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반항하긴 했지만 해결했어. 공주님. 왕자도 주제 파악은 잘하나 봐.”
렌이 내 발치에 무릎을 꿇은 채 내 손에 제 뺨을 비비며 말했다.
“어느 왕자.”
“평민.”
“…….”
할 말이 없었다. 애초에 왕이 나와 렌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알겠다. 렌은 누가 봐도 수상했으니까. 렌이 뒤에서 나랑 작당하고 무슨 개수작을 부릴지 모르지.
플로린스는 마법사가 필요한 국가였고, 그런 렌을 붙잡기 위해 거래해야 할 사항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을 거다.
그 와중에 렌이 갑자기 다 귀찮다는 핑계로 나를 납치해서 왕국을 떠 버리면 플로린스 입장에서는 굉장히 곤란해지니까.
렌은 몸을 열심히 들썩이며 내게 붙지 못해 안달이었다. 아주 온몸으로 좋아한다고 티를 낼 작정인가 보다.
물론 렌의 개수작은 아주 효과가 좋았다.
사실 렌이 하는 개수작은 전부 의도가 다분히 보이는 게 특징이었다.
예를 들어, 거의 헐벗고 내 방 창문을 넘어온다던가, 대뜸 등에 무지개 빛깔로 빛나는, 아. 단순 묘사가 아니다. 진짜 빛났다. 진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아무튼 무지개 빛깔로 빛나는 장미를 거의 한 가마 이고 온다던가.
정말 의도가 투명한 개수작을 내게 던지며 육체 공격을 끊임없이 했는데, 내 어물쩍한 태도 때문인지는 몰라도 렌은 이런 태도를 고수했다.
“공주님 아직 나 온 지 십오 분밖에 안 됐는데? 왜 그런 눈으로 봐?”
“……아니, 그냥 대단하다 싶어서.”
나는 얼굴을 들이미는 렌을 밀며 툭 터진 앞섶을 여며 주었다. 마법사라며 가슴은 왜 까고 다니는데!
“공주님 나 더워.”
“지금 가을이야.”
나는 렌의 구라를 깔끔하게 무시하며 방문이 완전히 닫혔는지 확인했다.
음, 이쯤이면 됐다.
“카일은 언제 호위로 들어온대?”
“공주님은 그게 궁금해? 내가 공주님 앞에 있는데?”
렌이 대놓고 불만스러운 얼굴로 내게 말했고,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렌을 째려봐 주었다.
그러자 렌이 입을 삐쭉 내밀며 내가 원하는 답을 내놓았다.
“공주님하고 결혼하면. 간단한 인사권 정도는 나한테 준대.”
“플로린스 왕자 얘긴 꺼냈어?”
내 말에 렌의 표정이 확 굳었다. 요즘 따라 내가 곤란한 질문만 하면 저렇게 정색을 한다. 남들 앞에서는 표정 관리 잘하는 것 같은데 왜 굳이 내 앞에서만 솔직해지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렌, 눈 색 변했어. 너 그거 들키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나는 렌의 뺨을 한 손으로 잡으며 말했다. 또 무슨 감정의 변화가 있었는지 눈이 보랏빛으로 변했다.
도대체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거람.
여태까지 관찰해 온 결과 렌의 눈은, 급격한 흥분 상태에선 붉은색, 평온한 상태에선 푸른색, 중간이라면 보라색. 이런 느낌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조절이 잘 안 되는 걸 어떡해.”
“그래도 조절하려는 시도는 해 봐. 내 앞에서는 상관없는데, 이젠 얼굴도 팔렸는데 조심해야지. 응?”
내가 엄지손가락으로 렌의 눈 밑을 문지르자 렌이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숨을 얌전히 몰아쉬었다.
그리고 다시 푸르러진 눈으로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왕자 얘기는 꺼냈어. 그놈도 어느 정도 동의는 하는 모양이던데? 아무래도 정체 모를 흑마법사 집단보다는 플로린스 왕자가 낫지.”
“카일한테 설명은 제대로 한 거 맞아? 내 사정이라든가, 그런 거. 또 통보만 한 거 아니지?”
“으음, 공주님은 나한테 너무 많은 걸 바란단 말이야.”
