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그래서, 나는 너희들이 만들어 놓은 각본대로 결혼 전까지는 방에 갇혀 있어야 한다?”
“죄송합니다. 구원자님.”
내 질문에 꼬박꼬박 존칭을 사용하면서도 기계처럼 죄송하다는 말만 내뱉는 모습이 기가 찼다. 아니, 어차피 거절할 거면서 뭘 그렇게 공손하고 순종적인 척이야?
벌써 삼 일째였다. 결혼을 준비한다는 이유로 나는 내내 방에 갇혀 패션쇼를 해야만 했고, 그나마 있는 자유 시간에는 이 몸의 가짜 엄마를 만나 극적인 재회의 티타임을 가져야만 했다.
문제의 왕자 얼굴은 코빼기도 못 봤다.
처음 왕궁에 당도해 왕과 왕비를 알현할 당시, 그 자리에 있었다는데 안타깝게도 나는 그때 렌에게 집중하느라 못 봤다. 렌이 신경 쓰이긴 더럽게 신경 쓰였나 보다. 렌의 그 태연한 얼굴 말고 아무것도 기억 안 나는 거 보면.
와중에 렌은 내가 갇혀 있는 동안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건지 내가 두리뭉실하게 말했던 것들을 착착 진행시켜서 내 방문으로 떠밀었다.
나는 조금 복잡한 심정으로 전에 렌의 돈을 뜯어 넘겨주며 플로린스로 보내 놓았던 아이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공주의 시종으로 들어간다고 때 빼고 광을 냈는지 반짝반짝, 아이들의 눈에서 선망과 호의가 가득 담긴 광선이 쏘아지는 것만 같았다.
“오랜만이구나. 란, 제임스, 내가 시킨 건 해 놨니?”
내 말에 구면인 둘은 눈을 크게 뜨고 눈물을 그렁그렁 내비치며 말했다.
“고, 공주님 저희 이름을 기억해 주시는 건가요?”
“역시 내가 공주님한테 붙길 잘했다고 했지!”
그 뒤에 서 있던 하녀 옷을 입고 있는 여자아이가 둘을 짜증 난다는 눈으로 매섭게 노려보았으나 일단 무시했다.
“얘들아?”
내가 주의를 환기시키자 아이들은 이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횡설수설 내 물음에 대답하기 시작했다.
“공주님은 원래 조용한 사람이래요. 공주님에 대한 소문이랄게 별로 없던데요?”
그나마 두 남자애 중에 똘똘해 보이는 란이 비장한 표정으로 말을 줄줄이 읊기 시작했다.
“요즘 플로린스 상황이 많이 안 좋나 봐요. 수도는 의외로 조용했는데 국경 근처에서는 흉흉한 소문이 많이 돌았어요.”
“가령?”
내 물음에 란이 침을 꿀꺽 삼키며 비장하게 대답했다.
“잔당들이 사람들을 죽인대요.”
“잔당? 어디의?”
무슨 잔당을 말하는 거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란이 입술을 깨물며 우물쭈물 대답했다.
“그것까지는 저도 잘…….”
“괜찮아. 모를 수도 있지.”
나는 란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또 다른 꼬맹이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이놈의 세계는 왜 죄다 애새끼들을 굴려 먹지 못해 안달이람. 어차피 중학생 정도밖에 안 되는 아이들인데 이 정도만 알아 와도 나는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도 어느 정도 쟤들을 굴려 먹은 입장에서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그 당시 상황에서는 내 판단이 최선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시종으로 들어온 거니까 편히 말하지, 레오닐.”
“구원자님의 뜻대로.”
“그나저나, 너 정확히 몇 살이니?”
내 물음에 레오닐이 당황스러운 듯 눈을 크게 뜨고 날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금방 이성을 되찾았는지 차분하게 답했다.
“열다섯입니다.”
“너희들은?”
