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이게 맞나 싶었지만, 일단 대충 느껴지는 감상은, 렌은 내 질문을 회피하고 있었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거에 집착하고 있었다.
“아니, 내가 진짜 이해가, 야.”
“…….”
“상식적으로 여기 왕자가 애가 셋이야. 가능성이 있어 보여? 감히 질투라는 단어가 여기 붙을 수가 있어? 내가 대가리에 총 맞았니? 내가 뭐가 아쉬워서 삼십 대 유부남이랑, 아니. 진짜 또라이야?”
나는 정말이지 노력했다. 렌에게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화를 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저 인간이 내 성질을 건드리잖아!
이게 뭔 개똥 같은 사고 흐름이야?
“……공주님. 총이 뭐야?”
맥이 쭉 빠졌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 정신 나간 미남하고…….
“으응, 그래도……, 아무리 공주님이 그렇게 말해도 싫은 걸 어떡해?”
렌이 내 손가락을 잡고 끙끙거리며 거의 촉촉해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눈만 안 시뻘게졌으면 아마 홀랑 넘어갔을 것이다.
“난 싫어.”
나는 이를 악물었다가 최대한 인자하게 웃으며 물었다.
“왜 싫은데.”
렌이 대놓고 자존심 상한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뭔가 억울한 듯 정색까지 하더니 고개를 팩 돌려 버렸다.
“말하기 싫어.”
“그러니까 왜? 그걸 말해야 내가 해결을 해 주지. 렌.”
내 말에 렌이 짜증 난다는 듯 제 머리를 확 헝클이며 조금 날 선 어조로 대답했다.
“나도 왜 그런지 몰라. 그런데 내가 공주님한테 어떻게 설명해? 나는 내 감정이 어떤지 몰라. 다 흉내 내는 거란 말이야.”
렌이 따지듯이 내게 말했고, 나는 착잡해진 마음으로 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렌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그리고 꼭 자존심이라도 상한 사람처럼 씩씩대기 시작했다.
“공주님, 떨거지들 다 버려. 나도 해결 할 수 있어. 다치지만 않으면 되잖아.”
“그럼 내가 납득할 만한 구체적인 계획을 보여 줘.”
“…….”
내 말에 렌이 조금 섬뜩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물론 네가 나한테 거짓말 잘 안 하는 거 알아. 그런데 이상하게 내가 볼 때는 너, 은근 생각 안 하고 먼저 저지르는 것 같거든? 나는 너랑 다르게 능력도 없어서 너 잘못됐을 때 뒷감당 못 해 줘. 나는 그렇게 되기 싫어.”
렌은 내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내가 정곡을 찌른 것 같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바가 있으면 우리 계획을 세우자. 괜히 내 말 들어주려고 싫어 죽겠는데 자꾸 애쓰지 말고. 나도 말도 안 되는 의견을 내놓을 수 있고, 그 의견이 네 마음에 안 들면 맞춰 주는 네 기분만 나빠지잖아?”
그때였다. 렌이 뭔가 울컥한 얼굴로 나를 대뜸 노려보더니 곧 나를 덥석 안았다.
갑자기 가해진 압박에 미약한 통증을 느꼈지만 렌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어서 눈치껏 가만히 있었다.
“공주님 나 자존심 상해.”
“……뭐?”
“자존심, 자존심 상해. 그리고 공주님이 영영 몰랐으면 좋겠어.”
순간 뇌가 정지하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뭐가 부족해서? 자존심 상할 일이 어디 있는데……?
아니다. 공감해 줘야 한다. 공감이 전혀 안 됐지만 공감을 해야만…….
“공주님도 아무것도 없는 남자는 싫지?”
“사람에 따라 다르지……? 아무것도 없는데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이랑 아무것도 없지만 노력하는 사람이랑은 다르잖아?”
“…….”
아차 싶었다. 렌의 말이 살짝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싫냐고 굳이 물어본 걸 보면 그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본인인 것 같았다. 하긴, 여긴 신분제 제도가 살아 있으니까, 갑자기 왕도 한복판에 들어온 렌이 무슨 감정을 겪었을지 내가 너무 신경 쓰지 못했다.
괜히 죄책감이 물씬 일었다.
“신분 때문에 자존심 상했어?”
렌이 조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만 성공하면 사라질 신분이잖아. 왜?”
“……억울해. 빌어먹을 떨거지들이 공주님을 가지고 논 시나리오에 나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이유가 뭐겠어.”
순식간에 다시 분위기가 섬뜩해졌다. 렌은 진심으로 열받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문제의 렌의 감정을 그 빌어먹을 마법으로 확인하고 나서부터 이런 렌의 감정적 반응 하나하나가 와닿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지금 얘가 얼마나 나를 원하고 있는지, 나를 가지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선명하게 보였다.
당연히 부담스러웠다. 완전히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내가 무슨 팜므파탈 연애 초고수였으면 모르겠는데, 나는 완전 극 내성향 집순이에 남자 경험도 없다고!
