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짜 약혼녀
로디언 후작의 재무관 이디스 아가일이 시간 외 특수 근무를 제안받은 것은 지난달의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날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녀는 다가올 겨울에 대비하기 위해 분주하게 일하는 중이었다.
왕국의 북부에 위치한 로디언 후작령은 여름이 조금 서둘러 떠나고 가을과 겨울이 조급하게 들이닥치는 곳이어서, 미리부터 목재를 비축해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디스는 재정 회계 집무실의 책상에 붙박여 이런저런 문서를 뒤적이고 있었다. 거래하는 상인들은 항상 거의 비슷한 시기에 들이닥쳐 힘이 들었다. 후작령이 북쪽에 치우쳐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는 해도, 무지막지하게 쌓인 서류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일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노크 소리를 들은 그녀는 두 번 묻지 않았다. 누구냐고 묻지 않아도 그녀에게 용건이 있을 만한 사람은 빤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끼려면 바로 들어오게 하는 편이 좋았다.
“레이디 아가일.”
“소어 집사님. 무슨 일이시죠?”
“보온 자재를 매입하는 건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앗, 그것도 있었지요.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이건 장작, 저건 기름.
각각의 서류에 수량을 기입한 이디스는 펜을 내려놓았다. 책상 앞에 있는 접객용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소어 집사의 말을 들을 생각이었다.
“괜찮으니 앉아서 들으십시오.”
“어머, 그렇지만 그건 집사님께 실례지요.”
“아닙니다.”
이디스는 난처한 얼굴을 했다. 나이 지긋한 소어 집사는 후작이 태어나기 전부터 로디언 후작가를 모셔 왔다. 그의 조부 때부터 대를 이어 후작 가문에 봉사했고 그가 은퇴하면 둘째 아들이 새로운 집사가 될 예정이었다. 그런 사람을 앞에 세워 놓고 자신만 앉아 있는 것은 영 찜찜했다. 하지만 소어 집사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바로 용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가신 가문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인데 가끔씩 깜짝 놀랄 정도로 자신을 낮추고는 했다. 아마도 몇 년을 동고동락하면서 이디스를 완전히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는 표현일 터였다.
이디스는 더 이상 그를 말리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어쨌거나 월동 준비는 무엇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디스는 소어 집사의 과도한 친절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던 생각을 거두고 집사가 가져온 이야기에 집중했다.
“상단에서 예년의 물량을 맞춰 주기 어렵겠다는 통보가 왔습니다.”
“네? 어째서요? 계약금에, 1차 대금까지 결제했는데 이제 와서 그렇게 말하는 게 어디 있어요.”
“동감입니다만, 뭔가 문제가 있는 모양입니다. 3할의 위약금을 지불하겠다고 하는군요.”
“그렇게까지. 사정이 뭔지는 모르지만 고의적이거나, 이익을 불리려는 건 아닌가 보네요.”
“레이디 아가일이 계신데 감히 농간 부릴 생각을 하겠습니까.”
“아하하. 무슨 말씀이세요.”
“그 상단의 차석 행수는 아직도 레이디 아가일이라면 한 수 접고 들어오잖습니까.”
이디스는 민망해졌다.
그야 소어 집사가 하는 말은 사실이지만 오래된 무용담을 본인 면전에서 꺼내면 숨고 싶은 기분이 되는 법이었다. 그것도 치기 어린 미성년 시절, 무시당한 오기로 저지른 일이라면 말이다.
물론 그 일 덕분에 로디언 후작의 인정을 받았고 여성의 몸으로 가신의 일원이 되었지만……. 소어 집사는 그녀의 내심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이는지 옅게 웃었다. 그래도 매너 있는 사람이다 보니, 그 이야기를 더 하지는 않고 넘어갔다. 처리해야 하는 일이 급하기도 했다.
“그럼 이렇게 하지요. 위약금을 2할로 깎아 주는 대신에, 2차 물량을 댈 수 있는 다른 상단을 연결해 주는 것으로요.”
“확실히 그 방법이 수고를 덜겠군요.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네, 부탁드려요.”
잠시 고민한 끝에 대안을 결정한 이디스는 즉석에서 서류를 꾸며 소어 집사에게 내밀었다.
그녀에게는 이만한 일은 임의로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렇지만 생각할수록 이상하기는 했다.
“레이디 아가일, 왜 그러십니까?”
“네? 무엇을요?”
“뭔가 생각하시는 듯해서 여쭈었습니다.”
“아, 별일은 아니에요. 그저, 제가 어쩌다가 이런 일에까지 권한을 갖게 됐나 싶어서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이디스는 책상 위에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는 문서들을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소어 집사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하고 있던 일과 소어 집사가 가져온 일을 나란히 놓고 비교했다. 후작의 돈을 다룬다는 점은 같고, 또 겨울나기를 준비한다는 점도 같고, 사들이는 물품도 그런 데 쓰는 나무니까 같고.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방금 같은 일은 엄밀히 말해 후작성의 안살림이잖아요?”
“그렇지요.”
“저는 후작 각하의 재무관이고요.”
“물론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월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게 왜, 혹시 또 누가 레이디께 무례를 저질렀습니까?”
이디스의 말을 듣던 소어 집사가 눈에 힘을 주었다. 이디스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소어 집사가 걱정하는 일은 너덧 해 전에나 마지막으로 일어났다. 지금은 로디언의 누구도, 후작의 재정 회계를 담당하는 이디스 아가일을 여자라고 폄하하는 일이 없었다. 그녀 스스로 실력과 실적으로 자리에 합당한 인물임을 증명했으니까. 그럼에도 걱정해 주는 것이 싫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그런 문제와는 전혀 상관없었다.
“아니, 아니에요.”
“그렇다면 무슨 뜻이신지요.”
“사실 이런 일은 안주인의 몫이잖아요. 후작부인께서 안 계신다지만 제가 손대는 것이 옳은 일인지 모르겠거든요.”
이디스의 말을 알아들은 소어 집사는 뭔가 말하고 싶은데, 그 말이 목에 걸려 안 나온다는 표정을 지었다. 의도와 달리 매정하게 들릴까 봐 저러시나? 이디스는 웃으면서 그냥 말씀하셔도 된다고 말하려 했다.
“그대가 있으면 된 것 아닌가.”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뾰족하게 치고 들어왔다. 이디스도, 소어 집사도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았다.
“후작 각하.”
“둘 다 바쁘지 않은가 보군.”
“예?”
“쓸데없는 소리나 하고 있는 걸 보니.”
로디언 후작 앨피어스는 심기 불편함을 감추는 법에 무지했다. 살짝 열려 있던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들어오는 얼굴에 짜증이 가득했다.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럴 때 건드리면 안 되는데, 밖에 있는 줄 모르고 잡담을 했으니 큰일 났다.
이디스도, 소어 집사도 입을 닫고 후작의 눈치를 살폈다. 나 기분이 안 좋다는 표정을 써 붙이고 있어도 참 잘생긴 남자였다. 반짝이는 은발은 실버글렌의 상징인 은여우를 연상시키고, 눈동자는 사시사철 푸른 침엽수 잎에서 추출한 것처럼 짙은 초록색이었다.
그런가 하면 우아하게 도드라진 코와 단단하고 각진 턱이 조화를 이루어, 남자다우면서도 섬세한 얼굴이었다. 그야말로 얼굴만 뜯어먹고 살아도 될 것 같은 미남이다. 하지만 그의 거만하고 고집스러운 성미를 익히 아는 이디스였기에, 주군의 미모에 새삼스럽게 넋을 잃는다든가 하는 따위의 실수는 저지르지 않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후작을 맞이했다.
“이야기가 다 끝난 참이었답니다. 각하께서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그래? 잘됐군. 안 끝났어도 끝내야 했을 테니까.”
이디스와 소어 집사는 재빨리 눈짓을 교환했다.
‘레이디께 맡기고 갈 수는 없습니다.’
‘집사님이 계시면 불똥만 더 커질 것 같은데요.’
누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지만 후작은 진짜 기분이 더러운 상태였다.
