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새로운 국면
“레이디 갤러웨이가 안 계신다고요?”
“네, 레이디 아가일. 아침에 세숫물을 떠서 갔는데 아무도 안 계셨어요.”
후작성의 하녀는 황당함을 감추지 않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이디스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바로 전날, 바이올라 갤러웨이는 후작을 상대로 동반 약물 복용을 시도했다.
생명을 해치는 종류는 아니었지만 성욕을 한계까지 끌어올려 이성을 잃게 만든다는 점에서 악질적인 미약이었다.
그러나 만반의 준비를 한 그녀 앞에 나타난 사람은 로디언 후작이 아니라 이디스 아가일이었다. 그때 계획을 중단했다면 좋았을 텐데 어째서인지 갤러웨이 공작 영애는 미약 성분이 든 차를 이디스에게 건넸다. 어째서? 미간을 찌푸린 채 지나간 일을 하나하나 맞춰 보던 이디스에게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쳤다.
“어제 저녁에는?”
“네?”
“어제 저녁에는 있었을 텐데, 이상한 점 없었나요?”
“잘 모르겠어요.
시중을 거절하셔서 방 안에 들어가지 못했거든요.”
“그래도 혹시 뭔가 들은 말은.”
“음, 수도에서 데려온 시녀와 하는 말이 들리긴 했는데…….”
하녀가 공작 영애로부터 저녁 시중을 거절당하고, 들고 갔던 물품들만 내려놓은 뒤 나설 때였다. 벽난로 앞에 의자를 두고 등을 돌려 앉은 바이올라 갤러웨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날카롭고 성마른 목소리만큼은 들을 수 있었다.
「후작이 데려갔고, 아직도 안 나왔다?」 「그렇습니다.」 하녀의 설명을 듣던 이디스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녀의 놀람을 본, 스무 살도 안 된 하녀는 멋쩍은 듯 웃으며 변명조로 말했다.
“엿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주인님 이야기가 나오니까 저도 모르게.”
“아니, 괜찮아요. 잘했어요. 후작 각하를 우선해야지. 그리고 또?”
공작 영애와 그 시녀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고 하녀는 그때 이미 문을 거의 다 닫은 상태라 온전한 문장을 제대로 들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한 덕분에 몇 개의 단어를 띄엄띄엄 들을 수 있었다.
「작은 집사…… 떠…… 는데…… 당연하다고…… 눈치…… 했습니다.」
「뭐? 어떻…… 그러면 아가일…… 진짜…… 인데.」
「……이제…… 공…… 후작…… 할까요…… 저라도…….」
“내 이름도 나왔단 말이군요.”
“네, 레이디 아가일. 그 말은 공작 영애께서 하셨어요.”
갤러웨이 공작 영애가 실버글렌에 들어온 뒤로, 그녀의 행동을 누구보다 상세하고 빠짐없이 아는 사람은 바로 이디스였다.
하녀가 전해 준 이야기가 넘치도록 충분하지는 않지만 일의 맥락을 따지기에는 그럭저럭 부족함이 없었다. 대강의 사정을 알 만했다.
이디스는 날선 웃음을 흘렸다. 왕도를 주름잡는 레이디답지 않게 왜 그런 허술한 짓을 했는지 이해가 안 갔는데, 이제 보니 목표가 두 가지였던 것이다.
첫째, 로디언 후작을 끌어들여 둘 다 미약을 먹고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치는 것. 물론 이 일은 본의 아니게 희생한 이디스 덕분에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무산되었다.
그리고 둘째. 후작의 약혼녀라는 이디스 아가일이 진짜 약혼녀인지 확인하는 것.
“정말 무서운 여자였네.”
이디스는 등줄기를 관통하는 서늘한 감각에 몸서리쳤다. 계략을 짜고 실행하는 실력을 직접 겪어 보니 갤러웨이라는 이름값이 대단하기는 했다.
“네?”
“아니, 앤에게 한 말이 아니에요. 고생했어요. 가서 쉬도록 해요.”
“아, 네! 저, 그런데 레이디 아가일.”
“왜 그래요?”
“저기…….”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요.”
“아, 아니에요. 그럼 가보겠습니다.”
하녀의 태도가 희한했다. 홍조를 띠고 쳐다보는 눈빛이 부담스럽다 싶더니, 표정은 말하고 싶어 죽겠다고 써 붙이고선 입으로는 얼버무리고 종종걸음 쳐 갔다.
왜 저러나, 고개를 갸웃하던 이디스는 조금 늦게 이유를 깨닫고 입을 딱 벌렸다. 후작의 침실에서 일어난 일을 물어보고 싶은 것이었다.
후작의 침실에서, 후작과 이디스 둘이, 심지어 한 침대에 올라가서 했던 일 말이다. 이디스는 스타킹을 벗고, 후작은 장갑을 벗고, 은밀한 속살과 맨손과 그리고 또 입술과 혀와……. 이디스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후작성 안에 부릴 수족이라고는 시녀 하나뿐인 공작 영애도 알아차린 일이었다. 과장을 보탤 필요도 없이, 후작성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지켜보고 공유하는 고용인들이라면 더욱 모를 수가 없었다.
‘미치겠네.’
지난밤, 아니 밤도 아니고 늦은 오후 그 일이 있고 난 직후에는 괜찮을 줄 알았다. 약효가 해소되고 정신이 든 이디스가 부끄러움으로 죽으려고 하는 동안 후작은 신속하게 물러났다. 침대 옆의 작은 테이블에 물병과 크리스털 잔을 옮겨 주는 친절을 마지막으로 그는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먼저 나갔다.
「옷이 필요하면 내 재킷을 입고 가도 좋아.」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도 전에 문이 달칵 닫혔다. 이디스는 내적 비명을, 아니 절규를 지르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구르듯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후작이 그런 말을 할 만큼 옷이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후작의 옷을 빌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구겨진 치마를 팡팡 두들겨 굵은 주름을 펴고 헛손질을 해 가며 웃옷의 단추를 잠갔다. 행위의 여운으로 후들거리는 다리가 몇 번이나 휘청거렸지만 용케 주저앉지는 않았다.
악으로 버텼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후작의 침실은 성의 최상층, 제한된 인원만 드나들 수 있는 복도에 있었다. 이디스는 손톱만큼 문을 열고 인적이 없음을 확인한 뒤 냅다 내달렸다. 그녀의 방은 아래층이었고 천운으로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고 돌아갈 수 있었다.
그녀는 방문을 닫고 걸쇠까지 잠근 뒤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그런 직후 다리 사이의 질척이는 천조각을 벗어내면서 머리를 쥐어뜯었지만 어쨌든 그 순간에는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았다고 믿고 안도했었다……. 그랬는데 대체 어째서, 어떻게, 왜! 이제 사람들의 얼굴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
말로만 약혼녀라고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그거야 그냥, 후작의 불청객을 내쫓기 위해 모두 함께 작당한 놀이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진짜로 한 침대에 들어간 이상 웃으며 농담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게 되었다. 억울한 점이 없지 않지만 타인에게 밝힐 수도 없고.
‘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닌데!’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소리를 해명이랍시고 하지도 못한다.
입이 찢어져도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눈물이 찔끔 났다. 아직 후작의 얼굴을 어떻게 볼지도 생각하지 못한 그녀였다.
그런 데다가 후작성의 구성원들까지. 과도한 압박은 이디스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쪼그려 앉은 채 괴로워하던 그녀는 옷장을 거칠게 열고,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옷을 끄집어 내 트렁크에 처넣었다.
잠시 후, 로디언 후작성의 마차가 희끄무레한 새벽을 뚫고 달려 나갔다.
* * *
“왕자님과 결혼한 공주님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
“오늘의 동화 끝.”
아가일 자작 저택. 이디스는 조카 소피아를 데리고 책을 읽어주는 중이었다. 올해 일곱 살인 소피아 아가일은 제 아버지를 많이 닮았고, 그래서 고모인 이디스와도 제법 닮은 귀여운 소녀였다.
“근데 고모.”
“응?”
“공주님은 앞으로 어디서 사는 거야?”
“어, 글쎄. 결혼했으니 왕자님의 성에서 살겠지.”
그리고 아주 똑똑했다. 그 나이 때의 이디스보다, 어쩌면 그 이상으로.
“공주님도 나라가 있는데 왕자님을 따라가면 그 나라는 어떻게 해?”
이디스는 진한 감동과 묵직한 난처함에 부르르 떨었다. 세상을 배우는 중인 어린 조카가 날이 갈수록 수준 있는 질문을 생각해내는 것은 정말 좋았다. 하지만 거기 대답해 주어야 하는 사람이 자신인 것은 힘들었다.
“공주님의 동생이 왕이 되지 않을까?”
“공주님 동생 있어? 왕자님?”
“책에는 안 나오지만 있기를 바라야겠지.”
“동생 있어도 임금님이 될 수 있는데 왕자님 때문에 못 한 거야?”
“아니, 그게 왕자님 때문이라기보다는…….”
아가일 자작이 연락도 없이 들이닥친 여동생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방을 내어 준 것은 이 지나치게 영특한 딸을 떠맡기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럼 왜 임금님 안 했어? 공주님이니까 할 수 있는데?”
“그러게. 책이 좀 이상하네.”
“고모도 그렇게 생각하지? 우리나라 임금님은 공주님이었다가 임금님 하잖아.”
그렇지. 이디스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리고 어린 조카가 로맨스 동화책의 해피엔딩에 이의를 제기한 근본적인 원인을 깨달았다.
“국왕 폐하 이야기가 궁금하니?”
