 어처구니없는 여자라고만 생각했었다. 휘하 소영주인 아가일 자작의 동생이 재무관으로 지원했다고만 듣고 그럼 시험 삼아 일하게 하라고 했는데, 알고 보니 성년도 되기 전의 여자였다.

 변명하자면, 그녀가 열아홉 살이었을 때 그는 스무 살이었다. 사람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는 데 미숙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는 그녀에게 썩 돌아가라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자기를 쫓아내면 안 되는 이유를 하나하나 꼽으며 박박 대들었다.

 짜증이 났지만,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없어서 어디 하는 데까지 해 보라 했다. 귀찮음 반, 제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우길 수 있는 담력에 대한 경탄 반이었다. 그저 그뿐이었는데. 

「감사합니다!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이디스는 기뻐하며 환하게 웃었다. 특별히 배려하거나 조건을 좋게 해주지도 않았는데 단지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는 것만으로. 실은 그때 최초로 얼이 빠졌다.

 평생을 사막에서 보낸 자가 녹음으로 가득한 곳에 떨어져 꽃망울이 터지는 순간을 목격한 것처럼, 앨피어스는 이디스가 발산하는 활기에 매료되고 말았던 것이다. 다만 정확히 무엇이 시작되었는지는 나중에 가서 깨달았다.

 그의 생애에는 최초이자 최후의 사건이었으므로 당시에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앨피어스는 자신의 감정이 가진 전통 있는 이름을 깨닫는 동안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그것이 실수인지도 모른 채. 

「각하는 결혼 안 하십니까?」

「생각 없어.」

 이디스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그러면 후계자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물었다. 앨피어스는 가출한 동생을 잡아들이면 된다고 답했다.

 동생이 어디서 뭘 하는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므로 필요할 때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될 일이라고 구구절절 부연했다. 진짜 이유가 너 때문이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네가 먼저 결혼할 생각 따윈 없다고 말하고 다녀서 나도 포기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장갑을 끼시는 이유가 뭐예요?」

「지저분한 것들과 닿는 것이 딱 질색이라.」

「혹시 거기 사람도 들어가는…….」

「당연하지.」

 거짓말이었다. 더러운 것을 싫어하기야 하지만 씻으면 될 일을 그럴 것까지야 있나. 사실은 우연히 이디스에게 손이 닿았을 때 얼굴이 화끈거려서 장갑을 찾은 것이 시작이었다.

 한 꺼풀 덮고 나니 안정되는 효과가 있어 습관으로 삼았던 것이다.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든 맨살로 닿기보다는 장갑 낀 쪽이 나은 것은 사실이었다. 결벽이니 뭐니 해도 반박하고픈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신에 대해 멋대로 오해하도록 내버려 두면 좋은 점도 있었다. 

「이제 저한테 이런 일까지!」

「왜, 뭐가?」

 이디스에게 은근슬쩍 안주인의 일을 맡길 때도 그랬다. 그는 일이 늘어났다고 억울해하는 이디스에게 왜 그 일을 맡기는지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그저 그것이 편리하며, 다른 믿을 수 없는 자에게는 맡길 수 없어서라고 주장했다. 그녀가 사인한 서류를 들여다보는 것으로나마 바닥없는 욕심을 충족시키고 싶어서였던 주제에. 의심을 갖고 따져보면 그의 언행은 모순과 허점투성이였다.

 그러나 그녀는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렸든, 조상들만큼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하든 간에 로디언은 로디언이다.

 유서 깊은 실버글렌의 영주이자 왕국의 북부를 밝히는 등불. 그 로디언의 독자(獨子)인 앨피어스는 적어도 제 땅에서만큼은 절대 권력을 영위하는 왕이었다. 그가 말하면 그것이 법이자 진실이었다. 그 사실을 이용해 뻔뻔스럽게 마음을 감춰 온 것이 수년째. 이 상태가 유지된다면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해 왔다.

