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
“우와, 공주님 손 되게 작다. 나는 큰데.”
“…….”
어색해 죽을 것 같았다. 우선, 카일과 만날 필요성을 느껴 자리를 마련했다.
“……공주님. 우선 성혼을 축하드립,”
“쟤 재미없지? 우리 나갈까?”
도대체 어디서 배워 온 개수작인지 정말 이쯤 되면 궁금해졌다. 그래도 이번에는 좀 근본이 있는 개수작이라 다행…… 인 건가?
나는 애써 웃는 얼굴로 렌의 허벅지를 주먹으로 쾅! 때렸다.
“렌, 내가 얌전히 있어 달라고 부탁했지?”
“아야.”
“안 아프잖아. 조용히 해.”
“응.”
다행히 렌은 얌전히 입을 닫았고, 나는 애써 평정심을 되찾고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일단 미안해요. 설명이 좀 늦었죠? 진작 따로 얘기했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상황이 이렇다 보니까…… 보나 마나 렌은 제 할 말만 찍 하고 간 것 같고.”
내 예상이 맞았는지 카일의 표정이 대놓고 구겨졌다. 그래도 전에는 표정 관리라도 하려고 애쓰는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그마저 포기한 모양이었다.
그만큼 나한테 불만이 많다는 얘기겠지?
“일단 말은 편하게 할게요. 이미 제 정체도 탄로 난 것 같으니까. 카일도 편하게,”
“안 되지. 공주님이 어떤 사람인데 쟤가 말을 편하게 해? 응?”
나?
나 그냥 대한민국 모범 시민 최창섭 유미라 딸램쓰인디……?
내가 황당한 얼굴로 렌을 쳐다보거나 말거나 그는 살벌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플로린스 대마법사의 목줄을 쥐고 있는 고귀한 분이잖아.”
“……내가 언제 너한테 목줄을 채웠어! 미, 미쳤니?”
순식간에 얼굴이 홧홧해졌다. 아무리, 내가 이성을 저버리고 선을 넘었다 하더라도 나는 진짜 아무 짓도 안 했다.
그리고 그제야 아차 싶었다. 미친 저거 관용구잖아. 내가 미쳤나 보다. 내가, 내가 진짜 미쳤어.
도대체 어디에 꽂힌 거야! 으악!
“……공주님.”
“아? 아, 네 하하. 잠깐 제가 잠을 요즘 못 자서 피곤한 모양이에요. 하하. 그리고 말 정말 편하게 해도 돼요. 하하……. 하하하.”
내가 눈에 띄게 당황하자 렌은 도대체 얘가 왜 이러나 하는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집요하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손을 뻗어 그런 렌의 얼굴을 멀리 치웠다.
“크흠, 아무튼 일이 이렇게 되었으나 다른 자들의 시선도 있으니 계속 공주님이라 칭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카일이 착잡한 얼굴로 대답했다.
“……마법사의 말대로 제 잘못도 있으니 편히 대하셔도 됩니다.”
“응응. 내 제안이 너한테 나쁠 게 없으니까 당연히 그렇게 나와야지. 공주님 쟤가 막 대단하게 착해서 저러는 건 아니다? 알지?”
렌이 빙글빙글 웃으며 내게 말했다. 뭔가 필사적이었다.
“공주님이 본인한테 대단한 호의를 베푼지도 모르고 눈을 저렇게 뜨는 걸 보니까 쟤는 글렀어. 정말 쟤가 능력이 있었다면 공주님을 나한테 빼앗…… 긴 게 아니지. 공주님은 원래부터 내 운명이었지.”
렌이 한껏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냉큼 끌어안았다. 그리고 나는 딱 부끄러워 죽을 것 같은 심정으로 렌에게 속삭였다.
“렌, 제발 때와 장소를 가리자. 응?”
“으음, 왜 그래야 하는지 물어보면 공주님 화낼 거지?”
“응.”
다행히 렌은 내 말을 비교적 굉장히 잘 들어주는 편이었기에 이번에도 순순히 물러났다.
나는 드디어 카일과의 대화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대화하기가 이렇게 힘들다.
“우선 흑마법사 조직에 관해서는 적당히 펜디엄 측에서 비위만 맞춰 주었으면 해요. 나는 걔들하고 깊게 엮이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내 말에 카일이 나름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마법사님께 전달받았습니다.”
“렌이 꽤 자세하게 얘기해 줬나 봐요?”
“……예.”
카일의 표정에 살짝 짜증 비슷한 게 떠올랐다. 아무래도 전달 과정에서 속을 박박 긁어 놓은 모양이었다.
“아무튼, 뭐……, 솔직히 따지고 보면 플로린스의 유일한 후계자가 그다지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더라구요. 그리고 펜디엄 측도 불안불안한 세력인 흑마법사 측보다는 플로린스의 손을 잡는 게 더 나은 판단이 아닐까 싶어요.”
내 말에 카일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그러다 흑마법사 측에 제 행보가 들킨다면 공주님께 걸린 주술을 풀어 버릴지도 모르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공주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펜디엄의 백성들을 구제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굴 수밖에 없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나는 의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나 살기도 바쁜데 쟤한테 신경 쓰는 이유가 그거니까.
이쯤 되면 슬슬 내가 호구같이 느껴진다.
렌의 말이 다 맞는 것 같다. 나 호구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이론적으로 움직이는 것만은 또 아니라 문제였다.
“왕자가 구미가 당길 만한 미끼를 던져 줘야죠. 그리고 야망도 불어넣어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공략할 건 왕자가 아니라 왕이죠. 제국이 마법을 독점한다는 사실은 다 알고 있잖아요? 플로린스는 지금 마법이 필요한 상태이고.”