내 말에 렌이 대놓고 불만스럽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에 나도 지지 않고 짜게 식은 눈으로 붙잡고 있던 렌의 뺨을 놓아 버렸다. 내가 그럴 줄 알았지.
“사람 좀 친절하게 대하라는 게 어떻게 많은 걸 바라는 거야? 할 수 있잖아. 렌.”
“으으응.”
렌이 괴롭다는 듯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리고 돌연 침대 위로 펄쩍 올라와서 두 팔로 나를 꽉 껴안고 애교라도 부리듯 칭얼대기 시작했다.
“공주님은 불쌍한 사람이 좋아?”
나는 가만히 렌의 잘난 얼굴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말이 그렇게 되는 거지?
“불쌍한 사람이 좋은 게 아니라, 불쌍하니까 마음이 쓰이는 거지, 렌. ‘불쌍하다’의 사전적 의미를 생각해 볼래?”
내 말에 렌은 나를 제 품에 가둔 채로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그리고 순진한 척 눈만 깜빡였다.
“음, 납득했어. 그래도 마음에 안 드는 건 안 드는 거야.”
그러고는 돌연 내 말투를 흉내 내는 게 아니겠는가?
살짝 어이가 없어졌다.
“너 지금 플로린스 쪽 왕자도 몰래 만나야 하는 건 알지?”
“당연하지. 공주님이 왜 갑자기 계획을 바꿨는지는 모르겠지만 눈에 안 띄기로 다짐한 거 아니야?”
렌의 말이 맞았다. 지금 내 계획은 완전히 엎어졌다. 렌이 쓸데없이 눈에 굉장히 띄는 덕분에 괜히 나까지 나댔다가 역효과만 일어날 것 같았으니까 말이다.
본격적으로 좀 나대려면 아무래도 타이밍을 좀 봐야 했다.
“내가 공주님의 방패 할게. 나는 공주님 마법사니까! 겸사겸사 왕자한테도 공주님 건드리면 죽여 버릴 테니까 대가리 간수 잘,”
“렌.”
“……알았어. 친절하고, 귀족처럼 우아하게 대화하고 올게. 이런 대답 원한 거 맞지, 공주님?”
나는 조금 몸을 꼼지락거리며 렌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아무리 현실감이 없어 와닿지 않는다고 해도, 렌의 스킨십을 덤덤하게 당하고 있을 자신은 없었다.
왜인지는 몰라도 나는 렌이 꺼려졌으니까.
렌이 싫은 건 아니었다. 정말로. 오히려 그 반대지.
당장이라도 렌이 날 침대에 눕히고 그 위로 올라온다면 나는 반항할 자신이 없다.
그만큼 렌은 매력적이었으니까.
……잠깐만, 그래서 그런가? 나 잘생긴 사람 공포증 있니?
“공주님, 어디가 아직 한 시간도 안 됐어. 나 아직 갈 때 아니잖아. 내가 예쁘게 말 안 해서 그래?”
“……애초에 내가 내 방에 몰래 머물러도 되는 시간을 정해 준 적이 없는 걸로 아는데?”
“공주님 세 시간까지는 봐주는 거 아니야?”
나는 그냥 픽 웃으면서 렌의 뺨을 꼬집었다. 쓸데없이 귀엽…….
아니지. 정신줄 똑바로 잡자! 나는 아직 쟬 책임질 준비가 되지 않았어!
그래그래. 나는 아직 어리고, 솔직히 여기 기준으로는 벌써 애 셋은 낳아야 할 나이지만, 내 기준으로 지금 결혼하면 미쳤단 소리 듣기 딱 좋으니까…….
염병.
철벽이 잘 안 쳐진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내가 렌에게 벽을 세우는 이유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나는 돌아갈 사람이고, 이곳의 사람에게 정을 준다는 의미는, 내가 이곳에 머무를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만들어 버리는 거나 다름이 없으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런 사고방식 덕분에 렌이 나를 따라온다는 폭탄선언 이후로 벽을 쳐야 할 이유마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거였다.
솔직히 객관적으로, 좀 로맨틱하잖아? 마법사 남자친구…… 가 아니라 이 경우에는 바로 남편이지.
이게 맞…… 아?
맞는 거야? 응?
렌은 내 표정 변화를 기가 막히게 눈치채고 내게 냉큼 다가왔다. 그리고 뚫어져라 내 입술을 쳐다보았다.
