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분명 처음에는 경계하며 날도 세웠던 것 같은데 어째 날이 갈수록 시아는 말랑해졌다.
오늘도 처음에는 왜 본인을 가둬 두는 거냐고 날을 세우다가 갑자기 헤실헤실 풀어져서 뽀뽀까지 해 줬다.
도대체 뭐가…… 문제지?
‘나 뭐 했는데?’
덕분에 렌의 심장은 남아나지 않는 중이었다. 요즘에는 시아가 그를 만지는 것도 서슴없어졌는데, 렌은 그녀의 감정 변화가 당연히 이해될 리가 없었다.
꼭 칭찬하는 것처럼 머리도 쓰다듬어 주고 입도 맞춰 주니까.
‘나쁜 짓 중인데?’
요즘 들어 다들 시아의 본성에 대해 눈치챈 것 같아서 불안해졌다. 실제로 그가 잡아 둔 인형들조차 마나 하나 없는 시아에 대한 호기심으로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았는가.
게다가 거슬리는 카일 펜디엄.
책에서 본 양심이라는 걸 상당히 탑재한 모양인지 며칠간 시아가 안 보이자 그 쓸모없는 리나 플로린이라는 이름을 거들먹거리며 시아를 찾아댔다.
와중에 어쭙잖게 뜨는 매서운 눈초리가 무서워서 아주 지릴 지경이었다.
어제 소설에서 본 ‘제 발 저린다.’ 라는 표현이 현재 렌의 상황과 아주 맞아떨어졌다.
괜히 기분이 더 나빴다. 그가 시아를 가둬 두는 것은 오로지 그녀의 안전을 위해서란 말이다.
“표정이 안 좋군. 마법사.”
“음, 좀 마음이 급해져서. 인형에 대한 소식은 이미 들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렌의 말에 왕이 아주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내, 그대의 복수라면 이뤄 주겠네. 마탑주의 자리를 노리는 건가?”
왕의 말에 렌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예, 뭐.”
왕은 그런 렌을 살짝 어두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건방진 태도가 아니꼬운 모양이었다.
그런데 뭐 어떤가. 이미 렌은 명백한 강자의 위치에 있다. 무려 코어의 조각을 흡수한 결과였다.
시아와 달리 이곳 사람들은 마나의 크기를 대강이나마 느낄 수 있으니까.
왕은 다시 표정 관리를 하며 꽤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나저나 그대가 칼리우스와 요 근래 가까이 지낸다는 소식을 들었네.”
렌은 앞에 있는 찻잔을 가만히 노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또 무슨 놀이를 하려고 그런 운을 떼지? 렌은 현재 물 흐르듯 사회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개조된 렌의 뇌는 정보를 빠르게 습득하고 구현해낸다.
그 덕에 금방 왕실 사람들의 뱀 같은 면을 아주 효율적으로 습득할 수 있었다.
왕은 급진적인 왕자의 세력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애초에 본인의 씨앗에 그리 애정이 없으니 이제 곧 저 입에서 왕좌 얘기가 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다.
“내 아들은 상당히 무모한 면이 있어. 천한 상인들과 친구놀음이라니. 왕실의 체면이 어디까지 떨어지려는지.”
렌은 어쩌라고, 라고 말하고 싶은 걸 시아의 얼굴을 생각하며 꾹꾹 참았다.
그리고 새삼 놀랐다.
‘효과가…… 있어?’
금방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방에 돌아가면 입이라도 맞춰 달라고 해야겠다고 렌은 생각했다. 요즘 시아는 그가 해 달라는 대로 잘해 주니까.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 뭐. 어차피 플로린스의 후계자는 왕자님이 아닙니까? 왕자님의 교우 관계가 마음에 안 드시는 거라면 부자간의 대화로 해결하심이 좋을 것 같은데요.”
렌이 때에 맞지 않게 빙글빙글 웃으면서 말하자 왕의 표정이 바로 구겨졌다.
“그대가 눈치가 꽤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오판이었군.”
왕의 말에 렌이 바로 받아쳤다.
“공주님을 굳이 위험에 빠트리고 싶지는 않아서 말입니다. 전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허.”
왕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렌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정말 렌이 오로지 시아를 위해 이 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게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렌은 아주 조금 서운해졌다.
‘다들 내 진심을 몰라줘.’
그가 대충 시무룩해진 얼굴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왕은 그런 렌을 보고 인상을 살짝 찌푸린 채로 물었다.
“왕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제가 원하는 것은 마탑과 공주님의 안전입니다. 전하. 다른 건 굳이 싶습니다만?”
“그대만 원한다면 그대의 자식에게 왕위 계승권을 넘길 수도 있다.”
렌은 어이가 없어 웃을 뻔한 걸 가까스로 참았다.
그러고 보니까 시아의 말대로 정말 제 감정 표현이 풍부해진 느낌이었다. 웃음을 참다니! 과거의 그로서는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확실히 아무리 인형화 과정을 겪었더라도 충격적인 감정 하나를 강렬하게 느껴 버리면 그 외의 감정에 대한 속박도 자동적으로 해제되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마탑 지하에 굴러다니는 인형들의 감정 제어 술식은 어떻게 푼담?
단순한 방법은 그의 공주님을 눈앞에 들이밀고 자신과 똑같은 상황을 만드는 거였지만 그건 죽기보다 싫었다.
뇌랑 간이랑 바뀐 것도 아닌데 그가 미쳤다고 시아를 내보이겠는가.