내 물음에 뒤에 있던 아이들이 제각기 대답했다. 대략 열셋에서 열다섯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딱 외관 나이와 똑같아서 더 착잡해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얘들을 내 마음대로 부려 먹어도 되는 건지 참.
“우선 너희들은 왕궁에 적응하기도 바쁠 테니까 최대한 여기 사회에 녹아드는 걸 목표로 해. 알았어? 쓸데없는 일 떠맡지 말고, 이방인이라고 차별당하면 나한테 와서 얘기하고. 얘기 안 하면 계약 파기할 줄 알아. 알아들어?”
내가 단호하게 혼내듯 말하자 아이들이 고개를 파닥파닥 흔들었다.
“사고 치지 말고. 괜히 나서지 말고. 시킨 것만 해야 해. 알았니?”
“네! 공주님!”
“무슨 일 생기면 누구한테 보고한다?”
“공주님이요!”
나는 크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중학교 선생님이 교직 중 가장 난이도 최악이라던데 지금 여기 애들이 몇 명이지……. 대략 여덟은 되는 것 같은데.
“좋았어. 이상, 보고 끝. 가 봐. 모르는 거 있으면 일단 윗선에 묻고. 어른들이 못살게 굴면 나한테 말해. 알았어?”
“네!”
다행히 내가 그렇게 무섭지는 않은 모양인지 처음 봤을 때보다는 한결 가벼워진 아이들이 애들 특유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표정을 하고 우르르 방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나는 찾아온 정적에 대충 다리를 꼬고 레오닐을 빤히 바라보았다.
레오닐과 나의 독대는 일종의 연막이었다.
지금 렌은 아마 카일을 만나고 있을 거다. 제발 둘이 싸우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카일이 날 이용해 먹으려는 건 알겠지만 솔직히 한국인 이전의 사람으로서 카일의 사정을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사실 무시해도 되긴 하는데, 어떻게든 뭐라도 해 보려는 필사적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무시하기 힘들었다.
아빠는 분명 내게 어릴 때부터 남 생각 하지 말고 자기 자신부터 챙기라고 그렇게 입이 마르도록 주입시켰으나 이게 바로 청개구리 심보인가.
아빠는 나를 영 잘못 키운 것 같다.
“좋아. 이제 설명 해 봐. 도대체 어떻게 제국을 삼키겠다는 거야? 날 왕으로 만들어서? 아니면 억지로 카일과 결혼시키기?”
내 물음에 레오닐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저희의 계획은 구원자님의 계획과 상이하니 계획을 다시 세우는 것이 좋겠다 판단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따로 내통하는 연락책이 있다는 소리네? 계획을 다시 세우는 게 좋다고 판단했으니까.”
“…….”
내 물음에 레오닐이 눈빛을 어둡게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언제든지 구원자님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연락책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너희들이 쉽게 나를 건들지 못하는 이유는 계획 밖의 존재인 렌이 있기 때문이지?”
“구원자님, 저희는 결코 구원자님께 해가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겨우 열다섯 살짜리 아이에게 보이기엔 매정할 수 있는 태도지만 조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도움이 되는 존재도 아니겠지. 도움이 되었으면 애초에 내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잖아? 이참에 물어나 보지. 도대체 날 소환하면서 뭔 배짱이었던 거야? 뭐를 기대했기에?”
물론 열다섯이 알아야 얼마나 알겠나 싶었다. 어차피 알아봤자 어른들이 주입시키듯이 떠들어댄 정보들 뿐이겠지.
그리고 또 얘는 뭔 죄가 있겠냐. 기분이 상당히 착잡해졌다.
왜냐면 나는 21세기에서 온 상식인이니까.
애초에 천재 어쩌고 하는 얘기를 들어 보면 그냥 어렸을 때부터 저 흑마법사라는 노답 집단에 세뇌되어서 제 의지도 모르고 그냥 시키는 대로 움직였겠지. 뭐.
