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나가!”
“그냥 아침 밝을 때 나가면 되잖아. 밖에서는 나랑 잘만 잤으면서 갑자기 왜 그러는데?”
“렌, 이제 우리 문명 세계로 왔잖아? 여기 경계 밖도 아니고, 왕궁이잖아? 제발 문명인답게 행동하자, 제발!”
렌은 내 태도가 물러지기 무섭게 다시 들러붙기 시작했고, 나는 세 시간의 실랑이 끝에 렌을 문밖으로 간신히 내보낼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보낼 수 있을 뻔했다.
거의 문 근처까지 내몰린 렌이 뚱하니 말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그런데 공주님, 이쪽으로 나가면 들키는데?”
“렌, 나 조금 화나려고 해.”
“응. 나갈게. 내일 봐!”
살짝 허무해졌다. 렌은 내 말에 겁먹은 사람처럼 부리나케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 정말 비명을 안 지를 수가 없었다.
“공주님! 무슨 일이,”
나는 내 비명을 듣고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왕실 호위에게 급하게 개소리를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 커, 커튼 쪽에 귀신이!”
내 말에 왕실 호위가 뭔 개소리를 하냐는 듯한 불손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곧 이성을 되찾았는지 공손하게 대꾸했다.
“……문이 열려 있어 바람에 커튼 자락이 흔들린 것 같습니다. 공주님.”
“……내가 보기에도 그렇네. 왕국까지 돌아오는 여정이 워낙 힘들어 내가 쇠약해졌던 것 같아. 이제 경 볼일 보러 가도 좋네.”
나는 무사히 호위를 물리고 침대에 대자로 뻗어 누웠다. 기가 쪽 빨린 기분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혹시 창문에서 렌의 얼굴이 다시 튀어나오진 않을지 그쪽으로 시선이 향,
“공주님 귀신 무서우면 같이 잘까? 난 하나도 안 무서운데.”
“……아, 진짜 저 미친,”
결국 나는 자리에서 베개를 들고 일어나 창문으로 돌진할 수밖에 없었다.
“안 꺼져? 얘가 말로 하면 못 알아들어, 왜! 안 가?”
“으악, 공주님! 알았어! 가면 되잖아!”
***
렌의 불만은 최고조로 달해 있었다.
플로린스 놈들이 무슨 생각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어떻게든 마법사를 손에 넣어서 저들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작정이겠지.
그래도 이건 너무 괴로웠다. 렌은 처음으로 시아와 떨어져 있는 게 상당히 힘든 일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법도에 의해 혼인식 전까지 공주님은 만나 뵐 수 없습니다.”
“아하, 그럼 그동안 나는 공주님을 뵙지도 못하고 밀가루 포대처럼 구석에 처박혀 있어라?”
렌은 싱긋 웃으며 꽤 지위가 높아 보이는 시종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목적은 공주이지 플로린스가 아닌데. 전하께서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시는 것 같아.”
“하, 하나, 이것은 플로린스의 법도,”
“그래서?”
정말 마음에 안 들었지만 렌은 필사적으로 참았다. 사고 치면 괜히 상황이 불리해질 수 있었다.
시아가 플로린스의 왕자에게 협조하는 방향으로 계획을 트는 게 더 좋을 것 같다고 했으니 대충이라도 왕족에게 잘 보여야 할 필요성이 생겨 버렸다.
바닥에서 기는 척하다가 살짝살짝 겁을 주면 알아서 사릴 거다.
문제는 그 기는 척을 하느라 그의 목적을 단 하나도 달성하지 못했다.
개인 시간은 꽤 많았다. 대충 왕을 독대하며 추후 플로린스를 위한 마법사 육성 계획을 설명하고 왕실의 위신을 세우기 위한 마법 세공품 몇 개를 만들고, 왕국을 보호하는 결계를 몇 개 설치하고 나면 세 시간 정도는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세 시간 동안 시아를 만날 수는 없으며 그는 시아가 원하는 대로 그 빌어먹을 떨거지들을 상대하는 데에 소중한 시간을 사용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플로린스에 렌이 허락한 그의 시간은 세 시간 중 단 한 시간이었다.
나머지 시간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공부’를 해야 했기 때문에 절대 양보할 수 없었다.
“며칠이나 이 짓거리를 더 해야 해? 나 인내심 없어.”
“그, 그것이.”
렌은 그냥 고개만 갸웃거렸다. 역시, 시아가 이상한 게 확실하다. 아직 마나를 표출한 것도 아닌데 시종은 겁을 집어먹는데 시아는 어제 그의 대가리를 베개로 후려치기까지 했다.
렌은 침울하게 시아를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밤에 찾아가면 혼내겠지? 그래도 마냥 쫓아내지는 않으니 가야지.
시아가 안다면 기겁을 할 생각이지만 렌은 이미 시아의 성향에 대한 판단을 대충 끝냈다.
선만 넘지 않는다면 시아는 그를 굉장히 너그럽게 봐주었다.
렌도 바보는 아니었기 때문에 타인에게 함부로 입을 맞추거나 포옹을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나는 정말 공주님 때문에 여기 있는 거라니까? 자꾸 못 만나게 할 거면 결혼식을 당장 내일로 당기는 게 어때?”
