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91/113)

<91>

“좋아. 나는 실수한 거 없어. 그렇지?”

내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최선을 다했다. 그래도 사람 사는 데 다 똑같고 내가 쌓아 온 데이터가 있는데 이 정도면 나름 훌륭한 계획이 아닐까 싶다.

나는 홀로 위로하듯 중얼거렸다.

“맞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름도 기억 안 나는 흑마법사 애들은 믿을 게 못 돼. 차라리 카일의 세력을 키워서 그쪽에 붙는 게 나아.”

그에 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공주님은 어차피 돌아갈 거잖아.”

“못 돌아가면 망하잖아. 예비책은 마련해 둬야지.”

내 말에 렌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님은 의외로 준비성이 철저하구나?”

“……나도 내가 이딴 입장이 아니었으면 이렇게까지 안 해. 지금도 충분히 머리 터질 것 같고 심적으로 힘들어.”

나는 축 늘어진 채로 렌의 팔에 머리를 툭 기댔다.

살짝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뭐……, 이미 관계 정리도 했겠다 이 정도 의지하는 건 괜찮지 않을까?

괜히 뭔가 양심에 찔려서 흘끗 렌을 올려다보니 렌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제 렌의 감정 반응에 대해 일일이 생각하는 것도 지쳤다. 도대체 내가 지금 뭐 했다고 저렇게 되는 건데?

“공주님 힘들어?”

“어? 어……, 뭐…….”

렌이 내 허리를 확 잡아당겨 제 품에 안았다. 당연히 나는 갑작스러운 행동에 왁!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고, 렌은 내가 비명을 지르거나 말거나 기쁨이 뚝뚝 묻어나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러게 내가 거기 신경 쓰지 말라고 했잖아. 나한테만 집중하면 공주님 머리 아플 일도 없는데.”

나는 가만히 싱글벙글 웃고 있는 렌을 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렌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가만히 있으면 어떡해? 그런다고 이 복잡한 상황이 해결돼?”

내 물음에 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상당히 상식 밖의 이야기를 아주 술술 내뱉었다.

“그냥 마탑을 부숴 버리면 될 일을 왜 돌아가?”

“…….”

나는 렌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었다.

“야. 그게 말이야 방구야. 뭘 부수긴 뭘 부숴. 전쟁이 애들 장난이야?”

렌은 내 손길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공주님이 하려는 것도 결국 전쟁 아니야?”

골이 띵했다.

“아니, 그 전쟁이야, 어차피 여기 사람들끼리 하는 거고, 네 말은 네가 직접 마탑에 쳐들어가서 박살 내겠다는 거잖아. 내 말이 틀려?”

“맞는데?”

“…….”

잠시 속이 터지려고 했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참았다.

“렌, 이제 나 네가 똑똑하고 센 것도 알겠는데, 네 목숨 귀하게 안 여기는 건 더 잘 알겠거든? 혼자 마탑 쳐들어가서 대충 팔 한두 개 날려 먹고 나 속 터지게 하려고?”

“으음.”

내 말에 반박할 수는 없는지 렌이 인상을 찌푸리고 신음을 내뱉었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성격이 급한 편인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말 안 했는데, 저번에 경계 밖에서 괴물한테 한 대 맞고 뻗었을 때 내가 얼마나!”

나는 갑자기 떠오른 섬뜩한 기억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땐 정말 렌이 죽는 줄 알았다.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최대한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아무튼, 비교적 안전한 길 놔두고 돌아가진 말자. 알았지?”

“공주님 빨리 집에 가고 싶은 거 아니었어?”

렌이 뚱하게 말하자 애써 진정했던 속에 화악 하고 불길이 붙는 기분이었다.

“……지금 꼴랑 집 빨리 가자고 남의 목숨을 갈아? 내가 미쳤니?”

“공주님은 너무 자비로워.”

아주 누가 보면 내가 세상에 없을 천사나 성녀 나부랭이인 줄 알겠다.

정신 똑바로 박혀 있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이게 당연한 거다! 심지어 내가 렌한테 뭘 더 바라면 그건 낯짝이 두껍다 못해 염치가 없는 거다.

그런데 얘는 도대체 날 뭘로 생각하는 거야?

나는 렌을 힘껏 째려보며 말했다.

“됐어. 말도 안 되는 생각 하지 말고, 나랑 같이 플로린스 왕자한테 뭐라고 말할지나 생각해 보자. 응?”

“꼭 그래야겠어? 그 사람은 시종일관 공주님을 처리할 생각뿐인걸?”

렌이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지운 채로 내게 말했다. 가끔 저런 식으로 말할 때면 좀 소름이 돋아서 큰일이다.

“렌, 표정 그렇게 짓지 마. 좀 무섭다.”

“응.”

와중에 말은 또 잘 들어서 골 때렸다. 뭔가 화가 나다가도 화낼 여지를 뿌리 뽑아 버린다고 해야 하나?

“내가 하란다고 곧이곧대로 하지도 말고.”

“…….”