“아니다. 널 탓할 마음은 없어. 그냥……, 원래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만 떨어져도 예민해지는 법이니까. 하물며 나는 세계가 뒤바뀌었는데 오죽할까.”
나는 대충 혀를 차고 오늘 오전에 받은 과일즙을 찻잔에 따라 레오닐에게 내밀었다.
렌이 내 말을 착실히 따랐더라면 지금쯤 흑마법사 단체가 아닌 플로린스의 왕자를 이용해 제국과 마탑을 칠 계획을 전달하고 있을 거다.
렌 정도면 혹시 모를 첩자들도 다 차단해 뒀겠지.
“너희가 할 수 있는 걸 말해 봐. 목표가 제국의 패권을 가져오는 거라고 했으니까, 병력이라든지, 예산이라든지. 있을 거 아니야? 말로 하지 말고 문서로 정리해서 내일까지 나한테 보고해.”
“…….”
레오닐이 당황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쯤 되면 대충 알 것도 같았다. 얘네들이 뭔 정신으로 날 소환했는지 말이다.
나 같은 애가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
성녀, 내지는 용사 따위를 기대한 모양인데……, 아니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안일한 생각을 할 수가 있지?
“가기 전에, 하나만 더.”
“물어보십시오, 구원자님.”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레오닐에게 물었다.
“나를 소환할 때, 정확히 어떤 존재가 소환될지는 예상하고 소환진을 발동시켰나?”
내 물음에 레오닐이 침을 꿀꺽 삼키는 게 적나라하게 보였다.
“바른대로 대답하는 게 좋아. 내가 바보가 아니라는 건 내 옆에 있는 마법사만 봐도 알 거야. 그렇지?”
내가 짐짓 엄하게 묻자 레오닐이 조금 긴장한 목소리로 내게 대답했다.
“……정확히 어떤 차원의 지성체가 소환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운명이 이끄는 대로 행할 뿐입니다.”
“그럼 지성체가 소환된다는 확신은 있었던 거고?”
“예.”
뭐야, 그럼 만약에 차원 연결이 잘못되어서 악마라도 소환했으면 어쩌려고?
이거 생각보다 더 대책 없는데?
“대현자의 예언이었습니다. 저희는 맹목적으로 믿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구원자님.”
“아, 그럼 지금 그 2012 세계멸망 같은 예언을 가지고 이 지랄을…….”
나는 급하게 레오닐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닫았다. 그래도 내가 어른인데 애 앞에서 욕을 하면 안 되지. 그럼 그럼. 이성을 찾자.
어차피 레오닐과의 독대는 연막이잖아?
본론은 렌이 잘 꺼냈을 거다.
“아니야. 이해했어. 그러니까 너희들은 내가 시킨 대로 너희 전력, 자금 등 내가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을 내놔. 어차피 너희들 목적은 달성해 줄 생각이니까.”
“…….”
레오닐이 뭔가 불안한 듯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애 앞에서 적대감을 너무 내비친 모양이었다.
“어떻게든 제국만 멸망시키면 되는 거 아니야?”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레오닐을 쳐다보았다. 만약에, 정말 저들의 목표가 세계 정복이라면 나는 당당하게 저 집단을 버릴 의향이 있었다.
물론 내가 대놓고 배신한다면 쟤들도 내가 가짜 공주라는 걸 밝히든가 세뇌를 풀어 버리든가 하는 강수를 놓겠지.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대책을 미리 생각을 해 놨다.
왕실이 어디 하나뿐인가?
조금 일이 힘들어지긴 하겠지만, 방법은 있었다.
렌의 말대로 카일은 나를 이용하고자 붙었으니까 나도 이용해 먹으면 되지.
대충 클리셰 때려 부어서 다른 세계에서 온 펜디엄의 성녀쯤으로 나설 작정이다.
물론 그 전에 플로린스와 완전한 동맹 협정을 맺어야겠지만.
“맞습니다.”
이제 왕자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고민해 봐야 할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