소피아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던켈드 왕국에 여왕이 즉위하는 것이 무려 이백 년 만의 일이었다.
“고모도 많이 아는 건 아니야.”
“고모랑 같이 사는 후작님하고 임금님하고 사촌이랬어.”
“그, 렇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불시에 습격을 받은 기분이었다. 체했을 때의 느낌과 아주 흡사했다. 이디스는 명치 아래를 슬슬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그러나 한번 들은 것을 잊어버리지 않는 소피아의 공격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후작님 잘생겼잖아. 임금님도 예뻐?”
“글쎄다. 그분을 뵌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
“후작님이랑 같은 은발이면 좋겠다.”
“그건 아닐걸…….”
왕이 아니라 후작이 궁금했던 건가. 보통 때라면 그에 대해 대충이라도 첨언하겠지만 지금은 때가 안 좋았다. 지금의 그녀에게 후작이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공격적이었다. 이디스는 미심쩍은 눈으로 조카를 들여다보았다.
“후작님은 왜?”
“아, 왕관 그림을 본 적 있는데 은발이면 예쁠 것 같았어.”
다행히 소피아의 관심은 왕 쪽이 맞았다. 티를 내지는 않았어도 괜히 예민하게 굴었던 것이 미안했다. 이디스는 성심성의껏 소피아의 말에 대꾸해 주기 시작했다.
선왕의 두 딸이 어머니가 다른 자매라든가, 로디언 후작의 고모인 왕태후가 반쪽 왕비로 살게 된 이유라든가 하는 것들로까지 이야기가 옮겨갔다.
이디스는 에둘러 설명하느라 애를 먹었다. 근간에 왕실에 일어난 일은 아이가 듣기에 좋은 화제도, 이해하기 쉬운 화제도 아니었다.
소피아가 잠자리에 든 후, 이디스는 녹초가 되어 방에서 나왔다.
‘아이고.’
기지개를 쭉 켰다. 평소에 비하면 한 일이 거의 없을 정도인데 피곤한 것이 희한했다. 후작의 재무관에게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할 일이 산적해 있었다.
새로운 사람을 들이는 일에 소극적인 후작 탓에, 영지의 규모에 비해 재무 일을 하는 인원이 많이 부족한 편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말도 없이 자리를 비운 이틀 동안 로디언 후작의 재무 집행관들은 토할 것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으리라.
‘어떡하지. 너무 미안하다.’
당분간 돌아갈 생각도 없었으므로 과도한 업무에 혹사당하고 있을 아랫사람들을 향한 미안함은 더욱 깊어졌다.
이틀 전, 날이 다 밝기도 전에 후작성을 나온 이디스는 아가일 저택으로 왔다. 자다 나온 자작은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동생을 쳐다보았으나 영주가 되어서 이 시각까지 자고 있느냐는 선제공격에 입을 다물었다. 이디스는 일단 좀 쉬겠다고 선언하고 빈 방 하나를 열어 짐가방을 던졌다.
자작부인과 소피아는 휴가를 나왔냐며 반겼다. 아니라고 하면 구구절절 설명해야 할 터였다. 이디스는 두말 않고 그 말대로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디스는 지금까지 제대로 된 휴가를 쓴 적이 없었다. 무려 6년 동안이나. 그러니 이 정도의 일탈은 괜찮을 것이고 괜찮아야만 했다.
비록 정식으로 문서를 올려 재가 받지는 않았다고 해도 그녀가 일한 세월이 그 정도는 보장해 줄 터였다.
‘문제는 어떻게 돌아가느냐겠지. 아니, 돌아갈 수는 있을까.’
그 생각을 하면 골치가 아팠다.
후작은 자신의 성에 일어난 변동을 보고받았을 것이다. 일단은 갤러웨이 공작 영애 소식부터 들었으려나. 공작 영애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이를 득득 갈았을 텐데, 그녀가 선수를 쳐 달아났다는 말을 듣고는 엄청나게 노했으리라.
공작 영애가 하루빨리 나가기만을 고대했던 것은 깨끗이 잊고 말이다.
‘뭐, 나 아니면 그 사실을 지적할 사람도 없으니까.
그보다 쫓아가서 물고를 내겠다거나 하지는 말아야 할 텐데. 다트 경이 잘해 줘야 하는데.’
그래도 기사단장이 있으니 몸을 던져서라도 막겠지.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든가.
이디스는 대체 덩칫값을 못 하는 후작령의 기사단장을 생각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다가 뚝 멈췄다. 후작이 공작 영애 일에 어떻게 나올지는 눈에 보이는 것처럼 훤히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일에 어떻게 반응할지는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화를 낼지, 어이없어 할지, 웃음을 터뜨릴지, 빈정거릴지, 떠오르는 그림이 없고 그저 깜깜했다.
“아, 진짜.”
방으로 돌아온 이디스는 앉지도 못하고 방 안을 서성였다. 후작과 대화를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고, 아가일로 오는 마차 안에서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할지 한 마디도 떠오르지 않았고, 머리를 쥐어뜯는 사이 이미 아가일 저택 앞이었다.
이미 도망쳐 나왔는데 뾰족한 수도 없이 돌아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일에 마비된 그녀의 두뇌는 도대체 제대로 돌아가질 않았다.
올케와 조카의 말대로 휴가라고 우기며 그대로 눌러앉아 현실을 회피한 것이 이제 이틀째. 하루라면 모를까, 이틀은 곧 사흘이 되고 사흘은 다시 일주일이 될 터였다.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수습이 되기는 될지도 모르겠다. 이디스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울렸다.
“이디스, 안에 있나요?”
화들짝 놀랐던 이디스는 목소리를 알아듣고 안도했다. 밖에 있는 사람은 아가일 자작 부인, 이디스의 올케이자 소피아의 어머니였다. 짧게 대답하고 문을 열자 상냥한 미소가 먼저 눈에 띄었다.
“로즈.”
“늦은 시간에 미안해요.”
“아니에요, 자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무슨 일이에요?”
“음, 잠시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심란하던 차였지만 안 된다고 거절하기는 그랬다. 오빠였다면 대답도 하지 않고 문을 닫았겠지만 올케는 이야기가 다른 것이다. 이디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문에서 비켜섰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네, 고마워요.”
로즈 아가일은 평균보다 한 뼘 정도 작은 키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로 나이보다 많이 어려 보이는 여성이었다.
하지만 실제 그녀는 명석하고 심계가 깊은 데다, 아가일 자작령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영주이기도 했다.
늦은 시각에 잡담이나 나누자고 방문을 두드릴 사람이 아니었다. 자리에 앉아 방긋 웃으며 바라보는 눈빛을 본 이디스는 올케의 방문 목적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로즈 역시 이디스가 깨달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왜 왔는지 알지요?”
“네.”
여섯 해 동안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 재무관 일에 몰두하느라 안부 편지에 답장도 잘 하지 않았으며 찾아가도 만나기 힘들었던 이디스였다.
그런 그녀가 연락도 없이 핏기 없는 얼굴로 들이닥쳤다. 심상찮은 일이 있음을 짐작하지 못하는 쪽이 이상하다.
“하루 정도 더 기다릴까 생각했지만, 그 하루가 이디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더군요.”
“그런가요.”
“더구나 내가 보기에 이디스, 당신은 누구에게든 말을 할 필요가 있어 보여요.”
정곡이었다. 혼자 앓기만 해서는 아무런 답도 찾을 수 없을 테니까. 방금 전까지도 끝없이 엉킨 생각에 빠져 헤매고 있지 않았던가. 이디스는 힘없이 웃었다. 웃으려다가, 일그러지는 입매를 느끼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 모습을 본 로즈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말했다.
“내게 말해 봐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게, 로즈. 그러니까요.”
입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로즈의 말대로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어디든 털어놓고 싶어 하던 중이었다. 이디스는 수없이 심호흡을 하고,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끝에 입을 열었다.
“사실은 여기 오기 전날…….”
이야기를 할수록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당일에는 날아간 줄 알았던 부분까지 눈앞에 번뜩 스쳤다. 이디스의 목소리가 갈수록 기어들어갔다.
이야기를 끝마칠 즈음에는 그녀 스스로도 자기 말을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였다. 사려 깊은 로즈는 잘 안 들린다거나 다시 말해 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쨌든 맥락으로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로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랬군요. 그래서 그날 그렇게 정신이 없었던 거였어요.”
“그런 셈이에요.”
“하지만 이디스, 후작성에서 달아나선 안 되었어요.”
“네? 하지만 로즈…….”
“탓하려는 게 아니에요.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아가일로 온 것은 잘했고요. 그렇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후작 각하와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잖아요.”
당신도 알고 있지요, 하는 투였다.
이디스는 반박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이디스. 당신이 실버글렌의 가신으로서 얼마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요. 재무관으로서 후작 각하께 아주 충실하다는 것도요. 그러니 내게 말해준 그 일이 있고 나서 당신은 아주 놀라고 두려웠을 테지요.”
로즈는 차분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이디스 스스로는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진짜 속내를 짚어냈다.
“지금까지의 관계를 이어나갈 수 없게 되었으니까.”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라 앞이 뿌옇게 보였다.
이디스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탄식했다. 남자와 여자가 한 침대에 들어갔다. 예복을 싹 갖춰 입고 나란히 누워만 있었다 해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데다가 배우자가 아닌 사람에게 보여서는 안 되는 곳을 적나라하게 내보였다. 그뿐인가. 숨이 막힐 만큼 외설적인 행위를 했다.
타의로 미약을 복용했고 그에 대한 응급처치였다고 말하기에는 정도가 너무 지나쳤다. 서로의 명예에 해가 될 일이라면 상호 침묵을 맹세하고 덮는 방법도 있기는 했다.
