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렌의 기분은 명백히 안 좋아 보였다. 그래서 덩달아 나도 기분이 안 좋아졌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현실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이렇게 무력감을 느끼는 건 진짜 난생처음이다.
수학 5등급 나왔을 때도 이 지경은 아니었는데. 그리고 애초에 그건 극복이 가능했다. 고1 때였으니까!
“이건 마탑의 명백한 도발이야. 왕한테 알려야 해.”
“으응, 공주님 그럼 왕이 날 쫓아내지 않을까? 섣부른 판단일 텐데.”
렌의 맞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적어도 카일한테라도,”
“그 자식은 왜 또 찾아.”
렌이 살벌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물론 금방 싱긋 웃는 얼굴로 돌아오기는 했다.
“공주님은 그냥 여기 얌전히 있어. 내가 해결하고 올게.”
나는 반사적으로 렌을 째려보았다. 이게 방금까지 겁먹고 덜덜 떨 때는 언제고 내가 속을 거라고 생각하나?
렌의 연기력은 뛰어났다. 만약 렌을 거짓말하는 그 순간만 딱 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속아 넘어갈 정도로 말이다.
문제는 연기하는 렌과, 나를 대하는 렌이 완전 딴판이라 아쉽게도 나는 렌의 구라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 네가 대책이 있었으면 그렇게 두리뭉실하게 안 넘어갔어. 벌써 어떻게 할지 나한테 줄줄이 내뱉었겠지.”
내가 정색하며 말하자 렌이 흠칫거리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공주님 조금 무섭다.”
“거짓말하는 거 내가 모를까 봐? 아니다. 어느 정도는 믿어줄게, 일단 쉽게 상대는 못 하지만 그래도 해결 가능성은 있다는 소리지?”
렌이 정말 무섭다는 듯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내게 물었다.
“공주님 독심술해?”
“왕자한테 가자.”
“…….”
나는 렌이 표정을 썩히건 말건 손부터 붙잡고 무작정 이끌었다.
그리고 렌이 설치해 둔 마법 종을 울려 아이들을 불렀다.
렌이 이게 뭐 하는 짓이냐는 듯 힘을 주어 나를 뿌리치려 했으나 시늉에 그치고 말았다.
온 힘을 다하면 내 손이 부러질 위험이 있으니까 그랬겠지. 진짜 쓸데없이 사려가 깊다.
나는 반항하는 렌을 무시하고 어느새 문 앞으로 빠르게 찾아온 아이들에게 말했다.
“카일 경을 불러 줘. 당장 오라버니를 봬야 할 일이 생겼으니까.”
***
“오랜만입니다. 오라버니.”
긴장했다. 나는 긴장감을 숨기기 위해 손을 꾹 말아 쥐었다. 솔직히 여기까지 무슨 정신으로 왔는지도 모르겠고, 애당초 왕자가 날 이 늦은 시각에 흔쾌히 만나 준 이유도 잘 모르겠다.
왕자는 나와 묘하게 닮은 얼굴로 자다 깨 잠기운이 가시지 않는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말했다.
“용건이 뭐지?”
“남매 사이에 얼굴 보는데 따로 용건이란 게 있겠습니까. 오라버니.”
내가 태연하게 말하자 왕자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내 뒤를 쳐다보았다.
“아, 고작 이 야심한 밤에 내 얼굴 하나 보는데 네가 가진 패들을 줄줄이 끌고 왔다?”
“…….”
“협박인가? 이 시간에? 이리 뜬금없이?”
왕자의 말에 뒤에 서 있던 카일도 동의하는 듯 똥 씹은 표정으로 날 필사적으로 모른 척하고 싶은지 한 걸음 물러났다.
“더없이 멍청한,”
그때였다. 왕자는 단잠을 깨운 내가 아니꼬웠는지 신경질적으로 말을 내뱉었고, 그 순간 뒤에 있던 렌이 눈을 빛내며 왕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왕자는 입을 꾹 다물었다. 꼭 겁에 질린 사람처럼.
“뭐라고?”
“…….”
“다시 말해 봐. 왕자님.”
렌은 미친놈처럼 씨익 웃었고, 그와 동시에 왕자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렌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가까스로 고개를 돌려 나를 괴물 보듯 두려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정신이, 나갔군.”
그러고는 피식 웃으며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대놓고 날 죽이러 왔나? 본색을 이리 멍청하게 드러낼 리가 없다는 걸 알고는 있다만.”
나는 왕자의 말에 또 발끈하려는 렌을 뒤로 치우며 말했다.
“사실, 오라버니와 긴히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어 이 늦은 시간에 급히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세요.”
“……날 뭐라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이 시간에 네 떨거지들과 함께 오붓하게 담소나 나눌 만큼 멍청하지는 않아서 말이다.”
이렇게 나올 줄은 알았다. 그나저나 떨거지들이라니. 나는 내 뒤에 서 있는 두 남자를 한 번 보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누가 봐도 떨거지는 난데…… 평가가 생각보다 좋잖아?
나는 쓱 복도를 둘러보았다. 왕자의 시종들이 눈치껏 빠져 준 덕에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좋다.
“그럼 거래는 어떠신지요?”
나는 애써 방긋 웃으며 물었고, 왕자의 얼굴은 그대로 구겨졌다. 야밤에 뭔 개소리냐는 듯이.
