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홀리는 느낌이 바로 이걸까.
나도 모르게 ‘응’이라고 할 뻔했다. 노크 소리만 아니었다면.
“구원자, 아니 공주님! 큰일 났습니다!”
레오닐의 목소리였다. 나는 잠시 멍하니 미동도 없이 내 목에 입 맞추고 있는 렌을 보다가 화들짝 놀라 바닥으로 내려와 엉망이 된 머리를 정리했다.
미쳤다.
미쳤어, 진짜!
렌은 그러거나 말거나 붉어진 눈으로 불만을 가득 담아 문고리를 쏘아보았다.
렌의 등 뒤로 열기가 이글거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게 아니라 정신 나갔나, 의자 타잖아!
“렌!”
“……으응.”
순식간에 방 안에 냉기가 스미더니 까맣게 타고 있던 의자에 서리가 꼈다.
“죽일까?”
얼굴이 미친 듯이 뜨거워졌다.
“내가, 내가 미쳤어, 진짜 정신이 나갔, 뭘 멀뚱히 보고 있어! 옷이나 여며, 어서!”
나는 렌의 흐트러진 옷을 대충 만져 주고 허둥지둥 문을 향해 달려가려 했다.
물론 보기 좋게 렌의 손에 저지당했다.
렌은 차갑게 식은 얼굴로 나를 번쩍 들어 구석 의자에 앉히고는 근처에 있는 담요로 둘둘 말았다.
그리고 가볍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끼이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문밖에는 창백한 얼굴의 레오닐이 서 있었다.
렌은 레오닐을 보자마자 대문짝만한 등으로 내 시야를 가리고 특유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별일 아니면 혼나.”
“마탑에서 알아차렸습니다.”
마탑?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로 렌의 뒤통수를 올려다보았다.
“그게 뭐?”
“……예?”
“어쩌라고?”
레오닐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응? 보통 저런 소식에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는 대답이 나올 수가 있나?
“음, 내가 설명해 줘야 해? 바보야? 아직 머리가 덜 자랐나? 천재라면서?”
렌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짝다리를 짚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너랑 달라. 천재의 뜻을 너희들은 잘못 알고 있나 보지? 함부로 가져다 붙이는 거 보면. 그런 걸 보면 인정하기는 싫어도 마탑 소속 마법사들이 너희보다 지능 자체는 더 좋은가 봐.”
나는 고개를 쭉 빼 아직 문밖에 서 있는 레오닐을 보았다.
화가 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방금 렌이 한 말에 열받은 모양이었다.
“마탑의 본대가 움직였다고 전해 드린 겁니다.”
나는 내 상식이 틀린 건가 고민했다. 마탑의 본대가 왜 움직여? 본대면 충분히 심각한 사안 아닌가?
“목표는?”
나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고, 레오닐이 화가 난 기색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다행히 마법사님입니다.”
‘다행히’라는 단어가 왜 붙는 거지? 지적해 주고 싶었지만 일단 참았다.
“왜?”
그때였다. 렌이 손가락을 급하게 휘두르니 문이 쾅! 하고 닫혀 버렸다. 황당함에 입을 쩍 벌리고 렌을 쳐다보자, 렌은 싱긋 웃으며 내게 말했다.
“알 거 없어, 공주님.”
“…….”
“내가 마탑에서 나왔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잖아? 공주님 말대로 날 질투해서 죽이려는 거야. 내가 걔들보다 훨씬 뛰어나니까!”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질투? 있겠지. 내 추측으로는 렌은 그 ‘폐기물.’ 즉 마탑에서 실패한 인체 실험의 결과물이니까.
그들이 인간 취급하지 않던 마법사가 마탑주보다 강력하니 질투하지 않을 리 없다.
게다가 비록 가짜이긴 하나 저들이 놓친 실험체가 제2 강대국인 플로린스의 부마까지 되었다.
안 죽일 수가 없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렌은 왜 내게 제 과거를 숨기고 싶어 할까? 뭐,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는 있었다.
원래 사람이란 본인의 아픈 과거를 남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아 하는 법이다.
하지만, 그래도 나한테는 말해 줄 수 있지 않나?
아니, 근데 내가 왜 서운함 따위를 느끼고 있는 거야. 급속도로 렌에게 미안해졌다.
말 안 할 수도 있다. 나한테 과거를 말해 주지 않는 게 잘못도 아니잖아?
“……공주님 왜 그렇게 쳐다봐?”
“응?”
렌이 불안한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렌의 손이 꿈틀대는 게 보였다.
“공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가볍게 좌시하고 넘어가실 일이 아닙니다! 마법사를 온전히 믿으면 안 됩니다!”
나는 방문을 쾅쾅쾅 두드리는 레오닐로 인해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 렌을 올려다보았다. 렌은 그러거나 말거나 대놓고 굳은 얼굴로 불안해하고 있었다.
“렌, 문 안 열어 줘도 되겠어? 마탑에서 본대를 움직였다잖아.”
“예상했어.”
렌이 딱딱하게 대답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예상을 했다고 해서 이게 괜찮은 사안이 아니잖아……?”
“괜찮아. 나는 이제 공작이야. 마탑에서 나 못 건드려, 공주님.”
나도 모르게 표정을 굳히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확신해.”