바로 전날 있었던 회의 때는 오히려 후작의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 새로 개봉한 차 맛이 괜찮냐느니 입에 맞으면 가지고 가라느니 하는 사교적인 대사까지 건넬 정도였으니까. 심지어 후작의 별난 태도에 놀란 이디스가 됐다고, 퍽 떨떠름하게 대답했는데도 타박하지 않고 넘어갔다. 그랬는데 갑자기 왜 저럴까.
“각하, 저는 일이 있어서…….”
“아직 안 갔나?”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소어 집사는 이디스를 혼자 두고 가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지, 문을 닫는 그 순간까지 눈빛으로 사죄하며 방을 나갔다. 달칵, 하고 문이 닫혔다. 이디스는 반사적으로 후작 쪽을 바라보았다가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어머.”
“왜?”
눈도 눈이고,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그녀가 팔을 뻗으면 바로 닿을 정도였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한 발짝만 물러서도 무방하겠지만, 남과 스치기만 해도 성질을 부리며 손수건으로 털어 대는 결벽증 후작이라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랐다.
더구나 그의 입장에서는 권위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행동이겠지만, 그녀 입장에서는 압도되기보다는 쓸데없이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달갑지 않았다. 이디스는 일단 적당한 거리를 확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에요. 앉으세요, 각하.”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던 그의 진녹색 눈이 가늘어졌다.
“됐어. 앉아서 할 만큼 긴 이야기도 아니고.”
“그런가요. 그럼 말씀 듣겠습…… 니다……?”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던 이디스는 혀를 씹을 뻔했다. 로디언 후작이 그녀를 향해 전투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지만 다섯 발짝도 못 가 책상에 엉덩이가 부딪쳤다.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치마 안에 부풀리기용 속옷을 입지 않아서 부딪친 자리가 얼얼하게 아팠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는 통증도 잊을 정도로 소스라쳤다.
“왜, 왜, 왜요?”
이디스를 외진 곳에 몰아넣은 것으로는 성에 안 차는지, 후작은 상체를 기울이며 양손으로 책상 가장자리를 짚었다.
넓게 벌어진 어깨와 그에 비례하는 상체는 이디스를 완전히 뒤덮고도 남았다. 그녀는 인위적으로 생겨난 그늘에 푹 파묻혔다.
등을 뒤로 젖혀 피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후작에게 손을 대 밀어낼 수는 없었다. 그야말로 오도 가도 못하게 된 그녀는 얼어붙었다. 후작은 물어뜯을 것 같은 눈으로 그녀를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디스 아가일. 그대는 독신주의지.”
“네?”
“결혼할 생각이 없다며?”
하도 뜬금없는 소리라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후작의 두 번째 말을 듣고서야 무슨 말인지 깨달았는데, 갑자기 그런 것을 왜 묻는지 몰라 눈만 동그랗게 떴다.
“그러면 그렇다고 대답을 해라.”
“……으음.”
엄밀히 말하자면 독신주의라는 말은 적당하지 않지만, 대체할 말이 없기는 했다. 이디스는 수년간의 실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낸 유능한 관료였다. 처음에는 마땅찮아하던 후작도 결국 그녀를 인정해 주었을 만큼.
하지만 그것은 후작의 영지 안에서만 통하는 이야기였다. 만약 다른 영주 휘하의 귀족과 결혼한다면 그의 부인으로만 살아야 했다.
그렇다고 로디언 안에서 남편감을 찾을까? 소녀시절부터 부대끼고 살아온 관료귀족들은 그녀를 누이처럼 여겼고, 재무관으로서 털면서 살아온 후작의 소영주들은 그녀를 원수처럼 여겼다.
오빠보다 더 오빠 같은 바보들과 매년 당하면서도 세금이 아까워 잔꾀나 쓰는 멍청이들 중에서 누굴 남자로 볼 수 있겠는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가까운 곳에 남은 후보가 한 명 있기는 했다. 앨피어스 로디언. 로디언 후작은 이디스보다 한 살 많은 또래였고, 실버글렌에서 가장 지위 높고 부유하며 심지어 미남이었다.
그런 데다가 그녀의 능력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기까지 한 남자였으니, 그녀의 마음이 그를 향했던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것도 다 한때였다. 지금보다 어리고 순진하고 현실을 잘 모를 때 말이다. 사랑은 밥 먹여주지 않으며, 후작은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 못해 후사도 동생을 데려다 잇겠다고 도망간 이복동생에게 수배령을 내린 사람이었다.
「그렇게까지 하시는 이유를 여쭤 봐도 됩니까?」
「그렇게까지, 라니.」
「아니, 그러니까. 권세가들의 정략혼 신청은 없어도 각하를 흠모하는 여성분들은 있다던데요.」
「내가 왜 그런 여자들에게 신경 써야 하나. 딱 질색이니 다시는 말도 꺼내지 마.」
수줍고 간질간질했던 마음은 냉혹한 상사 앞에서 싹 수그러들었다.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잘릴 것 같았다.
겁이 많을 때였다. 타고난 성격도 의심이 많았다.
‘성공하지 못할 일이라면 시작도 하지 말아야지.’
그녀는 잘하는 일이나 하며 혼자 살기로 했다.
자리는 안정적이었고 재산은 나날이 쌓여 갔다. 오빠로서 몇 번인가 혼처를 가지고 왔던 아가일 자작도, 이디스가 자기 딸에게 금목걸이를 걸어주면서 하는 말을 듣더니 입을 다물었다.
「이게 다 혼자 살면서 쌓아 둔 재무관 봉급인데 고모는 딱히 쓸 데가 없으니 다 우리 소피아 거겠네?」
어쨌거나 제법 길었던 숙고를 흔히 쓰이는 말로 딱 축약한다면 후작의 말대로였다. 윗사람에게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느니, 대충 독신주의라 생각하게 놔두는 쪽이 편하니까. 이디스는 깊이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그렇지요.”
“좋아.”
그리고 후회했다.
“그럼 그대가 내 약혼녀 역을 하면 되겠군.”
“제가 뭘 어쩐다고요?”
후작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는 분명히 기분이 나쁜 상태였는데, 그 순간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유쾌해 보였다. 이디스는 오싹함을 느끼고 어깨를 떨었다.
“이디스 아가일, 로디언 후작인 본인의 약혼녀로서 실버글렌 성의 안주인 역할을 맡아라.”
“…….”
그녀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외마디 대답도 못 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그 사이에 후작이 그녀를 가뒀던 팔을 거두면서 몸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는 그녀가 미치셨냐고 말하기 직전에 덧붙였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한마디였다.
“수당은 연봉의 열 배.”
* * *
이디스는 억지로 웃느라 입에 경련이 일 지경이었다.
‘옷은 옷대로 숨 막히고 말이야.’
평상시 옷을 입을 때는 전적으로 활동성과 기능성만 추구했던 몸에 코르셋을 조이고 매끄러운 실크 의상을 겹겹이 두른 탓이었다.
정말 말도 못하게 답답했다. 동방에서 수입한 고급 원단으로 지은 드레스는 예쁘고 값비싼 1인 감옥 같았다.
당장 벗어 던져 버리면 얼마나 상쾌할까. 그러나 피차 가식을 떨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판에 못 해먹겠으니 때려치우겠다고 할 수도 없었다. 일단 그러기에는 맞은편에 있는 상대가 너무 대단했다. 무려 수도에서 온 대귀족 가문의 외동따님인 것이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갤러웨이 공작 영애.”
“어머, 고마워요.
실버글렌 분이신데 어떻게 저를 알고 계시는군요.”
놀랍다는 듯 눈을 깜빡거리는 모습이 더 놀라웠다. 본인의 행차를 마중 나온 사람에게 너 같은 촌뜨기가 나를 아는 척하네, 라는 의미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다니 과연 바이올라 갤러웨이. 하지만 이 정도의 도발에 웃는 얼굴을 흐트러뜨려 봤자 비웃음이나 사고 말 것이다. 이디스는 곧게 편 어깨에 힘을 주면서 한층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최대한 상냥하게, 단 비굴하지 않게.
“레이디 갤러웨이의 명성이야 나라 전체에 자자하니까요.”
사실 시골구석 양치기라도 바이올라 갤러웨이의 이름을 모르기는 힘들었다.
