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113)

<75>

렌은 얌전하게 서 있는 금발의 소년에게 막 따지듯이 물었다.

“야, 물어봤잖아. 대답 안 할 거야?”

그에 나는 황급하게 렌의 팔을 붙잡아 내 뒤로 끌어당겼다.

“렌, 쫌!”

“웅. 알았어. 얌전히 있을게, 공주님.”

렌의 손가락이 내 뒷목에 닿았다. 그 순간 상쾌한 바람이 불었다.

렌은 무슨 청결 마법을 내 기분 전환 용도로 아는 건지 시도 때도 없이 남발하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문제는 솔직히 기분이 한결 나아지긴 했다는 거지만.

렌은 등 뒤에서 내 머리칼을 한참 만지작거리더니 나긋나긋한 말투로 금발의 남자아이에게 물었다.

“그래서 너네가 생각한 각본은 뭔데?”

그러자 아이가 정중하게 대꾸했다.

“그것은 노아 장로님이,”

물론 렌은 참지 않고 말을 끊으며 물었다.

“내가 왜 널 먼저 포탈 안으로 던져 넣었을까?”

날카롭게 따지던 렌은 잠깐 멈칫하더니 곧 한결 다정해진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 노인네가 가짜라는 걸 아니까 널 집어 던졌겠지? 너희 쪽에서도 그 사실을 인정하니까 따로 따라오지 않고 지금 포탈을 닫아 버린 거잖아? 분명히 우리 공주님은 그 노인네더러 따라오라고 했는데, 또 명령은 개무시했고.”

내 머리칼을 만지던 렌의 손길이 뚝 끊겼다. 열받는 모양이었다.

“아니야, 나는 착하니까 말로 해야지. 그럼 그럼. 맞지, 공주님?”

남자아이는 의외로 렌의 말에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성인인 렌보다 성숙한 태도로 답할 뿐이었다.

“미처 그런 부분까지는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대의 말대로 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노아 장로가 아닌 저였으니, 이미 진실이 간파된 이상, 굳이 장로님을 모실 필요가 없다 판단하여 문을 닫았습니다.”

아이가 정중하게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무슨 기사처럼 선언하듯 말했다.

“제 이름은 레오닐 칼라드. 위대한 마탑의 후예이자, 또 하나의 태양. 라크라시스의 후계자가 구원자님을 정식으로 모시기를 청합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됐고, 상황 설명부터 해. 너네들이 점지한 용사님이 많이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으니까. 둘이 얘기 먼저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사실 거의 핑계였다. 도저히 당장이라도 사람 하나 죽일 것처럼 인상을 구기고 있는 카일과 얘기할 자신이 없었다.

심지어 시종일관 내 옆에 렌이 찰싹 달라붙어 있으니 괜히 상황 설명이랍시고 대화하다가 상황이 더 지옥행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공주님 내가 설명할,”

나는 일단 렌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무작정 뒤로 잡아끌며 말했다.

“오 분 줄 테니 알아서 하고 경은 분노 좀 식히고 오게. 그러다 한 대 때리겠어?”

나는 렌의 등을 열심히 밀어 근처의 커다란 나무 뒤로 향했다.

“공주님, 나랑만 있고 싶어?”

나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고 대충 저들이 내 대화를 듣지 못할 위치까지 이동한 후 한숨을 푹 내쉰 뒤 렌의 소맷자락을 잡으며 말했다.

“렌, 네가 나 대신 화내 준 거하고 입 털어 준 거 진짜 고맙거든? 완전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어.”

“정말?”

렌의 얼굴이 더없이 환해졌다. 그 덕에 어쩔 수 없이 자동으로 시선이 다른 곳을 향했다.

도저히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얼굴이다. 정말.

렌이 차라리 싹퉁바가지라도 없었으면 이 정도까지 내가 몸을 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렌, 렌! 그만 와!”

“공주님 왜 내 눈 피해?”

렌은 대놓고 내게 바싹 붙었고, 나는 두 손으로 렌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말했다.

“렌, 정말, 나는 있잖아, 너 다 좋은데, 좀 사람 성질은 적당히 긁는 게 좋을 것 같아. 지금 내 입장이 상당히 곤란하게 됐거든? 원래 사람이라는 게 병 주고 약을 안 주면,”

“공주님 나 신경 쓰여? 응?”

렌은 내게 자신이 밀리거나 말거나 긴 팔을 뻗어 내 이마 위로 축 늘어진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톡 하고 튕겼다.

그리고 방긋 웃었다. 하필이면 날씨가 좋을 게 뭐람.

렌의 크림색 머리에 햇살이 반사되어서 눈이 좀 부신 느낌이었다.

지금 쟤 얼굴 감상할 때가 아닌데 말이다.

“나한테 막 고맙고 그래? 내가 갑자기 특별해졌어? 공주님 얼굴 빨개졌는데.”

“……그게 아니라, 내가 전에도 말했듯이 너는 내 생명의 은인 같은 거고, 지금으로서는 가장 믿을 만한,”

“응응, 내가 계속 부담스러워져야 해. 나 전략을 바꿨거든. 난 똑똑하니까.”

뭔 개소리야……?

