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102/113)

<102>

나는 렌의 설명을 당연히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일단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이랬다.

내가 경계 밖에서 열쇠로 사용했던 반지는 정말 우연히, 옛 연구소 안에 일부러 숨겨 놓은 코어의 파편이었다.

파편은 연구소의 비밀 감옥을 열기 위한 열쇠로서, 사라진 감옥의 담당자 대신 내 손에 각인된 것이고, 지금 렌이 그걸 흡수했다고 했다.

“지금 내 마나는 전부 코어에서 기인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렌은 코어의 마나를 다루기 위한 실험체로 길러졌다.

다섯 살 때 납치당해 쭉 마탑의 지하에서 실험을 당했단다.

감정을 거세시키고 마탑의 명령에만 철저히 대응할 수 있도록.

코어의 힘은 과거에도 완전히 다루지 못했다. 과거 선조들이 코어의 힘을 잘못된 방향으로 다루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마탑은 게이트를 열어 새 생명체와 이 세계의 생명체를 결합하는 대신 코어 자체의 마나를 마법사의 몸에 주입하는 방향으로 연구를 틀었다고 했다.

대표적인 코어의 힘을 꼽자면, 시공을 다루는 능력.

즉 차원을 찢거나, 시간을 다루거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인간에게는 금지된 마법.

현재 렌은 시간을 다룰 수 있는 유일한 마법사이다.

“그러니까 처음에 공주님한테 선물로 준 맛없는 빵도 나밖에 못 만들어…….”

렌이 눈을 감고 내게 기대며 자포자기한 사람처럼 히죽히죽 웃으며 말을 했다.

“공주님이 손가락에 끼고 있던 코어 조각이 나한테 흡수되는 건 당연한 일이야. 걱정 안 해도 돼. 나나, 코어나, 뭐 가까운 사이니까?”

렌이 온몸에 힘을 쭉 뺀 채로 내게 더 치대 왔다. 꼭 온기가 부족한 사람처럼, 어떻게서든 더 붙어 있고 싶어 하는 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으음, 공주님, 반지 해 줄까?”

렌이 뜬금없이 내게 물었다. 힘이 다 빠진 얼굴로 헤 하고 웃으며 새빨간 입술을 오물거렸다.

“렌, 너 괜찮은 거 맞아?”

내 물음에 렌이 입술을 삐쭉 내밀고는 대답했다.

“당연하지. 내가 안 괜찮으면 공주님은 지금 내 옆에 없었지.”

그 의미 모를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렌이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며 말했다.

“내 옆에 있는 게 제일 안전하니까. 내가 약해 빠졌으면 나는 공주님 내 옆에 안 뒀어. 내 옆이 제일 위험한데 내가 공주님을 어떻게 끼고 있어?”

렌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조금 자기 파괴적인 말이었다.

“응, 그렇지. 나는 위험하니까. 그래서 내 옆이 제일 안전해. 나는 위험한 새끼야. 통제조차 안 되는 폐기물.”

나는 렌의 뺨을 꼬집으며 정정해 주었다.

“아니지.”

“…….”

렌은 이해 못하겠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요즘 렌은 나를 자주 저런 얼굴로 쳐다보았다.

정말 전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렌, 진지하게 생각해 봐. 여기서 정말 쓰레기가 누구라고 생각해? 위험한 새끼가 누군데? 상종도 못 할 쓰레기가 누군데? 보편적인 상식으로 말이야.”

렌은 대답을 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아들은 모양이다.

“원래 주인공들 인생이 좀 복잡한 편이야.”

“무슨 뜻이야?”

“내가 원래 소설 읽는 거 좋아하거든? 보통 주인공들 과거는 좀 어둡지만 대부분 극복하고 일어나더라고. 그리고 주인공들은 웬만하면 엄청 강하다? 또 꼭 상종도 못 할 개쓰레기 빌런들이 나와.”

렌이 내 말을 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래도 내 헛소리에 맥 빠진 기색은 좀 없어져서 다행이었다.

“네가 전에 흑마법사들이 나한테 뿌린 시나리오에 네가 없어서 짜증 난다고 했지? 왜 그랬는지 대충 이유가 짐작이 가. 왜냐면 나는 애초에 동화 졸업한 지 한참 됐다고. 당장 여기 떨어지기 전날에만 해도 난 판타지 무협 읽었단 말이야. 왜, 주인공들이 정의 구현 하고 악당들 쳐 죽이는 거.”

렌의 표정이 순식간에 맹해졌다.

“그래서 내가 왕자가 아니라 널 만났나 봐. 사실 알고 보니까 내 장르는 동화 같은 게 아니라 판타지물이었고, 내 역할은 주인공 여자친구였던 거지. 이제 납득이 좀 가네.”

내가 장난스레 고개를 끄덕거리자 멍하게 있던 렌이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아, 큰일 났다.

그냥 차라리 울게 두는 게 나으려나? 다행히 근처에 손수건이 있었다.

“나, 공주님이 나 싫어할까 봐 계속 무서워, 다섯 살 때 이후로 처음이야. 말하고 싶지 않았어, 공주님.”

나는 렌의 눈가를 콕콕 닦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뭐 하러 널 싫어해.”

“꿉꿉한 지하감옥이 싫었어. 나랑 똑같은 애들이 무표정으로 쓰레기 더미처럼 섞여 자는 것도 싫었고, 내 손으로 울고 있는 애들의 목을 조르는 것도 싫었어.”