갤러웨이 공작 가문은 왕위계승을 둘러싼 분쟁에서 삼 대 연속 승자만 쏙쏙 골라낸 정쟁의 거물인 데다, 현 갤러웨이 공작부인은 바다 건너 공국의 공주 출신. 그런 집안의 하나뿐인 딸로서 막대한 자산의 상속녀인 바이올라는 심지어 생긴 것마저 미인이었다.
반짝거리는 금발에 청초한 보랏빛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들조차도 저절로 돌아보지 않고는 못 배길 미모였다.
이디스의 짙은 갈색 머리카락과 떡갈나무 색깔 눈동자는 칙칙한 그림자처럼 보일 정도로. 이런 미인이 이 벽촌까지 내려온 목적을 좌절시켜 돌려보내야 할 임무를 띤 이디스는 속으로 통탄했다.
‘평생 부족한 것이라곤 없었을 아가씨가 결혼을 구걸하러 오다니.’
로디언 후작과의 정략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수도에서 열흘 넘게 걸리는 실버글렌까지 몸소 행차하게 된 일은, 갤러웨이 공작 영애에게는 큰 굴욕이었다.
그녀로서는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로디언 후작을 남편 후보는 커녕 무도회의 일회성 댄스 파트너로도 고려해 본 적이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제 로디언 후작은 갤러웨이 공작이 금지옥엽 외동딸과 어떻게든 결혼시키고 싶어 하는 사윗감이었다.
“과찬이세요. 그런데 후작 각하는 어디에 계시지요?”
“아, 그것은.”
“12년 만의 해후라 어서 뵙고 싶답니다.”
모든 것은 왕국의 상황이 급변하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셀다 왕비가 쫓겨나면서 권력 구도에서 완전히 소외되었던 로디언은 이제 새로운 국왕의 외가이자 왕태후의 친정으로 급부상했다.
다만 현 로디언 후작, 앨피어스 로디언은 이러한 변화를 반기지 않았다. 그는 밀려드는 방문 신청과 약혼 제안에 치를 떨었다.
그리고 특히 자기 고모와 사촌—지금의 그리셀다 왕태후와 왕위에 오른 레지나—이 어려울 때는 로디언을 무시했다가 이제 와 태도를 바꾸고 접근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욕설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욕을 먹은 이름은 갤러웨이였다.
「미친 갤러웨이. 살겠다고 눈이 벌게져서 내게 질척거리다니!」
세 번이나 연속으로 왕위 계승 분쟁의 승리자를 알아본 갤러웨이. 그러나 네 번째에는 레지나 왕녀 대신 트리샤 왕녀를 선택했기에 지금까지의 승리가 무색할 정도로 처참하게 패배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국왕이 공작 가문을 싹 쓸어버릴 판이었다. 갤러웨이 공작이 선택할 수 있는 패는 그리 많지 않았다.
12년 전, 일방적으로 약혼을 파기하고 걷어찼던 로디언에 머리를 숙이고 들어오는 것이 가장 나은 방법일 정도로. 국왕이 유일한 외사촌의 처가이자, 외사촌이 물려받게 될 공작 가문을 죽이려 들지는 않으리라고 계산한 것이다.
「이제 와서 옛 의리를 운운하며 혼인으로 결속을 다지자?」
하지만 정략가 갤러웨이는 한 가지를 간과했다. 귀족 사회에서 완전히 소외된 가문을 십대 때부터 지탱하며 살아온 후작의 원한을. 그리고 그것이 공작의 패인이었다.
「내가 그 수작에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다니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야.」
「후작 각하.
외람되지만, 공작의 외동딸과 결혼해서 갤러웨이 공작가를 집어삼킨다든가 하는 계획에는 관심이 없으신지.」
「이디스, 지금 뭐라고 했나?」
이디스는 신임 받는 측근으로서 후작에게 기탄없이 직언할 수 있었다. 또한 어떤 말을 해도 후작은 철저히 이성적인 대답만을 돌려주고는 했다.
그래서 갤러웨이 공작가의 방문 요청이 들어왔을 때도, 이디스는 별 생각 없이 객관적으로 이득이 될 방법을 생각하고 질문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둘러앉아 있던 다른 사람들이 말리는 눈빛을 보냈었다. 그게 평소처럼 격려하는 뜻인 줄로 알아들은 것이 잘못이었다.
후작은 얼굴에 침을 맞은 것처럼 화를 냈다. 이디스에게 화풀이를 하지는 않았지만, 반듯한 이마에 핏대가 돋고 짙은 눈썹이 파르르 떨었으며 푸른 눈에 분노가 시퍼렇게 타올랐다.
무시무시한 눈빛을 본 이디스가 깜짝 놀라 딸꾹질을 할 정도였다. 그래, 그런 모습의 후작을 다시 대면하는 것보다는 눈앞의 갤러웨이 영애에게 모질게 구는 것이 훨씬 나았다. 이디스는 속으로 셋까지 헤아린 다음,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바이올라 갤러웨이에게 대답했다.
“후작 각하께서는 영지 시찰을 나가셨습니다.”
“네?”
“며칠 뒤에 돌아오실 예정입니다.”
“지금 뭐라고 했나요? 각하께서 부재중이라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금발자안의 미녀는 충격을 받은 듯 잠시 말이 없었다. 그렇겠지, 그녀가 친히 찾아간다는데 집을 비우고 출타해 버린 남자는 처음일 테니까.
퍼레이드를 준비하고 기다리지는 못할망정, 칙칙한 성의 외벽에 방한 목적의 짚과 목판을 둘러 움막 꼴로 만들어 놓기까지 했으니. 이렇게까지 하지는 말자고 말릴 걸 그랬나. 하지만 이디스는 이미 한 번 말실수를 했다가 대(對) 갤러웨이 방어전의 선봉장 역을 떠맡은 처지였다. 게다가 고용주이자 영주가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하는 것이 피고용인이자 봉신의 의무 아니겠는가.
그래도 수도에서 날고 기는 귀족 자제들을 쥐락펴락하는 레이디가 대단하기는 했다. 안색이 약간 창백해지기는 했지만 바이올라는 차분한 음성으로 다시 한번 사실 확인을 요청했다.
“지난 주에 확인 차 연락을 드렸어요. 혹시 날짜가 잘못 전달되었나요?”
등 뒤에서 얕은 기침 소리가 났다. 소어 집사가 감기에 걸려서가 아니라, 지금이야말로 시작할 때라고 알리는 신호였다. 이디스는 다시 한번 입가에 힘을 주었다. 억지웃음처럼 보이든 말든 상관없으니 대충 웃음 비슷한 곡선이 매달려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것만이 지금의 그녀를 지켜줄 얄팍한 방패였다.
“아니요, 제대로 전달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갤러웨이 가문의 독수리 문장으로 봉인된 제비꽃빛 카드였지요. 후작 각하께서 직접 뜯으시는 것을 제가 보았답니다.”
이디스가 말허리를 뚝 자르고 줄줄 읊자 바이올라 갤러웨이의 눈매가 뾰족해졌다. 자기 말을 잘라먹은 것도 잘라먹은 것이지만 그 말이 암시하는 바가 더 문제였다.
‘나는 당신이 후작에게 보낸 서한을 바로 옆에서 본 사람이다.’
귀족 간에 친전(親傳)으로 보내는 문서는 그 종류가 무엇이든 아랫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다시 말하자면 아랫사람, 그 귀족을 주인으로 섬기는 이들에게는 말이다. 바이올라가 알아들을 것을 충분히 예상했고 또 그러기를 바랐지만, 말하기 무섭게 상대가 반응하자 등골이 오싹했다. 이디스는 창대를 거꾸로 잡은 초년병처럼 잔뜩 긴장한 채 바이올라의 입술 움직임을 응시했다. 인형처럼 생긴 미녀가 싸늘하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누구신지 묻지 않았군요.”
그랬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후작에게 안내하는 역할을 맡은 가신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공작 영애의 판단은 상식적이었고 실제로도 맞았다.
이디스는 로디언 후작의 가신이자 재무관이라는 직분을 받은 정식 관료였다. 성년이 되기 한 해 전부터 스물다섯 살인 지금까지 무려 여섯 해 동안 자리를 지키면서 최측근 가신으로 인정받은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상대가 알아서는 안 됐다. 후작이 지정한 위장 신분을 자처해 바이올라 갤러웨이를 내쫓는 것이 바로 이디스의 임무였으니까.