 그렇지만 바이올라 갤러웨이를 받아들이면 어떠냐는 물음에는 아무리 그라도 평정을 지키기 힘들었다. 어려울 때 떠난 벗은 차라리 적만도 못한 법이었다.

 그런 갤러웨이의 딸과 정략적인 결혼을 하라니! 그는 울컥했다. 갤러웨이 자체부터 재고의 여지도 없는 상대이거니와, 그 말을 꺼낸 사람이 이디스였기 때문에 부지깽이로 속을 들쑤신 듯 홧홧했다.

 그래서였다. 가짜 약혼녀 역할을 밀어붙인 까닭은. 그녀가 자신의 약혼녀로 자처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맹세컨대 그저 그뿐이었다.

 진짜 연인들끼리 주고받을 법한 말이나 손짓 따위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당연하지만 키스 혹은 그 이상의 것 역시 논외였다.

 그래! 머릿속으로야 누차 상상하고 가끔은 꿈속에서 실행에 옮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행위를 현실로 옮기고 싶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다.

 앨피어스가 바란 일이라고는 그녀의 입에서 내가 로디언 후작의 약혼녀라는 말이 나오는 것, 그리고 그녀에게 소소하나마 선물을 하는 것 정도가 다였다. 그게 그렇게 지나친 바람이었던가? 갤러웨이의 딸이 저지른 짓에는 어지간한 그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약이라니.

 아무리 담대한 여자라도 공작 영애가 직접 그런 물건을 구하기는 어려웠다. 당연히 그녀의 부친인 갤러웨이 공작이 쥐여 주었을 것이다.

 차라리 그가 먹었다면 피를 내어 약효를 떨어뜨리는 방법을 썼으련만. 이디스에게 먹이는 바람에 모든 일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잔뜩 흥분한 모습으로 바르작거리는 그녀를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방으로 데려와 아무 말이나 나오는 대로 중얼거리며 옷을 풀어헤치는데 손이 사정없이 떨렸다.

 목이 바싹 타들어가 마른침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제 품에 얼굴을 부빌 때 이미 고개를 든 앞섶은 초를 다퉈 부피를 더해 갔다. 그녀에게 건넨 말이 거의 고백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은 깨닫지도 못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치마를 걷고 속옷을 젖히는데 코에 와 닿는 여성의 향에 등골이 오싹했다. 이성을 잃지 않으려고 한계 이상의 정신력을 동원했다.

 그러나 또렷한 정신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는 반쯤 취한 상태로 그녀의 몸을 틀어쥔 미약을 풀어냈다.

 끝의 끝까지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생각은 단 하나, 이대로 그녀를 덮쳐서는 안 된다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대할 여자가 아니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도 더 엉망으로 만들지 않고 곱게 감싸주고 싶었다. 그랬기에 이튿날, 괘씸한 갤러웨이 여자가 달아나고 이어 이디스까지 아가일 저택으로 가 버리는 동안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흐트러진 그녀를 취하고 싶은 몸의 충동을 한계 이상으로 억누른 탓이었다. 해가 중천에 뜨도록 그가 보이지 않아 들어온 소어가 끙끙 앓는 주인을 발견하고 얼마나 호들갑을 떨었는지. 앨피어스는 냉수를 몇 번이고 뒤집어 쓴 다음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마자 든 생각이 이디스의 상태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그녀가 사라졌다는 대답이 돌아왔을 때의 그 황당함이란! 수소문 끝에 아가일 저택으로 갔다는 사실을 확인한 앨피어스는 지체 없이 내달렸다.

 그리고 그녀를 다시 데려왔다. 실랑이가 있었지만 결국은 그가 바라는 대로 되었다. 후작부인의 방을 열어 이디스를 데려다 놓았다.

 다시 어디로 가 버리는 것을 막고자 절대 그녀를 내보내지 말라 엄명을 내렸다. 급한 일을 몇 가지 처리했다.

