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나 똑똑하다고 했잖아, 공주님. 왜 안 믿어? 정말 보여 줄까? 나 보여 줄 수 있어. 원래 인간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피부로 느껴 봐야 알잖아.”
도대체 어디서부터, 뭐가 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렌의 홍채가 보라색을 넘어 붉은색으로 달아올랐다.
그러고는 전혀 맥락을 알 수 없는 눈물이 그의 매끄러운 턱선을 타고 뚝뚝 흘렀고, 렌의 주변으로 작은 돌풍이 일기 시작했다.
파스스 마른 풀이 바람에 의해 바스라지기 시작했고, 지진 난 것처럼 땅마저 흔들리기 시작하자 저 멀리 있던 두 사람이 다급한 표정으로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렌은 기괴한 표정을 지어냈다.
전혀 자연스럽지 못한 웃음.
이어 렌의 팔에 붉은색 선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 선은 살을 가르고 지나가는 상처처럼 크게 벌어졌고, 곧 렌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만약 거기서 내가 렌의 머리채를 잡지 않았더라면 정말 위험했을 수도 있었다.
“악! 공주님 아파! 이번엔 진짜로 아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아니지, 사람으로서는 당연히 앞에 있는 사람이 위험한 짓을 한다면 속이 뒤집히는 게 맞다.
“그럼 전엔 가짜로 아팠어? 그리고 내가 너 때린 적이 어딨다고 ‘이번엔’ 타령이야!”
다행히 내가 다짜고짜 그의 머리채를 휘어잡자 렌의 홍채는 다시금 푸른색으로 돌아왔다.
잠깐이었지만 렌은 명백히 도를 넘을 정도로 흥분하고 있었다.
왜 그랬는가 생각해 보면, 렌은 내가 집에 간다는 이야기에 민감하게 반응하고는 했다.
그런데 내가 계속 그 주제에 대해 끈질기게 떠들어대자 핀트가 순간 나간 거다.
내가 집에 가는 게 그렇게 싫다고? 나로서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감정이었다.
아니, 왜? 나랑 얼굴 본 지 얼마나 됐다고? 도대체 그사이에 나에 대해 무슨 감정이 자라났길래?
뭐, 나한테 반했다고 치자. 렌이 내게 보이는 감정은 딱 그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그게 현실적으로 이렇게까지 싫어할 일이야?
뭐, 본인이 드라마 남자 주인공이야? 나는 아직 렌의 감정에 대한 답변도 안 내놓았는데 이렇게 맹목적으로 군다고?
전혀 이해가 안 갔다. 그래서 더 혼란스럽다.
“지금 내가 마법사랑 진지하게 할 얘기가 있으니까 잠시 자리를 피해 주겠어? 보기와 달리 아주 멀쩡하니 걱정할 것 없네!”
내게로 달려오던 카일과 레오닐은 당황을 가득 담은 얼굴로 멈춰 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렌의 머리채를 잡고 구석으로 끌어당겼다.
“아야, 공주님 잘못했어……. 그런데 이건 나도 조절되는 게 아니,”
“조절이 안 되긴 개뿔이 안 돼? 너 나 처음 만났을 때 한 계약. 그거 때문이지?”
“…….”
내 말에 정곡이라도 찔린 듯 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쩐지 불길하게 손에 피까지 내 가면서 별 생쇼를 하더라. 너 진짜 정신 나갔어? 너 지금 원래대로라면 나랑 결혼하면 집에 보내 줘야 하는데 그게 싫어서 네 몸에 이 난리 나는 거잖아. 내가 두 번이나 보고도 모르는 바본 줄 알아? 그 정도는 나도 알 수 있어!”
나는 이를 악물고 카일과 레오닐에게는 들리지 않게 렌에게 속삭였다.
렌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해지는 건 나였다.
쟤가 저럴수록 저 출처 모를 감정이 진짜라는데 쐐기를 박는 거나 다름없는 거 아닌가.
그것도 내가 감당하기 버거울 만큼 진심이라는 건데, 솔직히 말해서 이런 렌의 태도에 흔들리지 않았다면 그건 완전 거짓말이었다.
지금도 충분히 나는 동요하고 있었다. 렌의 표정은 쓸데없이 너무 솔직하니까…….
“너, 너 진짜 내가 나쁜 사람이면 어떻게 하려고 이렇게 굴어! 왜!”
짜증을 안 내려고 했는데 낼 수밖에 없었다.
렌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도 말이다.
“솔직하게 말해 줄까? 나 이 이상으로 너한테 정 주기 싫어. 나 생각보다 훨씬 이기적이라 내가 상처받기도 싫고, 너보다 나를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해서 나쁜 년 되기도 싫어.”
렌이 생각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조금 격해진 표정을 숨기고 최대한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조금 실수한 것 같아. 더 냉정하게 말했어야 했는데.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없긴 왜 없니? 네가 지금 네 상황 때문에 정 비슷한 걸 못 받아 봐서 그런,”
그때였다.