의도가 아주 다분한 시선이었다.
그런데 또 내가 저번에 싫다고 하니 입은 기어코 안 맞추는 걸 기특하다고 해야 할지…….
“결혼식까지 이틀 남았어. 이러지 마.”
“왜? 공주님, 그러니까 이제 나 뽀뽀 정도는 하게 해 주면 안 되는 거야? 이틀밖에 안 남았잖아. 그 정도는 미리미리 연습해 둬야지, 공주님.”
“…….”
정신이……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다. 정말.
원래 깜빡이 안 켜고 들이박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이럴 때면 정말 정신이 혼미해진다.
“으응, 절대로 내가 나쁜 마음을 먹어서가 아니라 이제 공주님 남편이 될 텐데 공주님하고 아무것도 안 하면 다른 사람이 보기에 이상하잖아? 그리고 진짜 공주님이랑 결혼하려면 이 기회에 더더욱 연습해 보는 게 좋아. 원래 능숙한 걸 더 좋아한대.”
렌의 말에 머릿속이 싸늘해졌다. 쟤가 진짜, 미친 건가?
“뭐,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저리 안 가?”
내가 기겁하며 화들짝 놀라자, 렌은 순간 입을 딱 다물었다. 그러고는 새파란 눈을 번뜩이며 말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에 나는 궁지에 몰린 쥐처럼 침대 헤드로 뒷걸음질 치듯 달아났고, 렌은 그런 나를 보며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공주님, 나 공부 다 했어.”
“…….”
머릿속에 빨간색 경고등이 켜졌다.
“이틀 뒤에는 나 이제 공주님 방에서 잔다? 여기 법이 그래. 공주님 정말 괜찮겠어?”
할 말이 없었다. 뒤에 이어질 말이…… 어쩐지 예상이 가서.
렌이 내가 알던 일반적인 남자라면 그가 어떤 말을 할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렌은 일반적이지 않다. 아주 직설적이고, 솔직하다. 쓸데없이.
“음, 나는 연기는 확실할수록 좋다고 생각해, 공주님. 만약에 결혼식 후에도 지금과 같으면 분명 사람들은 공주님과 내 관계에 대해서 의심할 거야. 지금 시기에 그런 의심을 받아 버리면 공주님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게 분명해.”
그때였다. 렌이 눈을 번뜩이더니 곧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냅다 내 몸 위로 완전히 올라탔다.
“그리고 나도 미리미리 연습해 둬야 진짜 공주님을 봤을 때 당황하지 않을 수 있어.”
렌이 한없이 진지해져 버린 얼굴로 내 위에 올라탄 채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당연히 이번에도 나는 숨조차 쉬지 못하고 눈만 크게 뜬 채로 렌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첫날밤 전에 뽀뽀는 하게 해 주면 안 돼?”
렌이 아주아주 애처롭게 나를 바라보았다.
“응? 이렇게 빌게, 공주님.”
“…….”
“공주니이임.”
나는 필사적으로 렌의 벌어진 앞섶을 닫았다. 얘가 미쳤나 봐. 야밤에 왜 이딴 옷을 처입고 와서 교태를 부리니!
“내, 내가 살다 살다,”
“공주님 빨리 허락해 줘. ……오래 참았는데, 나 되게 얌전히 있었는데…….”
“렌, 제발 좀!”
나는 렌의 주둥이를 냅다 잡아 버렸다. 진짜, 내가 제 명에 못 살겠다. 도대체 어떤 인간이 플러팅을 이딴 식으로, 허! 허어어!
그때였다. 렌이 제 주둥이를 잡고 있는 내 손목을 확 낚아채서는 내 손바닥에 제 입술을 찍어 눌렀다.
“공주님 허락해 주면 나 엄청 친절하게 굴 수 있어. 내가 그 빌어먹을 평민 왕자랑도 안 싸울게! 당분간만!”
도대체 당분간만 안 싸운다는 건 또 뭔 말이야, 제발…….
“그러니까, 렌. 나,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나 공부 진짜 열심히 했어. 공주님도 기분 좋을걸?”
그리고 보란 듯이 새빨간 혀를 빼꼼 내밀었다.
“…….”
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공주님?”
“나가.”
“…….”
그리고 휘둘렀다.
“당장 나가, 미친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