대충 이 대륙의 국제 정세를 보자면 이러하다.
플로린스와 제국의 거리는 꽤 멀지만 현재 제국은 정복 전쟁 중이다.
그러니 솔직히 말해서 플로린스가 쫄리겠는가 안 쫄리겠는가.
플로린스가 제2 패권 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풍요로운 땅과 상대적으로 제국과 멀리 떨어진 위치. 그리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반도 국가이기 때문에 무역에 굉장히 유리하다.
식료 수급도 원활하고 국민 평균 소득도 제국보다 월등하게 높다.
아니 대체 그러면 왜 플로린스가 제1 패권 국가가 아니냐고? 제국보다 여러 방면으로 뛰어난데?
이유는 단순했다.
마법의 부재.
마법은 지구로 따지면 생화학무기, 미사일, 최첨단 무기나 다름이 없었다. 즉, 고도의 과학 기술이다 이 말이다.
그런 마법을 소유할 수 없으니 플로린스가 국방력 방면으로 제국에게 밀리는 건 당연했다.
“렌의 말대로 마탑을 해방시킬 생각이에요. 다른 말로 부순다?”
“…….”
카일의 표정이 뭔 개소리냐는 듯 구겨졌다.
“보니까 마탑도 지어진 지 꽤 오래됐단 말이에요? 분명히 그 시스템적인 문제에 대해 불만을 가진 사람은 있을 거고, 현 마탑주에 대한 불만을 가진 사람도 있을 거예요. 없는 건 말도 안 돼. 마법으로 세뇌라도 하지 않은 이상.”
내 말에 옆에서 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응, 마탑주한테 반항하면 다 죽어.”
“…….”
아니 무슨 그런 얘기를 점심 메뉴 말하듯이 산뜻하게 하니?
“크흠, 아무튼 방금 렌이 한 얘기를 보면 내부 반발을 공포정치로 억누르는 것 같아요. 어떻게 잘 접근해서 분열시켜 봐야죠. 공포가 오래되면 그래도 혁명가 한 명쯤은 언젠간 나온단 말이죠? 물론 금방 죽겠지만, 그거야 안 죽게 만들면 그만이니까.”
“꽤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느껴집니다만.”
카일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뜬구름 잡는 얘기죠. 그래도 그냥 여기 앉아서 머리만 싸매고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그럴듯한 해결책이 나온 데 의의를 둬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이렇게 나랑 상관도 없는 펜디엄의 왕자님한테 신경 써 주고 있는데?”
내 말에 카일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솔직하게 말할게요. 그런다고 믿겠냐마는……, 카일 경이 날 이용해 먹으려던 건 사실이지만, 저 그렇게 카일 경 싫어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공감이 된다고 해야 하나?”
“…….”
“제가 살던 나라도 비슷한 역사가 있었거든요. 뭐, 내가 겪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신경이 안 쓰이려야 안 쓰일 수가 없네요. 무엇보다 내 입장에서 카일 경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나으니까? 그래도 내 정체를 아는 아군, 비슷한 거잖아요?”
내 말에 카일이 표정을 갈무리하고 특유의 동요 없는 표정으로 답했다.
“정확히는 인질입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긴 했죠. 일이 잘 해결되면 풀어 줄 겁니다. 그렇지, 렌?”
내 말에 렌이 무슨 신종 헛소리냐는 듯 나를 뚱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렌?”
“공주님이 원하면 해 줄게. 나는 공주님 남편이니까.”
남편이라는 부분에서 발음을 강조하는 걸 보니까 지금 자기 위치가 좋긴 좋은 모양이었다.
방금까지 세상 불만이라는 불만을 다 모은 사람처럼 뚱하니 있더니 갑자기 표정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도대체 내가 왜 좋은 건지 미친 듯이 궁금해졌다.
네가 날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왜? 아니, 내가 뭐 했다고?
“들었죠?”
“……들었습니다.”
렌이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내 머리에 제 뺨을 도리도리 비볐다. 카일은 그런 렌을 썩은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나는 그냥 늘 그렇듯 어색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아무튼 펜디엄은 플로린스가 제국을 칠 명분이 될 겁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카일 경, 아니지. 왕자님 측에서 힘을 써 주셔야 해요. 플로린스 혼자 펜디엄을 돕겠다고 나대기엔, 그림이 좀 이상하잖아요?”
내 말에 카일이 조금 놀란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렌. 지도 좀.”
“응.”
렌이 손가락을 휙 허공에 휘두르자 홀로그램처럼 생긴 지도가 펼쳐졌다.
나는 플로린스와 제국 사이에 있는 몇 개의 왕국들을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렌카스, 마일렌, 드라인, 포르탄. 그리고 플로린스. 이렇게 생각 중이에요. 왕자님도 알다시피 펜디엄은 꽤 전략적 요충지잖아요? 왕자님을 도울 이유는 충분할 겁니다. 플로린스와 달리 저 왕국들은 당장 제국의 압박을 계속 버텨야 하는 상태이니까요.”
“…….”
“저들도 충분히 동맹을 맺고 싶어 할 겁니다. 여태까지 동맹을 형성하지 못한 이유는 하나죠. 자기들끼리 동맹을 맺자마자 제국에서 쳐들어올 게 뻔하니까. 어차피 그들끼리 동맹을 맺는다고 해도, 국방력으로는 제국을 조금 귀찮게 할 뿐이지 상대도 안 될 테니까요. 하지만 여기 플로린스가 끼면 말이 달라지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