렌이 뭐 어쩌라는 거냐는 듯이 날 쳐다보았다.

“그리고 왕자는 애초에 마법 때문에 그런 거잖아. 그리고 왕자 입장에서는 날 죽여야 하는 게 이론상 맞아.”

내 말에 렌의 표정이 대놓고 구겨졌다.

“그게 왜 맞아? 그럼 내 입장에서는 공주님을 죽이려고 하는 왕자를 당장 죽여야 하는 게 맞아.”

나는 멍하니 렌을 쳐다보았다.

“……그렇지. 맞는 말이긴 하지. 나 생각해 줘서 고맙다…….”

차마 저 말에 반박할 수 없다는 사실이 당황스럽기도 하고 렌의 아주 당당한 표현에 낯부끄러워지기도 했다.

나는 스스로 세뇌하듯 생각하기 시작했다.

익숙해져야만 한다. 익숙해져야 한다!

“나 왕자라는 말 자체가 싫어지려고 해.”

렌은 인상을 찌푸린 채로 복도 구석진 곳에서 내게 따지듯이 말하기 시작했다.

“공주님이 자꾸 걔들한테 신경 쓰는 것도 거슬리고, 또…….”

그러다가 렌이 잠깐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뭔가 혼란스러운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갑작스러운 정적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렌에게 물었다.

“또?”

“…….”

내 물음에 렌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뭔가 억울하다는 듯 마른침을 꿀꺽 삼키더니 덥석 내 옷자락을 세게 그러쥐었다.

뭐지?

“갑자기 왜 그래, 렌.”

“몰라.”

그리고 나를 꽉 끌어안았다.

“공주님 너무 착해. 진짜 마음에 안 들어.”

“렌, 제대로 말해야 내가 알지.”

렌은 그 큰 덩치로 내 품에 완전히 파고들면서 어린애처럼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다.

“나 안 버릴 거지? 데려갈 거지? 누가 또 공주님 구해 주면 나 버리고 갈 거 아니지?”

뜬금없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렌을 이해해 보려고 애쓰다가 곧, 살짝 떨리는 렌의 목소리에 마음이 착잡해졌다.

“렌, 나 봐 봐.”

“싫어.”

렌이 나를 더 세게 제 쪽으로 당기며 말했다. 그리고 나는 굳이 강요하지는 않았다. 렌의 체온이 살짝 뜨거워졌기 때문이다.

설마, 얘 울어? 갑자기?

내가 뭘 잘못했더라? 나는 아까 카일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전혀 짚이는 게 없었다.

설마 진짜 내가 자기한테 관심 안 가져 줘서 삐졌을…… 리는 없는데.

뭐지?

나는 아무튼 렌을 마주 안아 주며 렌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 이유가 뭔지 말해 줄 수 있어? 내가 뭐 잘못했어?”

렌이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다. 순간 쿵쾅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복도에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그 소리가 커질수록 렌의 팔에 실린 힘도 강해지기 시작했다.

진짜 뭐지?

“……나 안 버린다고 약속했어?”

“네가 물건이야? 버리고 말고가 어디 있어?”

내가 인상을 찌푸리고 말하자 렌이 드디어 내게 파묻었던 제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부끄럽다는 듯 커다란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는 몸을 잘게 떨었다.

그 덕에 나는 소매 사이로 삐쭉 내비치는 렌의 상처투성이 손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상당히 거슬렸다.

아마 렌의 이런 갑작스러운 행동의 변화도 저 상처와 연관이 있겠지?

도대체 그 마탑 놈들은 어떤 새끼들이길래……?

만약에라도 내 예상대로 렌이 마탑에서 내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수준의 실험을 당한 거라면…….

내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렌의 손목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자, 렌이 황급하게 제 소매로 손목을 가렸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내게서 떨어져 등 뒤로 양손을 휙 감춰 버렸다.

“음, 투정 안 부릴게.”

“왜? 괜찮아.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도 돼, 렌. 너랑 내가 그 정도도 못 할 사이는 아니잖아.”

나는 부러 더 다정하게 말했다.

“…….”

내 말에 렌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그러자 렌의 눈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뭐지 또? 어차피 렌의 눈에 변화가 있든 말든 크게 문제가 된 적은 없었기에 나는 말을 이었다.

“이런 말 조금 기만처럼 들릴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나만 너한테 의지하는 것보다는 너도 어느 정도 나한테 의지해 줬으면 좋겠어. 너무 받기만 하잖아.”

“…….”

“그러니까, 투정, 그으러니까, 뭐 그런 건 해도 된다고. 내가 그 정도도 못 받아 줄 정도로 쫌생이는 아니야. 너도 내가 약한 소리 하고 싫은 소리 해도 잘 받아 주는데 내가 못 받아 줄 이유가 없잖아.”

렌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고는 그대로 다리에 힘이라도 풀린 건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렌!”

당연히 나는 깜짝 놀라 렌을 붙잡았고, 렌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을 보다가 돌연 붉어진 눈으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개소리를 뱉었다.

“공주님 나 나쁜 생각이 자꾸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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