“네, 그러셨지요.”
이디스는 어깨를 으쓱했다가 제풀에 놀라 자세를 바로잡았다. 관료로 지내면서 몸에 밴 몸짓을 무의식중에 해버렸다.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니 공작 영애는 아무것도 못 보았다는 듯 아까의 모습 그대로 서 있었지만 보랏빛 눈동자만은 훨씬 더 사나워진 상태였다. 비꼬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을까?
상대를 기분 나쁘게 만들어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최종 목적이므로 기분이 상했다면 좋은 일이기는 했다. 로디언 후작의 입장에서는 말이다.
냉정하고 까칠하고 결벽적인 실버글렌의 영주, 앨피어스 로디언은 왕국 최고 미인의 눈에서 눈물이 나든 피눈물이 나든 개의치 않고 독설을 퍼부을 위인이었다.
그가 여기 있었다면 눈앞에 있는 미인의 얼굴을 보고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갤러웨이 공작을 닮은 부분을 찾아내며 증오를 불태웠으리라.
애초에 갤러웨이 가문의 인간을 직접 상대하겠다는 그를 모든 가신들이 드러눕다시피 해 말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아무리 다시 안 볼 사이라도 공작 가문과 척지다 못해 원수가 된다면, 로디언은 물론 그리셀다 왕태후에게도 폐가 된다는 말로 회유했었다.
그 대신 많은 성실한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이디스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어쨌거나 주군과 달리 한없이 평범하고 일반적인 감성과 양심의 소유자로서 이디스는 콕콕 찔리는 감각이 신경 쓰여 견딜 수 없었다. 책임진다는 약속을 받았어도 거짓말은 거짓말이다. 그것도 잠깐 면피하고 넘어가면 그만인 사소한 내용이 아니라…….
“이디스 아가일이라고 합니다.”
“아가일, 로디언의 봉신 가문이었던가요. 작위가 자작?”
“예. 지금 아가일 자작이 제 오라버니입니다. 그리고 저는, 직접 소개하려니 부끄럽습니다만.”
결정적인 말이 입에 턱 걸렸다. 수도 없이 연습했건만 이것이 기다려 왔던 진짜 그 상황이라고 생각하니 압박감이 전혀 달랐다.
그래도 안 할 수는 없었다. 기세 좋게 칼을 빼들었다가 도로 집어넣으면 적이 그 평화의 의지를 높게 사 얌전히 돌아가 줄 것도 아니고. 시작했으면 끝까지 가는 것이다. 이디스는 깍지 낀 손을 배에 얹고 힘을 주었다. 그리고 바이올라 갤러웨이를 향해 한 방을 날렸다.
“후작 각하의 약혼녀랍니다.”
그 말을 들은 공작 영애의 눈빛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살벌해졌다.
이디스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서며 생각했다. 특근 수당을 더 청구해야겠다. 지금 생각해 보면, 로디언 후작이 그만한 조건을 걸면서 제시한 일이 만만찮으리라는 것을 짐작했어야 했다.
10년 치 연봉으로 할 수 있는 일부터 생각할 게 아니었다. 갤러웨이 공작 영애는 절대로 쉽지 않은 상대였다.
아무래도 로디언 후작은 소년 시절에 몇 번 본 것이 전부인 그녀의 진면목을 잘 몰랐던 듯싶었다. 아니면 알면서도 이디스에게는 말하지 않았든가.
그래, 그랬을 것이다. 함구한 이유도 알 만했다. 로디언의 영지 실버글렌 안에서 후작이 원하는 대로 가짜 약혼녀 노릇을 시킬 사람이라고는 딱 하나 이디스밖에 없었다.
그러니 어렵고 힘든 부분은 쏙 빼고 혹할 만한 보상부터 눈앞에 들이밀었겠지. 후작령의 재정 전반을 관리하는 장본인으로서 이디스는 최근 5년 동안 이보다 더한 불공정 계약을 본 적이 없었다. 남의 일이었다면 제대로 보고 말렸을 텐데 자기 일이라고 한 치 앞을 못 봐서 이렇게 된 것이다.
“실례지만 레이디 아가일.”
예상 밖의 공격이 꽤 아프게 들어갔는지, 바이올라 갤러웨이의 말이 어색하게 뚝뚝 끊겼다.
하지만 이디스가 눈을 들어 본 그녀는 여전히 우아하고 여유 있는—혹은 여유 있어 보이는—얼굴이었다.
음, 이 대목에서 초반의 판단을 철회하고 넘어가야 할 듯싶었다. 노한 로디언 후작을 상대하기보다는 갤러웨이 공작 영애를 들이받는 쪽이 낫다고 했던 것 말이다.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후작 쪽이 차라리 낫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공작 영애는 눈을 감은 뱀 같았다. 배가 불러서 나른하게 잠들어 있는지, 굶주린 채 방심한 사냥감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는 큰 뱀.
“저는 후작 각하께서 약혼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는데요.”
“오, 물론 그러셨을 거예요.”
이디스는 터질 것 같은 긴장을 애써 감추며 뻣뻣하게 대답했다. 오늘을 대비해 예상 질문을 만들고 그에 대한 답을 준비해 두었으므로, 그녀의 심리 상태와 상관없이 말은 꽤 매끄러웠다.
“왕도의 상황이 복잡하다고 들었어요. 물론 레이디 갤러웨이께서 훨씬 더 잘 아시겠지만요. 각하께서는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난 다음에 결혼 인가를 요청할 예정이랍니다.”
그리셀다 왕태후의 딸 레지나 왕녀는 이복동생과의 정쟁에 승리했고 이미 폐하라고 불리는 중이었다. 그러나 국왕의 의지에 따라 즉위식은 아직 거행되지 않았다.
그녀는 우선 선왕이 어지럽혀 놓은 왕실의 족보를 정리하고자 했다. 이복동생인 트리샤의 계승권을 완전히 빼앗은 뒤 적법하고 유일한 왕녀로서 왕위에 오르겠다는 뜻이었다.
덕분에 온 나라가 어수선했다. 트리샤 왕녀를 지지했다가 쪽박을 차게 생긴 갤러웨이 공작이 살아 보겠다고 머리를 굴릴 틈이 생길 정도로. 은연중, 아니 노골적으로 그 점을 푹 찌르자 공작 영애의 눈썹이 움찔했다.
‘이크.’
이디스는 그것을 보지 못한 척 어색하게 딴청을 피우며 생각했다.
‘고용주가 시키는 대로 해야지.
잘하고 있어, 이디스 아가일.’
기회가 될 때마다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리라는 것은 로디언 후작의 주문이었다.
갤러웨이 공작이 가진 모든 것을 지참금으로 가진 여자, 바이올라 갤러웨이는 지금의 국왕보다도 더 공주처럼 자랐다고 했다.
부친의 잘못된 선택으로 작위, 영지, 재산, 명예, 그 모든 지참금이 날아갈 처지가 되었어도 도도한 자존심을 굽히지는 못할 터였다.
그러니 현실을 상기시켜 주기만 해도 치미는 울화를 못 참고 돌아가리라는 것이 후작의 계산이었다. 후작의 말만 들었을 때는 그래도 여기까지 온 절박함이 있는데 그럴까 싶었다. 하지만 직접 겪어 보니 그의 말이 맞는 듯했다. 하긴 무려 나라에 셋밖에 없는 공작 가문의 상속녀였다.
그에 비하면 이디스는 전부 다 해서 몇이나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자작, 그것도 국왕이 아니라 후작에게 속한 지방 귀족 집안의 딸이었다.
그녀가 바이올라 갤러웨이의 사고방식을 들여다보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당연했다.
‘딴 생각 말자.’
어차피 이디스는 후작의 지시에 충실하게 따라 공작 영애가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도록 하면 그만이었다.
후작이 원하는 바는 갤러웨이 공작의 청혼을 완전히 묵살해 버리는 것이었고, 그녀가 원하는 바는 그 사실이 확인된 후 지급될 보너스였다. 아, 그렇지. 돈을 생각하니 싹 말랐던 웃음이 다시 피어났다. 이디스는 상냥하게 웃으며 공작 영애를 바라보았다.
