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99/113)

<99>

Chapter. 14

렌은 시아의 얼굴을 보며 말을 이었다.

“주제넘게 이상한 생각 하지 마. 내가 여기까지 온 건 공주님 때문이야. 애초에 네 편의 봐줄 생각으로 온 거 아니야. 그러니까 네가 우위에 선 것처럼 거만한 태도는 집어치워.”

그에 옆에 있던 카일의 표정이 구겨졌다. 표정 관리에 실패한 모양이었다.

렌은 쓸데없는 잘난 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시아에게 함부로 말을 지껄이는 놈들을 가만히 두기에는 렌의 성질은 매우 더러운 편이었다.

시아는 그의 시시각각으로 진화하는 인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아무튼 렌은 플로린스에 머무는 동안 다양한 서적들을 통해 그의 성격을 최초로 정의 내렸다.

시아의 기준에서 보자면 그의 성격은 상당히 더럽고 치사했다. 집요하고, 생각보다 무모하고, 또…….

자아 성찰은 하면 할수록 기분이 나빴다. 그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지 알아 가는 과정 같아서.

지금도 애써 시아가 온건하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판을 깔아 줬는데 결국 이딴 식으로 처리하는 걸 보면 답이 나오지 않는가?

그래도 그녀를 깔보고 모욕하는 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걸 왜 그냥 넘어가는 거지? 어차피 왕자라고 해 봤자 진짜 오라버니도 아닌데, 뭐가 불쌍하다고?

도대체 어디가 불쌍한 건데? 애초에 그딴 걸 왜 신경 쓰는데? 참았던 짜증이 다시 확 밀고 일어났다.

심지어 제 과거에 대해서는 일부러 시아 모르게 왕하고만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걸 이렇게 밝혀야 한다고?

렌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두 왕족을 쳐다보았다.

왕족. 누구보다 고귀한 신분으로 금이야 옥이야 자랐겠지. 그와 다르게.

그건 시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시체를 보고 두려워했으며 사고방식도 때 묻지 않았으며 게다가…….

“으응, 진짜 싫은데.”

렌은 시아의 눈치를 흘끔흘끔 보기 시작했다. 과거를 말하고 싶지 않다.

지금은 꽤 나아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당했던 일이 완전히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쓰레기, 폐기물, 물건, 그게 바로 그가 있던 위치였다.

지금은 비록 감정이 반쯤 말소되어 아무 느낌도 안 들지만. 렌의 과거는 시아의 기준으로 더럽기 그지없었다.

‘하……, 렌을 빼고는 오늘도 다 실패네. 죽여.’

‘아니, 뭘 또 청소하기 귀찮게 따로 데려가서 죽여. 여기서 죽……, 아. 렌, 네가 죽이자.’

‘죽여. 웃으면서 죽여야지?’

렌은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에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시아는 살인을 싫어한다. 당연한 사실인가? 일단 그의 세계에서 살인은 나쁜 짓은 맞지만 심심찮게 벌어졌다.

시아의 반응을 봐서는 그녀의 세계에서는 경악할 만큼 나쁜 일인 것 같긴 했다.

물론 시아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그가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는 걸 눈치는 채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얼마나 죽였을지는 전혀 모른다.

그리고 그 과거를 들키는 순간 시아가 렌을 어떻게 쳐다볼지 너무 분명했다.

“…….”

렌은 눈에 힘을 주었다. 괜히 감정에 휘둘려 봤자 좋을 게 없었다.

하지만…….

무섭고 엿같았다.

굉장히…… 굉장히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처음 마탑에 잡혀 오고 아직은 날짜를 셀 수 있었던 삼 년 동안 느꼈던 감정을 요 근래 모조리 느끼고 있었는데 정말 정말 엿같고 불쾌하다!

도대체 마탑은 왜 제 무덤을 파는 거지? 이제 와 그의 목숨에 무슨 가치가 있다고?

괜히 플로린스로 암살 부대를 들여놔 봤자 지금처럼 그가 플로린스 왕실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면 리스크를 떠안게 되는 건 오로지 마탑이다.

왜?

‘도대체 왜 나한테 집착하는 건데 왜?’

이해할 수 없었다.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어차피 나는 실패작이잖아. 시간 마법 좀 능숙하게 하는 게 뭐가 문젠데? 그냥 망설임 없이 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뿌드득, 괜히 잡고 있던 테이블이 조각처럼 부서져 내렸다.

렌은 그제야 정신줄을 붙잡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아무튼 시아의 발상은 그에게는 나쁘지 않은 발상이었다.

렌이 그의 과거를 까발려야 한다는 것만 빼고는 그녀가 깔아 둔 판은 오로지 그의 안전만을 위한 판이니까.

멍청한 카일 펜디엄은 시아가 요구한 대로 거짓말을 술술 내뱉었고, 플로린스의 왕자도 그 거짓말에 속아 주지는 않을지언정 렌이 어떤 존재인지 이번 기회에 제대로 파악한 것 같으니.

“나는 최근부터 착하게 살기로 했으니까 얌전하게 굴게. 다른 거 필요 없어. 도둑고양이처럼 내 성에 기어들어 오는 인형을 잡아서 광장에 전시해 놓기만 하면 일은 해결돼.”