툭 튀어나오는 무거운 주제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가만히 렌의 눈을 쳐다봐 주었다.

“아픈 것도 싫어. 물론 지금은 익숙해져서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 그런데 공주님이 자꾸 싫어하니까 계속 이상했어. 여기가.”

렌이 제 명치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전에는, 마탑에서만 벗어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랬는데 공주님 만나고 나서부터 자꾸 답답해. 내가, 내가 싫어져.”

그리고 더운 숨을 뱉어냈다. 렌의 눈은 금세 충혈되어 빨개졌고, 내 앞에서 눈물만 뚝뚝 흘리는 처연한 모습은 내 마음을 아프게 하기 충분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처음 느껴 본다.

원래도 공감을 잘하는 편이긴 했는데, 진짜 이렇게까지, 나까지 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처음이었다.

“어른스럽지 못한 것도 싫어. 왕자가 아닌 것도 싫어. 손에 쥔 게 힘밖에 없는 것도 싫어. 나도 동화 속 왕자님, 하고 싶어. 그런데 공주님이 자꾸, 이상한 소리 하니까…….”

렌이 신음을 흘리며 머리가 아픈지 제 이마를 부여잡으며 이를 꽉 깨물었다.

“진짜, 공주님한테 미움받을 짓 하고 싶잖아.”

그러고는 나를 덥석 껴안았다. 렌은 허벅지로 거의 나를 가두듯이 품에 아예 품어 버렸고, 나는 렌의 애매한 대사를 번역해 보려 노력했다.

도대체 전부터 ‘나쁜 짓’, ‘미움받을 짓’이라고 종종 말하는데 그게 무슨 뜻일까?

말로만 저렇게 하고 렌은 그 후로 보통 아무 짓도 안 했다. 해 봤자 뭐, 깊은 접촉……?

설마 그게 나쁜 짓이라고 인식하는 건가?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따지기에는 렌은 내게 닿을 때 죄책감 같은 걸 보이기는커녕 너무 대놓고 기뻐해서 나도 덩달아서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쁜 의미는 아니고 좋은 의미로.

렌이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보이니까. 원래 사람이란 자신에게 쏟아져 내리는 무한한 호의를 받으면 그러고 싶지 않아도 홀랑 넘어가 버리는 게 정상이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곳에서 날 구해 주고, 지켜 준 렌이라면 더더욱.

“렌, 나 봐 봐.”

렌이 많은 감정이 교차해 있는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는 천천히 렌의 얼굴에 입을 맞춰 주었다.

“안 하면 되잖아. 간단해, 렌.”

“…….”

“나쁜 생각은 누구나 종종 들어. 오히려 너처럼 입 밖으로 꺼내는 경우는 양심적인 편일걸? 그리고 난 네가 나한테 나쁜 짓 할 거라고 생각 안 해. 그랬으면 진작 했겠지.”

나를 안고 있는 렌의 몸에 힘이 더 세게 들어갔다. 나름 나를 만질 때는 힘 조절을 하는 것 같은데, 오늘은 아닌 모양이었다. 렌이 붙잡고 있는 팔이 아팠다.

“렌. 나는 있잖아, 이 말 안 해 준 것 같아서. 나도 너 좋아해.”

“…….”

“그러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 괜찮아. 도망 안 가. 네 옆에 있어 줄게. 헛소리 아니고 가벼운 마음으로 하는 소리도 아니야. 나 이미 너한테 정을 너무 많이 줘 버린 것 같아. 사람 감정이라는 게 물건이 아니라 돌이킬 수가 없네?”

나는 푸흐흐 웃으며 렌의 눈가를 다시 닦아 주었다.

“아무도 못 건드려.”

그때였다. 렌의 발끝에서 황금빛 마법진이 물방울 떨어지듯 작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마법진은 순식간에 크기를 불려 나갔다.

“애정이지? 네가 나한테 주는 게 사랑인 거지? 내가 느끼고 있는 것도 그 대단한 사랑이 맞지?”

렌의 눈이 점점 보랏빛으로, 붉은빛으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럴 때면 아주 조금 렌이 무서워진다.

하지만 나는 간땡이가 부은 건지 아니면 저게 허세인 걸로 착각하고 있어서 인지는 몰라도, 저 상태의 렌 앞에서 꽤나 아무렇지 않게 굴 수 있었다.

“내 감정이라면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네 감정이라면 네가 판단해야지, 렌.”

“…….”

“날 사랑해?”

펑! 폭죽처럼 마법진이 터졌다.

아까 들었던 기이한 찰칵 소리가 렌의 몸 안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응.”

렌이 나를 끌어안고 있던 팔에 힘을 빼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번쩍 들어 올려 내 다리를 제 허리에 감고는 입을 맞췄다.

뒤로 들려오는 비명 소리만 아니었어도 나는 렌의 분위기에 휩쓸려 상황도 잊고 정신을 홀라당 빼먹었을지도 몰랐다.

“커헉!”

“아아아악!”

당연히 나는 다급하게 내게 달라붙는 렌을 밀쳤고, 렌은 황홀해하는 표정으로 내게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괜찮아. 공주님. 계속하자. 나 정신 나갈 것 같아, 지금.”

그리고 활짝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