“더 궁금하신 점이 있으신지요? 얼마든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이올라 갤러웨이는 이디스를 빤히 바라보다가 그녀가 내심 불안해졌을 때에야 눈길을 거두며 새침하게 대답했다.
“감사하지만 괜찮아요. 쉬고 싶으니 방으로 안내해 주시겠어요?”
“그러시다면야. 저를 따라오세요.”
* * *
나흘 후 돌아온 후작은 본격적으로 공작 영애를 박대하기 시작했다. 사실 영지를 방문한 손님이 영주에게 인사를 하는 것은 당연한 예의이지만 또한 권리이기도 했다.
영주는 정식 인사를 받은 다음부터 손님을 받아들이고 대접할 의무가 있었다. 이는 바꿔 말하면 인사를 받기 전까지는 없는 존재로 취급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후작은 공작 영애에 관해 한 마디도 꺼내지 않고 바로 가신들을 소집했다. 다른 일도 아니고 영주가 영지의 일이 있다는데 훼방 놓아서야 고위 귀족의 체면이 서지 않는다.
공작 영애는 항의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회의실의 원탁에 둘러앉은 후작의 가신들은 한숨을 쉬었다. 그들의 터전인 로디언 후작령 실버글렌은 한적한 땅이었다. 후작이 뜬금없이 영지 시찰을 나서기 전날 정례 회의를 가졌고 그때와 달라진 것이라곤 갤러웨이 공작 영애의 방문밖에 없었는데…….
“불청객에 관한 건은 제외하고 주요 사항 보고해.”
“각하, 영지에는 아무 일도 없습니다만.”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해라. 각자 두 건 이상.”
짜증 가득한 영주를 앞에 두고 진지한 척 잡담을 하게 된 그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치안, 행정, 재무 등 영주의 통치를 보좌하는 분야별 책임자는 총 다섯 명이었다. 명실공히 그 다섯 중 한 사람으로서 회의에 참석했으나, 본업 외의 일을 처리하느라 피로가 누적된 이디스는 자기 차례가 돌아올 때까지 비몽사몽이었다.
“그럼 다음, 재무.”
후작이 호명하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그녀는 보다 못한 옆자리의 기사단장 다트가 들썩거리며 눈치를 주고, 후작이 다시 한번 부른 다음에야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이디스 아가일.”
“아, 네!”
“…….”
“죄송합니다.”
“됐다.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하도록 해.”
나머지 가신들이 그녀를 보고 작게 키득거렸다. 이 인간들이, 당신들은 각하가 시찰 나간 일주일 동안 놀고먹었지만 나는 아니란 말이야! 이디스는 그들 하나하나를 힘주어 흘겨보며 착석했다. 그 생각을 하니 못내 억울했다.
손님방 안에서 칩거하다시피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바이올라 갤러웨이가 아예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정도로 무시하기에는 너무 대단한 여자였다. 결국 후작이 없는 동안 이디스는 공작 영애에게 하루 종일 시달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일어날 때부터 잠들 때까지 최고급품만을 누리며 살아온 여자는 불평하는 방식도 세련되고 우아했으며 또한 철저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레이디 아가일은 후작 각하의 약혼녀라면서 정말 검소하시군요.」
「후작령의 재정을 생각하면 이만큼 준비해 주신 것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얼마나 오래 머물지 몰라 왕도에서 이것저것 가져왔는데, 썩 좋은 것은 아니지만 나눠 드릴 테니 써 보시겠어요?」
「감사하지만, 침대 커튼은 제가 가져온 것을 쓰겠어요. 피부가 약해 아무 것이나 쓰기 어렵답니다.」
하루에 세 번씩 얼굴을 본 이디스뿐만 아니라, 하녀를 통해 식사나 비품을 올려 보내고 보고를 듣는 소어 집사도 어마어마하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런데 어떻게 공작 영애가 아닌 다른 건을 말하란 말인가! 이디스는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대부분의 경우 후작에게 납작 엎드리고 특히 돈과 관련해서는 그의 바람을 이루어주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 이디스였다. 하지만 노력해도 개선될 수 없는 일에 직면하는 경우는 달랐다. 앞뒤 재봤자 안 될 일이라면 질러 버리고 말지, 라는 것이 그녀의 모토였다.
“각하, 제 머릿속에는 공작 영애에 관한 생각밖에 없는데요.”
“지금 뭐라고 했나?”
“공작 영애 생각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다고요. 저도 원하는 바가 아니랍니다.”
후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건 나도 원하는 바가 아니야.”
“네, 그런데 아시다시피 제가 지금 각하의 사기극에 동참하고 있잖아요.”
“사기극이라고.”
“표현 정도는 그냥 넘어가세요. 어쨌든 그런 제가 지금 어떻게 다른 일을 생각할 수 있겠어요?”
이디스가 능력을 증명하고 자기 자리를 지키게 되면서부터, 후작의 가신들은 그녀에게 차차 마음을 열었다.
그러면서 그녀가 가끔 보여주는 돌발적인 언행을 두고 별명 비슷한 것을 붙였다.
‘간덩이가 부어터진 이디스.’
특히 지금처럼 후작 앞에서 막 나가는 모습을 볼 때 딱 그렇게 보인다나. 하지만 그것도 후작이 화를 내지 않고 용인해 주기에 우스갯소리로 먹히는 것이다. 투덜거리는 이디스 본인부터 후작의 분노를 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없었고 둘러앉은 가신들도 큰 걱정 없이 그녀를 지켜보았다.
간만에 구경거리가 난 것처럼 눈을 반짝거리면서. 과연 후작은 화를 내지 않았다. 미간을 좁히면서 따지듯 묻기는 했지만 말이다.
“갤러웨이의 딸이 무슨 짓을 했기에 그대가 이러는지 궁금한데.”
“일일이 일러바치자면 너무 오래 걸려서 안 됩니다.”
그리고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후작성의 살림이 변변찮다고 비꼰 공작 영애를 혼내 주세요, 하는 것 같지 않은가.
만약 이디스가 진짜 후작의 약혼녀였다면 공작 영애로부터 들은 말들이 서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짜 약혼녀라는 자각이 분명했으므로 그녀는 공작 영애의 말에 거의 타격을 받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재정을 맡은 관료의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약간 긁혔지만 그거야 어쩌겠는가. 왕태후가 버려진 왕비로 산 12년 동안 그 친정인 로디언 후작가도 예전의 영화로움을 잃고 근근이 유지되어 왔다.
레지나 왕녀가 왕위계승을 확정짓자마자 이런저런 특례를 베풀어 주어 지금은 숨이 트였지만, 그렇다 해도 막대한 재산을 굴려 온 공작가와 비교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고로, 결론.
“현재 각하의 재무관으로서 간언하고 싶은 바는 딱 한 가집니다.”
“뭐지?”
이디스는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하루라도 빨리 공작 영애를 퇴거시켜 주세요.”
로디언 후작이 눈을 찡그렸다. 아, 저 결벽증. 그는 실내에서도 장갑을 꼈고 얼굴을 닦을 때도 손수건의 가장 안쪽을 펼쳐 한 번만 쓴 다음 바로 세탁시켰다. 맨손으로 화장한 얼굴을 만지는 이디스의 행동이 거슬려서 참을 수 없는 듯했다.
“이디스, 그 일은 그대가 맡기로 하지 않았던가? 특별 수당도 지급하기로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게 아니었군. 이디스는 어색하게 웃었다. 후작과 재무관 사이의 거래는 비밀도 아니었다. 엄연히 다른 직위가 있는 사람을 후작의 약혼녀로 만들자면 후작성에 드나드는 사람 모두가 입을 맞춰야만 했으니까. 특히 이 자리에 함께 있는 가신들은 머리를 맞대고 기초 계획을 짰던 사람들이었다.
특히 이 자리에 함께 있는 가신들은 머리를 맞대고 기초 계획을 짰던 사람들이었다. 후작이 다시 뭐라고 말하기 전에 그들이 차례대로 끼어들었다. 반쯤은 이디스의 심적 스트레스를 염려했고, 반쯤은 그녀가 발을 빼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레이디 아가일, 왜 그래. 공작 영애가 때리기라도 했나?”
“다트 경,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그 고고한 아가씨가요? 척 봐도 손끝 하나 안 대고 웃으면서 피를 말릴 타입이더구먼.”