 그 중에는 아가일 자작저에 사람을 보내 그녀의 짐을 챙겨 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수십 번의 사인을 한 그는 약간 피곤한 상태로 후작부인의 방에 돌아왔다. 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참 사랑스러웠다. 일어나자마자 하는 소리마다 죄 속이 터지는 것들이라 문제였을 뿐이지. 

* * *

 다음날 이디스는 아주 늦게 일어났다. 후작은 이미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없었기 때문에 전날 있었던 일을 떠올리는 데 시간이 걸렸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자신이 어디에 왜 있는지 생각해 낸 이디스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으윽.”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몸 이곳저곳을 두들기는 통증에 신음하며 허리를 꺾었다. 새털을 가득 채운 이불을 끌어안으며 얼굴을 푹 묻었는데 낯선 감촉이 느껴졌다.

 처음 보는 잠옷이 몸에 입혀져 있었다. 안 입은 것처럼 가볍고 보드라운 재질이라 그제야 안 것이다. 이디스는 뒤늦게 살짝 놀랐다.

 옷의 존재를 인식하고 나자 그 다음에는 몸이 산뜻하게 닦여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후작의 품에 안긴 그대로 잠들었으니 당연히 그가 손을 썼을 터였다.

 세상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때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살짝 열렸다. 이디스는 반사적으로 눈만 굴려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뼘 정도 열린 틈으로 들여다보던 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 레이디 아가일. 안녕히 주무셨어요?”

 앤이었다. 혹시 후작인가 싶어 잔뜩 긴장했던 이디스는 어깨의 힘을 풀었다.

이디스가 일어난 것을 확인한 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읏차, 하며 뭔가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리더니 몸으로 문을 밀어 열면서 들어왔다.

 앤이 한가득 든 것은 몸을 씻고 정리하는 데 필요한 각종 도구들이었다. 그 뒤를 따라 비교적 어린 하녀들 넷이 욕조를 밀고 들어왔고, 재빠른 움직임으로 더운 물을 나르기 시작했다.

 재무관으로 생활할 때도 하녀들의 수발을 받았기에 그것 자체는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앤이 침대 옆까지 와 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 이디스는 입을 딱 벌렸다. 

“이게 뭐지요?”

 새로 들어온 것 중에서 크기와 무게로는 욕조가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그게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의 물건이 몇 개 있었다. 척 보기에도 새것인 데다 값비싼 공예품들이 은쟁반 위에 가지런했다.

 섬세한 조각이 붙은 상아 빗, 진녹색 비단에 은실로 놓은 자수가 빽빽한 머리끈, 틀어 올린 머리카락을 고정하는 용도의 에메랄드 핀. 이디스는 꽤 눈이 높았다.

 후작성의 자산을 관리하고 대형 상단과 거래하는 당사자로 몇 년을 살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그녀가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사치품들이 태연하게 날라져 온 것이다. 

“후작 각하께서 꺼내 주셨어요, 레이디 아가일.”

“꺼내 줬다고요?”

“그게, 어디에 있던 것인지는 저도 몰라요. 레이디 아가일이 쓰실 물건들을 요 곁방의 장에 올려 두었으니 가져가라고 명하셨어요.”

 후작성의 하녀로 반평생을 살아오면서 안목이 생겨서인지 앤도 자신이 가져온 물건들을 쳐다보며 연신 감탄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깃털을 다루듯 섬세한 손길로 쟁반을 내려놓았다. 뭔가 더 묻고 싶었지만 뜨끈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욕조의 유혹이 너무 컸다. 이디스는 한숨을 푹 쉬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다리 사이가 부은 듯 아리고 쓰렸지만 앤 앞이라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어정어정 걸었다. 목욕을 마친 이디스는 앤에게 머리카락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남의 손에 다뤄지는 느낌이 낯설어서 자꾸 흠칫거렸다. 본래 세숫물을 날라다 주는 정도로만 하녀들의 도움을 받고, 머리를 만지는 단장은 혼자 해 왔다. 이번에도 그러려고 했는데 앤의 눈빛이 하도 강렬해서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와, 레이디 아가일. 이 빗 진짜 예뻐요.”