그 맹세에는 절대적인 망각, 관에 머리를 누일 때까지의 망각도 포함되었다. 하지만 잊을 수가 없었다. 상대가 앨피어스 로디언이었기 때문에. 그를 향한 그녀의 감정은 아주 복잡했다.
단언컨대 여자로서의 감정보다는 충실한 가신으로서의 감정이 압도적으로 컸지만, 지난날 품었던 마음이 발아하기 전의 씨앗처럼 남아 있었다.
그나마 지금까지는 같은 성에 살며 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같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그럭저럭 만족해 왔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디스는 로즈에게 말을 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 못했다. 아니, 괜찮은 척을 아주 장렬하게 실패했다.
이도 저도 아니기에 어느 쪽으로도 갈 수 없는 꼴이 제 눈에도 가관이었다.
물론 뻔뻔하게 돌아가 집무실의 책상에 앉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로디언 후작의 재무관인 이디스 아가일은, 인정하기는 정말 싫지만 결국 이렇게 끝이었다. 이디스는 잔뜩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빠한테는 비밀로 해 줘요.”
“물론 그럴 거예요. 하지만 이디스.”
“오늘은 여기까지만요.”
“…….”
“이야기를 들어 줘서 감사해요, 로즈. 그렇지만 오늘은 그만해요.”
* * *
타인에게 그날의 일을 모두 고백함으로써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던 밤이 지났다. 이디스는 온갖 악몽으로 잠을 설쳤고, 느지막이 일어나 비척거리며 창을 열었다. 환한 햇살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반갑기는커녕 푸석해진 피부에 닿는 햇살이 거북해서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마당에서 외출 준비를 하던 아가일 자작이 그런 그녀를 보고 기겁했다.
“저게 내 동생같이 생긴 귀신이야, 아니면 귀신같이 생긴 내 동생이야?”
“테런, 오전 열한 시에 나오는 귀신이 어디 있어요? 늦기 전에 얼른 출발해요.”
로즈가 남편의 어깨를 밀어 마차에 태웠다. 배웅 나왔던 소피아가 실랑이하는 부모와 창가에 선 고모를 번갈아 쳐다보고 까르르 웃었다.
“진짜 귀신 같기는 해!”
이디스는 느릿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오빠와 조카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아니었지만 생기 없는 몰골로 흐느적거리는 모습은 확실히 으스스한 데가 있었다. 이디스가 어렸을 때부터 아가일 저택에 있었던 고용인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난 괜찮은데.”
“고모, 아직 괜찮으냐고 물은 사람이 없어.”
“그러게.”
“소피아가 해줄게. 고모 괜찮아?”
“아니. 안 괜찮아.”
방으로 찾아온 소피아까지도 눈을 휘둥그레 떴다. 로즈가 데리러 오자 손을 잡고 나가면서도 고모가 걱정되는지 자꾸 돌아보았다.
혼자 남은 이디스는 꽤 오랫동안 창밖을 바라보다가, 그림자의 방향이 훅 꺾일 무렵에 천천히 일어섰다. 그녀가 향한 곳은 아가일 자작의 서재였다.
아가일 자작인 오빠 테런이 아침에 외출했기 때문에 서재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디스는 익숙하게 책상 서랍을 뒤져 종이를 꺼내고, 펜과 잉크를 찾아냈다.
그리고 익숙하게 써 내려갔다. 존경하는 실버글렌의 영주, 앨피어스 칼라일 로디언 후작 각하. 그의 이름을 적어 본 적은 숱하게 많았다.
보고서를 쓸 때마다 첫머리에는 후작의 이름을 포함한 문구가 들어갔다. 선대 후작이 직접 지었다는 퍼스트 네임은 고풍스럽고 유려해서 잘난 얼굴에 딱이라고, 누군가와 농담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것으로 마지막이리라. 그렇게 생각하자 먹먹해져 망설임 없이 첫 줄을 완성했던 펜이 멈췄다.
잉크 한 방울이 똑 떨어져 종이에 얼룩을 남겼다. 이디스는 한숨지으며 다음 문장을 써 내려갔다. 일신상의 이유로 사직을 청합니다. 재무관 이디스 리산드라 아가일 배상(拜上). 사직서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는 후작도 알고 있으니 구구절절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종이에 여백이 너무 많이 남았다. 보는 사람이 심란할 정도로 하얗게 펼쳐져서 정말 이렇게만 적고 펜을 놓을 참이냐고 묻는 듯했다.
고심하던 그녀는 다시 펜을 바르게 쥐었다. 어차피 후작 본인만 볼 텐데 덧붙이는 말 정도는 써도 될 것이다.
후작 각하, 죄송 죄송해요, 라고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길지도 않은 그 문장은 완성되지 못했다. 한 글자씩 천천히 적고 있던 이디스의 귀에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이디스! 이디스 아가일, 어디에 있나!”
맙소사, 후작이었다. 이디스는 펜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환청을 들은 것이라면 좋을 텐데 그 순간 후작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심지어 첫 번보다 가까운 위치에 온 듯했다. 바짝 얼어붙어 귀를 기울이자 뚜벅뚜벅 걸어오는 특유의 걸음 소리까지 포착할 수 있었다.
그는 복도에 난 문을 모조리 열어젖히면서 오는 중이었다.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하나하나 직접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디스의 간이 졸아들었다. 따지자면 그녀가 잘못한 일은 없었고 후작의 목소리에서도 분노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지금 후작과 대면하기는 싫었다. 그녀는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 문을 열고 뛰어나갔다간 바로 후작의 눈에 띌 것이 뻔했다.
“후작 각하, 각하!”
“뭔가?”
게다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그가 다 왔는지, 집사의 다급한 음성이 바로 문 밖에서 들렸다. 이디스는 소스라쳤다.
“응접실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아가씨를 찾아 모시겠습니다.”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며? 난 지체하고 싶지 않다. 이디스!”
“죄송합니다만 그곳은 자작님의 서재…….”
묵직한 나무문이 벌컥 열렸다. 로디언 후작은 휘하 봉신 아가일 자작의 서재에 거침없이 침입했다. 뒤에서 집사가 절망하든 말든,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서재 안을 훑었다.
“흠.”
이디스는 자작의 책상 아래 빈 공간에 옹송그린 채 입을 틀어막았다. 후작은 인기척에 대단히 예민했다. 옷 부스럭거리는 소리라도 냈다간 바로 들킬 터였다.
‘가요, 나 없으니까 가라고!’ 급하게 밑으로 숨는 바람에 자세가 어정쩡했다. 다리를 조금 더 몸에 붙여서 치마가 퍼지지 않도록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만 들킬까 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디스는 눈을 꽉 감은 채, 후작이 익숙하지 않은 남의 서재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빨리 돌아나가길 기원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근래 운이 좋았던 날이 하루도 없었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분명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을 텐데도 후작은 바로 나가지 않고 서성였다. 그러다가 정확하게 그녀가 숨어 있는 책상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에게 투시 능력이라도 있었단 말인가! 달달 떨던 간이 덜컥 떨어졌다.
‘으윽…….’
성년이 되기 직전부터 지금까지 후작을 보필하면서 이디스가 경험으로 깨달은 법칙이 몇 가지 있었다.
후작은 상벌에 엄격한 영주였다. 그리고 모든 일이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극히 혐오했다. 잘한 일이든 잘못한 일이든 후작에게 보고되는 것이 최우선이었고 처분은 그다음 일이었다.
후작성 사람들 식으로 바꿔 말하면 이랬다. 받게 될 상이라면 먼저 손을 내밀고, 맞게 될 매라면 먼저 회초리를 대령하자. 더구나 형편없이 구겨진 자세로 앉은 상태에서 굽어보는 후작과 마주치는 꼴은 피하고 싶었다. 체념한 이디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예상대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후작의 발소리가 뚝 멎었다.
“……이디스?”
“각, 하.”
“거기 있었던 건가?”
“예?”
아니, 잠깐만. 알고 다가오던 게 아니었나? 이디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꼼짝없이 들킨 줄 알고 모습을 드러냈는데 정작 후작은 몰랐던 듯 살짝 커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낭패였다. 이디스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후작의 반대편으로 돌아 나가려고 했다.
“또 어딜 가나.”
하지만 손목을 잡혔다. 단단하게 옭아맨 손을 반사적으로 내려다보았는데 예의 새하얀 실크 장갑이 보였다. 그걸 보자 후작의 침실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얼굴에 불이 붙는 것 같았다. 벌게진 이디스는 그녀답지 않게, 후작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더듬거렸다.
“놓아주세요.”
“도주의 우려가 있는 자를 어떻게.”
“제가 무슨 죄인도 아니고.”
“그야 그렇지.”
후작은 담담하게 인정했다.
그렇지만 손아귀에는 더 힘이 들어갔다. 코웃음을 치지는 않았지만 그것과 거의 비슷하게 느껴지는 어조로 그가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도망은 왜 갔는지 궁금하군.”
“……제가 왜 그랬는지 아시잖아요.”
“말 한 마디 없이 사라졌는데 어떻게 아나. 죄인도 아닌 레이디 아가일?”
“각하. 말이 필요했나요? 그날 일어난 일이 있잖습니까. 일이요!”
“그 일로 그대가 여기까지 도망칠 까닭이 뭐지.”
“정말 몰라서 물으십니까?”
“그래. 그래서 내가 직접 온 거야.”
“무슨 뜻인가요.”
