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113)

<82>

내가 렌의 말을 받아치지 못하는 이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얘가 헛소리를 하는 것 같지만 솔직히 따지고 보면 매번 맞는 말을 한다.

물론 등짝 맞을 소리 포함.

둘째. 점점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렌의 인격이 변하는 것만 같았다.

뭐라고 해야 하지? 분명 처음에는 백지상태였는데, 도대체 어디서 이상한 걸 주워 먹고 다닌 건지 입도 험해지고 이상한 짓도 자주 한다. 제일 큰 가능성은 꽤 오래 같이 다녔던 카일인데……, 오늘 보였던 신사적인 태도는 카일의 것과 아주 조금 닮아 있었다.

하지만 카일은 내가 볼 때 그렇게까지 인성 파탄은 아니었는데 도대체 뭘 보고 배운 거야?

아무튼 그 덕에, 늘 고민하던 ‘얘를 어떻게 대해야 하나’라는 문제가 더 심각해졌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평소라면 쉽게 할 수 있는 판단을 못 내리는 경우가 잦았다.

지금처럼 말이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 제국하고 플로린스하고 딜 하면 손해는 누가 보는데? 네 말대로 나는 멀쩡하겠지만 넌 아니겠지. 제국이 널 가만히 둘 것 같아? 내가 그 정도 눈치도 없는 줄 알어? 내가 인성 파탄자야? 나 살자고 널 팔아넘기게?”

나는 냅다 렌의 양 귀를 잡아당겼다. 이게 진짜 오냐오냐해 주니까 아주 선을 시도 때도 없이 넘는다.

“그리고 너 이거 보통 상황 같으면 범죄야. 알아? 어디서 함부로 남의 방에 막 들어와서 네 멋대로 만져?”

“플로린스에는 그런 법 없는데?”

“…….”

염병. 말로 다 죽여 버린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사람 할 말 없게 하는 데 아주 선수다.

“우리나라에는 있어, 이 화상아!”

나는 내 태도를 확실히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런 건 확실하게 선을 긋는 게 좋다.

……좋을걸? 맞지? 이렇게 하는 거?

“하나 확실히 해 두겠는데, 나는 네가 싫지 않을 뿐이지 좋아하는 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내 허락 없이 함부로 만지는 건 자제해 줬으면 좋겠어.”

“…….”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렌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내가 이런 말 할 줄 전혀 몰랐다는 것처럼.

더 할 말은 없어서 나는 애써 렌의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 몇 분간의 침묵이 방 안에 맴돌았다.

나는 참을 수 없는 어색한 기운에 애써 다시 렌을 바라보았고, 뭔가 일이 심각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렌의 표정이, 이상했다.

“렌?”

내가 불안함을 가득 담은 어투로 렌을 부르자 그는 내게서 대뜸 멀어졌다.

“……공주님이 시키는 대로 할게. 얌전히 있을게.”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명백하게 겁에 질린 얼굴.

나는 바로 내 행동에 대해 후회했다. 아니, 나도 분명 알고 있는 사실이었잖아? 렌한테 말 못 할 과거가 있고, 나는 적어도 그런 렌을 배려해서 그의 트라우마를 건들면 안 됐다.

렌이 여태까지 나에게 해 준 게 있잖아.

나는 황급하게 렌의 팔을 붙잡았다.

“렌, 내가 배려가 없었어. 미안. 그러니까, 내 말은 네 마음은 알겠는데,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는……, 소리야. 알았지?”

내 말에 렌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마치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으려는 듯이.

그러고는 내게서 멀리 떨어진 채로 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 입을 열었다.

“언제 준비되는데? 준비만 되면 되는 거야? 그럼 내 마음대로 해도 돼?”

“…….”

나는 당연히 렌의 물음에 적절한 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내가 이딴 질문을 살면서 들어 볼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렌, 사람은 네 마음대로 하고 싶다고 해서 네 마음대로 다루면 안 돼……. 그건 상호 합의가 있어야만 하는 거라니까?”

“그럼 공주님한테 순종적으로 굴면 돼? 공주님 명령에만 따를게. 그럼 나는 내 마음대로 못하잖아. 공주님은 날 공주님 마음대로 다룰 수 있어. 공주님이 그렇게 한다면 나는 좋아.”

렌이 꼭 계속 정의 내리지 못한 답을 드디어 찾은 사람처럼 기쁜 얼굴로 침대에서 내려와서 내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덥석 내 손등을 가져가 제 뺨에 비비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태세 전환에 어이가 나갈 수밖에 없었다.

“렌, 당장 안 일어나? 너 똑똑하다며. 내 말 도대체 어떻게 들은 거야? 사람은 네 마음대로 하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라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나는 렌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그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렌을 들어 올린다고 해서 렌이 들릴 덩치가 아니었으니 스스로 일어났다고 함이 더 맞았다.

렌은 제 입술을 깨물며 답답하다는 듯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일은……, 공주님 계획대로 진행될 거야. 펜디엄의 잔당들과 공주님을 납치한 놈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방향으로.”

갑자기 꺼내진 일 얘기에 살짝 당황했다. 하지만 나는 빠르게 집중했다.

차라리 지금은 렌의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보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얘기가 차라리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렌, 궁금한 게 있는데, 코어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돼?”

