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2/113)

<72>

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당당하게 말했다.

“음……, 일단 공주님 말대로 지금 당장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그러고는 내게 칭찬받으려는 사람처럼 기대에 부푼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공주님. 쟤들이 완전 허당은 아닌 것 같아. 보니까 그 긴 세월 동안 성과를 내긴 했더라고? 대륙 전체에 퍼져 있는 마나 파동 감지장을 피하는 방법이 있어.”

렌의 말에 노인이 입에서 피를 토하며 눈에 핏발을 세웠다.

솔직히 조금 무서웠으나, 렌의 태연한 표정을 보고 가슴을 쓸었다.

별일 없겠지, 뭐.

“대체 그걸 어떻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배신자여? 그 입 닥쳐라!”

노인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고, 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물어 왔다.

“공주님 이제 어떻게 할까? 억지로 포탈을 열게 할 수는 있어. 그런데 용사 말대로 저 인원을 다 끌고 넘어가면 이목이 집중되긴 할걸?”

렌의 말에 나는 고민 할 수밖에 없었다. 맞는 말이었다. 아무래도 쟤들은 누가 봐도 수상해 보였다. 게다가 쟤들도 일종의 병력과 같은데, 만약 다 데리고 플로린스로 갔다가는 왕자가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알아낸 거야?”

“……공주님?”

내 말에 반응한 건 렌도 아니고 다름 아닌 카일이었다.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는 듯 인상을 구기고는 내게로 한 걸음 다가왔다.

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더니 제 허리를 숙여 내 귓가에 속삭였다.

“공주님, 나 머리 잘 썼지?”

그리고 상큼하게 카일에게 윙크까지 날려 주며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우리 왕자님 죽어. 알지? 나랑 계약까지 했잖아.”

“…….”

“그러니까 그딴 식으로 쳐다보지 마. 네가 선택한 거잖아?”

렌이 허리를 펴고 여유롭게 내 어깨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여전히 시선은 카일에게 고정시킨 채로 말이다.

카일은 살짝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렌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이 검을 더 세게 꾹, 쥐자 힘줄이 도드라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본인의 선택에 대한 책임은 알아서 지는 거야. 그건 나도 배웠는데. 왕자님은 더 잘 알 거잖아?”

렌이 아쉽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는 벌써 기회를 많이 줬는데. 도망가지 않은 건 전적으로 왕자님 책임이지. 그럼 그럼.”

그러고는 내 손을 잡아 제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공주님,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어?”

렌의 길게 뻗은 손가락이 놈들을 가리켰다.

솔직히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신경 쓰이게 만드는 카일을 나는 빤히 쳐다보다가 곧 고개를 돌렸다.

물론 렌이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카일의 목숨을 담보로 뭔가 계약을 한 건 괘씸했지만 아무튼 그건 둘만의 문제였다.

그걸 제외하고는 렌이 틀린 말을 한 것 같지도 않아서,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헷갈렸다.

“너희들이 날 소환한 건 확실한가?”

내 물음에 노인은 분노하던 표정을 싹 지우고 더없이 영광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예! 구원자님!”

“나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건 오로지 제국의 몰락뿐인가?”

놈들은 나름 내게 논리정연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놈들은 내가 자신들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드디어’ 눈치챈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영화나 소설 속 용사나 성녀 같은 존재이길 바랐던 거 같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런 반응은 정말 말도 안 되지.

“배신자들이 훔쳐 간 우리의 것들을 되찾을 것입니다. 현재 이곳의 배신자들은 사람들의 고혈을 쥐어짜 이 땅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구원자님, 저희는 악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저, 세계의 평화를 위해 움직일 뿐입니다.”

와. 내가 살면서 세계 평화라는 단어를 두 귀로 직접 듣는 날이 오다니.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사실 그런 말 할 만큼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단체 이름은 뭔가?”

“……라, 크라시스. 또 하나의 태양이라는 뜻입니다. 구원자님.”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이름도 더럽게 뻔하다.

“자네는 이 단체의 우두머리인가?”

내 물음에 노인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저는 라, 크라시스의 일개 장로일 뿐입니다. 단주님께선 아직 외부에 노출되시면 안 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구원자님.”