“다른 사람을 보내 그대 말을 듣게 할 수는 없으니까.”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대목에서 말문이 막혔다. 도의를 지켜줘서 감사하다고 하는 것도 웃기지 않은가. 이디스는 발끝을 쳐다보며 침묵했다. 후작은 그녀의 머리를 내려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그럴 리 없겠지만 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디스 아가일이 근무지 무단이탈이라니.”
“…….”
“그대답지 않은 행동이었어.”
사실 그의 말에는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며칠째 진정되지 못한 상태를 지속해 온 이디스는 발끈했다.
“저답지 않다고요? 저다운 것은 무엇인데요?”
“이디스.”
“각하, 여기까지 오시게 만들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각하께서 오실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지만요. 어쨌든 마침 오셨으니까 잘되었습니다.”
이디스는 고개를 홱 돌렸다. 책상 위에는 조금 전에 쓴 사직서가 접히지도 않은 상태로 놓여 있었다. 후작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펜을 잡았다. 펜촉의 잉크는 거의 말라붙었지만 힘을 줘 누르자 기분 나쁜 소리가 나면서도 획이 그어졌다. 그녀는 마지막에 덧붙이려고 했던 문장 위에 두 줄을 친 다음 종이가 구겨지든 말든 잡히는 대로 집어 들었다. 그리고 후작에게
“이게 뭐지.”
“사람을 시켜 보내려고 했는데 마침 받을 분이 오셨으니 그냥 드릴게요.”
후작이 종이를 가져갔다. 이디스는 종이가 손에서 빠져나갈 때 저도 모르게 살짝 힘을 주었지만, 허무하게 놓치고 말았다.
그래, 될 대로 되라지. 그녀는 후작의 시선이 종이 위를 훑는 것을 지켜보았다. 오는 사람은 질릴 정도로 까다롭게 거르면서 가는 사람은 말로도 잡지 않는 후작이었다. 사직은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렇지만 면전에다 사직서를 던지는 정도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렇게 되어 버렸다. 입맛이 썼다.
“……하.”
적혀 있는 문장은 몇 개 되지도 않았다. 쓴 장본인인 이디스가 토씨 하나까지 다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짤막했다. 하지만 몇 번을 다시 읽은 후작은 한참 만에야 종이에서 눈을 뗐다. 그리고 한 손으로 종이를 와작 구기며 으르렁거리듯 사납게 말했다.
“웃기지도 않는군.”
“지금 뭐라고 하셨…….”
“불허한다.”
“각하!”
“거절 답장을 보낼 시간까지 단축했으니 일석이조군.”
이디스는 눈을 부릅떴다.
“돌아가지.”
물론 혼자서만 돌아가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후작은 사정없이 구겨 원래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 종이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친 뒤 이디스를 당겼다. 이디스는 발을 떼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힘에 못 이겨 기우뚱했다. 살짝 놀란 후작이 그녀의 팔을 받치면서 손목을 잡은 힘이 느슨해졌다. 이때다. 그녀는 힘껏 팔을 휘둘러 후작의 손을 떨쳤다.
“뭐 하는 건가?”
“제게 이러실 수 없으세요.”
“왜?”
왜? 왜라고 했나? 그녀는 황당함에 눈을 치떴다. 잘생긴 미간에 굵은 주름을 만든 남자가 고압적인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그녀가 익히 알고 있노라 자부했던 로디언 후작 같지 않은 표정이었다.
“안 간다니까요!”
“허락 안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지금 절 강제로 데려가겠다는 말씀이세요?”
“그대는 여전히 본 후작의 재무관이고, 그러니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한다는 것뿐이야.”
“아니, 저는 그만두겠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이디스가 딱 잘라 말하자 후작의 눈썹이 크게 꿈틀했다. 아, 마음에 안 드는 소리를 들었을 때 보이는 버릇. 지금은 다시 이디스가 잘 아는 그 사람 같았다. 그녀는 후작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서둘러 말을 이었다. 후작이
‘그녀가 아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을 때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
“데려가신다고 한들 일 안 합니다.”
“뭐야?”
“저는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전했어요. 집무실에 들어가지도 않을 거예요.”
그 순간 진녹색 눈동자에 얼룩이 졌다. 이디스는 깜짝 놀랐다. 가장 깊은 밤의 그늘이 숲을 잠식하듯 새카만 그림자가 후작의 눈동자를 잠식하고 기이하게 번들거렸다.
“……정말인가?”
목소리 역시 늪에 잠긴 것처럼 낮고 위협적이었다. 말투조차 달랐다. 등이 오싹했다.
이디스는 자신이 정확하게 무슨 짓을 했는지 몰랐지만 이 상황이 대단히 안 좋다는 것만은 알아차렸다.
“정말로 재무관 일을 끝내겠다는 건가?”
“…….”
“정말이냐고 묻잖나. 이디스.”
“그, 그렇습니다.”
그녀가 용기를 쥐어짜내 대답하자 후작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았다.”
“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 꺄악! 각하!”
그리고 이디스를 번쩍 안아 들었다. 다만 안아 들었다는 표현에는 왜곡이 있었다.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후작은 짐짝을 둘러메듯 이디스를 들어 올려 자기 어깨에 걸쳤다.
“재무관으로 대할 필요가 없다면 나로서는 사양할 까닭이 없지.”
* * *
로디언 후작성의 하녀 앤이 이틀 만에 돌아온 이디스의 손을 잡고 울먹였다.
“레이디 아가일! 말씀도 없이 사라지셔서 얼마나 놀랐다고요!”
“하하.”
이디스는 남의 웃음을 따라하는 사람처럼 어색하게 웃었다. 하녀에게 유감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성의껏 응대하기에는 지금 그녀의 상황이 안 좋았다.
“후작님께서도 얼마나…….”
“앤, 미안하지만 피곤해서 쉬었으면 하는데.”
“어머나! 죄송해요. 쉬세요, 레이디 아가일. 필요한 것 있으시면 바로 부르시고요!”
“네, 그렇지만 내가 직접 나가면 되니까…….”
“아니에요. 집사님이 레이디를 나오시게 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셨는걸요.”
단호하게 말한 앤은 이디스가 뭐라고 더 말하기도 전에 꾸벅 인사한 뒤 방을 나갔다. 이디스는 참았던 한숨을 푹 쉬었다. 쉬고 싶다는 말은 진심이었지만 쉴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첫째, 그녀는 실질적으로 자유를 빼앗긴 상태였다.
소어 집사와 앤을 거치면서 놀랍도록 부드럽게 돌려 전달되었으나, 그녀를 직접 이 방에 데려다 놓은 후작의 의사를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이랬다.
‘이 방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음.’
그리고 둘째, 지금 그녀가 머무는 방이 어디인가도 문제였다. 후작의 재무관이 된 이래 여섯 해 동안 사용해 온 그녀의 방이 아닌 데다가, 무려…….
‘후작부인의 방이라니.’
현 후작의 모친은 아주 오래전에 작고했다.
후작부인의 방에 사람이 묵지 않은 시간을 햇수로 따지면 거의 스무 해쯤 될 터였다. 물론 대대로 성의 안주인이 사용하는 공간인 만큼 주인이 없어도 사람의 손길이 닿아 잘 관리되기는 했지만, 사람의 기분이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머리를 지배하는 생각에 좌우되는 법이다.
정성스럽게 꾸며 놓았어도 어쩐지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듯했다. 이디스는 차마 침대 근처에는 가지도 못하고 티테이블 옆의 장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심란한 마음을 토닥거리는 것처럼 졸음이 몰려들었다. 아가일 저택에서 출발한 후작의 마차는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질주했다.
그 과정에서 탑승자의 편안함은 상당 부분 도외시되었으니 피곤한 것도 당연했다. 더구나 그녀를 이 방 안으로 밀어 넣은 후작은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며 쌩하게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가 눈앞에 없고 당장 볼 것 같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자 눈꺼풀이 천근처럼 무거워졌다.
‘조금만 자고 생각하자.’
상단이나 소영주들과의 협상에서는 양보라는 단어를 아예 배운 적도 없는 것처럼 구는 그녀였으나, 노곤한 몸을 뒤덮는 졸음 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력했다. 이내 방 안에는 규칙적인 숨소리만 남았다.
* * *
로디언 후작이 두 번째 외출을 끝내고 성으로 돌아왔을 때는 날이 저물어 어두컴컴했다.
해가 짧은 북부에서는 생활의 기준이 일출이나 일몰 시간과 별개로 돌아가지만, 해가 떨어지기 전에 돌아오려고 서둘렀던 후작은 짜증 섞인 얼굴로 마차에서 내렸다.
“이제 돌아오십니까, 각하.”
“그래. 그녀는?”
“쉬시겠다고 하녀를 내보낸 뒤로 줄곧 아무 말 없으십니다.”
외투를 벗어 건넨 그는 두말없이 성의 본채로 들어갔다. 주인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던 하인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으나 본체만체하고 지나쳐 중앙 계단을 올랐다.
가신들의 집무실과 개인공간이 늘어선 2층 역시 눈길도 주지 않고 스쳤다. 그가 긴 다리를 쉬지 않고 움직여 도착한 곳은 꼭대기인 4층, 후작부인의 방 앞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잠시 침묵했다. 묘한 감회가 드는지 표정이 가라앉았다. 후작부인의 방은 지금껏 스무 해 가까이 비어 있었고 후작의 방과는 중앙 계단을 사이에 두고 대칭을 이룬 반대편에 위치했다.
후작으로서는 우연히 들여다볼 일도 없었다. 그의 어머니가 썼던 곳이지만 들어가 본 적이 드무니 기억도 거의 없으리라. 그러나 지금 이 안에는 그녀가 있었다. 이디스 아가일.
