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잘못 걸렸다.’라고 생각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렌은 꼭, 한 마리의 또라이 그 자체였다.
“공주님, 이리 와.”
경계 밖에서 구한 물품으로 돈을 이렇게 많이 벌었다고? 말도 안 된다.
분명 그 전에 따로 자금을 조성해 두었을 것이다.
렌이 구한 화려한 마차를 타고 나는 정말 공주님이 행차라도 하듯 휘황찬란하게 왕성으로 향했다.
“너 미쳤어? 뭐 어쩌려고!”
“공주님 벌써 그 얘기만 몇 번째야? 나 서운해……. 나 그 어느 때보다 정상이란 말이야.”
“…….”
렌이 진짜 서운하다는 듯 눈썹을 축 늘어트리고 내게 치대기 시작했다.
“응? 나 서운해애.”
이, 이 인간은 미친놈이다. 내가, 경황이 없어서 못 알아봤던 게 틀림이 없다.
렌은 내가 뭘 하기도 전에 제멋대로 카일과 레오닐을 쫓아내 버렸다. 뭐 나를 자기가 단독으로 구했다는 걸 증명해야 한다나 뭐라나.
처음에는 당연히 반발하려고 했다. 그걸 왜 네 멋대로 정하냐고 하려다가 문득, 생각해 보니 어차피 렌이 마탑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공주의 부군 자리를 노린 거면 차라리 이 방법이 낫겠다 싶었다.
어쨌든, 렌을 안전한 위치에 올려놓으면 렌이 움직이기 쉬워진다. 더 이상 마탑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이 소리다.
카일의 권력에 대한 문제는 그냥 그를 내 호위로 들이면 끝날 일이고 말이다.
변명도 간단했다. 플로린스로 오는 길에 훌륭한 기사를 만나서 길거리 캐스팅 했다고 대충 둘러대면 되지 뭐.
레오닐의 경우 내가 미리 보내 놓은 아이들 틈에 섞어서 시종으로 들이면 될 일이고.
“공주니이임, 응? 왜 대답 안 해 줘? 나 싫어?”
나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렌의 얼굴을 양손으로 밀어냈다.
아씨, 얼굴은 왜 또 더럽게 작아?
“공주님 화났어? 눈썹 올라갔다.”
렌은 또 순순히 밀려나며 재밌다는 듯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내가 자신에게 악감정이 없다는 걸 알고 저러는 것 같았다.
의외로 렌은 내 정곡을 아주 제대로 찔렀다.
렌이 나한테 들러붙든, 뭘 하든 딱히 싫지 않았다.
그래서 문제였다!
“너, 돈 어디서 났어.”
“공주님 나 똑똑하다니까? 내가 마탑에서 도망쳐 나오면서 이런 것마저 준비 안 해 놨을까 봐?”
“…….”
할 말이 없어졌다. 그래, 처음에 허당같이 굴던 거 순전히 개뻥이었네.
“그리고 생각해 보니까, 공주님 데리고 가려던 데, 그냥 내 탑이더라고? 나는 생각보다 화려한 게 좋은 것 같아.”
“하하, 그럼 화려하지 않은 나한테 도대체 왜 이러는 거니?”
내가 넋이 나가 말하자 렌은 그대로 내 허리를 꼭 껴안고 몸을 열심히 비비며 말했다.
“공주님은 눈부신데?”
“…….”
순간 욕이 튀어 나갈 뻔했다. 이건 또 뭔…….
“공주님 뜨거워.”
“아아악! 저리 가, 이 미친놈아!”
“공주님 나 어느 때보다 멀쩡하다니까? 쑥스러워하지 마.”
렌은 도대체 출처도 근본도 알 수 없는 플러팅을 하며 내게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그의 눈빛에서 기묘한 열기를 느낄 수 있었는데, 지금 나는 지금 그것 때문에 더 멘붕이 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 솔직히 말해서 권력이니 뭐니 뜬구름 잡는 사정 복잡한 사건에 집중하는 것보다는 렌의 신원 미상 불꽃 플러팅에 정신을 빼앗기는 게 정신 건강상 좋긴 했다.
아니, 좋은 거 맞나……?
“공주님, 그런데, 나 그거 한 번 더 하면 안 돼?”
“……뭐, 뭐 인간아, 뭐! 안 돼!”
“아직 그게 뭔지 말 안 했는데.”
“안 돼!”
내 말에 렌이 시무룩해져서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마차 안에 벌렁 누웠다.
그리고 세상 불쌍한 표정으로 구시렁거리기 시작했다.
“왜 말 끝까지 들어 보지도 않고 싫어……. 공주님 나 싫어? 응? 싫어졌어?”
“…….”
미치겠다. 저 머리통에 도대체 뭔 생각이 들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어!
“렌,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왜? 공주님이 집에 다시 돌아갈 방법은 내가 알아. 그러니까 공주님은 나한테만 신경 써. 상황이 변했잖아. 그 편이 더 편할걸?”
렌의 말에 나는 짜게 식은 얼굴로 놈을 쳐다보았다.
“안 보내 준다며.”
“보내 준다니까? 대신 같이 가. 그리고 나랑 결혼해.”
“…….”
자리에서 일어난 렌은 커다란 몸으로 압박하듯 가까이 다가와 나를 자신과 마차 벽 사이에 가둬 버렸다.
“응? 나랑 결혼해. 공주님이 나 책임져.”
“……얘가 진짜 왜 이래! 렌, 이건 졸라서 되는 게 아니,”
“조르는 거 아닌데? 나 공주님한테 수작 부리고 있는 거잖아. 몰랐어? 큰일 났다.”
렌이 진짜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서 떨어져 다리를 덜덜 떨기 시작했다.
“나 아직 이 쪽은 잘 모르는데.”
