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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지금 상황은 최악이었다.
카일도 내 정체를 완전히 알아 버린 거나 다름이 없고, 나는 단순히 마법적 오류가 아닌, 뭔가 목적을 가진 단체에게 소환되었다는 사실을 알아 버렸다.
그리고 내가 지금 유일하게 의지하고 있는 사람인 렌은…….
내가 집에 돌아가는 것에 호의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렌이 내게 위협이 되거나 해가 되지는 않지만.
“지금부터 거짓말을 하는 순간, 네 혀를 자를 것이다.”
나는 드라마에서나 본 되도 않는 협박을 내뱉었으며 정보를 캐내려 했다.
렌이 옆에서 진짜 혀를 자르려고 준비만 안 했다면 내 연기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공주님 이게 아니야? 왜 그렇게 봐?”
나는 어디서 구했는지 단검을 꺼내 들고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렌을 보고 착잡한 마음으로 그의 손등을 쓰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야. 믿을 건 너밖에 없는 것 같아서.”
“그렇지? 봤지, 용사야?”
아무튼.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내가 이렇게까지 머리를 쓰는 날이 오다니. 나도 생각보다 절박한 모양이었다.
뭔가 생각하고 고민하느라 머리가 아플 수 있다는 건 여기 와서 처음으로 느껴 본다.
공부를 좀 이렇게 할걸.
아니지, 공부 열심히 했다가 괜히 또 상상도 못 하게 성공했으면 지금 더 절망스러웠을지도 몰랐다.
어딜 가나 평범한 게 최고지. 그럼 그럼.
나는 일단 놈들의 신상 정보를 캐냈다.
대충 알아낸 바로는, 단체의 규모는 총 이천 명 정도. 전원 다 마법사다.
렌의 설명을 들어 보니 이쪽이 바로 ‘흑마법사’라고 불리는 범인인 것 같았다.
‘미친, 더 찝찝해.’
차라리 신전에서 ‘당신이 바로 성녀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했으면 좀 고민해 볼 법한데 이건 완전히 최악이었다.
왜 하고 많은 용사물의 조력자가 신전인지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하…….”
나는 한숨을 쉬며 내 얼굴을 쓸었다.
“흑마법사……, 흑마법…… 하…….”
그래서 이들이 왜 흑마법사라고 불리는가.
보통 지금의 마법사들은 자연 발생 마나를 심장에 축적시켜 사용하지만 이들은 공기 중에 떠다니는 마나 입자를 즉석에서 모아 사용한다.
즉,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는 현세의 마법사보다 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고 했다.
그러니까 기존 세력인 마탑의 마법사들은 규격 외의 존재이며 소수인 그들을 ‘악’으로 규정하고 핍박한다고 놈들은 말한다.
사실 내가 보기에도 충분히 나쁜 놈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법했지만.
그런 오해 받기 싫으면 컨셉부터 바꿨어야지. 세상은 보이는 게 그래도 반은 먹고 들어가는데.
뭐, 어차피 얘들은 현 권력자들을 매우 증오하는 모양이니 굳이 이미지 개선을 할 필요성을 못 느낀 모양이지만.
어쨌건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금의 마법사들이 규제해 놓은 이동 마법 또한 신체에서 발생하는 고유 마나가 아니라 외부 마나를 사용하기 때문에 추적이 불가능하단다.
“…….”
나는 대강 필요한 정보를 다 듣고, 망연자실한 얼굴로 굳어 있는 카일을 흘끗 쳐다보았다.
……솔직히 말 못 걸겠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공주님, 뭘 보고 있어? 냅둬. 지금이라도 떨어져 나가면 좋고?”
렌은 이러나저러나 상황이 제 뜻대로 돌아가서 좋다는 듯 생글생글 웃었다.
그러고 보면 렌은…… 도대체 언제부터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걸까? 상황이 돌아가는 꼴을 보자니, 렌은 이들이 나타날 걸 미리 예상하고 있었고, 대처도 물 흘러가듯 자연스러웠다.
분명 처음 봤을 때만 해도 렌의 사회성은 완전 어린아이 그 자체였는데 말이다.
물론 그거랑 별개로 지식은 그때도 풍부해 보이긴 했지만.
“그래서 공주님. 저 노인네만 데려갈 거야? 나머지는 그냥 보내면 여러모로 위험할 텐데.”
렌이 손을 쫙 펼치고는 손가락 몇 개를 까딱거렸다. 그러자 딱 봐도 불길해 보이는 검은 불길이 아주 작게 솟아올랐다 사라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렌의 눈을 쳐다보았다.
또 보라색으로 변했다.
아니, 저거 숨겨야 하는 것처럼 굴더니 아니었어?
렌이 씨익 웃자 놈들의 낯빛이 단체로 하얗게 질리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하긴, 적으로 만나면 좀 살벌하긴 하지.
“방법이 있어?”
“당연하지. 공주님. 그때 본 제국 암살자들 있지? 중요한 애들은 목 뒤에 검은색 낙인을 찍어. 나 그거 엄청 잘해.”
“……낙인을 찍어서 뭐 하는데?”