“아니, 나야 레이디 아가일이 포기를 한다니까 이해가 안 가서 그러지요. 안 그래? 이왕 시작한 것 끝까지 해야지!”
“확실히 그건 맞는 말입니다.”
아니, 왜들 이래. 판이 벌어지기도 전에 접힌다는 말을 들은 노름꾼들도 아니고. 이디스는 얼굴을 찌푸리며 그들을 외면했다. 그리고 후작을 향해 계약 해지를 요청했다.
“후작 각하. 저의 부족한 능력으로는 도저히 공작 영애를 감당할 수 없으니 부디 저와 파혼해 주세요.”
후작은 기본적으로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다. 거만하고 제멋대로인 면도 없지 않지만 대체로 공정하고 합리적이었다.
이유 없이 자신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굴지 않을 뿐이지 당당한 태도로 예의를 지키는 한 얼마든지 대화가 가능했다.
이디스가 가짜 약혼녀 행세를 못 하겠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후작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을 마주 보면서 진심으로 부탁했을 때 거절당한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한껏 짙어진 진녹색 눈빛을 겁 없이 맞받으며 생긋 웃기까지 했다.
“거절한다. 그렇게는 안 돼.”
그런 대답이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하고. 예상 밖의 냉랭한 대답을 들은 이디스는 당황해서 말끝을 흐렸다.
“네? 어째서…….”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각하!”
“그대뿐만 아니라, 모두. 잘 들어.
갤러웨이의 딸은 이디스를 내 약혼녀로 알아야 하니 언동을 조심하도록.”
“…….”
“대답들.”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해산해.”
자기 할 말만 쏘아붙인 후작은 쌩하게 나가 버렸다. 이디스는 뒤늦게 그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벌떡 일어섰지만 이미 후작이 나가고 문이 도로 닫힌 다음이었다.
그래도 모든 일을 다 떠넘긴 것은 좀 너무하다 싶었는지, 후작은 그날 저녁에 공작 영애와 정식으로 대면했다.
가장 큰 응접실에 주요 가신들을 불러놓고 차례대로 소개하고 인사시킨 것이다. 로디언 후작의 가짜 약혼녀 신분을 벗지 못했기에 이디스는 내내 후작의 옆자리를 지키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사실 후작과 가까이 있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디스를 고통스럽게 만든 원인은 후작과 공작 영애 사이에 끼어 이리저리 치이는 것이었으니까. 시작부터 살벌했다. 공작 영애가 손을 내밀었지만 후작은 냉엄한 표정을 지은 채 무시했다. 손등에 입 맞추는 인사 따위는 꿈도 꾸지 말라는 태도였다.
“바이올라 갤러웨이입니다. 실로 오랜만에 뵙게 되었습니다, 각하.”
“앨피어스 로디언입니다.
다시 볼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되어 유감이군요.”
어쨌거나 약혼을 바라는 쪽이 아쉬운 법이라, 초반에는 공작 영애가 차분하고 부드럽게 대화를 시도했다. 후작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거칠게 쳐내는데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아주 관대하고 후한 말을 들은 것처럼 유하게 굴었다. 지켜보는 이디스로서는 연기력과 비위 중 어느 쪽에 감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각하께서 부재중이신 동안에는 레이디 아가일의 환대로 잘 지냈습니다.”
“영지의 안주인 노릇으로 바쁜 그녀에게 큰 짐을 떠맡겨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어머, 제가 부담을 드렸을까요. 하긴 왕도에서도 저 같은 사람이 저택에 방문하는 일은 흔치 않으니까요.”
“부친께서 강짜를 놓으시면 어느 누가 거절했겠습니까. 이번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후작은 단 한 마디도 물러서지 않고 무안을 주었다.
“뭐, 그 대단하신 부친보다도 이 먼 곳까지 친히 행차한 레이디 갤러웨이가 더욱 대단하긴 합니다만.”
“어떤 의미로 하시는 말씀이신지…….”
“아실 텐데, 제 입으로 들어도 괜찮겠습니까?”
정말이지 물만 마셔도, 아니 숨만 들이쉬어도 체할 것 같았다. 그러고도 후작과 레이디 갤러웨이 사이에서는 몇 마디의 공방이 더 오갔다. 공방이라기보다는 우세를 점한 후작 쪽에서 일방적으로 폭격했다고 하는 쪽이 적절할 것이다. 옆에서 듣는 이디스의 피가 싸늘하게 식을 정도로 혹독한 말들이었다. 하지만 감히 말릴 수는 없었다.
“후작 각하, 지금 말씀 다 하셨습니까?”
“아니, 끝도 없이 남았습니다. 그러나 레이디가 들어 봤자 못 알아들을 말들이 대부분이니 그만두지요. 부친에게 해야 할 말들은 아끼겠습니다.”
후작이 열네 살 소년이었을 때 고모가 왕비 자리에서 쫓겨났다. 충격을 받은 아버지가 쓰러져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의 죽음 이후 식음을 전폐한 어머니까지 뒤따랐다.
갤러웨이 공작은 바로 그 시점에서 일방적으로 약혼을 파기하고 가문 간의 모든 교류를 끊겠다고 선언했다. 이제 와서 권력 관계가 바뀌었으니 다시 손잡자고?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후작 각하!”
“굳이 부친의 몫까지 듣겠다면 각오를 다시 해야 할 겁니다.”
모멸감을 다 삭이지 못한 공작 영애의 얼굴이 굳었다. 이디스는 그녀가 떠나겠다고 말할 줄 알았다.
“인사는 충분히 드렸으니 오늘은 물러가겠습니다.”
“어디로 말입니까?”
“각하께서 내어주신 저의 숙소로요.”
“내가 말을 아끼는 것은 오늘까지만입니다.”
경고를 알아듣지 못할 공작 영애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어떤 불쾌한 일도 없는 사람처럼 우아하게 절했다.
‘헉.’
그러나 굽혔던 허리를 펼 때 본 공작 영애의 눈빛은 장난이 아니었다. 짧은 찰나였고 눈을 깜박이고 보니 공작 영애가 이미 몸을 돌려 다시 볼 수 없었지만 잘못 본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살기 어린 눈빛이라니. 무슨 일을 내도 크게 낼 눈빛이었다. 그래서 이튿날, 공작 영애가 후작에게 티타임을 요청했다는 말을 들은 이디스는 두 번 생각지 않고 자신이 대신 가겠노라 했다.
“어울리지 않게 무슨 오지랖이야?”
“어느 분이 계약 파기를 안 해주시니 돈 받은 만큼 일해야지요.”
“좋을 대로 해. 들키지 않게 조심하고, 허튼소리에 너무 붙들려 있지 말고.”
“명심하겠습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 * *
바이올라 갤러웨이가 사용한 미약의 효과는 엄청나게 강력했다. 성적 뉘앙스가 없는 접촉도 곧바로 자극으로 치환되었고,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조차 귓가를 찌르르 울렸다.
이디스는 주체할 수 없는 열감에 헐떡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얼결에 이디스를 받아 안은 로디언 후작, 앨피어스는 제 가슴팍에 비벼지는 그녀의 얼굴을 붙들었다. 장갑 낀 손의 손바닥이 턱을 받치고 손가락이 뺨을 누르자 이디스의 입술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입안에 고였던 타액이 진한 신음과 함께 흘러내렸다.
“아으응…….”
“정신 차려, 이디스. 이디스 아가일!”
감각이 극한까지 치달은 상태였다. 눈앞이 물에 빠진 것처럼 어룽거렸고 날카로운 이명이 들렸다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가를 반복했다.
몸에 닿는 것은 어느 부분에 무엇이 닿든, 심지어 얼굴에 제 머리카락이 붙는 것조차 아프도록 자극이 되었다.
그나마 정상에 가깝게 기능하는 것은 청각 정도였다. 그래서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후작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디스는 필사적으로 이성을 잡으려 애썼다.
“읏, 으응, 각…… 하.”
“그래, 나다. 어떻게 된 일이야? 두 시간이 넘도록 나오질 않는다기에 왔더니.”
“……갤, 러웨…… 이, 약…… 차에…… 으흣.”