“…….”
“마탑이라며. 애초에 미친놈들 아니야? 지금 쟤가 이 얘길 나한테 꺼낸 것 자체가 저 자식들이 앞뒤 생각 안 하고 눈 까뒤집고 너 찾으러 왔다는 소리잖아.”
렌이 싸늘해진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아니 지금 정색해야 할 게 누군데 앞에서 똥을 씹지?
“문 열어 봐. 저런 누가 봐도 심각하고 중요한 얘기 남들 다 듣게 문밖에서 떠들게 놔둘 순 없잖아.”
“싫어.”
렌이 살벌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그럼 저 문 내가 열어? 내가 나갈까? 난 들어야겠는데.”
“…….”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렌이 내 어깨를 제 손으로 꾹 눌렀다. 그리고 내 몸에 두른 담요를 더 빡빡하게 둘렀다.
그러자 끼이익, 소리와 함께 문이 다시 열렸다.
“다섯 발자국까지만 허락해 줄게.”
렌이 언제 정색했냐는 듯 미소를 지으며 레오닐에게 말했다.
레오닐은 짐짓 공포에 질린 사람처럼 몸을 경직시키며 조심스레 방 안으로 들어왔고, 정확히 그가 다섯 걸음을 내딛자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헛소리하면 죽일 거야.”
렌이 흉흉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웃는 얼굴로 짓씹듯 말했다. 물론 나는 그런 렌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진짜 죽이는 건 아니고. 공주님은 그런 거 싫어하니까.”
렌이 주먹을 꽉 쥐며 덧붙였다. 렌은 뭔가 불안해하고 있었다.
“적당히 하십시오, 마법사. 우리는…… 공주님을 따르는 것이지 당신의 명에 따를 이유가 없습니다.”
레오닐이 명백히 렌을 견제하는 투로 대꾸했고, 렌은 제 큰 덩치로 나를 완전히 가리며 대답했다.
“응. 나도 알아. 그래서 협박 중이잖아? 그런데 너희도 공포 제거술 같은 걸 받나? 겁이 없네.”
“…….”
아니, 얘는 나한테 뭘 숨기려 하는 거야, 아닌 거야? 제거술이라니. 단어만 들어도 뭔가 끔찍한 내막이 잠재하고 있을 것 같았다.
“마탑에서 마법사를 잡으러 올 것입니다. 구원자님.”
“정보 입수는 어떻게 했어?”
나는 렌의 바지춤을 뒤로 끌어당기며 물었다.
“마탑에 심어 놓은 저희 측 정보원이 있습니다.”
“아, 같은 마법사니까 그래도 잠입하기는 쉬운가 보네? 자신만만한 거 보면?”
“예. 마탑에서는 저희 집단의 존재에 대해서 모르니 정보원의 정보는 정확한 편입니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마탑에서 마법사를 죽이려 하는 이유도 알고 있습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런 폐쇄적인 집단이면 탈출했다고 죽이려고 드는 것도 딱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 입 닥쳐.”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는걸 마탑에서도 알고 있습니다. 차라리, 죽이지 못한다면 지금이 제일 적기라는 것도. 아직 작위를 받지 못하였으니까요.”
렌의 손가락이 꿈틀거렸고, 나는 반사적으로 렌의 두 손을 잡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감사합니다. 구원자님.”
레오닐이 식은땀을 잔뜩 흘리며 내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 말로 나는 방금 렌이 뭔가를 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렌, 일단 앉을래?”
“…….”
“괜찮아.”
렌의 표정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웃으려는 것 같기도 하고 정색하는 것 같기도 했다.
“쳐들어오기까지 얼마나 남았는데? 플로린스 측에서는 아나?”
내 물음에 레오닐이 대답했다.
“대규모 병력은 아닙니다.”
“본대라며.”
레오닐은 반사적으로 렌의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나를 쳐다보았다.
뭔가 망설이는 눈치였으나 금방 겁을 잔뜩 집어먹은 기색을 지우고 내게 말했다.
“인형, 커헉!”
“렌!”
렌의 눈이 검붉은색으로 타올랐다. 나도 모르게 겁을 집어먹었다. 레오닐의 몸은 각기 인형처럼 비틀린 채로 끈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바닥으로 픽 쓰러졌고, 렌은 미동도 없이 로봇처럼 아무런 표정도 담지 않은 채 가만히 전방만 쳐다보았다.
“무슨 인형? 마탑에 인형술사가 있나?”
순식간이었다. 렌은 자연스러운 명배우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뱉었다.
내가 렌과 초면이었다면 분명 음,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렌은 이상했다. 아니, 오히려 여기서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게 더 부자연스럽다는 걸 모르나?
“렌.”
나는 단호하게 렌을 불렀다. 그러자 렌이 보란 듯이 내 눈을 피하며 말했다.
“공주님 죽인 건 아니야. 그냥 헛소리를 하니까 거슬리네?”
“렌. 다시 생각해. 내가 뭐라고 할지 알고 있잖아.”
“…….”
렌의 표정이 마구잡이로 일그러졌다. 얼마 안 가 레오닐의 몸 위로 황금빛 시계 태엽이 떠올랐고, 곧 어렵지 않게 레오닐의 입에서 신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