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화 (104/113)

<104>

카일은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척 봐도 과하게 고급품으로 보이는 로브 자락을 휘날리며 현장으로 걸어오는 마법사에게서는 범접할 수 없는 구역감이 치고 올라왔다.

단순한 구역감 같은 게 아니었다.

상식 외의 힘을 맞닥뜨렸을 때 느껴지는 생리적 공포감.

마법사의 주변에는 그로서는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강력한 마나가 소용돌이처럼 회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일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건 더 이상 사람이 아니다.

정신이 아찔할 정도였다. 와중에 도대체 저 정신머리 없는 공주는 마법사의 품에 도대체 어떻게 안겨 있는 거지?

가짜 공주가 가지고 있는 마법사에 대한 기이한 애착 관계는 머리로는 대충 이해를 했다.

아무래도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 마법사가 아무 힘도 뭣도 없는 여자를 돌본 모양이니까.

하지만 이건 단순히 생명의 은인이랍시고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심지어 저 미친 마법사는 제 마나를 갈무리할 생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눈앞에 플로린스의 왕자가 서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흐음. 정말 셋이네?”

마법사의 옆에 있는 레오닐이라는 흑마법사가 이를 달달달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처지에 동정 따위는 사치였으나, 아주 조금 저 꼬맹이가 불쌍해질 지경이었다.

저 마나를 정통으로 받다니. 그야 마법사가 아니라 덜 민감하다고 해도 저 꼬맹이는 완전히 다를 것이었다.

마법사는 영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제 품에 있는 여자를 꽈악 안고는 로브를 들춰 안에다가 무어라 속삭이기 시작했다.

제3자의 입장으로 보기에는 퍽 기괴해 보이는 광경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안에 있는 여자도 그 꼬라지가 이상하다는 걸 아는지 마법사의 품 안에서 조그마한 손을 빼내더니 냅다 마법사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었다.

“안 돼. 위험해.”

“제발……! 좀!”

“으응, 안 돼에에. 공주님. 조금만 참아. 알았지?”

마법사는 머리가 아픈 듯 인상을 찌푸리며 제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러고는 다시 살벌한 얼굴로 황금빛 마법진에 갇혀 기괴하게 사지가 틀려 있는 마법사들을 바라보았다.

아니, 애초에 저걸 마법사라고 할 수가 있나?

미묘하게 마법사와 비슷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기괴할 정도로 풍부한 마나. 그리고 전혀 마법사답지 않은 신체 능력.

그와 비교하자면……, 아마 카일을 딱 한 명 정도를 상대해 겨우 죽지 않을 정도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하아. 미완성이라 다행이야. 그렇지?”

마법사가 히죽 웃었다. 카일은 이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저와 비슷한 처지일 플로린스의 왕자를 보았다.

그리고 절로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플로린스의 왕자는 전혀 겁에 질린 눈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저 표정에는 환희가 담겨 있었다.

카일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을 뻔했다.

무슨 생각으로 저런 표정을 짓는지 대충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플로린스의 상황은 솔직히 말해서 마냥 희망적이지는 않았으니까.

제국은 계속 세력을 넓히고 있었고, 아무리 플로린스가 제국 다음으로 강하다고 해도 결국 플로린스 또한 제국이라는 무자비한 지배자 앞에서는 일개 사냥감으로 전락할 운명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마법사의 유입이라니.

플로린스 입장에서는 렌이 아무리 위험 분자라고 해도 그의 힘을 두 눈으로 확실하게 본 이상 환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왕자 또한 상당한 무력의 소유자이기에 저 마법사 셋이 어떤 존재인지는 대략 짐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비록 가짜이긴 하나 공주의 남편 자리에 억지로 앉은 마법사 하나가 저 셋을 쳐다보지도 않고 제압했다?

환영하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이상했다.

심지어 저 미친 마법사의 목적은 기이하게도 오로지 저 어디서 떨어졌는지 모를 기괴한 여자 하나였다.

쓸데없이 사려 깊어서 대놓고 싫어할 수도 없는 여자.

어쩌다 보니, 썩은 줄만 잡고 있던 그에게 멀쩡한 줄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 준 여자.

“…….”

카일은 저도 모르게 피로해지는 기분에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신경 쓰지 말자. 그는 그냥, 다 준비된 판에 체스 말만 움직이면 되는 거다.

간단했다.

“감정만 거세당했어? 이렇게 약한 걸 보면 맞는 것 같은데.”

마법사가 히죽히죽 웃으면서 사지가 뒤틀린 암살자들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가운데 있던 남자의 머리채를 잡아 그대로 끌어 올려 제 큰 키에 시선을 억지로 맞추게끔 만들며 물었다.

“왜 왔어?”

“…….”

“음, 안 돼, 안 돼. 벌써 죽으면. 안타깝지만 마나 계약은 내가 이미 부쉈어. 어때. 고맙지? 생명의 은인인 셈이잖아?”