대부분의 경우 앨피어스 로디언이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데 크게 기여하지만, 때로는 충동적으로 굴도록 만들기도 하는 여자 말이다. 그는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문을 두드렸다.
“이디스. 나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예상했기에 그는 거의 동요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어서 아가일까지 도망치기도 했는데 방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하는 것쯤이야 놀라운 일이 아니잖은가.
“이디스. 이야기 좀 하지.”
그러나 두 번째에도 아무 기척이 없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집사 소어는 그녀가 계속 방 안에 머물렀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옆에 밀착해 지키고 있지 않은 이상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이디스는 이 성에서 여섯 해를 살았고 후작이 최측근들에게만 알려준 비밀 통로도 훤히 꿰고 있었다.
후작은 문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조급한 손놀림에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안에서 잠그지는 않았기에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렇지만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 다시 한 번 적당한 소리를 내고 이디스의 응답을 기다리는 쪽이 여성에 대한 예의였다.
그러나 후작의 매끈한 구둣발은 생각할 여유가 어디 있냐고 말하는 것처럼 망설임 없이 성큼 걸어 들어갔다.
방 안으로 몸을 밀어 넣은 그는 즉시 등 뒤로 손을 돌려 문을 닫았다. 침대 위는 깨끗했다. 사람이 누워 있기는커녕 침구에 손댄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후작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없어서 말로 하지 않았을 뿐, 속으로는 이미 애가 타기 시작했다. 만일 그녀가 또 달아났다면 그는…….
“이런.”
다행히도 그녀는 방 안에 있었다. 침대가 아니라 장의자에 모로 누워 있어서 바로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크게 안도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갈수록 쌔근거리는 숨소리가 귀를 적시듯 들려왔다. 그에 따라 그의 걸음은 급격하게 느려졌다.
해가 있을 때부터 잠들었는지 창으로 새어 들어온 달빛만이 조명의 전부였다. 처음에는 어스름한 실루엣만 눈에 들어왔으나 어둠에 익숙해질수록 명암과 색채가 세밀하게 구별되었다.
하얗게 빛나는 목선이 후작을 붙들어 세웠다. 그는 가만히 선 채 한참, 아주 한참 동안 잠든 이디스를 내려다보았다. 손도 대지 않고 오직 눈으로만 부드러운 얼굴선을 덧그렸다. 충분히 휴식한 그녀가 마침내 제풀에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그는 침묵했다.
“으음…….”
마침내 그녀가 느릿느릿 눈을 깜박였다. 짙은 떡갈나무 빛, 온기 어린 갈색 눈동자에 빛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눈에 그의 모습이 언뜻 비치는가 싶더니 이내 동그랗게 커졌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후작은 희미하게 웃었다.
“가, 각하.”
“침대를 놔두고 왜 여기서 자고 있나.”
“제가 써도 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쓰라고 데려다 놓았는데.”
그녀가 딱딱한 말투로 그의 말을 반박했다.
“각하, 이곳은 후작부인의 방입니다.”
“내게 후작성의 구조를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나.”
“잊으신 것 같아서요.”
“그렇지 않아.”
“아무튼, 이곳은 제가 함부로 쓸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니까요.”
“내가 허락했으니 여기서 달리기를 해도 상관없어.”
“제가 싫다고요!”
두 사람 사이에 설전이 벌어졌을 때의 승률을 따지면 4대 6 정도였다. 전자가 이디스이고 후자가 후작인데, 그래도 다른 가신들과 비교하면 이디스의 전력이 비교불가로 우수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애초부터 이디스가 질 싸움이었다. 그녀는 몰랐지만, 후작은 그녀가 어떤 논리와 법도를 가져오든 막무가내로 부정할 준비가 만만했다.
“왜 싫지? 그대 취향이 아니라서 그런다면 아예 새로 단장해도 좋아.”
“그게 돈이 얼마나 드는, 아니. 제가 왜요?”
“그대가 오늘부터 여기서 지낸다는 사실은 변함없으니까.”
“저에게는 제 방이 있어요!”
“아, 그 방은 정리하도록 했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정리라니, 대체 무슨 명목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짜증을 내려던 이디스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이래서 머리 회전이 너무 빨라도 안 좋다. 그녀는 아가일 저택에서 자신이 했던 말을 생각해냈고 그가 어떻게 답할지도 거의 완벽하게 유추했다. 후작이 빙긋 웃으며 그녀의 기대에 부응했다. 아까 언뜻 보고 착각이라 생각했던 미소와는 사뭇 다른, 심술궂은 웃음이었다.
“재무관을 그만둔다고 했지 않나.”
“…….”
“하지만 약혼녀를 그만둔다고 하지는 않았으니, 마땅히 이곳을 내주어야지.”
“공작 영애가 떠났는데 이러실 필요가 어디 있어요?”
“그 여자 이야기는 하지 말고.”
“됐습니다.
약혼녀 노릇도 그만둘—.”
“계약의 해지 조건은 쌍방 합의라고 썼었어.”
이디스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일그러졌다. 불공정 계약을 덜컥 해버린 데 대한 짜증과 분노, 자괴감 때문이었다. 그 표정을 본 후작이 눈을 찡그렸다. 그녀의 자존심이 상하기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 마음 편하게 이 방의 모든 것을 쓰도록 해.”
“각하. 제가 마음 편할 수 없다는 사실도, 그 이유도 아시잖아요.”
그랬는데, 이디스가 정말 단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뻗대니 후작도 점점 여유가 없어졌다. 이디스가 물러서지 않고 버티는 것은 그녀가 기력을 되찾아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것 자체가 후작의 심기를 거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물쩍 넘어가려던 것이 뜻대로 안 되게 생겼다는 점이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다행히 로디언 후작의 얼굴 가죽은 상상초월로 두꺼웠다. 역사 있는 대귀족의 혈통이란 응당 그래야 하는 법이다. 그는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어 당당하게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내가 그대에게 한 일이라곤…….”
“각하!”
“……의료적 응급처치에 준하는 행동뿐이었고.”
이디스는 입을 딱 벌렸다. 그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아니, 진실의 색이 순백이라면 온통 새빨간 가운데 손톱만큼 흰 점이 찍힌 정도일까.
“그럼에도 진실을 아는 자가 없어서 성 안에는 우리가 동침했다는 소문이 자자하지. 그러니 차라리 약혼을 유지하는 쪽이 그대에게는 낫지 않겠어?”
“어차피 언젠가는 없던 일이 될 테고, 그럼 제게 돌아오는 부담은 같아요.”
“없던 일로, 아니, 아니다.”
후작은 혀끝까지 치밀어 올라 감겨드는 말을 꾹 눌러 삼키느라 잠시 지체했다. 짧지만 의미심장한 침묵이 지나갔다. 이디스가 조금만 침착했더라면 그가 평소의 패턴과 좀 다르게 행동하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법한 여백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원치 않는 대치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중이었고, 말이 헛나올 뻔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후작 본인뿐이었다. 그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그대에게 부담이 적게 가도록 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마.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지원하겠다.”
“각하, 제발.”
그답지 않게 애원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혹은 다행히도, 여전히 그의 상황을 간파하지 못한 이디스는 제 주장에만 완강했다.
“그런 배려는 원치 않아요. 그냥 지금 약혼을 백지화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고요.”
후작은 조금 의기소침해졌다. 그를 아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앨피어스 로디언과 의기소침이라는 표현을 한 문장에 넣지 않겠지만, 실제로 그러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디스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슬쩍 흘린 말에는 그의 심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내가 그렇게까지 싫은가?”
아이러니한 사실은, 그 물음이야말로 도대체 결론이 나지 않을 것 같았던 둘의 대치를 끝내는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이디스가 눈을 부릅떴다. 후작은 목이 타는지, 목깃을 맵시 있게 감싸고 있던 크라바트를 잡아당겼다.
이디스는 어이가 없었다. 그가 알고 그녀 자신이 아는 바, 이디스는
‘네, 그렇게까지 싫습니다’라고 대답하려면 하고도 남는 사람이었다.
알면서 왜 저런 말을 했을까. 그녀는 평소와 달리 속을 짐작할 수 없게 된 후작을 빤히 바라보았다. 헛소리를 했다고 생각해서 부끄러운 건지, 아니면 진심으로 그 질문의 답을 듣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하는 건지.
그냥 딱 잘라 말해 버려? 거짓말을? 아, 바로 그 부분이 문제였다. 자신은 후작을 싫어하지 않았다. 싫어하기는커녕, 아무리 뿌리 뽑으려 해도 뽑히지 않는 마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후작에게 고하는 것은 안 될 말이었다. 그랬다가는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될 테니까. 승리할 확률이 제로에 가까운 도박을 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각하야말로 저를 싫어하시면서 왜 이렇게까지 괴롭히세요.”
“뭐라고?”
이번에는 후작이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눈을 부릅떴다. 그의 고개가 살벌하게 홱 돌아왔다. 이디스는 목까지 벌게진 채 고개를 푹 숙이면서 더듬거렸다.
“그, 그렇지 않고서야.”
“…….”
“그때 그렇게 태, 태연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나가고.”
“내가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멀쩡하셨잖아요! 거기다 이제는 뭐, 기가 막혀서, 의료적 뭐라고요?”
“잠깐, 이디스.”
“그러면서 왜 꼭 저여야 해요?”
그것이야말로 그녀의 진심 어린 원망이었다. 정말이지 너무했다. 본인 말마따나 의료적 처치일 뿐인 행위라면 가짜 약혼도 깨끗이 청산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걸 마치 책임이라도 지겠다는 것처럼 구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그만두세요, 제발. 그리고 진짜 약혼할 여자, 같이 자고 싶은 여자를 찾으시라고요!”