 이디스는 눈을 감은 채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목적은 화려한 치장 도구들이었나. 후작의 재정이 어렵다 어렵다 해도 속을 들여다보면 의외로 탄탄했다. 로디언 가문이 오래되어 가진 기반이 있는 덕분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정계에서 확실히 밀려났기에 새롭게 얻은 것은 없었으나 이미 가지고 있던 재산은 꽤 건실했다.

 빈털터리를 예상하고 재무관에 지원했던 이디스도 생각보다 훨씬 사정이 나은 자산을 파악하고 감탄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흔히들 고위 귀족의 삶이라는 표현에서 연상하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소비는 후작성에서 거의 멸종하다시피 했다.

 물론 후작 본인이 쓰는 물건은 펜대 하나조차 평범하지 않았다. 하지만 타인의 재력을 확인하려고 계산서를 뒤지는 사람은 없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 마련이다.

 실버글렌 인근의 영주들은 물론 후작의 휘하에 있는 소영주들조차 로디언 가의 몰락이 가깝다고 보았다. 그렇게 된 이유는 당연히, 고귀한 여성이 없어서였다.

 후작부인이나 후작 영애가 있어야 뭘 써도 쓸 텐데, 현 후작의 모친은 아주 오래전에 타계했고 로디언 가문에서 마지막으로 태어난 영애는 현재 왕국의 왕태후가 된 그리셀다였다. 공주님의 삶을 갖지는 못해도 가까이에서 보기를 꿈꿨던 하녀들에게, 이러한 후작가의 상황은 참으로 가혹했다. 

“이 끈도요! 이거 어디 비단일까요? 처음 만져 보는데. 더구나 자수가 굉장해요, 레이디 아가일. 얼핏 봤을 때는 그냥 꽃무늬인 줄 알았는데 똑같은 문양을 반복한 게 아니네요.

여기 사슴도 있고…….”

 그동안 얼마나 목말랐을까. 이디스는 피식 웃었다. 앤을 알게 된 이래 이렇게 수다스러운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 여자, 바이올라 갤러웨이의 방에 기웃거린 것도 뭔가 구경하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자, 이제 묶어드릴게요.”

“천천히 해요.”

 본래 이디스는 머리를 만지는 데 그다지 공들이지 않는 편이었다. 머리든 옷이든 치장하는 종류라면 모두 그랬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앤을 재촉하지 않았다. 일단은 예쁜 물건을 만지는 앤의 즐거움을 조금이라도 연장해 주고 싶었고, 다음으로는 모든 과정이 끝난 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벅찼기 때문이었다.

 몸은 피곤해도 머리는 아니었다. 지난번처럼 약을 먹은 것도 아니고 멀쩡한 정신으로 사고를 친 덕분에 그때의 백 배 정도로 속이 복잡했다. 

“다 됐습니다, 레이디 아가일. 어떠세요?”

 거울 속의 이디스 역시 속이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앤이 뒤에서 들여다보고 있었기에 그녀는 서둘러 표정을 고치고 희미하게 웃으며 감사 인사를 하려고 했다. 대뜸 들려온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괜찮군.”

“핫, 후작님.”

“할 일을 마쳤으면 나가라.”

“네, 넷. 알겠습니다!”

 이디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미 거울을 통해 후작과 눈이 마주친 까닭이었다. 그는 앤이 이런저런 물건을 챙겨 나가기도 전에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허둥지둥 나간 하녀가 문을 닫는 소리와 동시에 이디스의 손등에 키스했다. 이디스는 황당한 눈으로 후작을 쳐다보았다.

