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113)

<88>

‘렌.’ ‘렌!’ ‘미친, 렌!’ ‘렌?’ ‘레에엔…….’ ‘응? 렌.’

순식간에 심장을 누가 주먹으로 치는 것처럼 쿵쿵 이상한 감정이 흘러 들어왔다. 그 와중에 금발, 초록 눈의 셀카 앱 보정 떡칠한 것만 같은, 내 입장에서는 딱 봐도 기괴할 정도로 뽀샤시한 내가 세상 미화된 얼굴로 렌을 끊임없이 부르고 있었다.

아니, 내가 저렇게 생겼다고? 말도 안 돼! 얘는 도대체 날 뭐로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애당초 자기감정을 보여 주는 마법이라니 이 뭔…… 말도 안 되는!

덕분에 나는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렌이 나 같은 사람을 처음 봐서 착각하는 거라고?

도대체 착각을 어떻게 하면 이딴…….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뭔가,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진액처럼 끈적거리기도 하고 상큼하기도 한 이 기괴한 감정을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렌의 시각에서 본 나는 정말 연예인 뺨 후려치는 초절정 미인이었다. 절대 자화자찬이 아니다!

어쩐지 눈깔 색이 휙휙 바뀌더라. 시각에 문제가 있는 게 틀림이 없다!

게다가, 아무리 내가 렌이 날 좋아한다는 말에 심드렁하다고 해도, 제 속을 있는 그대로 다 보여 준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다니. 이놈은 미친 게 틀림없다.

만약 내가 아니었다면 다들 지레 겁먹고 도망갔을 거다. 정말이다.

나는 그래도 렌을 이해하니까 넘어가 줄 수 있는 거다.

“진짜 나한테 왜 그래…….”

“으응, 공주님 이제 대답해 줄거야?”

나는 입술을 꾹 다문 채로 렌을 째려보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렌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어차피 맷집이 좋아서 내가 등짝 좀 때린다고 안 아파할 거 훤히 아니까.

“내가 나한테 함부로 마법 쓰지 말랬지!”

“아야.”

“아야 같은 소리 하고 있어! 너 진짜 배려 없었어. 내가 화낼 거란 거 알고 있지? 응?”

나는 렌의 머리를 헝클이던 걸 그만두고 놈의 양 뺨을 꼬집어 마구 늘려 주었다.

쓸데없이 잘생겨서 사람 심란하게 만들고!

“대답 안 해?”

“……공주님이, 공주님이 안 믿어 주잖아! 착각 아니란 말이야. 공주님 왜 나한테 멀어지려고 해?”

나는 렌의 뺨을 꼬집는 걸 멈추고 눈썹을 쓱 들어 올리며 대꾸했다.

“이게 멀어진 거야?”

그리고 나와 렌의 사이를 가리켰다.

“이렇게 앞섶 다 풀어 재끼고 나한테 달려든 게 멀어진 거라고?”

“…….”

그에 렌이 내게서 시선을 쓰윽 돌렸다. 제가 말해도 억지인 걸 알긴 하나 보지?

“나 똑바로 안 쳐다봐?”

“흐응.”

렌이 입술을 꼭 다물고 어물쩍 웃어 보였다. 얼씨구, 이제 얼굴로 떼워?

“야. 뭘 잘했다고 웃어.”

“음, 미안해?”

“미안하면 다야? 응? 미안하면 다냐고 이 화상아!”

나는 다시 렌의 뺨을 잡고 마구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어? 내가 아무리 행동이 모호했다고는 하지만 사람을 이렇게 다짜고짜 덮치는 게 어디 있어!”

내 말에 렌이 뭔가 불만을 가득 담은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한참 전부터 예고했는데…….”

“내가 대답 안 했잖아!”

그리고 볼에 바람을 넣고는 내 시선을 피했다.

“어디서 덩치는 산만 한 게 귀여운 척이야. 입술 안 집어넣어?”

“공주님 나 귀여워?”

“…….”

렌이 금방 화색이 되어 특유의 반짝거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제 허리를 내게 바짝 붙힌 채 몸을 비비적거리기 시작했다.