내 말에 렌은 의외로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제국은 일단 몰라. 알았다면 쓸데없는 짓 할게 아니라 코어부터 빼 왔겠지. 그리고 공주님을 납치한 조직은 코어에 대해서 확실히 알고 있을걸? 그 정보를 미끼로 삼아 펜디엄 측에 풀었을 확률이 크고.”

“그럼 둘 다 코어라는 걸 노리고 있는 거 아니야? 안 노릴 이유가 없잖아. 이미 코어가 뭔지에 대해 알아 버린 이상.”

아무리 놈들의 목표가 코어 탈환이 아니라 대륙 패권 장악이라고 할지라도 상식적으로 준 무한 동력 장치나 다름없는 코어를 노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우리가 마음 놓고 코어를 사용하려면 그놈들 계획에 업혀 가는 게 아니라 우리가 주체가 되어서 코어를 탈환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내 말에 렌이 입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나를 소환한 흑마법사 단체를 믿을 수 없었다.

이미 무고한 인간 납치 이력이 있는 그들을 어떻게 신뢰해야 한단 말인가?

렌의 말대로 이기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우선 흑마법사 단체는 이용만 한다.

그리고 뭔가 생각의 방향성을 틀 필요가 있어 보인다.

아까 왕의 반응을 보면 플로린스에는 마법사가 굉장히 귀하다.

“어쨌든 펜디엄이라는 왕국의 왕자는 제국을 칠 명분이 되는 건 확실해. 그게 아니고서야 구 마탑의 잔당들이 카일을 제물이니 뭐니로 점지했을 리가 없잖아.”

“…….”

렌은 계속해서 대답이 없었다.

뭔가 문제인가 싶은데, 만약에 내 말에 문제가 있었다면 렌은 바로 입을 열어 내 의견을 정정해 주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내가 집에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확실하게 수중에 있다면 굳이 죄 없는 플로린스의 왕자를 나락으로 처박을 이유도 없는 거잖아? 솔직히 날 죽이려 했다는 사실도 결국 거짓인데.”

안 그래도 처음부터 계속 거슬렸던 사실이었다.

플로린스의 왕자는 죄가 없다.

공주를 죽이려고 했던 사실도 마법사들의 주술에 의해 조작된 것이었고, 왕자의 입장에서는 나를 죽이려고 하는 이유도 이해가 됐다.

사실 관계만 놓고 보면 나는 가짜니까.

왕자가 이 사실을 알든 알지 못하든, 왕자의 행동은 결과적으로는 탓할 수 없었다.

“왕자 쪽을 이용해 보든가, 아니면 왕 쪽을 이용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공주님, 미쳤어? 왕자가 공주님 죽이려는 거 알고 있잖아.”

렌이 조금 화난 얼굴로 내게 말했다.

“그럼, 어떡해. 아무 죄 없는 나라 망치고 나르자고? 권력이 흑마법사 쪽으로 쏠리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뻔하잖아. 걔들이 플로린스를 그냥 둘 거라고 생각해? 경계 밖에서 봤잖아. 어차피 걔들 입장에서 여기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은 다 배신자 아니야?”

“공주님이 뭔 상관인데? 어차피 공주님은 이 세계 사람도 아니잖아. 여기 사람들이 뒈지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고.”

렌이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게 따지듯 물었다.

“맞아. 내가 처음 여기 도착했을 때 가볍게 생각한 거. 나는 여기가 동화 속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카일을 보고서 생각이 좀 달라졌어.”

렌의 표정이 순식간에 사납게 변했다.

“여기 사람들한테는 현실이잖아. 네 말대로 이거 동정심이야. 그리고 나같이 생명의 위협 따위 느껴 볼 수 없었던 인생을 산 사람한테는 쉽게 동하는 죄책감이기도 하고. 네 말대로 여긴 내 세상도 아니니까. 더……, 좀 그렇다고 해야 하나?”

“…….”

렌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방금 느껴졌던 살벌한 기색은 사라진 후였다.

“그냥, 뭐라고 해야 하지? 나라 잃은 설움을 대충 알 것도 같고…… 만약에 원래 계획대로 플로린스 왕자의 뒤통수를 때리면 그냥 카일 같은 피해자를 내가 하나 더 만드는 거나 다름없잖아. 그렇게 되면 나 집에 돌아가도 마음 편하게 두 발 뻗고 못 잘 것 같아.”

렌은 주절주절한 내 말을 이해하려 노력하는지 간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나는 그래. 좀, 답답하지?”

내 말에 렌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대답했다.

“공주님 원래 성녀였어?”

“……뭐?”

렌은 나름 심각한 얼굴로 개소리를 이어 갔다.

“공주님이 나랑 결혼하길 꺼리는 것도 그렇고, 이브린 신전의 진짜 성녀도 안 할 이상적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떠들어 대는 걸 보면…….”

렌의 표정이 순식간에 절망으로 물들어 갔다. 나는 당연히 렌의 감정 변화를 따라갈 수 없어 입만 쩍 벌리고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다.

“안 돼. 당장 그 신전에서 나와, 공주님. 절대 안 돼.”

꽤 절박해 보이는 태도였다. 그래서 더 어이가 없었다.

“……렌, 나 무교야.”

“아.”

“그리고 이건 정상인이라면 당연히 이렇게 생각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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