이, 이 쪽은 잘 모른다는 건 또 대체 무슨 말이야!
“으음…… 으으……. 괜찮아, 공주님. 왕성에 들어가면 일단 가짜 결혼이라도 할 거니까. 그때 가서 하면 돼.”
“뭐, 뭐! 하긴 뭘 해! 뭐 할 건데!”
내가 잔뜩 당황해서 묻자 렌이 해맑게 대답했다.
“내가 더 잘 알아 올게. 하루면 돼. 나 되게 빨리 배워, 공주님.”
렌이 손을 뻗어 내 머리칼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마차 벽에 몰려 한껏 쭈그려진 채 숨만 꼴딱꼴딱 삼켰다.
사실, 그냥 하지 말아라. 나는 너 마음에 없다. 한마디 하면 끝날 일이건만 그게 뭐라고 입 밖으로 쉽게 튀어나오지 않았다.
“……나 따라오는 법은 알아?”
“응. 코어만 탈환하면 돼.”
“…….”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는 답변은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이동이 휘리릭 뚝딱 가능한 거였으면 왜 아홉 시 뉴스에 ‘정체불명의 마법사 등장, 나사 외계인 공식 발견’라는 속보가 보이지 않았던 걸까.
“으응, 물론 조금 힘들겠지만…….”
“…….”
“으음……, 물론 조금 고생도 해야겠지만…….”
렌이 곤란한 듯 인상을 마구 찌푸리다가 이내 방긋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여기 혼자 남겨지는 것보다는 공주님이랑 계속 사는 게 최고의 선택이니까.”
“아니, 왜…….”
내 물음에 렌이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대꾸했다.
“공주님도 내 입장이 되면 그렇게 생각할걸?”
렌이 활짝 웃으며 내 손을 가져가 제 뺨에다 대고 비비기 시작했다. 진짜 행복해 보여서 할 말이 없었다.
“공주님 손 부드럽다. 진짜 손도 부드러워?”
“…….”
“나 공주님 진짜 얼굴이 너무너무 보고 싶어. 호문쿨루스 구현율은 높은 것 같은데, 그래도 이건 진짜 공주님이 아니잖아.”
렌은 못 참겠다는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열렬한 눈빛으로 나를 핥듯이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고민해야 했다. 왜, 나는 저놈의 정신 나간 짓거리에 놀아나고 있는가.
그런데 생각해 보면…… 뭐, 렌의 제안이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어디 가서 렌같이 생긴 초절정 꽃미남 마법사를 만나 보겠어?
그리고 어쨌든 결혼만 약속하면 집에 보내 준다잖아?
엄마랑 아빠한테 통보하는 과정에서 조금 잡음은 생기겠지만 뭐 그래도…….
“공주님은 나만 믿어. 원래 마법사랑 계약한다는 건 이런 거야.”
렌이 천천히 내 뺨을 제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아무 걱정 할 필요 없어. 무서워할 필요도 없고, 고민할 필요도 없어. 공주님이 원하는 건 내가 이뤄내 줄 거니까.”
그리고 커다란 양팔로 나를 제 품으로 끌어당겨 꼭 안았다.
“그러니까, 공주님은 나만 책임지면 돼. 알겠지?”
넋이 완전 나가 버렸다. 그러니까 이걸 싫다고 하기도 애매하고 또 좋다고 하기도 애매하다.
“아, 거의 다 왔네. 흐음.”
렌은 나를 꼭 껴안은 채로 흘끗 창밖을 쳐다보았다.
“다른 놈들은 내가 밤에 따로 보자고 했어. 오늘은 바쁠 거야.”
그러고는 손가락을 탁, 튕겼다.
그러자 조금 더러워졌던 내 드레스가 순식간에 금실 자수가 놓인 화려한 드레스로 변하기 시작했다.
“공주님 반지.”
렌은 손을 가져가 경계 밖에서부터 끼워져 있던 기묘한 반지에 제 검지를 올리며 말했다.
“이거 빼지 마. 비싼 거야.”
렌이 내 반지에 대해 자세하게 언급하는 건 처음이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렌에게 물었다.
“이게 뭔지 알아?”
그러자 렌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여상하게 대답했다.
“응. 여기다 이것저것 해 놓을 거야. 왕성 안은 위험하니까.”
차르릉, 소리와 함께 작은 마법진이 반지 위로 떠올랐다.
“왕자가 공주님한테 이상한 짓 하면 꼭 말해. 내가 죽여 버릴, 아니. 내가 응징해 줄 거니까. 알았지?”
렌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사람 좋은 얼굴로 내게 웃었다.
“걱정 마, 공주님, 나 착해. 그렇지?”
“……잘 모르겠,”
“공주님. 나 착해.”
“……아, 예.”
“그럼 그럼.”
그때였다. 마차가 이동을 멈췄고, 주변에서부터 시끄러운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렌은 씨익 미소를 지었고, 손가락을 한 번 탁, 튕겼다.
그러자 넝마였던 그의 로브가 눈 부신 빛에 휩싸이더니 새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공주님, 어때? 신뢰감이 생겨?”
렌은 완전히 동화 속 왕자님 같은 단정한 차림으로 변모해 있었고, 나는 놀라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처음 보는 완벽하게 꾸민 렌의 모습이었다.
누구든 실물로 본다면 기함을 토할 비주얼이었다.
절대 내가 얼빠라서 이러는 게 아니라, 이건 진짜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일 수밖에 없다.
정말, 내가 아닌 누구더라도 지금 렌의 모습을 보면 감탄할 것이다.
“……입만, 조심하면.”
“걱정 마, 공주님. 나 연기도 잘한다?”
렌이 허리를 펴고 마차 문을 열었다.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졌고, 렌은 당당하게 마차에서 내려 내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공주님. 플로린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