렌은 제 목소리가 떨리지는 않은가 확인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빌어먹을 전투 인형에 대해서 말을 꺼낼 때마다 시아에게 그의 과거가 들킬까 봐 두려워서 척추가 찌릿찌릿했다.

그때였다. 시아의 따뜻한 손이 렌의 허벅지를 짚었다. 그리고 염려 어린 눈이 그를 바라본다.

아, 불안해하는 걸 들켰나?

아닌데. 렌은 그래도 마탑에서 거의 완벽한 인형 취급을 받은 전적이 있었다.

그러니 연기에는 능숙한데…… 음.

시아의 앞에 있으면 그냥 다 조절이 안 되는 것 같다. 다 발가벗겨져서 낱낱이 보이고 마는 기분.

“물론 그 이후의 행보는 조금 머리 좀 써야 할 거야? 안 그래도 대륙 상황이 계속 긴장 상태였잖아? 터질 게 드디어 터질 거라는 뜻이야. 왕자님들이니까 그 정도는 알지?”

렌은 부러 시아의 허리를 덥석 끌어안았다. 콩닥거리는 심장 소리에 온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다.

‘너무 좋아.’

시아가 그에게 보내는 따뜻한 눈빛도 너무 좋고 걱정 어린 말투도 너무 좋고, 그냥,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무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을 정도로 너무 좋아 미칠 것만 같았다.

시아가 조금만 더 나쁜 사람이었다면 렌은 아마 진작 큰일이 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물론 그랬다면 렌이 이 정도로 그녀에게 휘둘리지는 않았겠지만, 현재 렌은 시아가 그의 장기를 내놓으라 해도 기꺼이 이 자리에서 꺼내 줄 심산이었다.

발을 핥으라면 핥을 수도 있고, 또 그를 두고 집에 돌아가겠……, 그러니까 돌아…….

“……공주님이 플로린스 사람인 이상 이 싸움에서 승자는 플로린스가 되는 수밖에 없어. 제국이 정말 전 대륙을 삼켜 버린다면 플로린스 왕실 꼬라지가 어떻게 될지는 왕자님이 제일 잘 알잖아?”

“이미 활시위는 당겨졌으니, 멍청하게 앉아 있지 말고 서둘러 움직여라, 이 뜻이군. 플로린스의 승리라. 대단한 자신감이야.”

렌은 영민한 왕자와 원활한 대화를 위해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니까, 공주님에 대한 생각을 조금만 천천히 해도 좋았다.

하지만……, 만약에, 정말 만약에.

이론만 있는 차원 이동 술식에 오류가 나서 그가 시아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분명 시아는 오늘 그에게 함께 도망가자고 말했다.

그렇다면 더 이상 그녀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그가 더 중요해졌다는 의미가 아닐까?

실패 확률이 높은 모험보다는, 차라리 거짓말에 거짓말을 보태 위태위태하더라도 그의 세계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 나?

렌은 안고 있는 시아의 허리를 더 꽉 껴안았다. 그리고 그녀가 싫어하는 상황에 맞지 않는 행동을 행했다.

시아의 목에 그의 코를 박고 숨을 크게 들이키자 문제는 더 복잡해져 버렸다.

떨어지고 싶지 않다. 시아는 그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가짜 몸인데?

그런데 몸이 중요한가?

하지만 돌아가지 못한다면 시아가 슬퍼할 것이다.

렌은 그걸 가만히 지켜볼 수 있나? 지금도 시아가 눈물이라도 흘리면 뇌라도 쓰레기통에 처넣은 사람처럼 아무것도 못 하는데?

“그걸 대비해 내 앞에 펜디엄의 유일한 핏줄을 들이밀었고.”

“으으응, 그런 복잡한 건 왕자님이 알아서 생각해.”

“네 머리에서 나온 건가, 리나 플로린?”

날카로운 왕자의 시선이 시아에게로 꽂혔다.

그리고 렌은 어째서인지 부글부글 끓는 감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복잡했다. 그의 생에서 이렇게 복잡한 감정은 처음이었다.

“씨발, 내가 공주님한테 말 그따위로 하지 말랬지.”

“세상에, 렌!”

갑작스러운 욕설에 시아가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렌의 양팔을 잡았다.

“렌, 왜 이래. 응? 화내 주는 건 고마운데 진정하자.”

시아가 상황에 맞지 않게 그를 꼭 껴안아 주었다. 그리고 머리도 쓰다듬어 주었다.

빌어먹을 방해물들은 얼어붙은 표정으로 차마 렌과는 시선도 마주치지도 못하고 주먹만 꽉 쥐었다.

왕족도 별거 없어. 내가 제일 강해. 마탑이 보내는 전투 인형도 완성품일 리가 없어. 시간을 좀 끌면서 몸에 새겨진 주술을 역행시키면 손쉽게 파괴될지도 몰라.

“내가, 자발적으로 얌전히, 있을 때 사용해 두는 게 좋을 거야. 괜히, 함부로 대했다가는 그땐 공주님 혈육이고 뭐고 없어.”

시아의 손이 다급해졌다. 어떻게서라든 그를 진정시켜 보려는 건가? 그런데 그러기에는 시아의 손이 미약하게 떨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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