이래 놓고 멀어지긴 개뿔이 멀어져!

“으응, 귀엽구나? 그런데 나는 멋있는 건데?”

“……렌, 네 입으로는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왜?”

설명하기를 포기했다. 내가 기진맥진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기가 무섭게 렌이 입을 대뜸 벌리며 내게 다가왔다. 저건 또 뭔 개짓거리…….

“…….”

“…….”

앙.

렌이 내 뺨을 물었다. 멘탈이 터질 것 같았다.

“뽀뽀는 안 되니까? 어라? 공주님?”

나는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술, 술. 나 술…… 필요해.”

“술? 술은 왜?”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못 버티겠으니까! 도저히!

“으음……, 공주님 술에 의존하는 건 좋지 못한 선택이야. 나는 공주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맨정신이었으면 좋겠어. 그래야 나를 똑바로 보잖아?”

“허, 허어.”

말이 안 나왔다. 그냥 말문이 턱 막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렌은 두 볼을 발그레 붉히고는 흥분한 듯 손을 쉴 새 없이 쥐락 펴락 하기 시작했다.

***

“공주님, 조금만 더 있다 가면 안 돼?”

“조용히 해…….”

“나 아직 쌩쌩한데? 공주님 포션 마실래?”

나는 렌의 입을 기어코 틀어막고 내 희망찬 미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금 창문 밖에서 비치는 햇빛이 비록 어제의 것은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희망차게 생각하기로 했다……. 희망찬 거 맞겠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긍정적으로.

그래, 나는 일반인이었고, 렌은 웬만해서는 거절할 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렌에 대해서 다시 한번 깊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객관적으로 렌은 잘생겼고, 또 성격적으로 봐도 내 기준에서 조금 생각하는 걸 따라가기 힘들 뿐이지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날 생각해 주는 것도 그렇고. 솔직히 이런 상황이 아니라 평화로운 내 세계에서 처음 만났다면 충분히 재밌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렇게 된 이상, 나는 이놈을 책임져야 했다.

이미 결심하고 일을 벌인 거 아니야?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너, 자세히 말해. 나 따라오는 거 그거 어떻게 하는 거야.”

“비밀이라니까?”

렌은 내가 다른 얘기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고개를 팩 돌렸다. 그리고 다시금 내 팔을 꼭 껴안고 내 어깨에 제 뺨을 비비기 시작했다.

“비밀, 안 알려 줄 거야. 이건 계약 조건에 없어. 안 알려 줘도 돼.”

그러고는 커다란 손으로 내 팔을 열심히 조몰락대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머리를 싸매고 상당히 희망적인 고민에 빠졌다.

얘를 데려가면 도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남자친구?

국적은? 얘 외모는? 외모야 대충 혼혈이라고 하면 되겠지만 애초에 신분증이 없잖아!

한국에서 대충 흥신소 같은 데 찾아가면 불법 체류자도 신분 만들어 주나? 근데 나한테 위조 신분 만들 만한 돈은 있고?

애초에 마법 썼다가 들켜서 나사 같은데 잡혀가서 해부당하는 거 아니야?

내가 인맥이 있던가? 그거 막아 줄 수 있나?

어른한테 부탁해? 아빠? 우리 아빠 인맥이 도대체 어디까지 있지? 나 잘 모르는데? 그러면 아빠한테 얘가 불법 체류자라는 사실을 밝혀야 하는, 아니 그 전에 마법사라는 걸 밝혀야 하는데 괜찮을까?

“렌, 나는 이제 더 이상 뭐가 더 중요한 건지 잘 모르겠어.”

“왜 몰라? 나잖아.”

렌이 반짝반짝 빛나는 얼굴로 당당하게 자신을 가리켰다.

누구는 기절하기 일보 직전인데 쟤는 뭔데 왜 이렇게 반질반질하냐.

“……자꾸 물어봐서 미안한데 확실히 따라올 수 있는 거지? 응?”

“코어만 손에 넣으면?”