부정확한 발음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전후 사정을 짐작하기에는 충분했다. 후작이 낮게 욕설을 뇌까리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리고 이디스를 안고 있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단단한 팔이 좌우에서 꽉 조여들자 등줄기가 저렸다. 이디스는 바르르 떨며 젖은 숨결을 토해냈다.
“하아, 아…… 학!”
“정신 차려야 해, 이디스.”
“아…… 안 되느…….”
몸을 뒤틀며 최후의 최후까지 버티려 애썼지만, 간신히 만들어 낸 말이 혀에 눌려 뭉개졌다. 마지막 끈마저 풀려 버린 듯 의식이 아득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런, 제길!”
이디스가 허리를 틀며 가슴을 밀착시키자, 후작도 그녀의 상태가 심상찮음을 바로 알아차렸다. 욕지거리를 뱉은 그는 이디스의 등과 엉덩이를 받치면서 벌떡 일어섰다. 아이처럼 안긴 이디스가 몸부림쳤으나 그가 등을 힘주어 눌러 저지했다. 그녀는 그의 어깨에 턱을 얹은 채 움찔거렸다.
“여기서는 안 되니, 조금만 참아.”
“으응…… 죽을, 거…… 같…… 아, 아.”
후작은 얼굴을 찡그렸다.
녹을 것 같은 숨결이 그의 목덜미를 적신 탓이었다. 쾅. 발로 문을 걷어찬 후작은 다급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에게 안긴 이디스의 몸이 흔들리면서 비명인지 비음인지 모를 소리들이 툭툭 떨어졌다. 이디스의 기억은 거기에서 완전히 끊겼다. 다시 눈앞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후작의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흐으…….”
그러나 그곳이 후작의 침대임을 인지하기에 앞서 낯선 감각들이 밀어닥쳤다. 어쩐지 다리 쪽이 서늘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에서 어마어마한 자극이 느껴졌다. 깊은 살 틈에서 뜨거운 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다리 사이의 속살을 타고 흘러내리는 액체의 느낌이 지독하게 선연했다.
소스라치며 다리를 모았으나 양쪽 허벅지가 닿지 않았다. 그 사이에 들어와 있는 무언가 때문이었다. 그것은 가죽도 아니었고, 사람의 살갗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나 부드럽고 매끄러웠으며 살아 있는 것처럼 유려하게 움직였다. 그 무언가가 터질 것처럼 부풀어 있는 곳을 쿡 찔렀다. 아, 맙소사. 벼락이 내리쳐 전신을 꿰뚫는 것 같았다. 이디스는 허리를 들썩이며 소리를 질렀다.
“흐아응!”
부풀어 오른 살점을 건드렸던 무언가가 살짝 물러났다. 하지만 이디스에게서 완전히 멀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허벅지 안쪽 여린 살갗을 스치며 적당한 거리에 멈췄다. 그리고 명백히 그녀의 다리 안쪽을 바라보면서 하는 말이 들려왔다.
“민감한 부분을 만져 줘야 하는군…….”
“……누, 누…… 구…… 으응.”
“……이디스. 정신이 드나? 내가 누구인지 알겠어?”
다급하게 재우치는 목소리는 귀에 익었다. 이디스는 가물가물한 눈을 억지로 떴다. 처음에는 초점이 잡히지 않았지만 몇 번인가 끈질기게 깜박거리자 가까스로 사물의 윤곽을 분간할 정도는 되었다.
“누구…… 몰, 라…….”
그러나 상대의 얼굴을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목에 힘을 주었던 이디스는 다시 고개를 뒤로 꺾었다. 풀썩, 머리가 베개에 파묻혔다. 정신을 다잡고 다시 보기에는 아직도 아랫배가 불붙은 듯 뜨거웠다. 이 열기를 어떻게 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터였다. 그녀는 다리를 꼬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투정을 쏟아냈다.
“나…… 하응, 뜨거…….”
“이런.”
이디스의 다리 맡에 앉은 남자, 로디언 후작은 혀를 찼다.
“약기운이 빠지려면 멀었나.”
그는 이디스의 다리 사이에 낀 손을 빼냈다. 그리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의 손을 덮은 하얀 장갑이 끈적이는 여성의 액으로 푹 젖어 있었고, 새큼하고 비린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찌른 탓이었다.
“이봐, 이디스.”
“으응…….”
“이런 식으로 그대를 안고 싶지는 않거든.”
몸을 괴롭히는 미약에 시달리는 이디스에게는 들리지도 않을 말이었지만 후작은 꿋꿋하게 자기 할 말을 했다. 그녀가 듣기를 바란다기보다는 그 말을 토해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상태인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덜 닿으면서 풀어 주려고 노력하는 거니까 원망은, 아니, 원망해도 어쩔 수 없지만 말이야. 어쨌든 용서해.”
이디스를 안고 침실로 온 뒤부터 지금까지, 후작은 그녀의 몸을 잠식한 미약 성분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일단 호흡을 편하게 해 주기 위해 허리를 꽉 조인 속옷을 풀고 다리를 조인 가터벨트와 스타킹 따위를 벗겨냈다.
치마를 허리 위로 걷어 올리자 드러난 속옷은, 차마 벗기지는 못하고 살짝 젖혔다. 그리고 이미 잔뜩 달아올라 애원하고 있는 여성지를 천천히 자극했다.
빨간 살이 움찔거리며 벌어지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눈을 꽉 감은 채. 하지만 독한 약에 의해 인위적으로 끌어내어진 욕구는 그 정도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나마 한두 번 정도 절정에 근접한 덕분에 이디스의 의식이 돌아오기는 했지만 여전히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렇게 풀어서는 끝이 없을 것 같군.”
“……하응.”
한숨을 쉰 후작은 침대 위로 완전히 올라와 앉았다. 무릎으로 기어 이디스의 아래쪽으로 내려간 그는 애액이 잔뜩 고인 음부를 애써 외면하며 늘씬한 다리를 잡아 올렸다. 이디스는 바닥없는 지하로 끌려 내려가는 감각을 느끼며 비명 같은 신음을 질렀다.
“으응! 아!”
“아무것도 안 했어. 불편하지 않게 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흐으응…….”
후작은 이디스의 무릎이 자신의 어깨에 걸치도록 만들었다. 그러자 드레스가 뭉쳐 있는 허리가 공중에 뜨고 동그란 엉덩이가 뽀얀 윤곽을 드러내며 흔들렸다.
발갛게 익은 통통한 살이 아찔했다. 그러나 그 곡선은 후작이 이디스의 허리에 쿠션을 받쳐 빈 구석을 없애자 살짝 감춰졌다.
“후…….”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내쉰 후작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노려보면서 호흡을 골랐다.
들썩이던 가슴이 서서히 느려졌다. 아까보다는 후작의 얼굴빛이 조금 나았다. 눈을 찡그린 후작은 푹 젖어 못쓰게 된 장갑을 벗었다.
처음에는 손으로 벗으려고 했는데, 이디스가 들썩이며 균형을 잃는 바람에 급히 받치느라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장갑의 손가락 부분을 물어 당겼다. 지극히 선정적인 광경이었다. 이디스의 의식이 있어 그 순간을 목격했다면 다시 기절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의 애액으로 질척해진 장갑이 후작의 잇새에 물려 손을 벗어났다. 하얗게 드러난 손은 길쭉하고 아름다웠으며, 이디스의 아랫배를 반 넘게 덮을 정도로 크기도 했다.
“아앙!”
한쪽 손만으로 잘게 떠는 아랫배를 꾹 누른 후작은 얼굴을 숙였다. 푹 녹아 있는 새빨간 음부에 그의 코와 입술이 차례대로 닿았다. 미끈미끈한 점막이 빠끔 열리며 뜨끈한 애액이 다시 흘러나오는 순간, 망설이듯 혀가 뻗었다.
“으으응, 흐응, 응! 응앗!”
거대한 무엇이 온몸을 통째로 핥는 듯했다. 이디스의 발끝이 곱아들고 허리가 둥글게 굽었다. 후작은 몸부림치는 그녀를 가볍게 제압하고 얼굴을 더 밀어 넣었다.
그는 그 행위 자체에 넋이 나간 것 같기도 했다. 붉은 혀가 뱀처럼 기어 나와 애액이 솟는 음부를 길게 핥고, 젖어 투명하게 반짝이는 빨간 살점을 휘감아 빨았다.
