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3화 (113/113)

<113>

Epilogue

“……마약 소굴에 떨어졌다고?”

“응응. 나오는데 조금 힘들었어, 공주님. 총도 쏘던데?”

“……아니, 그걸 왜 이제 얘기하니.”

“그런데 괜찮아. 마법은 비록 못 썼지만 나 몸도 되게 튼튼하거든! 그리고 그땐 공주님도 정신없었잖아. 그런데 더 정신 나간 소리 할 정도로 나 정신머리 없지는 않아.”

렌은 결국 미국에 갔다가 여행 비자를 얻어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엉터리긴 하지만 렌은 내게 꽤 자세하게 일 년 동안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설명해 줬다.

일 년 전, 미국 약쟁이 소굴에 떨어져 기절한 렌을 다니엘 김이라는 유흥업소 바텐더가 주워서 재워줬다.

렌은 이곳에서도 제 아공간을 열 수 있었고, 그 덕에 다행히 금전적인 어려움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뒷세계 쪽에 떨어져서 아이디 카드도 쉽게 만들 수 있었다고 했다.

“내가 살다 살다 이세계인 비자를 걱정하는 날이 올 줄이야…….”

렌은 내가 복잡해하거나 말거나 눈앞에 놓인 프라푸치노를 쭈욱 들이켰다.

전에야 너무 사는 곳이 척박해서 잘 몰랐는데 렌은 단걸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을 너무 좋아했다.

마법 없이 차가 굴러가는 것도 좋아했고, 특히 비행기를 좋아했다.

게다가 일 년을 꽁으로 있었던 건 아닌지 유연성도 늘었다. 그러니까 내 동생한테 첫 만남에 다짜고짜 이십만 원을……, 진짜 미친 것 같다.

“아……, 네 말대로 결혼하는 게 제일 빠르고 안전한 법이긴 한데, 혼인신고서부터 제출했다가는 엄마 아빠한테 개깨질 텐데…….”

나는 물고 있는 빨대를 잘근잘근 씹었다.

그에 렌이 상큼하게 대답해 주었다.

“나도 공주님 뭐 걱정하는지 알아.”

나는 또 튀어나온 이곳에서는 상당히 거북한 호칭에 주위를 휙휙 둘러보며 렌에게 속삭였다.

“렌! 이름으로 부르라고, 이름!”

“공주님이 마음에 드는데……. 그럼 자기야?”

“……차라리 그게 나은 것 같아.”

“응 자기.”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래도 싫은 건 아니었다.

사실 렌과 이렇게 돌아다니는 게 꿈 같았다. 렌이 내 현실로 다가와도 현실성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렌은 전시도 굉장히 좋아했는데, 역시 내 예상대로 현대미술을 엄청 좋아했다.

지갑을 털어 내 명의로 얻은 오피스텔에 다짜고짜 작품 이십 점을 사서 짱박아 두려는 걸 말리느라 진땀을 뺐다.

내 명의로 얻은 건 어쩔 수 없었다. 렌은 일단 관광객인걸…….

돈이 많아서 다행이었다. 비행깃값을 충당할 수 있으니 말이다.

“나도 다니엘이 말해서 잘 알아. 자기 부모님한테 잘 보여야 한다며?”

“……그래, 네 마음대로 불러.”

“응 자기야. 근데 나는 ‘여보야’도 좋아, 자기야.”

렌이 헤실헤실 웃자 주변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역시, 너무 잘생겨도 문제다 문제야.

“아무튼 학생 비자로 올 거야. 공주님 학교로.”

“어떻게……?”

내 말에 렌이 당당하게 말했다.

“미국 마피아는 못 하는 거 없어.”

“렌, 도대체 뭔 짓을 하고 다닌 거야……?”

렌이 내게 윙크를 날리며 대답했다.

“뒤처리는 확실히 했어. 사람도 안 죽였는걸? 다니엘이 도움을 많이 줬어. 그래도 다니엘한테 너무 잘해 주지는 마. 알았지?”

“…….”

나는 침묵을 택했다. 여전히 렌이 좋았지만 여전히 렌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많이 밝아진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원래도 밝긴 했지만 근본적인 성향이라고 해야 하나? 모르겠다.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정말 렌은 많이 바뀌었다.

꼭 마음의 부담감을 완전히 털어 버린 사람 같았다.

“그런데 네 세계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

내 말에 렌의 표정이 굳었다.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야, 뭐, 궁금해 해 봤자 의미 없겠지 뭐. 그런데 학교는 어떻게 하게? 편입? 아니면 그냥 입학?”

내 생각이 맞는지 렌의 표정이 금세 환해졌다.

“입학! 비자 오래 받아야 해.”

맞는 말이었다.

“그러면 굳이 우리 학교로 올 필요 없지 않아? 좋은 학교로 가, 렌. 아니면 어차피 국적 있는 김에 미국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아? 그쪽 학교가 더 좋잖아.”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하는 얘기였다. 렌은 천재였으니까. 책 보고 얘기하는 거 보니까, 그냥 한번 보면 외우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무래도 우리나라가 다인종 사회가 아니니까, 네가 아무리 백인처럼 보인다고 해도 나중에 취업할 때 힘들 수도 있어.”

내 말에 렌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 아무래도 그냥 내 옆에 있고 싶어 하는 모양이었다.

“나랑 결혼한다며. 그럼 미래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너 뭐 하고 싶은 직업 같은 거 없어?”

렌이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나는 공주님만 있으면 되는데 말을 왜 그렇게 해…….”

얼씨구, 울겠다, 아주. 나는 그런 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을 이었다.

