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롤로그 (1/9)

 by.쉼터ddo

0. 프롤로그 : 계획 밖의 사고

 이디스 아가일은 떨리는 손으로 빈 찻잔을 집어 들었다. 바닥에 엷게 말라붙은 찻물의 흔적이 보였다. 그러나 남아 있는 양이 너무 적었다.

 증거가 되기에는 부족했다. 나중에 전문가를 불러 본다고 한들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저 정황만으로 공작 영애를 추궁할 수는 없다.

 갤러웨이 공작 영애는 유유히 빠져나가리라. 

‘원래 노렸던 사람이 당한 것도 아니니까.’

 이 찻잔의 차를 마셨어야 하는 사람은 이디스가 아니었다.

 공작 영애의 목표는 명백히 로디언 후작이었다. 다만 공작 영애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후작은 그녀가 떠나기를 아주 절실하게 원하고 있다는 점 말이다.

 하지만 후작과 그의 측근들 역시 공작 영애의 간절함을 너무 얕보았다. 그리고 지금 이디스가 당한 일은 바로 그 때문에 일어났다.

‘같이 마시고 같이 당한 척하려고 했던 걸까.’

 후작 대신 이디스가 나타난 것을 본 공작 영애는 시녀에게 약을 가져오라고 말했다. 막 자리에 앉던 이디스는 약이라는 말에 흠칫 놀랐으나, 이내 대령된 파란 알약이 공작 영애 본인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경계를 풀었다.

 이제 와서 생각한들 소용없는 일이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그게 해독약이었나 본데 여분이 있을까.’

 이디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행여 여분이 있더라도 공작 영애가 순순히 내놓을 리 없다. 그리고 지금은 공작 영애가 어디 있는지조차 알 방법이 없고. 차를 마신 직후부터 졸음이 쏟아졌다.

 이디스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떠밀리듯 눈을 감았고, 의식이 돌아왔을 때는 혼자 남은 상태였다. 공작 영애, 공작 영애의 시녀, 그리고 공작 영애의 몫이었던 찻잔 한 조까지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꿈이라도 꿨나 의아해하는 순간 약기운이 뻗쳤다. 잠이 든 것은 수면제를 섞었기 때문이겠지만 그것이 공작 영애가 사용한 약의 주성분은 아니었다. 

‘어, 어?’

 이디스는 아랫배에서 피어오르는 열기에 당황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열기는 아랫배보다 더 밑으로 내려간 은밀한 곳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공작 영애가 후작성에서 지낸 며칠은 후작이 만만찮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수면제 같은 시시한 짓을 해 봤자 부질없다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그래도 이건 정말, 너무하잖아.’

 다리 사이가 강하게 저려왔다.

 이디스는 헉 소리를 내면서 찻잔을 떨어뜨렸다. 찻잔은 카펫 위를 구르다가 거꾸로 엎어졌다. 

‘망할.’

 그나마 남아 있던 것까지 다 쏟았으니 완전한 증거 인멸이로군. 본의 아니게 공작 영애를 도와준 꼴이 되었다.

 정작 그 공작 영애는 이디스를 엿 먹였다고 생각하며 쾌재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이디스는 점점 더 뜨거워지는 몸을 끌어안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 겪고 있는 증상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어리거나 순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남의 계략으로 미약을 먹었을 때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알 정도로 도가 튼 것도 아니었다. 

“흐윽.”

 눈물이 찔끔 나왔다. 불안하고 두려웠다. 또 억울했다.

 그러나 그 모든 감정에 앞서 주체할 수 없이 달아오른 몸이 문제였다. 나갈 길을 찾지 못한 열기가 꿈틀거리며 배 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이디스는 자신이 등을 둥글게 구부리며 허리를 비틀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자기 몸의 움직임조차 신경 쓸 수 없는 처지였으니,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오는 것도 당연히 알 수 없었다. 

“이디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귀에 익은 목소리였지만 동시에 귀에 선 말투였다. 6년이란 세월을 부대꼈기에 목소리만으로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지만, 지금껏 그 남자가 이렇게 당황하는 말투는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가능한 표현이었다.

 이디스는 입술을 달싹였다. 어쨌든 이름을 불렸으니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말이 아니라 달큰한 비음이었고……. 

“흐응!”

 단단한 팔이 고개만 겨우 들었다가 도로 앞으로 무너지는 그녀를 받아 안았다. 향유도 향수도 쓰지 않아서 엷은 잉크 냄새만 은은하게 배어나는, 그러나 새것보다 더 철저하게 각 잡힌 옷깃. 로디언 후작 앨피어스는 완벽하게 정돈된 자신의 옷섶에 얼굴을 비벼 흐트러뜨리는 이디스를 내려다보며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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