이디스의 음성이 거의 찢어질 듯 높아졌고 목덜미는 거의 폭발할 것처럼 붉어졌다. 시뻘건 목이 후작의 눈에 고스란히 보였겠지만, 그가 정확히 어디쯤을 보고 있는지 모르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잠시 말이 없던 후작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한숨을 쉬는 것도 같고, 이상하게 들뜬 것도 같았다. 너무 부끄럽고 화가 난 나머지 그녀의 청각에도 문제가 생겼을까?
“이디스.”
“…….”
“내가 그대에게 발정하지도 않는 주제에 약혼녀를 해 달라 우긴다는 말인가?”
낯부끄러운 말이 또렷하게 들리는 걸 보니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이디스는 입술을 깨물며 침묵했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아니, 아니다.”
후작이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는 무척 불유쾌한 기분인 듯싶었다.
“말로 해명할 일이 아니지.”
그가 대뜸 그녀의 턱을 받쳐 올렸다. 이디스는 제 얼굴이 수치심과 당혹으로 상기되어 있음을 알았다. 평소보다 배는 짙어진 진녹색 눈동자에 고스란히 비쳤기 때문이다.
달아오른 뺨과 붉게 물든 눈가, 멍하니 벌어진 입술까지. 꼴이 한심해 보였는지, 후작이 뭐라고 말하려다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목울대가 급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리고 후작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직접 확인하고 오해를 풀도록.”
이디스는 당황했다. 아니, 당황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그녀는 기겁했다.
“뭐, 뭐, 뭘 확인해요?”
“이제 와서 모르는 척하지 마.”
후작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사납게 웃었다. 늘 쌀쌀맞은 표정 아니면 덜 쌀쌀맞은 표정만 달고 있던 얼굴에 그런 난폭함이 나타날 수 있음을 이제야 알았다. 노여워할 때도 미간이나 입매 정도만으로 기분을 표현하는 편이었는데, 지금은 창살이 부서져 나간 맹수 같았다. 그 우아한 입에서 나오는 말 역시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대에게 발정하는지 안 하는지 확인하라고.”
이디스는 입을 딱 벌렸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야! 그러나 후작이 농담을 한 것도 아니었고, 그녀가 환청을 들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반쯤 헝클어져 있던 크라바트를 완전히 풀어 던졌다. 그리고 단정하게 잠겨 있는 목깃에 긴 손가락을 집어넣더니 쭉 당겼다. 크게 힘을 주는 것 같지 않은, 심드렁하게까지 보이는 동작이었는데 단추들이 뜯겨나갔다. 소름이 돋았다. 겁을 먹은 이디스는 주춤거리며 물러나려 했다.
“어딜 가?”
“아니, 각하. 그게.”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장의자에 앉아 있는 상태여서 재빠르게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의 움찔거림을 포착한 그는 먹잇감을 잡아채는 맹수처럼 날래게 덮쳐 왔다. 이디스는 긴 의자 위에 드러누웠다. 그녀가 그런 자세를 취하도록 몰아붙인 후작은 이제 완전히 그녀의 위로 올라와 그늘을 드리웠다. 그녀의 다리 양옆에 세운 무릎과 어깨 양옆을 짚은 팔은 석주 기둥처럼 위압적이었다.
“아, 그렇지.”
그 상태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후작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완전히 잊고 있었어.”
“뭘, 말이에요.”
“그대는 그대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여자라는 것.”
그는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고 있던 이디스의 손을 잡아챘다.
자기가 그러고 있는 것도 몰랐던 이디스는 깜짝 놀랐지만 그 손이 속절없이 끌려가 무엇인가에 닿았을 때는 더 놀랐다.
“히익.”
“아직 다 커진 것도 아니야.”
후작은 그녀의 손이 자신의 바지 앞섶,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 열기를 발산하는 부위를 누르게 했다. 속옷과 겉옷, 최소 두 겹의 얇지 않은 천이 사이에 있음에도 그것은 뜨거웠다.
이디스는 부끄러움, 난감함, 당황, 하여간 비슷한 카테고리의 온갖 기분이 뒤엉킨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안타깝게도 눈을 감음으로써 촉각이 더 예민해져 후작의 것이 꿈틀거리는 움직임까지 모조리 느끼게 되었지만. 손바닥이 녹을 것 같은 와중에 아랫배가 저렸다. 문제의 그날 약기운이 돌면서 느꼈던 바로 그 감각이었다.
“그날은 이것보다 훨씬 더했고.”
이디스는 몸서리쳤다. 그날을 떠올리는 순간 후작의 말이 겹치면서 온몸이 저릿하게 뒤틀린 탓이었다.
“윽.”
비명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는 그녀가 아니라 후작의 입에서 나왔다. 그녀가 부르르 떨면서 그의 것에 닿아 있던 손에도 힘이 들어간 탓이었다. 아직 아니라던 말은 과장 없는 사실인 듯했다.
이디스는 제 손을 밀어내듯 부풀면서 쿵, 하고 맥동을 과시하는 그것의 존재감에 경악했다. 옷 안에 갇힌 것의 실루엣을 더듬기만 하는데도 숨이 턱 막혔다. 후작이 입술 한쪽을 깨물며 잇새로 속삭였다.
“순서를 좀, 지켰으면 좋겠군.”
“순서라니…… 흣.”
그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몸으로부터 떼어내고, 그대로 위로 젖혀 자유로운 상태였던 다른 손과 합쳐 쥐었다.
그녀의 양손목이 그의 한 손에 잡혀 결박되었다. 팔을 버둥거리며 벗어나려 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힘으로 후작을 이길 수 있었다면 재무관이 아니라 기사단장을 했을 것이다. 괜히 힘을 쓴 탓에 호흡만 가빠졌다. 이디스는 가슴을 얕게 들썩이며 그를 노려보았다.
달빛이 그의 옆얼굴을 새파랗게 비추고 있었다. 조물주가 완벽한 계산 끝에 정성들여 깎아낸 얼굴선이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디스는 순간 넋을 잃고 후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을 향한 시선을 바로 알아차린 듯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 역시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의 시선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곧게 맞물렸다. 이디스의 가슴이 요동쳤다.
“그대의 형편없는 오해도, 결국 순서 때문이 아닐까 하는데.”
“…….”
“오늘은 착실하게 순서에 따르도록 하지.”
후작은 한쪽 눈썹을 까딱 들었다 놓았다. 그리고는 이디스를 향해 쇄도했다.
“응, 으응!”
“시작은 키스부터.”
말캉한 입술을 맞댄 채 속삭이는 목소리가 무시무시하게 유혹적이었다. 타인에게 닿는 것을 질색하던 그 남자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후작은 이디스의 입술을 통째로 빨아들여 입 안 가득 머금었다. 미끈거리는 입 안 점막과 습한 열기, 그리고 어떤 의지로 단단해진 혀에 쓸리자 금세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녀는 자신이 언제 입술을 열었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제 입술을 벌리고 들어오는 그를 느꼈다.
“웁…….”
아까는 입술을 통째로 먹혔는데 이제는 입 안을 모조리 빨아 먹히는 것 같았다. 고개를 틀어도 바로 따라붙어 깊이 파고들어오는 통에 입가는 물론 뺨에까지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이 길게 늘어졌다.
너무 철저하게 밀착한 탓에 소리를 제대로 내기조차 어려웠다. 그녀가 내는 신음은 거의 다 그에게 먹혔다.
그는 질척이는 소리조차 흘리지 않으려는 것처럼 집요하게 달라붙어 그녀의 입을 차지했다. 겨우 놓여났을 때는 얼굴이 벌겋게 물들고 입술이 축축하게 젖어 번들거렸다. 그러나 호흡을 고르기도 전에 다른 공격이 그녀를 엄습했다.
“흐윽!”
후작이 앞니로 귓불을 살짝 긁었다. 이디스는 말랑한 살을 물어뜯길 것 같다는 공포로 몸을 굳혔다. 물론 그의 의도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입술에만 키스를 하는 것은 아니지.”
“읏, 흐으…….”
귀 다음에는 목선을 따라 내려가며 잔 입맞춤이 퍼부어졌다. 그녀는 그의 입술이 그토록 뜨거울 줄 몰랐다. 뜨끈한 입술이 내려앉을 때마다 솜털이 일어섰고, 진하게 눌러 비비고 떠날 때마다 그 자리에 화인(火印)이 남은 듯 아려왔다.
“흣, 각하, ……이러지 마시고, 으응, 대화를…….”
“나는 하고 있어. 몸으로.”
“아니…… 잠깐만요, 응, 읏, 각하!”
옷 밖으로 드러난 부분에 모두 입 맞추기는 금방이었다. 후작은 장갑 낀 손을 부지런하게 움직여 이디스의 옷을 헤치기 시작했다.
가슴 앞을 묶은 매듭을 끌러내고, 허리를 죄는 리본을 당겨 풀고, 주르륵 흘러내린 옷섶을 꽃잎 펼치듯 열었다.
레이스와 작은 리본이 종종 매달린 아이보리색 슈미즈가 드러났다. 코르셋을 하지 않았으므로 둥근 곡선이 고스란히 엿보였다. 후작의 시선이 얼핏 비치는 가슴의 정점으로 향했다. 이디스는 얼굴을 붉혔다. 시선이 닿은 것만으로 그 부분의 동그란 살점이 곤두섰다.