아무튼 그런 이유로 내가 얘를 받아들이는 게 자연스러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얘는 무슨 벤츠도 아니고 똥차도 아니고 마법 양탄자인데, 그 누구도 마법 양탄자와의 연애 대처법을 내게 알려 준 적이 없다.
“왕이랑은…… 작위식에 대한 얘기만 했어. 마탑에 내 근황을 더 정확하게 알려 줘야 하니까.”
“그 얘기가 하기 싫었던 거야?”
내 말에 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 품에 파고들듯이 더 밀착했다.
“근데, 렌. 어차피 너 나 따라올 거면 신분 말고 다른 걸 걱정해야 할 텐데…….”
나를 따라온 렌이 눈앞에 펼쳐진 하드코어 자본주의 세상을 마주하고 어떤 충격을 받을지 벌써부터 좀 걱정이 됐다.
팔자 좋은 김칫국이지만.
“내 세계는 다른 거 필요 없고, 일단 돈이 많아야 편해.”
“…….”
렌이 다시금 푸른색으로 돌아온 눈을 깜빡이며 내 허리를 조몰락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렌의 잘생긴 얼굴에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뭔가 울 듯 말 듯한 촉촉한 눈으로 신경 쓰인다는 듯 입술을 축이고 있는 렌의 표정이 상당히 거슬렸기 때문이다.
하,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벌써 넘어간 게 확실하다.
사실 이곳에 오고 나서 계속 악몽만 꿨다.
부모님이 돌아가신다거나, 아니면 여섯 살로 돌아가 무인도에 홀로 버려져 날 두고 가는 부모님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수학여행을 갔을 때로 돌아가 친구들이랑 막 떠들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내가 귀신이었다든가.
아무도 날 못 알아봐 한참을 절망 속에 빠져 있다가 깨어나곤 했다.
그런데 망할 렌의 ‘그’! 차마 입에 담기도 민망한 사건 이후로 꿈 내용이 완전히 달라졌다.
본래 세상으로 돌아갔는데 사람들이 전부 오징어 탈을 쓰고 있고, 렌 혼자 고고히 빛났다.
나는 그날 이후로 꿈이 완전히 내 무의식을 반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내가 저 얼굴과 저 마음을 두고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
렌의 손이 슬금슬금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도 내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게 다 렌이 그 마법을 써서 제 감정을 내게 보여 줘 버린 탓이었다.
렌이 얼마나 나를 원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이해는 전혀 안 되는데 아무튼 내 상상 이상으로 렌은 날 원하고 있다.
“으응, 그리고 솔직히 나 여기 사람들이랑 좀 사상적으로 안 맞아서 관심 없,”
그때였다. 렌이 손을 내 옷 밖으로 꺼내 허리를 잡더니 나를 휙, 들어 올려 제 무릎에 앉혔다. 그리고 나는 완전히 입이 막혀 버렸다.
솔직히 말해서 이번에는 온전히 집중했다.
도대체 뭘 보고 온 건지, 아니면 아직은 손에 꼽을 수 있는 적은 입맞춤 경험으로도 뭘 터득한 건지 렌은 내 정신을 쏙 빼놓기에 아주 충분했다.
큰일이었다. 렌이 날 만지는 게 싫지 않다.
이렇게 칭얼대는 것도 싫지 않다.
어쩌면 좋지?
나도 모르게 렌의 목을 두 팔로 꼭 감싸 안았다.
그리고 엄마한테 안기는 것처럼 몸을 바싹 기댔다.
렌은 예상대로 따뜻했고, 렌과의 포옹은 이제 불안감보다는 편안함에 가까웠다. 물론 여전히 조금 부끄럽긴 했지만.
“하으, 공주, 님.”
“둘이 있을 때는 이름으로 부르면 안 돼?”
“…….”
입술이 수분감으로 촉촉했다. 나는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부끄럽단 말이야.”
“…….”
나는 밀려오는 쑥스러움에 잠깐 렌의 눈치를 보았다. 눈이 다시 붉어져 있었다. 아니, 조절 좀 하라니까.
“렌, 눈 변했어. 이거 정말 우리나라에서 들키면 끌려갈지도 몰라. 조심해야 한다니까?”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렌의 눈 밑을 엄지로 부드럽게 쓸었다.
속눈썹이 굉장히 길었다. 솔직히 말해서 여태까지 렌의 얼굴을 이렇게 유심히 쳐다본 적이 없었다.
뭔가 죄짓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흡!”
렌이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내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등을 쓸었다, 어깨를 만졌다가 부산스럽게 내 뒤통수를 단단히 고정시켰다.
“기분, 좋아, 좋아.”
렌이 내 입술을 혀로 핥으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렌의 등 뒤로 아지랑이 같은 황금빛이 피어올랐다.
저번에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경황이 없어서 바로 기절한 터라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더, 더 안아 줘.”
렌이 초점이 없어진 붉은 눈으로 내게 낮게 읊조렸다.
“나, 진짜가 갖고 싶어.”
등허리가 움찔거렸다.
“독점하고 싶어. 나 말고는 아무것도 신경 안 쓰게 하고 싶어.”
철컥.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영원히 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