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렌, 나는 공주님이 아니,”
“맞는데? 공주님이 내 공주님 아니면 뭐야?”
“…….”
입이 절로 벌어졌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쟤, 지금 공주님이 보통 무슨 뜻으로 쓰이는지 알고 저러는 거다.
분명히.
“그리고 내가 공주님한테 협조적인 건 공주님이랑 내가 결혼을 약속한 사이이기 때문이야!”
“…….”
“연인 사이에서는 당연한 거잖아?”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가 금방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아니지, 얼굴이 아니라 뇌가 새하얗게 질리는 기분이었다.
정신이 아주 아찔했다.
지금 나한테 중요한 사안은 그게 아닌데 얘는 나를 무슨 삼천포로 빠지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그 밑에 묻어 버릴 작정인가 보다.
“너, 너 뭐 알고, 하는 말,”
“당연하지. 나 똑똑하다니까?”
“…….”
말문이 턱 막혔다. 렌이 하는 소리가 이론적으로는 틀린 소리는 아닌데, 그러니까, 애초에 결혼 얘기는 거의 거래나 다름없는 제안이었으니까 저건 틀린 말이 되는데…….
“공주님 표정이 왜 그래?”
렌이 대뜸 내 양 뺨을 움켜잡고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조금만 더 다가오면 입술이 닿을 것같이 가까이.
“갑자기 곤란한 얼굴로 쳐다보면 기분 더러워지잖아.”
나는 손바닥으로 렌의 얼굴을 밀어냈다. 밀어낸다고 쭉 밀쳐지는 렌이 더 어이가 없었다.
“렌, 네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는 이런 얘기를 하려고 여기 있는 게 아니라,”
“나는 이런 얘기 하려고 쟤들이랑 떨어진 거 맞는데? 공주님은 나랑 결혼하기 싫어?”
나는 내 양 뺨을 아직도 붙잡고 있는 렌의 손목을 거칠게 아래로 내렸다.
“아니, 렌, 그러니까 지금…….”
뭐라고 말은 해 줘야 할 것 같은데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렌은 분명 내게 제 의사를 표현했다. 어떻게 하고 싶은지, 왜 지금 내 옆에 있는 건지.
물론 렌의 감정이 이해가 되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남자한테 고백 비슷한 거 받아 본 것도 처음인데 그 처음이 존잘 마법사다? 마술사 아니고 마법사다. 마법사!
내가 지금 현실감이 들 것 같아?
그리고 누가 고백을 저따위로 해!
“쟤들이 하는 건 딱히 어려운 얘기가 아니야. 어차피 공주님이랑 상관없는 것들뿐이잖아.”
렌이 내게 붙잡힌 손을 들어 올려 내 허리에 얹고 화사하게 웃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세계 정복이니 뭐니, 공주님은 집에만 가면 끝 아니야?”
나는 움찔거리며 너무 가까워진 렌에게서 벗어나려고 했고, 그는 그러거나 말거나 같이 움찔거리며 내 쪽으로 더 바짝 붙었다.
나는 무슨 왈츠 스텝 밟는 줄 알았다. 한 걸음 물러서면 한 걸음 쓱 다가오는 게 아주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틀린 말은 아닌데……, 아니 내가 집에 가려면 그 코어인지 뭔지 필요하다며!”
내 말에 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러면 상식적으로 마탑은 거대한 단체고 지금 마탑이랑 제국이랑 그리고 나 찾아온 미친놈들까지 얽혀 있는 복잡한 상황에서 주도권을 쟁취해야 코어에 접근을 하든 말든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내 말에 렌이 눈을 도르륵 굴렸다. 뭔가 고민하는 눈치였다.
“음, 괜찮아, 공주님. 귀찮은 놈들 일은 알아서 하라고 해. 우리는 마탑만 붕괴시키고 시간만 벌면 되는 거 아니야?”
“……렌, 와중에 미안한데, 그렇게 되면 네 조건이 안 맞잖아. 너 나 집에 보내 주기 싫다면서.”
렌이 답답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공주님 집에 보내 준다니까? 나랑 결혼하면?”
“그러니까 그게 말이 안 된다니까?”
내가 나긋한 말투로 따지자 렌이 한숨을 푹 내쉬며 내 귀에 대못을 박았다.
“왜 말이 안 돼? 나 공주님 따라갈 거야.”
“…….”
와, 설마가 진짜가 됐다. 진짜 설마설마했다. 쟤가 말한 나는 ‘최시아랑 결혼한다!’라는 말이 진심일 줄은 정말이지……, 정말!
“뭐야. 공주님 표정 왜 그런데?”
“……렌, 상식적으로,”
“공주님이 상식이 어딨는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너 말 예쁘게 안 할래?”
“공주님처럼 말하면 예쁘게 말하는 거야?”
렌이 내 허리에 올린 손을 꼼지락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튼 공주님은 마법에 대한 건 아예 모르잖아. 내가 따라간다면 따라가는 거야.”
“……아니, 렌. 그러니까, 이건 상식적으로 가능할지 말지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결혼이라는 건 그렇게 간단히 정하는 게 아니야!”
“공주님은 간단하게 정했잖아. 나랑 결혼한다고.”