아직 두어 겹의 속옷이 남았는데도 다 벗겨진 채 관찰당하는 것 같았다. 배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래, 좋아. 그대가 원한다면 말 몇 마디는 하고 넘어가지.”
그것을 감지하기라도 했는지, 후작이 이디스의 납작한 아랫배를 살살 쓸며 말했다.
“우선, 나는 곧 자제를 내려놓을 생각이야.”
“내려놓는다고요……?”
그의 말뜻을 못 알아들어서가 아니라 아직까지 제정신이기는 하냐는 의미였다. 그녀의 말에 담긴 비난조의 뉘앙스를 알아차린 그가 픽 웃었다.
“그날도 넘어갔는데 이 정도를 가지고.”
“하, 하지만, 으읏.”
“아무튼 그래. 그러니 그대는 충분히 확인할 수 있을 거야.”
은근하게 가슴을 쥐어 오는 손길에 저도 모르게 신음이 흘렀다. 하지만 이래도,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자존심 따위 이미 땅바닥에 패대기쳐졌다고 생각해 홧김에 내뱉은 말일 뿐이었는데 어마어마한 값을 돌려받게 생겼다.
“확인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했을 것 아닌가.”
“하지만, 각하.”
후작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어둠 속에서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이제
‘하지만’은 그만 말하도록 해. 그리고 만약 내가 말한 것이 모두 틀렸다면 그대에게 기회를 주지. 취소할 기회 말이야.”
그 눈빛을 정면으로 받자 등허리가 오싹했다. 두려워서만은 아니었다. 후작은 턱으로 자신의 다리 사이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내 뺨을 때리고 여길 걷어차.”
“뭐, 뭐라고요?”
“그러면 완전히 그만두고 나갈 테니까.”
손목을 옭아매고 있던 힘이 느슨해졌다. 이디스는 잽싸게 두 손을 가슴께로 모았다. 마치 방어하는 듯한 동작이었지만 아무 소용없으리라는 것이 명백했다. 후작은 자신의 블레이저를 벗으며 비아냥거렸다.
“이디스 아가일.
최선의 방어는 바로 공격이야. 어디를 공격할지도 말해 줬잖아.”
그리고는 마치 때리라는 듯 얼굴을 살짝 틀어 갖다 댔다. 이디스는 어안이 벙벙해 눈을 깜박였다. 그러니까 이 상황을 끝내려면 반드시 그를 때리고 걷어차야만 한단 말인가? 아니, 왜 그런 방법만이 허락된다는 거지? 목깃이 뜯긴 실크 셔츠 차림의 후작이 고개를 까딱했다.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 듯한 동작이었다.
“내일이 되도록 고민할 생각인가? 각오하고 있을 때 때리라니까?”
“제가 어떻게 각하를…….”
“재무관은 그럴 수 없지만, 그대가 지금 갖고 있는 직함은 내 약혼녀뿐인데 어떤가.”
유려한 말투였으나 무척 다급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한없이 기다리겠다는 말은 아니거든.”
“흐으응!”
이어진 손길과 키스 역시. 후작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이디스의 슈미즈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이미 살짝 고개를 든 유실을 더듬어 찾더니 엄지손가락으로 꾹 누르고 둥글게 문질렀다.
깜짝 놀란 그녀가 허리를 들자 그 아래에 손을 넣어 상체를 안아 올렸다. 이디스는 순식간에 번쩍 들려 후작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게 되었다.
자세가 바뀌면서 다 풀어 놓은 옷자락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뽀얀 상체가 고스란히 드러나면서 한기가 느껴졌다.
후작은 한 손으로 이디스의 허리를, 다른 손으로 등을 끌어안았다. 단단한 팔에 꽉 당겨지자 어쩔 수 없이 가슴을 내미는 모양이 되었다.
이디스는 늘어져 있던 손으로 후작의 어깨를 밀어내려 했으나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숙여 가슴을 물었다.
그녀의 유실은 이제 완전히 도드라져 통통하게 서 있었고, 그의 입 안으로 쏙 빨려 들어갔다. 두툼한 혀가 그녀를 아래위로 핥았다. 희롱당하는 것은 아주 조그만 살점 하나인데 마치 온몸이 노출되어 괴롭힘 당하는 듯한 감각이 그녀를 뒤흔들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도리질 치며 울먹였다.
“으읏, 각하, 그만…… 제발, 아흣, 으응.”
“그만두고 싶으면 언제든 때려.”
“못…… 하아앙, 제가 못 하는…… 거, 아시면서, 핫, 하응!”
다리 사이가 울컥 젖어들었다. 미약을 먹었을 때는 이런 흥분을 느낀 기억이 없었다. 후작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때는 순서 없이 곧장 극한으로 끌려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 지금은 하나하나 놓치려야 놓칠 수 없을 정도로 느렸고 하나하나 각인될 정도로 충실했으며, 그럼에도 델 것처럼 뜨거웠다. 그녀의 등을 두른 손이 겨드랑이 아래의 여린 살을 지분거리다가 흔들리는 가슴을 더듬어 앞으로 넘어왔다.
말캉한 아랫부분을 움켜쥐고 거침없이 주물렀다.
“흐으응! 아, 아! 아응…….”
이디스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바르작거렸다. 후작이 퍼붓는 애무를 감당하기에만도 벅차 그 이상의 행동을 할 수가 없었다.
구겨진 옷이 그녀의 몸에서 완전히 벗겨져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아래쪽 속옷과 가터벨트, 그리고 스타킹만 남게 되었다.
그때까지 신고 있던 구두는 후작의 손에 쓸려나가 보이지도 않는 곳으로 툭 떨어졌다. 기다란 손가락이 등허리를 타고 내려가 엉덩이의 굴곡을 어루만지고 엉덩이와 허벅지가 이어지는 부분의 부드러운 살을 한껏 쥐었다. 이디스는 탄성을 터뜨리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
후작의 가슴에 이디스의 이마가 부딪쳤다. 마치 그것이 신호가 된 것처럼 후작은 이디스를 안아들고 벌떡 일어섰다. 갑자기 몸이 붕 뜨자 떨어지면 다친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디스는 후작의 목에 팔을 감고 매달렸다.
“역시 똑똑해.”
그가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는 듯도 했다. 거의 맨몸에 가까운 그녀를 안아 든 후작은 긴 다리로 몇 걸음 걷지도 않고 침대에 다다랐다. 침구는 대단히 푹신했다.
살짝 던졌어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을 테지만 그는 기꺼이 불편을 감수하며 그녀를 곱디곱게 눕혔다. 그런 다음 그녀의 다리를 벌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그의 허벅지에 그녀의 종아리가 걸쳐지면서 엉덩이가 살짝 떴다. 며칠 전의 낯 뜨거운 일을 연상시키는, 아니 거의 재현한 자세였다.
이디스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 사실을 깨닫고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 모습을 보아서인지 그가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다리 사이로 손이 쑥 들어왔다. 어느새 장갑을 벗었는지 체온이 느껴지는 맨손이었다.
“그날은 정말 미치는 줄 알았지.”
“아흣!”
“어떻게든 참아야 했으니까.”
“어째서…… 으으응, 안 돼, 하응.”
“당연하지 않아? 그대가 의식도 없고,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는데.”
“아, ……손! 손 좀! 하앙, 아, ……아아앙!”
이미 젖어들어 색이 변한 속옷의 가운데를 쿡쿡 찌르는 손이 짓궂었다. 이디스는 아래로 손을 뻗어 그를 막으려 했지만 바로 제 손을 잡혀 꼼짝도 못 하게 되었다.
“그럴 때, 옳다구나 안는 건, 인간 이하나 할 짓이거든.”
“지, 금도, 읏, 마찬가지…… 아응!”
“무슨 소리야? 지금은 그대의 의식이 분명하잖나.”
후작이 검지를 곧게 펴고 갈라진 틈 위를 진득하게 문질렀다. 손가락이 그려내는 선을 따라 속옷이 젖어들었다.
이디스는 제 아래가 뭔가를 기대하듯 움찔거리는 것을 느꼈다. 살 틈을 문대던 손은 갈수록 정교해졌다. 애액이 배어나오는 골짜기를 느리고 확실하게 비비면서 동시에 톡 도드라진 살점을 더듬어 찾았다. 대단히 예민해진 음핵은 주변을 스치는 것만으로도 바짝 곤두섰고, 전신의 신경이 온통 그 조그마한 점에 집중되었다.
“아앗, 아, 아으으응.”
“그래서 나도 완전히 다른 기분이고.”
“아앙!”
속옷을 사이에 두고도 목표를 찾아낸 후작이 그 부위를 약하게 꼬집었다.
이디스는 엉덩이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그는 놓기 아쉬운 사람처럼 그녀의 민감한 부위를 연달아 희롱했다.
“아, 안 돼, 아앙! 앙!”
“어쨌든 그대는, 여기를 특히 못 참는 게 맞군.”
몸부림치는 그녀의 한쪽 허벅지를 눌러 고정하고 질척거리는 천 위로 동그란 살점을 긁으며 그가 속삭였다. 그녀는 고개를 내저으며 그가 들이붓는 쾌락에서 허덕였다. 미끌미끌한 액으로 범벅이 된 속옷 안, 은밀한 부위가 폭발할 것처럼 뜨거웠다.
“하아아아앙!”
눈앞이 번쩍였다. 이디스는 긴 교성을 내지르며 작은 절정에 올랐다. 숨을 몰아쉬는 사이 다리가 살짝 들렸다.
그녀의 몸을 받쳐 든 그가 은근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가터벨트와 스타킹을 벗겨내느라 그런 것이었다. 이어 푹 젖어 다시는 못 입을 상태가 된 속옷이 드디어 벗겨졌다.