렌의 커다란 손이 내 뒤통수를 감쌌고, 입술 위로 따뜻한 감촉이 닿았다 떨어졌다.
무슨 일이 벌어졌나 이해할 수 없었다.
너무 순식간이라서.
렌은 그런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이번에는 다소 천천히 내게 다가와 내 입술을 잠시 머금고 떨어졌다.
“거짓말하지 마, 공주님.”
그러고는 웃었다.
“공주님은 이미 나한테 정 붙었잖아.”
“…….”
그냥 멍했다. 내가 무슨 상황에 처해 있는지도 이제 잘 모르겠다.
“그게 아니면 쓸데없이 날 감싸긴 왜 감싸? 내가 다쳤을 때는 막 화내더니 지금은 화도 안 내잖아. 나 다른 것도 잘하는데 거짓말인지 아닌지 알아내는 건 더 잘해.”
렌이 손가락으로 천천히 내 목을 훑어 내렸다. 나는 정말 마법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옴짝달싹도 하지 못한 채로 얼어 있었다.
“공주님 얼굴도 빨개졌고, 심장도 빨리 뛰고.”
렌의 양손이 내 허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보란 듯 나를 안아 올리더니 이마를 맞대고 빨간 입술로 속삭이듯 나긋하게 말했다.
“나 똑똑하다고 몇 번 말해, 공주님. 나 다 알아. 내가 바보 같아 보였어? 물론 그 취급도 싫었던 건 아니야. 나는 공주님이 주는 거라면 다 좋거든.”
렌의 손이 내 귓가를 어른거리다가 곧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근데 생각보다 더 좋다. 공주님. 원래 사람들은 다 이런 거 하고 사나? 왜 다들 공주님이랑 결혼하려고 지랄인지 알 것 같아.”
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렌은 한참을 그렇게 굳은 얼굴로 내 눈을 삼켜버릴 것처럼 보고 있더니 곧 다시금 내 입술을 머금었다.
그제야 나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느새 내 근처로 와 있는 남자 둘.
그리고 대놓고 나를 껴안고 있는 렌.
렌이 뭘 하려는지 대충 감이 왔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과 나의 관계를 더 확실하게 정립하고자 하는 거겠…… 지?
아니, 원래 이런 의도가 맞았나? 아니면 그냥 어쩌다 보니까 이렇게 된 거야?
“하, 생각할수록 엿 같네.”
렌이 내게서 느릿하게 제 입술을 떼어내고 비릿하게 웃으며 두 남자를 바라보았다.
“으응, 기분 더러워. 내가 공주님 발견 안 했으면 저 자식들이 이 짓 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짜증 나. 공주님. 어떡하지? 참기 힘든데…….”
렌이 나를 꼭 껴안았다. 양 뺨이 붉게 달아오른 채로 기분 좋은 티를 팍팍 내면서 말이다.
“뭐, 괜찮아. 쟤들도 눈이 있으면 알겠지. 나 공주님 말대로 착해서 공주님 심신에 해가 되는 짓은 안 해. 공주님 겁쟁이잖아. 날 무서워하면 절대 안 돼.”
렌이 나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다시 뒤에서 꼭 안았다. 그리고 제 이마를 내 머리에다 비비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왕성으로 갈 거야.”
그러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손가락으로 레오닐을 가리켰다.
“너희들 계획은 다시 세워. 조금이라도 더러운 의도가 느껴질 시에는, 나도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네?”
렌의 말에 반응한 건 다름 아닌 카일이었다.
“……처음부터, 이러실 작정이었습니까?”
카일이 애써 무언가 참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물론 옆에 있는 렌은 참지 않았다.
“눈깔 똑바로 떠.”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내뱉은 대사는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마법사, 당신이 끼어들 일이 아닙니다.”
“방금 못 봤어? 눈깔 장식이야? 내가 왜 못 끼어들어. 조금만 있으면 공주님은 내 부인인데.”
머릿속이 하얘졌다. 나,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거지. 이게 현실은 맞나?
나 지금 뭐 하고 있었더라?
“아, 꼬맹아. 놀라지 마. 공주님 나랑 결혼하기로 했거든. 그러니까 너도 그 대단한 계획 처음부터 다시 세워야 할걸? 그렇지, 공주님? 응?”
렌은 나를 뒤에서 꼭 끌어안은 채 내 볼에 제 입을 맞췄다.
난 바보처럼 그냥 움찔거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망할. 착하고 순진해 빠졌다는 거 다 취소다.
얘, 뭐야?
뭐 하는 놈이야!
“자세한 이야기는 왕궁에 가서 하는 게 좋겠다.”
렌이 해맑게 웃으면서 내 손을 꼭 잡았다.
“구원자님.”
레오닐이 처음 보는 당황한 얼굴로 나와 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나는 그제야 좀 말다운 말을 할 수 있었다.
“허어어어. 허어어어…….”
“공주님 도망치지 마. 부끄러워?”
“으아아악! 이 미친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