두툼한 혀가 힘 있게 움직이며 빈틈없이 훑어낼 때, 이디스는 또다시 쾌락에 잡아먹히는 감각으로 몸서리쳤다. 그러다가 뾰족하게 세운 혀끝이 쿡 찔러 들어오는 순간에는 정말 견딜 수 없었다.
“흐아아앙!”
옅은 절정이었다.
이디스의 다리가 덜덜 떨렸다. 그것을 느낀 후작이 혀를 떼고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과 살짝 열린 채 파르르 떠는 입술, 그러나 빛이 돌아오지는 않은 눈을 본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한 번으로는 안 된다는 건가.”
“으흑, 흐아아…….”
혼잣말이었지만, 이디스의 다리 사이에 떨어진 숨결은 그 자체로 자극이었다. 음부와 한 뼘도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서 속삭이는 목소리는 그녀를 애타게 만들었다. 공교롭게도 그때 그녀의 의식이 잠시 돌아왔다. 다만 여전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누구와 어떤 자세로 뒤엉켜 있는지, 왜 그렇게 되었는지 파악할 수 없는 수준에 불과했다.
“나…… 으응…….”
“이디스?”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그것이 자신을 가리키는, 자신을 부르는 이름이라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다. 흔들리는 눈으로 내려다보는 후작을 향해 애걸한 것 역시 본능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가 누구인지 깊게 생각지 못하고, 다만 그녀를 해치지 않으면서 이 끓어오르는 열기에서 구해 줄 사람이라고만 느꼈기에.
“읏, ……더, 더.
모자라…… 아읏!”
이디스는 흐느적거리는 손을 들어 올려 후작에게로 뻗었고, 손목을 덥석 잡혔으며, 끄트머리까지 발갛게 달아오른 손을 깨물렸다. 손이 상할 정도로 강하게 물지는 않았지만 감정이 실린 짓임은 분명했다. 후작은 이디스의 손가락을 입에 넣은 것으로 모자라, 죽 끌어다 어금니 위에 놓고 잘근거리면서 느릿한 어조로 경고했다.
“그런 말을 할 거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마.”
“아!”
다음 순간 타액 범벅이 된 손이 놓여났다. 긴 호선을 그리며 허공을 날아 침대 위로 툭 떨어졌다. 이디스의 다리도 마찬가지로 푹신한 침대 위로 떨어졌다. 후작이 아예 엎드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디스가 뭘 어떻게 하기도 전에 그가 양손으로 허벅지를 당겨 안았기 때문에 그녀는 꿈틀거리지도 못하고 그대로 속박당했다. 다시 끈적한 위로가 시작되었다. 아까보다 더 노골적이고 적극적으로.
“여기를 달래지 않으면 안 되겠어.”
“아으으응!”
빨갛게 부풀어 오른 동그란 살점이 후작의 입술로 빨려 들어갔다. 이디스는 허리를 뒤틀고 엉덩이를 들썩였지만 단단한 팔에 얽매인 상태여서 달아날 수가 없었다.
쾌락으로 저며지는 감각이 그녀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후작의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깊은 살 틈으로 들어왔다.
난생 처음 경험하는 쾌락 섞인 이물감에 숨이 넘어갔다. 후작의 손은 검술을 배운 남성의 것치고는 매끈한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성인 이디스에 비하면 훨씬 단단하고 거칠었다. 길쭉한 손가락 중간중간에 툭툭 불거진 마디가 은밀한 속살을 긁고 비틀었다.
“아, 아학, 아아, 아!”
비집고 들어온 손가락이 있는지도 몰랐던 감각점을 스칠 때마다 눈앞이 표백되었다.
“조금만 힘을 빼 주면 좋겠는데…….”
“시, 싫엇, 아앗!”
“아니, 아니다.
내가 어떻게든 하마.”
완전히 새하얘졌다가 다시 정상적인 명암이 뵈기까지의 간격이 너무 짧았다. 그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속삭임이 아니었다면 이디스의 머릿속은 자극을 버티지 못하고 망가져 버렸을지도 몰랐다.
“으응, 으! 으흣, 흐아아…….”
“괜찮아, 이디스. 숨을 쉬어.”
무척 서툰 다정함이었다. 말 자체로는 달래는 것인지 다그치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그녀의 반응에 어쩔 줄 몰라 하며 파들파들 떠는 몸을 지그시 누르는 손은 상냥했다.
쿨쩍쿨쩍 소리가 점점 부피를 더해 갔다. 둘로 늘어난 손가락은 더욱 세심하게 박자를 맞추어 이디스의 안을 달랬다.
자극이 중첩되면서 여성의 샘으로부터 꿀 같은 액이 폭발적으로 흘러나와, 그녀의 허벅지는 물론 그의 손목까지 타고 내렸다.
아직 볕이 밝은 대낮이었다. 다른 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장소라고는 해도 어마어마한 치태였다. 침대 위의 두 남녀. 단정했던 옷을 엉망으로 흐트러뜨린 채 새하얀 다리를 활짝 벌리고 흐느끼는 여자. 그런 그녀의 다리 사이에 엎드려, 새빨간 음부 가운데에 긴 손가락을 밀어 넣고 당겨 내는 동작을 반복하는 남자.
“아응, 응, 흐응, 응.”
하지만 타인의 악의에 따른 강제적인 열락으로만 이루어진 장면은 아니었다. 시작은 확실히 사고였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으웃.”
후작의 집요한 애무로 이디스가 다시 절정에 올랐다. 그녀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한두 번과, 어렴풋이 느낌만 남은 바로 직전에 비해 강하고 긴 절정이었다.
손가락을 삼킨 속살이 경련하며 그녀의 상태를 알렸다. 쾌감이 크게 폭발하면서 어마어마한 열기가 훅 끼쳤다.
모르긴 몰라도 미약의 성분이 왈칵 터져 나온 애액으로 꽤 씻겨 나갈 듯했다. 후작은 용암에 담근 것만큼이나 얼얼한 손을 빼내며 이디스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의 눈에 가득 차올랐던 눈물이 툭 터지고 도르르 구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리고 서서히 이디스의 눈빛이 돌아왔다. 모르는 새 기력을 있는 대로 소모한 탓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약기운에 잠식당해 마냥 흐리기만 한 눈은 아니었다. 후작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친절하게도 구겨진 스커트를 슬쩍 끌어내려 무릎까지 덮어 주고 벌겋게 된 자신의 목을 손으로 가리며 말을 걸었다.
“이디스, 괜찮은가.”
기억이 아예 끊겨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
그러나 공작 영애의 독하디독한 약은, 안타깝고 또한 어이없게도 완벽한 기억상실 효과는 갖고 있지 못했다. 드문드문 잘려 나간 장면들은 있었지만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중요한 기억은 거의 온전했다.
심상찮은 분위기의 공작 영애와 마주앉아 차를 홀짝거렸다. 불가항력으로 잠들었다가 깨 보니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갑자기 몸이 뜨거워지면서 다리가 꼬였다. 믿고 싶지 않지만 아마 성적 흥분을 끌어올리는 미약을 먹은 것 같다고 판단했다.
놀라고 무서워서 허우적대는 중에 후작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리고! 맙소사! 이디스는 그때까지도 채 가라앉지 않은 여운에 달달 떨면서 입술을 달싹였다.
“……각하.”
아, 이건 아니지 않나. 정말 아니다. 차라리 꿈이어라. 꿈이어야만 하는데.
“다행히 이제 괜찮아진 것 같군.”
땀에 젖은 이마를 쓸어주는 후작의 손이 서늘했다. 그러나 그의 손끝에서 희미하게 묻어나는 냄새는 뜨겁게 녹아내렸던 순간의 감각을 상기시켰다. 그것이 자신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어오던 느낌이 떠올라, 이디스는 파드득 떨었다.
“다시 안 좋은가?”
“윽…….”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걱정스럽게 말을 붙여 오는 후작의 입술, 그 입술이 어디에 어떻게 닿았고 무엇을 어떻게 했느냔 말이다! 눈도, 귀도, 입도 막고 딱 죽어버리고 싶었다. 지금 죽으면 사인은 수치심이라고 기록될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