한껏 달아오른 비부는 스스로 움찔거렸고 애액 특유의 새큼한 향이 물씬 피어올랐다. 그녀는 쾌감을 맛본 여운으로 노곤한 상태였지만 부끄러움을 느끼고 무릎을 모았다.
그가 묘한 눈으로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러나 무릎을 모으고 비부를 감추는 것을 제지하거나, 모은 다리를 다시 벌리게 하지는 않았다. 후작은 자신의 옷을 벗었다.
“……각하.”
“조금만 기다려. 이제 본론이니까.”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리느라 모로 돌아앉은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조금 아쉬웠다. 입 밖에 내어 말할 생각은 절대로 없지만! 그가 옷을 벗는다고 멀어진 것이 약간 허전했다.
“다 됐다.”
하지만 그가 완전히 나신이 되어 다시 올라왔을 때 그녀는 직전까지 했던 생각을 깨끗이 잊고 말았다. 거의 배에 올라붙을 정도로 곧추선 그의 것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 주인의 멀끔한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불뚝하게 두드러진 핏줄들이 다분히 위협적인 남성이었다.
꼭대기에서 솟은 말간 액이 흘러내려 기둥을 적시는 중이었는데 마치 따로 살아 있는 것처럼 꺼덕이는 모습에 기가 질렸다.
한마디로, 바라보는 것만으로 눈이 뜨거울 정도였다. 이디스는 차마 눈을 떼지도 못했다. 얼굴을 잡혀 그쪽을 바라보도록 고정당한 느낌이었다.
그가 확인시켜주겠다고 말했던
‘본론’은 지나치게 야했다. 그의 말대로 그것을 가득 채운 욕망이 그녀를 향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뒤흔들렸다. 온통 저릿했다. 심장에서 말초까지 살아 있는 감각이라고는 있는 힘껏 쥐어 짜이는 그 자극 하나뿐인 듯이.
하지만 그는 그것으로 끝낼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무릎걸음으로 다가온 그는 또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보지만 말고 다시 만져 봐.”
“뭐, 뭐, 뭐라고요? 싫, 아니, 괜찮은…….”
질겁하고 빼려는 손을 꽉 쥐고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면서 그가 말했다.
“확실하게 확인해야지. 내가 네게 발정한다는 걸.”
아까 충분히 확인했던 것 같은데! 그러나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후작은 이디스의 손을 쥔 채 그녀의 옆에 비스듬하게 누웠다.
“헉.”
그의 하반신이 시야에서 벗어나자 간신히 가쁜 숨이 터졌다.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던 것이다. 가슴이 크게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렇지만 그는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그녀를 끌어당겼다.
“자, 이디스.”
후작은 고개를 기울였다. 코와 뺨, 눈가에 새털 같은 키스를 흩뿌리며 아래로는 다리를 얽었다. 그리고 이디스의 손을 자신의 가운데에 가져다 댔다. 이디스는 흠칫 놀랐다. 옷을 입은 채 같은 행동을 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열기였다. 더구나 이번에는 그가 그녀의 손등으로 깍지를 낀 채 그것을 손바닥으로 감싸 쥐도록 유도했다.
결국 핏줄이 불끈거리는 것을 그대로 느껴 버렸다. 외설적이게도,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잔뜩 발정한 남성이었다.
“으흑.”
“진실성이 증명되었기를 바라.”
“……알았, 어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그만, 자제를 내려놓아도 되겠지.”
뭐라고? 그녀는 기겁했지만, 반박하기도 전에 그가 그녀의 입술을 삼키는 바람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알몸으로 밀착해 뒤엉킨 채 당하는 진한 키스는 그녀의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헤집었다.
물론 머릿속뿐만은 아니었다. 후작은 그녀를 통째로 집어삼킬 것처럼 굴었다. 사막에서 물을 길어 올리려는 사람처럼 입술을 빨더니, 이어 온 얼굴과 목과 가슴에 키스해 댔다. 지치지도 않고 붉은 흔적을 남기면서 분별없이 그녀의 몸 위를 헤맸다.
“아, 아! 아앗, ……하아아, 아앙.”
“이디스, 이디스.”
“각하…… 아, 아응! 으응…….”
후작이 언제 배꼽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열에 들떠 신음하다가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니, 잔뜩 흐트러진 은발이 배 위를 덮고 있었다.
이디스는 흐린 눈으로 사르르 쓸리는 은빛 머리칼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다리 사이 수풀에도 주저 없이 입을 맞추고,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잔뜩 무르녹은 여성지가 뻐끔거리며 액을 흘려냈다. 보이지는 않아도 제 몸이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이디스는 달뜬 숨을 뱉으며 무의식중에 힘을 주었다.
“초대하는 건가?”
“하으응!”
후작의 호흡도 거칠어져 있었다. 뜨거운 숨이 벌어진 아래에 닿는 느낌 때문에 또 애액이 울컥 새어나왔다.
“앗, 아앙! 그만!”
막 흘러나온 뜨끈한 액을 묻힌 손가락이 찔러 들어왔다. 그녀는 몸부림쳤다. 단지 그녀의 흥분을 풀어 주려던 전과는 달랐다. 천천히 호를 그리며 안을 넓힌다는 느낌으로 움직이는 손가락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이미 한 번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목적을 가지고 하는 행위인 탓인지 완전히 달랐다.
스스로는 몰랐지만 이디스의 상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저도 모르는 사이 아래를 조이면서 후작의 손가락을, 더불어 후작 자체를 도발하고 있었다.
“자, 조금만, 더…….”
“하으으, 으…… 으응…….”
결국 이디스는 또 한 번의 절정을 맛보았고, 그에 따라 찾아온 탈력감에 살짝 늘어졌다. 쪽, 하고 그곳에 키스한 후작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미 아까부터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으며, 그가 그녀를 온몸으로 안고 부비는 동안 계속해서 그녀의 살결을 찔렀던 그것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금세 보이지 않게 되었다. 후작이 허리를 움직여 이디스에게 밀착하면서, 서로의 것이 맞닿았기 때문이다.
처음에 후작의 것은 조심스럽게 꾹 눌러 왔다. 그리고는 살살 비비다가, 이디스의 갈라진 살 틈을 열고, 마침내 입구를 찾아 머리를 들이밀었다. 이디스는 눈을 크게 떴다. 후작이 그런 그녀의 이마를 쓸어주며 작게 미소했다.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후작의 바람은 실현되지 못했다.
“아흑! 아, 아악…….”
굵고 뜨거운 것이 용암처럼 그녀의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한계 이상으로 몸이 벌어지자 찢기는 것 같은 통증이 그녀를 엄습했다.
그런 데다가 끝도 없이 들어와 그녀를 꿰뚫고 꼼짝도 못 하게 고정시켰다. 한순간에 눈물이 확 차올랐다가 툭 터졌다.
이디스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놀란 후작이 허리를 뒤로 물리려고 했다. 하지만 오히려 역효과로, 딱딱하고 뜨거운 그의 것을 겨우 받아내고 있던 이디스의 속살이 긁히면서 고통이 더해졌다.
결국 후작은 아주 느리고 조심스럽게, 거의 손가락 한 마디도 못 되게 빠져나왔던 자신의 것을 원위치로 돌렸다. 그리고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녀의 눈물을 핥았다.
“고통스럽게 해서 미안하다.”
상상 이상의 격통에 정신이 나갔던 이디스는 꽤 시간이 흐른 뒤에야 진정되었다.
후작은 그때까지 그녀의 얼굴을 다정하게 어루만지고 이따금 자잘한 키스를 해 주며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이윽고 흐느낌을 그친 이디스가 고개를 들자 후작은 안심한 듯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
이디스는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어쩌면 착각인지도 몰랐다. 후작의 눈에 떠오른 찬란한 빛은 그녀가 남몰래 꿈꿨지만 포기해 버렸던 어떤 감정을 연상시켰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 자신을 향한, 그러니까, 애정 말이다. 심장이 뛰었다. 두근두근, 맥동하는 소리가 벗은 몸 따위는 쉽게 지나쳐 밖에까지 들릴 듯했다.
혹시 입을 열었다가는 그쪽으로 튀어나가 버릴지도 몰랐다. 그녀는 입술을 꼭 맞붙이며 손으로 심장 부근을 짚었다.
그에게 들키지 않도록, 단지 이제 아픔이 덜해 스스로 정신을 차리려고 하는 것처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다행히 후작은 이디스의 변화를 깊이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아마 스스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지 못해서였으리라. 덕분에 그녀는 그의
‘그답지 않은’ 얼굴을 조금 더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약간 넋이 나간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사이, 그는 조심스럽게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깊이 맞물린 몸이 문질러지면서 질척한 소리가 나고 살짝 가라앉았던 배 속에 도로 불이 붙었다.
“흐읏.”
저절로 교성이 터져 나왔다. 스스로 듣기에도 조금 전과는 결이 다른 소리였다. 아까는 후작이 놀라 멈출 수밖에 없을 정도로 고통이 역력했다면 지금은 쾌감만이 남아 갈수록 농후해지고 있었다.
후작은 느릿하게 움직였다. 여전히 빠듯하고 버거웠지만 아픔은 잘 느껴지지 않았다. 이디스는 허리 아래에 힘을 주며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체향과 둘 사이에서 나온 야한 냄새가 그녀의 비강으로 밀려들어 왔다.
그만 머리가 아찔해졌다. 마지막으로 아주 깊이 들어와 쿡 찌른 그가 서서히 빠져나갈 때, 그녀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아득하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