하, 진심 귀여워서 큰일 났다.

“나도 가면 되지? 어차피 유학 한 번쯤은 가 보고 싶었어.”

“……응?”

나는 당황스러워하는 렌에게 말했다.

“너 미술 좋아하잖아. 그쪽으로 공부하고 싶으면 공부 해 봐도 좋지 않을까? 과학 기술도 좋아하니까 아예 그쪽으로 가도 좋고. 너는 머리도 좋으니까 배우고 싶은 거 다 배워도 돼. 돈도 많잖아?”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다 있었다. 렌은 제 통장을 가감 없이 내게 보여 줬고, 렌의 통장에 쌓여 있는 액수를 보고 나는 기함을 토했다.

내가 백 년을 일해도 못 버는 돈이 렌의 계좌에 쌓여 있었으니까.

얘기를 들어 보면 미국에 있을 때 아주 많은 일이 있던 모양이었다.

나중에 들은 다니엘의 말에 따르면 갑자기 뒷세계에서 렌과 함께 도주한 다니엘을 처리하기 위해 갱단 몇 개가 다니엘의 뒤를 쫓았으나, 불의를 참지 않는 렌으로 인해 조직이 탈탈탈 털렸다고 했다.

조직을 넘어서 그 대가리까지 털어 버리고 의기양양하게 마법까지 쓰는 바람에 아주 후처리가 완벽해서 탈이었다.

“사람이 너무 하나에만 매달리면 곪는데.”

내 말에 렌이 입술을 삐쭉 내밀고 내게 물었다.

“공주님은 어디 가고 싶은데?”

“음, 글쎄? 우리 학교 교환학생 프로그램 찾아봐야 할 것 같은데. 그래도 졸업은 해야지.”

렌이 제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내게 밀며 말했다.

“이거 다 공주님 돈이야. 공주님이야말로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어.”

“알았어, 이제 네 부자 어필 그만해도 돼.”

나는 실없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렌의 손을 잡았다.

“가자. 조금 돌아다니다가 밥이나 먹자. 천천히 생각해도 좋으니까. 나는 어디까지나 제안한 거고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

“약속했잖아. 내가 너 책임진다고. 내가 따라갈게.”

나는 까치발을 들어 렌의 뺨에 입 맞췄다.

조금 이기적인 생각이었지만 역시, 렌이 내 세계에 영영 있는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이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공주님, 나 이 세계가 너무 마음에 들어.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아. 사람들도 나 안 싫어해.”

“다행이다.”

나는 렌의 잘생긴 얼굴을 보며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사실 나 철학도 배우고 싶고, 엔지니어링도 배우고 싶고, 미술도 하고 싶어. 공주님은 날 너무 잘 알아.”

나는 또 땅을 파려고 하는 렌의 허리를 붙잡아 안아 주었다. 그리고 렌의 가슴팍에 턱을 대고 렌을 올려다보았다.

“배우면 되지? 돈 많잖아?”

“……내 마음대로 하는 게 불편해.”

“그럼 내가 부탁했다고 생각해. 나는 네가 네 마음대로 했으면 좋겠어. 나는 솔직히 네가 내 남자친구인 것만으로도 굉장히 행복하거든?”

사실이었다. 렌이 내 옆에 있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굉장히 충족해졌다.

SNS에 렌과의 다정한 사진을 올리는 것도 좋았고 또 렌이 사랑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날 쳐다보는 것도 좋았다.

그냥 렌이랑 있는 게 너무 좋았다.

“나 또 화학도 배우고 싶어. 신기해.”

렌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렌을 보고 그냥 계속 웃었다.

진짜 다행이다. 이 세계를 지나치게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그럼 돈도 많은데 그냥 미쳤다 하고 혼인신고서 내고 나랑 해외 이곳저곳 돌아다닐래?”

“…….”

렌이 온갖 감정이 일렁이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대신 나 졸업할 때까지는 기다려야 해. 어쩔 수 없어.”

내 말에 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스물네 살이지만 어쨌든 렌의 세계에 가 있는 동안 이곳의 시간은 흐르지 않았으니 스물셋인 이 나이에 결혼이라니.

당연히 등짝 맞을 미친 짓이었지만 그래도 일단 진행시키면 못 할 건 없었다.

뒤지게 혼나겠지만 뭐, 혼나고 말지.

나는 아직 렌이 날 구해준 걸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렌이 나만 보고 이세계로 넘어온 것까지 알고 있다.

그런데 내가 쓸데없는 현실적 핑계로 렌의 최대 소원을 미루는 건 너무 양심 없는 일이 아닌가?

물론, 렌이 너무 잘나서 내가 조금 조급해진 건 절대 아니다! 절대……!

“비자는 그냥 결혼으로 해결 보자. 내가 책임진다고 했지?”

“……공주님 그래도 돼?”

“그럼 그럼. 등짝 몇 대 맞으면 돼.”

나는 결연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순식간에 몸이 허공에 들렸다.

렌은 환의에 찬 얼굴로 나를 안아 올렸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게 느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렌은 나를 붙잡고 제자리에서 빙글 돌았다.

“공주님, 나 공주님이 너무 좋아. 내 공주님.”

“이름 부르라고오…….”

“응 시아야. 내 시아. 내 행복.”

렌이 무거운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 내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해맑게 웃었다.

그래, 네가 행복하면 됐지 뭐.

“너도 내 행복이야. 알았지?”

“응응.”

“너랑 계속 함께 있을 수 있어서 너무 다행이야. 렌.”

나는 렌을 꼭 안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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