 그는 언제나와 같이 장갑을 낀 상태였고 키스는 예의에 맞는 정도로 가벼웠지만 애초에 앨피어스 로디언이라는 인간이 여성에게 손등 키스를 하는 부류가 아니었다. 

“각하.”

“아, 호칭도 정정해야겠군.”

“네?”

“이름으로 부르라는 말이다. 알고 있잖아.”

 당연히 알았다.

심지어 직전에 속으로 떠올리기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그래야 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유는 있어. 그대는 내 약혼녀니까.”

 마치 속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말했다. 이디스는 그때까지도 잡혀 있었던 손을 잡아 빼며 반박했다. 

“그것도 퇴직 처리해 주셨으면 하는데요.”

“아직도 그 소릴 하는 건가.”

“네, 그리고 들어주실 때까지 계속 말할 참이었습니다.”

“쌍방 합의는 계약서에 명시된 사항인데.”

 이디스는 싱긋 웃었다.

 기분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전투에 임하기에 앞서 상대를 향해 보이는 도발적인 신호였다. 확실히 후작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디스는 목욕과 치장을 하는 동안 그에 대응할 말을 생각해 두었다. 같은 말에 두 번 당해 침묵해 버리면 체면이 살지 않으니까.

 조건이 맞지 않는 거래를 셀 수 없이, 거의 대부분 후작에게 이득이 되는 쪽으로 성사시켜 온 그녀였다. 그것을 익히 아는 후작이 눈썹을 꿈틀하며 미심쩍어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건! 그때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불공정한 조항이에요.”

“무슨 소리야? 쌍방 합의라는 어휘의 의미가 바뀌기라도 했다면 모를까.”

“아니요, 표현 자체는 상관없어요.”

 이디스는 딱 잘라 말했다. 진작부터 마음을 다잡고 있었기에 주저하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각하와 저의 관계 기반이 바뀌었잖아요.”

 후작은 말이 없었다. 어쨌거나 이디스의 말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유감스럽지만, 각하. 가짜 약혼녀 역할을 제안하셨을 때 각하께서는 제 고용주셨어요. 하지만 제가 더 이상 후작령의 재무관직을 맡지 않겠다고 했지요.

 그러면 각하와 제 사이의, 가짜 약혼 계약을 보증할 관계가 없어지는 거지요.”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 이렇게까지 말하려니 참 씁쓸했다. 바로 전날 몸을 섞은 기억이 생생한 채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가, 그녀라고 쉽겠는가.

 하지만 당장 어떻게든 끝을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영부영 끌려가 얽히고설키기에 로디언 후작은 너무 문제가 많은 상대였다.

 집안의 문제도 문제거니와, 그녀의 마음이 한 조각이나마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렇다. 마음이 있었다.

 차라리 그녀가 그에게 아무 감정이 없었다면 훨씬 간단했을 것이다. 후작가의 봉신 가문 출신이고 후작의 직속 재무관인 그녀로서는, 약혼녀 역할이란 것이 조금 어처구니없지만 어쨌든 일의 연장이라고만 생각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이디스는 지난날 후작에게 향했던 자신의 마음이 완전히 말라죽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상태는 위험했다. 마음이 완전히 되살아나 헛된 기대와 바람을 품기 전에 멈춰야 했다. 상처 받기 전에. 그녀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저를 놓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겉보기에 로디언 후작에게는 아무 변화가 없어 보였다. 그는 언제나와 같이 조각 같은 미모를 자랑했고, 결벽증이 있네 마네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말처럼 철저하게 깔끔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관계가 없어진다, 라.”

 굳었던 입술이 풀리면서 흘러나온 목소리도, 귀에 들리는 것만으로는 평소와 다른 점을 찾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그는 분명 동요하고 있었다. 불필요하게 되물은 것이 첫 번째 증거였다. 

“진심인가?”