렌이 내 말을 끊어 먹고 제 할 말만 하며 굉장히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전에 책에서 본 게 완전히 이해가 되는 건 아니었는데, 최근 들어서 왜 저자가 그렇게 서술해 놨는지 드디어 이해했어. 공주님. 역시 실습이 중요한가 봐. 그렇지?”

렌과의 대화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이렇게 앞뒤 다 잘라먹고 수수께끼 던지듯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바로 내 눈앞에 있지. 하하.’

나는 애써 렌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

“조금만 안으로 들어가면 플로린스 수도야. 여기 좌표 찍어 본 적 있어서 잘 알아, 공주님.”

렌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어서 칭찬하라는 듯 입꼬리를 씩 끌어 올렸다.

하지만 딱히 말을 얹어 주고 싶지는 않았다. 괜히 입 열었다가 나만 궁지로 몰릴 것 같기 때문이다.

“렌. 넌 날 계속 도와줄 작정이야? 나 저번에 네가 한 이야기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은데.”

“…….”

순간 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으음, 공주님 나는 뭔지 기억이 안 나는데? 내가 무슨 말을 했어?”

“너 나 집에 보내 주기 싫다고 했잖아.”

“…….”

렌은 티 나게 내게서 고개를 팩, 돌렸다. 꼭 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말이다.

“그런데 왜 날 계속 도와주고 있는 건지 물어봐도 돼? 나 네 생각이 궁금해.”

내 말에 렌이 고개를 푹 숙이며 연신 제 주먹을 쥐었다 폈다.

얼마나 꽉 쥐는지 손바닥에 자국이 남을 정도였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잘못하다가는 손바닥에 흉이라도 질 것 같았다.

렌이 어디 정상 범주 안에 들어가는 인간이었나.

설마가 사람 잡는다.

나는 살포시 렌의 두 손을 잡아 내 가슴께로 끌어 올렸다.

그러자 렌의 손에서 순식간에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공주님 나 아니면 쟤들한테 이용당해.”

“너랑 상관없잖아. 어쨌든 우리 계약은 결혼하는 대가로 날 집에 돌려보내 준다는 거였으니까. 렌, 아직도 나랑 결혼할 마음이 있어?”

“…….”

렌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더니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만약 네가 나랑 결혼하지 않는다면 나는 놈들의 계획대로 카일과 결혼하게 될 거야. 그게 아니라면 왕실에서 정해 준 혼처와 결혼하겠지.”

내 말에 렌이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내 전신을 훑기 시작했다.

내 손을 잡고 있는 렌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싫어.”

“솔직히 말해 내게 주어진 현재의 상황 속에서 믿을 만한 사람을 꼽으라면 너밖에 없어.”

맞는 말이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렌이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했다.

그러니까 제 목적인 결혼도 포기하고 나를 집에 돌려보내기 싫다고 말을 흘린 게 아니겠어?

“렌, 나는 네 감정을 이용하고 싶지 않아. 네가 무슨 생각으로 나를 도와주고 있는지 냉정하게,”

그때였다. 렌이 싸늘한 얼굴을 하고 내 입술을 엄지로 꾹 누르며 말했다.

“공주님이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렌의 눈이 보라색으로 물들어 갔다.

“공주님이 날 이용하고 있는 게 아니지. 내가 무슨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용병인 줄 알아?”

“…….”

렌이 특유의 미친놈 같은 얼굴로 씩 웃으며 허리를 굽혀 내게 바짝 다가왔다.

“공주님을 따라다니는 건 순전히 내 의지고. 공주님을 처음 발견한 건 나니까, 공주님은 내 거야.”

렌이 두 손으로 내 양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여기서 나는 그게 뭔 개소리냐고 화를 내야 했다.

그런데 쟤가 일부러 저러는 건지 그냥 몰라서 그러는 건지.

감정을 숨길 생각도 없이 그대로 내뱉으며 결정타를 날렸다.

“공주님이 다른 놈들한테 잘해 주는 꼴 나는 못 봐. 나도 몰랐는데 나 욕심 많나 봐. 이걸 독점욕이라고 하나? 소유욕?”

렌이 비릿하게 웃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건 독점욕이나 소유욕이 아니라 네가 그냥 나한테 반한 것 같다고 정정해 주고 싶었지만 나는 렌과 달리 분위기 파악을 할 줄 알았기에 입을 닫았다.

“공주님. 내가 계약한 사람은 시아야. 리나 플로린이 아니라.”

오랜만에 듣는 내 이름에 순간 등골이 쭈뼛 섰다.

“그러니까 내가 결혼할 사람도 리나 플로린이라는 가짜 공주님이 아니라 최시아가 되는 셈이지. 이제 알겠어?”

렌이 씩 웃으며 내 눈가를 엄지로 쓱 문질렀다. 심장이 절로 쿵쿵 대기 시작했다.

왜 뛰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공포감 아니냐고?

뭐, 맞을 수도 있다. 문제는 그 공포가 생리적 공포감이 아니라는 거지.

“나는 진짜 공주님이랑 결혼할 거야. 그럼 공주님도 집에 돌려보내 줄 수 있지.”

“그게 무슨…….”

“공주님 나랑 결혼해야 한다고.”

도대체 저건 또 뭔 개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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