꼭꼭 숨겨서 아무도 안 보여 줄 거다. 시아는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다른 사람들이 탐낼 게 분명했다.
“흠. 공주님께선 생명은 소중한 거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인가?”
왕이 뭔 개소리냐는 듯 렌을 바라보았다. 렌은 대충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차피 현재 시아는 호문쿨루스 상태이기 때문에 임신이 불가능했다.
가능하다고 해도 렌은 자식이란 불청객은 완강히 사절이었다.
“제 자식이라고 암살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서.”
렌은 빙긋 웃었다. 왕은 렌의 태도에 기가 찬다는 듯 자꾸 헛숨을 내뱉었다.
“그 얘기 하시려고 부르신 겁니까? 웬만해서는 왕자 저하께 오늘 한 이야기는 안 꺼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괜히 이 이야기 때문에 공주님께서 이상한 일이라도 당한다면…….”
렌은 순간 든 기분 나쁜 생각에 인상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처음부터 자꾸 시아를 노리는 세력 때문에 기분이 나쁘던 참이었다.
시아 눈치 보지 말고 진즉에 다 죽여 버렸어야 하나……?
현재 렌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물론 시아가 사람 죽이지 말라는 소리는 안 했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싫어할 게 눈에 보이는데 어떻게 눈치를 안 보겠는가.
하지만 눈치 보는 건 눈치 보는 거고 거슬리는 건 거슬리는 거였다.
렌은 가만히 왕을 바라보다가 순간 든 기발한 생각에 손뼉을 짝 쳤다.
“아하, 전하. 제가 좋은 제안을 드릴 게 하나 있는데.”
“……그대의 제안이라면 흔쾌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네.”
왕이 영 미심쩍은 얼굴로 렌을 바라보았고, 렌은 그러거나 말거나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당장 이틀 후에 마탑을 칠 생각인데, 마탑에 소속된 자들을 플로린스로 넘겨주는 대신 사람 좀 대신 죽여 줬으면 합니다.”
“지금 자네가 무슨 소리 하는지 알고 있는 건가?”
왕이 또 이해가 전혀 안 간다는 얼굴로 렌을 보며 물었다.
“본 목적이 뭔가. 나는 빙빙 돌리는 걸 좋아하지 않네. 단순하게 사람 좀 대신 죽여 준다는 그런 가벼운 부탁에 마법사를 내준다?”
렌은 왕의 말을 듣고 또 시아를 떠올렸다. 확실히 시아가 비정상인 게 맞았다. 목숨은 사람들의 기준에서 가벼운 것이 맞다. 그런데 왜 이렇게 꺼림칙해하는 건지.
시아의 세계에서는 사람 죽이면 감옥 간다고 했는데. 그녀의 세계에서 감옥이라는 게 그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무시무시한가? 마탑의 실험실만큼?
그러면 대충 납득이 가긴 했다. 그 정도라면 무서워서 살인에 대한 개념이 부정적으로 잡힐 확률이 높지.
시아는 그가 감옥 가는 게 싫은 모양이었다.
렌은 다시금 기분이 좋아졌다.
“제가 감옥 갈 수는 없으니까요?”
“……자네라면 감옥은 가지 않을 거라네.”
렌은 왕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제 할 말을 내뱉었다. 그를 걱정해 주는 시아를 떠올리며.
“공주님이 싫어합니다.”
“…….”
저도 모르게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앞에 앉아 있는 왕은 얼빠진 얼굴이었지만 렌은 개의치 않았다.
시아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 어쩔 줄 몰랐다.
“우리 공주님은 착하고 예쁘고 귀엽고 정의로워서 그런 더러운 일을 제가 직접 한다면 슬퍼할 겁니다.”
“…….”
“그러니까 내가 직접 하지 않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버리네?”
렌은 제가 생각해도 기발한 발상해 홀로 뿌듯해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아, 안 그래도 흑마법사 무리가 왕자 저하와 이야기를 나눈다 들었습니다. 거기서 죽여 주었으면 하는 사람들이 몇 있는데. 전하의 명령이라면 왕자 저하도 달갑게 받아들일 겁니다.”
“……알았네.”
“말이 잘 통해서 좋습니다. 전하.”
그때였다.
“…….”
렌은 순간 그의 신경을 뚫고 들어오는 마나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왜 그러지?”
“아, 잔챙이들이.”
렌은 꽉 주먹을 쥐었다. 시아의 방에 설치해 둔 방어막을 누가 건드렸다.
머리가 핑글 돌았다. 아, 이러면 시아가 싫어할 텐데. 저도 모르게 눈이 붉어졌다.
‘어떤 새끼지?’
렌은 무작정 시아의 방 앞으로 가려고 했지만, 금세 똑똑하게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지금 바로 가면 높은 확률로 건방진 잔챙이의 목을 따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똑똑하게 대충 체면부터 차리고.
“공주님께 급한 일이 생긴 것 같아서.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전하.”
“……그렇게 하게.”
죽이지는 않고 잡아만 둔다.
렌은 그렇게 포탈을 열고 시아의 방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보이는 건 빌어먹을 마법사 꼬맹이와 당황해하는 시아의 얼굴.
“……뭐야?”
렌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시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혼란스러워하는 얼굴.
저 얼굴을 그가 언제 봤더라.
아, 자신과 처음 만나고 얼마 안 지났을 때.
렌의 기억력은 상당히 좋았다.
그래서 불행하게도 시아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굉장히 부정적인 신호라는 걸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