“네, 물론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말끝을 흐린 것이 두 번째, 그리고 이디스의 약점을 언급하면서 아주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한 것이 세 번째 증거였다. 

“우리는 이미 함께 밤을 보냈다. 그 사실이 그대에겐 걸림돌이 될 거고, 나는 마땅한 보상을 해야만 해.”

“괜찮습니다.”

 이디스는 스스로도 매몰차다고 느낄 정도로 칼같이 딱 잘랐다. 그래야만 했다.

상대가 후작이기에, 자칫 잘못하다가 마음이 약해지면 어제처럼 말려들어가게 될 뿐이었다. 영지의 정책이 걸린 재정 거래를 주관하면서 지금보다 더 난처한 공방도 많이 해 보았다. 어차피 양보할 수 없다면 철저하게 막는 것이 옳았다. 

“괜찮다고?”

“네. 어제 일을 가지고 각하께 책임지라느니 하는 말씀을 드릴 생각 없어요.”

 후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디스는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하며 말을 이었다. 

“저는 결혼할 생각이 없는 여자이고요. 더구나 요즘 세상에 혼전의 관계로 흠 잡는 것은 왕공 귀족들이나 하는 일이니까요. 오히려 각하께서 뭔가 보상을 하겠다고 하시면, 물론 그런 의도는 아니시겠지만, 제게는 모욕이 될 수 있답니다.”

 정부, 혹은 하룻밤 즐긴 여자에게 관계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디스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지만 후작은 확실히 알아들었다. 그런 지저분한 짓을 끌어다 붙인 것이 불쾌하다는 듯 그의 목소리가 약간 딱딱해졌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절대 아니야.”

“네, 알고 있어요. 어쨌든 그러니까 말씀하신 보상은 필요 없다는 말이에요.”

“……재무관으로 복직시켜 준다면 이 계약도 이어갈 건가?”

“음…….”

“그것도 아니라면 재무관으로서만 남는 쪽을 바라나?”

 마지막 말에는 솔직히 조금 혹했다. 그가 그렇게 말한다면 못 이기는 척 수락할까 생각도 해 보았고, 실제로 들으니 더욱 흔들렸다. 하지만 그건 지난밤의 일이 있기 전까지나 실현 가능했다. 이디스가 그 누구의 앞에서든, 나는 아무 사심이 없노라 자부할 수 있었던 시점까지 말이다. 이제는 아니었다. 이디스는 진심으로 아쉬워하며, 그러나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니요, 둘 다 끝내고 싶어요. 각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셔도 변함없이.”

 후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해 그의 표정은, 아주 고통스러워 보였다. 잘못 봤을 것이다.

이디스는 살짝 놀랐지만, 마음을 다잡으며 시선을 피했다. 후작이 곧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어, 자신의 의사를 다시 주장하든 혹은 꺾든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주 긴 침묵이 이어졌다. 아주 길고, 길어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무슨 대화를 하고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릴 정도의 침묵. 물로 가득 찬 방에 갇힌 기분이었다. 

“…….”

 이디스는 참고 또 참다가 딱 죽기 직전의 심정으로 고개를 홱 들었다. 발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도망이라도 간 게 아닌가 싶었는데, 후작은 여전히 같은 거리를 유지한 채 서 있었다.

 정말이지 그 사람답지 않은 모습이어서, 그녀는 한숨을 푹 쉬고 입을 열었다. 

“각하.”

 대답을 독촉하기 위해 부르는 것 외에는 그녀에게도 할 말이 달리 없었다. 그러니 결국 똑같은 침묵이 이어질 참이었다. 밖으로부터 다급한 외침이 들려오지 않았다면 말이다. 

“각하, 후작 각하!”

 이디스는 눈을 크게 떴다. 후작도 마찬가지였다. 그 목소리는 후작을 따라다니는 하인도, 후작성의 집사 소어도 아니었다. 기사단장인 다트가 후작을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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