렌이 대놓고 굳은 얼굴을 하고 나를 노려보았다. 미간이 깊게 팬 걸 보니 삐진 기색이 역력했지만…… 나는 쟤가 삐진 걸 알아차리고 싶지 않았다.
아니 왜 삐져! 제발!
“렌, 그거야 나는 원래 이곳 사람이 아니고 네가 원래 원하던 건 나랑 사랑해서 하는 정상적인 결혼이 아니라, 권력을 위한 계약 결혼이었잖아.”
“나는 그렇게 말한 적 없는데? 권력을 원한 건 맞지만 계약 결혼이라고는 안 했어.”
“…….”
렌이 여전히 토라진 얼굴로 내게 치대기 시작했다.
“그럼 내가 공주님 사랑하면 공주님은 나랑 결혼하는 거야?”
“……렌, 여기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결혼은 쌍방의 합의 후 신중히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해.”
“합의했잖아, 공주님. 나랑 결혼하면 공주님을 집에 보내 준다. 아니야?”
나, 얘를 어쩜 좋지? 총체적 난국이었다. 사실 크게 고민할 것도 없었다. 결혼이 뭐 대수인가.
어떤 사람은 돈만 보고 결혼하고, 또 어떤 사람은 명예를 위해 결혼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현재 집에 돌아가는 것만큼 중요한 건 없으니까, 결혼쯤이야.
한국에서의 결혼이 조건으로 바뀐다고 해도 충분히 협상할 만한 조건이었다.
문제는 그거지.
“렌, 너 나 좋아해?”
“좋아한다는 게 뭔데? 만지고 싶고, 안고 싶고, 같이 있고 싶고, 먹고 싶으면 좋아하는 거야?”
“도대체 먹고 싶은 건 왜 나오는 거야……?”
황당했다. 아니, 진짜야? 진짜 나한테 반한 거야? 아니 왜?
“가끔 공주님 보면 입에 넣고 싶어.”
“…….”
아, 현기증.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너무 다행이었다.
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이 안 왔다.
아니……, 아니!
“렌…… 꼭 네 감정에 나한테 일일이 솔직하게 보고할 필요는 없어…….”
“공주님 얼굴 빨개졌는데? 좋은 거 아니야?”
“……쪽팔린 거야!”
“아하.”
나는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가렸다. 한가하게 지금 이런 대화나 나누고 있을 때가 아닌데. 나 어떡하니?
어쩌면 좋지?
어떻게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 머리 아파.
“공주님도 나랑 똑같이 생각했으면 좋겠어. 나는 공주님 같은 사람 못 봤거든. 공주님도 나 같은 사람 못 볼 거야.”
렌이 너무나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래. 이 세상에 렌 같은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겠어. 아, 이 세상은 모르겠고, 적어도 지구에는 없는 게 확실하다.
“나는 공주님이 소중해졌으니까 공주님도 빨리 나를 소중하게 여겨. 그래야 결혼도 빨리하지.”
“렌, 진짜 미안한데, 네가 뭔가 착각,”
“…….”
렌의 눈이 자줏빛으로 변했다. 짐짓 붉은색으로 보이는 듯도 했다.
렌은 대놓고 정색을 하며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공주님, 내 감정을 의심하는 거야? 나는 감정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원한다면 보여 줄 수도 있어.”
렌이 웃음기 하나 담기지 않은 어투로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나 이론적인 건 되게 잘 알아. 이제 질투가 뭔지도 대충 감이 와서 공주님이 나 말고 다른 놈이랑 결혼한다고 하면 나 어떻게 될지도 몰라.”
“……어떻게 될 건지 물어봐도 되니?”
“내가 바보야? 공주님한테 안 알려 줄 거야. 알면 싫어할 테니까.”
“…….”
그러고는 기분이 풀렸는지 다시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리고 이제 진짜 개수작이 뭔지도 알아. 나 어떻게 써먹는지 완벽하게 이해했거든.”
“……렌, 일단 알았으니까 그 문제의 나를 따라온다느니 어쩐다느니 그것부터 설명해 줄래?”
내 말에 렌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 반응은 또 뭐란 말인가.
“안 알려 줄 거야. 비밀이거든.”
“렌. 나 장난하는 거 아니야.”
내가 짐짓 단호한 어투로 폼을 잡으며 으름장을 놓자 렌이 귀엽다는 듯 픽 웃으며……, 그러니까 귀엽다는 듯…….
“공주님 얼굴 또 빨개졌네?”
렌이 내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고는 제 뺨에 가져다 댔다. 나는 낯이 뜨거워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걱정 마, 공주님. 나도 장난하는 거 아니야.”
진지한 사람치고는 굉장히 가벼운 말투였다. 물론 렌은 언제나 가볍긴 했다.
문제는 가벼운 행동과 달리 저 예쁜 조동아리에서 나온 말은 이백 퍼센트 진심일 때가 대부분이라는 거지만
“아, 맞다. 나, 공주님한테 엄청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공주님 오기 전에는 목표랄 게 딱히 살아남는 거 말고는 없었는데, 공주님 만나고 갱신됐거든.”
“……렌, 내가 정말 정말 네 감정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은데.”
“나 공주님이랑 살면 행복할 것 같아. 공주님도 그렇지? 그래야 해.”
“…….”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