사실 야밤에 개소리가 맞았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다.
렌에게 뭐라고 할 처지가 안됐다. 앞뒤 생각 안 하고 들이박은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 렌 혼자 마탑을 상대한다? 아무리 내 상식선에서 이건, 개소리를 넘어서 자살 행위였다.
애초에 집단과 개인의 싸움 아닌가. 아무리 렌이 난다 긴다 하는 강력한 마법사라고 해도 상식적으로 싸움이 되겠냐고.
어쨌든 놈들은 더 늦기 전에 렌을 처리하기로 마음먹었고, 그렇게 된 이상 나도 가만히 있을 이유는 없다.
판을 더 키워서 콧대를 납작 눌러 줄 셈이었다. 플로린스 정도면 충분하겠지.
“……갑자기, 뜬금없이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거래하자? 그것도 네 남편과 신원 모를 호위를 데려와서?”
왕자가 삐딱하게 팔짱을 끼고 턱으로 렌과 카일을 가리켰다.
“마탑이 겁도 없이 움직였더군요.”
“…….”
“…….”
순식간에 주변에 침묵이 맴돌았다. 나는 누가 말하기 전에 최대한 빠르게 내 할 말을 뱉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전하께 직접적으로 제 의견을 전달하고 싶습니다. 하나 저는 상식적으로 공주 신분이라 쉽지 않죠. 오라버니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
왕자의 얼굴이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둘째, 저는 왕좌나 권력 따위는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제가 좀 곤란한 일에 엮여 버려서.”
카드를 공개할 때가 된 것 같다. 질질 끌어 봤자 마탑이 나선 순간 완전 말짱 도루묵이다.
나는 뒤에 있는 카일의 손목을 잡고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인사하시죠. 왕자님. 제 오라비 되는 분이십니다.”
“…….”
카일이 경악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웃으며 카일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어서요.”
“공주님, 제정신이십니까?”
“안타깝게도?”
내가 어깨를 으쓱이자 눈앞에 있는 왕자도 무슨 이런 미친년이 다 있냐는, 굉장히 불쾌한 표정으로 나를 멍하니 쳐다보더니 황급하게 문을 열었다.
“하…… 일단 들어오지.”
“감사해요, 오라버니.”
철컥, 문이 닫히고 나는 태연하게 의자에 앉았다.
사실 방금 전부터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이게 맞나?
일이 잘못되면 어떡하지? 이거 진짜 맞아?
“권력에는 크게 관심 없습니다. 그러니 오라버니께서 염려하시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다른 건 모르겠고, 네가 권력에 욕심을 내는 순간 플로린스가 크게 위험에 처할 거란 건 알겠군. 생각을 하고 사는 건가? 아무리 네게 왕위 계승권이 없다 하여도 세간에 소문이 어떻게 돌고 있는지는 알고 있을 터. 눈치가 없는 편인지, 아니면 그저 뒤에 업은 알량한 힘을 믿고 뻗대는 건지. 알 수가 없군.”
왕자가 나를 대놓고 깠다. 섣부르고 성급하다 이 소리였다. 그건 나도 알고 있었으니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공주님, 나 기분이 너무 나쁜데.”
“쉿.”
렌이 손에 핏줄을 세우며 말했다. 그에 사람들의 시선이 렌에게로 쏠렸다. 아니 쟤는 도대체 어떤 포인트에서 열받은 거야?
나는 가볍게 무시하고 내 할 말을 이었다.
“그럴 일은 절대 없습니다. 오라버니. 그렇기에 제가 이 좋은 기회를 오라버니에게 알려드리려 찾아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싱긋 웃자 옆에 있던 카일이 표정을 구겼다. 꼭 할 말이 있는데 참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 일단 들어나 보지.”
왕자가 자리에 털썩 앉아 한껏 곤란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오우, 지리겠네.
왕자는 못해도 30대 초반이었고, 나는 20대 초반이니, 어른 앞에 서는 이 중압감이 아주 어마어마했다.
“마법사와 관련한 문제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이미 네 남편과 아버지께서 서로 대화를 나눈 걸로 알고 있는데.”
“새로운 기밀입니다.”
사실 왕자를 쥐락펴락할 매혹적인 미끼는 없었다. 만약 내가 진짜 공주였다면 단순히 렌을 왕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끼로 던졌겠지만 애초에 나는 그쪽에 목표가 없으니 영 알맞은 미끼는 아니었다.
그리고 미끼가 없을 때는 어쩔 수 없이 협박을 해야 하는 법.
“오라버니께서는 영민하시니 이미 제 목표가 무엇일지도 잘 알고 계시지요?”
내 물음에 왕자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내가 신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알지? 질질 끌지 말고 본론부터 말하도록.”
왕자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탐색하는 눈빛.
“당장 오라버니의 권력이 필요합니다. 협조하지 않는다면 저와 척을 지시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
왕자가 뭔 개소리냐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저는 오라버니께서 절 도와주셨으면 하는 마음에 찾아온 것뿐입니다. 하나, 오라버니께서 제게 협조해 주지 않으신다면 저는 오라버니께서 저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알아듣기로 하였답니다?”
“지금, 네 입으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고 있나?”
나는 애써 웃으며 답했다.
“그럼요, 오라버니께서 절 죽이려고 시도 하셨던 사실을 왕족으로서 모를 리가 없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