그런데 시아는 그 짓을 당하고서도 세상 너그럽게 그의 뺨을 때리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의 기분을 맞춰 주려고 하고 있다!
심지어 지금도 몰래 창문을 넘어 찾아와도 몇 대 때리고 말지 않는가? 그것도 쥐콩만 한 손길로! 만약 그였다면 쇠몽둥이라도 가져와 머리를 내려쳤을 것이다. 하지만 겨우 무기라고 찾은 게 베개라니. 심지어 그녀가 실었던 힘은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가 맞아도 아프지 않을 만큼 연약하디 연약했다. 다분히 의도적인 힘 조절이었다.
“나 급해. 공주님 금단 증세가 도질 것 같아. 이대로는 너무 힘든걸?”
렌은 발을 동동 굴렀다. 사실 그가 조급하게 구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미 이렇게 소란스럽게 그가 플로린스로 당도한 이상 마탑은 그의 행방을 눈치채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렌에게 마탑을 폭파시킬 대책은 아직 없었다.
두루뭉술한 계획은 있었지만 아직 확실하지는 않았다.
마탑 지하에 갇혀 있는 폐기 예정 전투 인형들을 그가 무슨 수로 설득한단 말인가?
무턱대고 풀어놨다가는 생각보다 큰일이 날 수도 있었다.
그들이 애초에 렌을 폐기하려 했던 이유가 뭐였겠는가?
‘통제 불가’
렌은 혼자 비릿하게 웃었다.
통제, 통제라…….
확실히 그는 통제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실제로 시아의 앞에서 제멋대로 굴고 있지 않은가.
지금도 그렇고.
“응? 그러니까 당장 가서 말해 줘. 나 급해. 정말로.”
렌은 감정을 갈무리하려 노력했다. 심장이 흥분으로 쿵쾅쿵쾅 뛰는 기분이었지만 필사적으로 참았다.
제멋대로 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그냥 넘어가 주는 시아를 떠올리니 오금이 저리는 듯했다.
아마 렌이 굳이 굳이 시아를 따라 차원을 넘어도 그녀는 그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인생을 크게 놓고 보았을 때 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시아의 곁에 있는 거였다.
그러니까, 어서, 그녀도 그와 같아져야 했다.
떨어져 있으면 끊임없이 불안해해야 했고, 결국 의지할 종착지는 그여야만 했다.
그러니까 다른 놈들한테 너무 다정하게 굴면 안 되는데…….
“아, 그러고 보니까 공주님 옆에 영 쓸 만한 놈들이 없더라고?”
렌은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 렌은 시아에게 큰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종국에는 들킬 사실이었고, 시아에게 들킨다면 이번에야말로 그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릴 수도 있었다.
시아의 경멸.
상상만 해도 정말 끔찍했다!
그러니까 미리미리 잘 보여 놔야 했다.
“준비해 놓을 테니까 전하한테 잘 좀 말해 줘. 나는 나름 잘 보이고 싶거든.”
렌은 빙그레 웃었다. 눈앞의 시종이 겁에 질려 벌벌 떠는 게 보였다. 렌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저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렇게 겁을 먹고 달아나는 것일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쯤 되면 망국의 왕자 재평가가 시급해질 정도였다.
사실 카일 정도면 훌륭하긴 했다. 사실상 왕위 계승권 밖이라 놀고먹는 신세였던 막내 왕자 주제에 소드마스터의 경지까지 다다랐고, 결국은 최후까지 살아남았다.
게다가 렌의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대드는 꼴을 보면 분명 그놈도 겁대가리를 상실한 게 확실했다.
문제는 렌이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는 것이지만.
“기간은 내일까지. 답변을 꼭 받았으면 좋겠어. 나는 인내심이 부족하거든. 이유는 나도 모르겠어. 그냥 그렇게 태어났나 봐.”
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아가 하던 대로 시종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 최대한 인자하게 웃어 보였다.
“너무 무서워하지 마. 내가 관심 있는 건 공주님 하나라니까? 그리고 나는 쓸데없이 공주님의 미움을 살 만큼 멍청이가 아니야.”
시종이 렌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했는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저, 전하께, 보고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혼인 시일은, 신전에서 결정하는 일이기 때문에,”
“아. 신전.”
렌은 입술을 삐쭉 내밀고 복도를 장식하고 있는 여신상을 훑었다.
플로린스의 신이 누구였더라? 이즈벨? 무지개 여신?
제2 패권국치고는 이름값이 꽤 소소한 여신이긴 했다.
“그런데 신전에서 마법사 결혼 날짜도 잡나? 마법사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
“빨리만 하면 상관없어. 나는 의외로 신전에 악감정이 없거든. 아, 내가 신전에 호의적이라는 것도 전해 주면 더 좋을 것 같아! 나는 정말 잘 보이고 싶어.”
렌은 여전히 빙글빙글 웃으며 시아에 대해 생각했다.
음,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시아가 편하게 지내려면 이곳저곳 호의를 얻어 놓는 게 좋았다.
비록 폐기물인 그가 노력한다 한들 호의를 얻을 수 있으리란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뭐,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