내 말에 렌이 자신 있게 대답하려다가 아차 싶다는 기색으로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렌?”
“말 안 할래. 비밀이야. 공주님.”
“하!”
그에 뒤에서 카일이 비웃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한 삼십 분 동안 얼어 있다가 처음으로 내뱉는 소리였다.
“나한테 한 것처럼 저자들의 목숨도 쥐락펴락하기 위함이겠지.”
카일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카일은 선명한 적의를 내비치고 있었고, 나로서는 사람이 내보이는 적의를 처음 목격하는 것이기 때문에 괜히 몸이 움츠러들었다.
물론 죄책감 때문도 있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지? 내 말이 틀렸나?”
카일이 기가 찬다는 듯 렌을 삐딱하게 노려보았고, 렌은 곧장 내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도대체 뭘 안심했는지 모르겠는데, 방금 전까지 누구라도 썰어 버릴 것처럼 정색하더니 금방 부스스 풀린 얼굴로 태연하게 대답했다.
“뭐, 굳이 겁줄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말 안 했는데 용사님이 말해 버렸네? 어때, 공주님. 그렇게 해도 괜찮아?”
렌은 내 대답도 듣지 않고 제멋대로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검은 불길이 놈들의 발밑에서 화르륵 피어올랐고, 놈들은 절망했다.
“음, 아니다. 어차피 공주님 나 말릴 시간도 없었고, 이건 내가 독단적으로 행동한 거야. 공주님. 알겠지?”
렌의 선택은 옳았다. 쟤들을 그냥 보낸다면 충분히 위험 요소가 되는 것도 맞았고, 나는 놈들의 우두머리에게 내 의사를 확실히 보여 줄 필요도 있었다.
그런데 그거랑 별개로…….
렌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식으로 구는지 이해가 갔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죽음에 익숙하지 않은 상태였다.
누굴 죽이는 건커녕 잘 때리지도 못한다.
렌은 나랑 지내면서 그걸 캐치한 거고.
지금도, 내가 남의 목숨을 쥐락펴락하는데 불쾌감을 느끼고 꺼려 하니까 자기 멋대로 먼저 행동한 다음에 책임을 본인이 지려 하잖아.
“…….”
저게 아무것도 모르고 한 행동이라고 넘겨짚기에는 너무 말이 안 된다.
분명 내 눈치를 살피고 한 행동이다.
진짜 사람 생각 복잡하게 만드는 데 뭐 있다.
나는 다른 생각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대의 이름은?”
잔뜩 굳은 목소리로 노인에게 물었다.
그에 노인은 잠깐 분노한 기색을 보이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한없이 인자한 얼굴로 정중하게 대답했다.
“노아입니다. 구원자님.”
나는 잠깐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말했다.
“좋아. 그대는 나와 함께 플로린스로 간다. 대충 내가 플로린스로 돌아오는 와중에 은혜를 입었다는 걸로 가지.”
“예. 명 받들겠습니다.”
노아라는 생각보다 멋진 이름을 가지고 있는 노인이 자리에서 우아하게 일어났다.
분위기는 여전히 좋지 않았고,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원 모양으로 빙 둘러서서 기이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바닥에는 검붉은색의 마법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마법진에서 흘러나오는 왜인지 모를 음산한 느낌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렌은 그런 내 반응을 보고 여전히 해맑은 얼굴로 내 팔을 잡아 주었다.
그리고 저만 믿으라는 듯 의기양양하게 나를 쳐다보는데…….
아니, 생각해 보면 집에 보내 주기 싫다고 그랬으면서 나는 왜 도와주는 걸까?
살짝 이해할 수가 없었다.
렌의 목적은 그냥 나랑 결혼하는 거뿐이잖아?
결혼만 하면 되는데 굳이 이럴 필요까지 있어? 물론 권력이 필요하다고도 하긴 했다.
하지만…….
이왕 하는 권력 쟁취, 더 확실하게 하려고 그러나?
준비를 다 끝마친 모양인지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는 원 중앙에 게임에서나 보던 커다란 포탈이 생겼다.
렌은 흠, 소리를 내고는 내 손을 꼭 잡고 의기양양하게 원 중앙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용사야. 안 오고 뭐 해?”
“…….”
카일은 렌을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내 쪽으로 시선을 던지지 않으려 노력하며 고개를 홱, 돌리고 우리를 뒤따랐다.
렌은 그런 카일의 반응이 신경도 쓰이지 않는지 룰루랄라 인파를 헤치면서 손에 닿는 대로 사람들이 뒤집어쓰고 있는 로브의 모자를 하나둘 벗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당황한 얼굴로 렌을 쳐다보았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은 왜 까 보는 거지?
“음, 혹시 몰라서 둘러봤는데.”
그러고는 누군가의 앞에 딱, 멈춰 섰다.
확! 렌이 거칠게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로브를 낚아채더니 거칠게 잡아당겼다.
렌의 손에 의해 로브는 맥없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
15살 정도 되어 보이는 금발의 소년이었다.
렌은 뭔가 거슬리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방긋 웃으며 허리를 굽혀 소년에게 제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여기 진짜 대가리가 너구나?”
렌은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려 웃었다.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