마법사가 더러운 걸 만졌다는 듯 그대로 남자의 머리채를 놓았다. 쾅! 소리와 함께 남자는 중력에 의해 바닥에 머리를 찧었고, 마법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순간 청량한 향기가 마법사를 감싸더니 뿌드득 소리와 함께 사지가 꺾여 있던 마법사들의 몸체가 원상태로 돌아왔다.

“똑똑해. 공주님이 아니라 날 노리다니! 만약 그 반대였으면 나는 정말 참지 못했을 거야.”

마법사가 과장된 어투로 우는 척을 하며 품 안에 있는 여자를 껴안았다.

“상상만 해도 열받네.”

마법사의 품에서 다시 손이 튀어나와 마법사의 뺨을 약하게 꼬집었다가 쏙 들어갔다.

그에 난폭하게 날뛰던 마나가 줄어들었다.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공주님 너무 착해……. 진짜 마음에 안 들어.”

“시끄러워, 제발……! 내려 줘!”

“공주님, 그러면 나한테 그냥 얌전하게 안겨 있어야 해. 알았지? 절대 쟤들 보지 말고 내 가슴에 머리 박고 있어.”

평소처럼 도대체 지금 뭐 하고 있는 거냐고 딴지를 걸고 싶어졌으나, 카일은 이제 제 위치를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저보다 위에 있는 건 그 누구도 아닌, 저 미친 마법사였다.

마탑의 실패작. 폐기물.

그리고……, 어쩌면 대륙 최강이라 부르는 마탑주보다 훨씬 강력한…….

카일은 헛웃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왜 몰랐을까? 저건 괴물이다.

마탑이 암살자를 보낸 이유? 뻔했다. 저자가 살아 있다면 마탑은 끝이다.

완전히.

게다가 머리까지 좋은 건지, 아니면 단순히 사람을 잘 만난 건지, 그것도 아니면 상황 자체가 저 빌어먹을 마법사의 편인 건지 그는 플로린스까지 등에 업었다.

“좋아! 내가 특별히 손봐 주도록 할게.”

“……마탑주께 충성을.”

“하아, 멍청하게 또 헛소리 중이네? 걱정 마, 걱정 마. 내가 생각도 안 나게 해 줄게. 왕자님 이제 플로린스가 마법사가 넷이나 생겼는데. 나한테 뭐 해 줄 거야?”

마법사가 섬뜩하게 씨익 웃었다. 그 앞에 있던 왕자는 짧은 헛웃음을 뱉더니 이내 이 미친 분위기 속에서도 즐거운지 하하하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

“그대가 원하는 걸 구체적으로 말해 보게.”

“마탑을 나한테 줘.”

***

염병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렌은 상당히 쪽팔릴 만큼 나를 대했다. 나는 정말 렌의 가슴팍에 얼굴을 처박고 있어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귀로 들리는 소음들 또한 전부 이상한 소리들밖에 없었다.

“하하하하!”

왕자가 미친 사람처럼 웃었고, 렌은 나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왜? 못 하겠어?”

그에 왕자가 기쁨이 뚝뚝 묻어나는 어투로 렌에게 말했다.

“플로린스에 영광의 태양이 떠오르겠군.”

렌은 왕자의 말에 내 머리칼을 헤집으며 제 턱을 내 정수리 위에 턱 올려놓곤 밍밍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러든가 말든가. 마탑만 넘겨. 나는 그거면 됐어. 잠깐 사용하고 줄게.”

“전하께는 내가 전하도록 하지. 그 전에 마나를 좀 거두어 주지 않겠나? 그대가 모은 내 기사들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말이지. 이리 강대한 마나를 보는 건 다들 처음 아니겠나.”

이전과 완벽하게 달라진 정중한 태도였다. 그만큼 마법사가 플로린스에 중요한 존재라 그런가?

“공주님 이건……!”

그때였다. 레오닐이 급하게 내 곁에 다가와 소리쳤고, 그에 렌이 크게 움찔거렸다. 뭔가를 하려다가 만 느낌이었다.

“꼬맹이는 내가 잘해 줄 때 저리 가 있어. 쓸데없이 끼어들면 혼나.”

렌은 뭔가 진정하려는 듯 숨을 크게 몰아쉬고는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해 보였다.

그리고 다시 나를 꽉 껴안은 채로 숨을 들이마시더니 곧 입을 뗐다.

“그리고 왕자님. 왕자님이 감사해야 할 대상은 내가 아니라 우리 공주님인 거 잘 알지?”

렌의 뜬금없는 말에 왕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대가 내 하나뿐인 동생을 아끼고 있다는 사실은 아주 잘 알겠네.”

“공주님만 아니었으면 넌 여기 없었어. 잘 알아 둬.”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얘가 미쳤나, 그런 얘기를 왜 여기서 꺼내!

내가 경악하거나 말거나 렌은 조금 진정이 됐다는 몸짓으로 몸에 잔뜩 주고 있던 힘을 풀었다. 그러고는 나를 안고 꽤 웃긴 꼴로 어기적어기적 자신을 죽이러 온 마법사들에게로 걸어갔다.

아니 그런데 나 언제까지 가만히 이 꼴로 있어야 하니……?

“지하실로 데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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