렌이 애매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활짝 웃었다. 그리고 강아지처럼 또 내게 달려들어 내 뺨에 제 입술을 마구 찍어 눌렀다.

“공주님 나 지금 기분이 너무 좋아.”

“그런 기분 좋음 혼자 속마음으로 간직해 줄래? 나 조금 심란해…….”

“공주님 아직도 부끄러워?”

렌이 너무너무 행복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으니까 나도 모르게 도로 눕고 싶어졌다.

솔직히 지구로 따지면 중국 주석 딸이 초능력자 하나 데리고 미국 뒤통수 후려서 구글 폭파시키고 알파고 빼 오겠다는 상황이나 다름없는데 그냥 포기하고 얘랑 이러고 살…….

아니지. 내가 미쳤나 보다.

“렌, 우리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네가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정말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고.”

“이러고 있는 게 뭔데? 어차피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없는걸?”

렌은 여전히 아무 걱정 없는 얼굴로 빙글빙글 웃으며 내게 말했다.

“음,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마, 공주님. 어차피 놈들도 슬슬 움직일 때가 됐으니까.”

그러고는 다정하게 내 입술에 입 맞춰 주었다.

“공주님 말대로 왕자는 만나 봤어. 공주님이 왜 왕자를 좋게 평가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뭐, 여기 왕족치고는 딱 교본에서 말하는 왕족 같더라고?”

렌은 뭔가 고민하는 눈치로 눈을 도르륵 굴렸다. 여전히 렌의 눈은 붉은색이었다. 도저히 가라앉을 기색이 안 보인다. 저거 괜찮은 거 맞겠지?

워낙 기이한 짓을 많이 벌이니까 조금만 애 상태가 이상해져도 걱정되어서 돌아 버리겠다.

“공주님은 그냥 원하는 것만 말해. 그럼 내가 다 들어줄게. 나는 공주님의 남편이잖아?”

“…….”

렌의 말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대사가 마법사에서 남편으로 진화됐다. 미친. 그래 놓고 옆에서 자기가 뱉은 말이 못내 좋은지 몸을 배배 꼬며 행복해하는 렌을 보자니 굳이 딴지를 걸어야 할까 라는 생각이 물씬 들었다.

하지만 나는 렌을 책임지기 위해서라도 딴지를 걸어야만 했다.

“냉정히 말해서 남편은 아니지. 희망적인 가정이긴 한데, 혹시 나중에 돌아가서…… 누가 물어보면 남자친구라고 해.”

“내가 왜 공주님 친구야?”

렌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었다. 얼씨구? 친구랑 남자랑 뭐가 다른지는 또 알아? 선택적 상식이야, 아니면 그동안 새로 습득한 지식이야?

“애인을 그렇게 부르기로 했어. 사회적 약속이니까 표정 풀어.”

“애인? 공주님은 나랑 결혼하기로 했잖아!”

“응, 여기 왕보다 우리 엄마 아빠가 더 엄격해서 무턱대고 결혼하자고 들이박으면 절대 못 해. 나는 나름 현실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거라고. 알았어, 렌?”

렌은 무슨 그런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있냐는 듯 절망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렌의 뒤통수를 쓱쓱 쓸어 주었다.

“따라오겠다면서? 내가 그랬지, 내 세계도 만만치 않다고. 너 나 따라올 거면 적어도 내 세계가 어떻게 굴러가는 건지는 대충 알아야지. 안 그래?”

나는 최대한 다정하게 렌에게 말했다. 그러자 렌은 대충 납득이 되었는지 눈썹을 축 늘어뜨린 채로 내게 폭탄을 던졌다.

“그럼 아기 생기면 어떡해? 그래도 3년 기다려야 해? 본신으로 하면 생길 텐데.”

“…….”

“3년 동안 나 공주님 못 만져?”

“…….”

“으응, 나 못 참는데. 안 되는데…….”

나는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엄마, 미안해.

엄마 딸, 좀 미친놈한테 잘못 걸린 것 같아. 도대체 어떻게 하면 지금 이 타이밍에 그런 소리가 튀어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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