나는 미간을 문질렀다. 그러면 지금 이 단체의 정원이 이것보다 많다는 소리인가?

“그대들의 목표를 위해 내가 필요한 이유는?”

내 말에 노인이 잠시 망설이는 듯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뭔가 결심한 듯 제 입술을 꾹 깨물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해진 계시록대로라면 이 세계는 멸망할 것입니다.”

“…….”

할 말이 없었다. 뭔 개소리람.

“이미 인류는 정해진 금기를 깨고 욕망을 실현했습니다. 겨우 과거의 영광을 찾은 듯싶지만 이는 일시적인 것. 절대자들의 격은 추락하였고, 머지않아 이 세계는 세계선에서 추방될 것입니다.”

“아.”

무슨 헛소리를 기깔나게도 한다 싶어서 헛웃음을 지으며 카일과 렌을 쳐다보았다.

그리나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둘의 얼굴이 나랑 다르게 심각해 보였으니까.

뭐지? 저거 진짜로 하는 말이야?

어이가 없었다. 아니, 멸망이라니. 내가 아는 지구 멸망이라고 해 봤자, 현실적으로 지구 온난화나, 아니면 운석 충돌 같은 다소 허황된 재앙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여기가 다른 건 다 구려도 환경 하나는 끝내준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대기 오염이나 지구 온난화 뭐 이런 걸로 멸망할 것 같지는 않고.

그럼 운석이라도 떨어진다는 얘기냐, 하면……. 상식적으로 그걸 내가 어떻게 막는데?

그런 걸 막아야 했으면 애초부터 과학자를 데려왔어야지!

“……그래서 지금 나더러 그 멸망을 막아라?”

안 그러려고 했는데 너무 기가 차서 어조에 어이없음이 뚝뚝 묻어 나왔다.

노인도 바보는 아닌지 바로 눈치채고 말을 덧붙였다.

“구원자님이 해 주실 것은 그저 저희 계획의 주체자가 되는 것. 그게 전부입니다. 나머지는 저희가 알아서 잘 모실 수 있도록 이미 계획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아니, 아까부터 자꾸 내 질문의 요점만 살살 피해서 말을 빙빙 돌리는데, 그러니까 너희 계획이랑 나랑 뭔 상관이냐고. 뭐 어쩌라는 거야? 그러니까 한마디로 정리하면 세계 멸망은 핑계고 세계 정복하고 싶다 이거 아니야.”

“구원자님, 그것이 아니라!”

“정말 세계 멸망이 문제라면 나한테 와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제국이나 다른 나라한테 미리 알리고 대책을 세웠어야지. 아니면 그 전에 미리 네놈들의 영향력을 키워 놓든가.”

나는 내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겼다. 화를 안 내고 싶은데 말을 하면 할수록 화가 나는 걸 어떡해?

이 정도면 솔직히 잘 참았다.

“대충 이 세계에 연고 없는 나 불러서 너네 좋을 대로 이용해 먹고 팽하겠다고밖에 생각이 안 되는데. 내 말이 틀려?”

“구원자님! 어떻게 저희가 감히 그런 불손한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계의 예정된 운명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이계의 존재뿐입니다! 저희 세계가 이계의 존재를 불러 멸망을 초래하였으니, 멸망을 저지하는 것 또한 이계의 존재가 되어야만 합니다.”

나는 그대로 놈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아무튼 저놈들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뭔지 이해는 못 하겠으나, 내 입장에서 나를 소환한 집단이 가지고 있는 정보는 꼭 필요했다.

아무리 렌이 있다고 해도, 렌은 나를 소환한 소환자도 아니고, 그 방면으로 전문가도 아니었다.

집에 가려면 날 소환한 놈들에게 정보를 캐내는 수밖에 없었다.

“공주님 화 많이 났어?”

그때였다. 렌이 순진무구한 표정을 하고 내게 얼굴을 들이밀며 속삭였다.

“눈물 나?”

나는 자동 반사적으로 내 두 눈을 가렸다.

“공주님, 내가 복수해 줄까?”

렌의 말에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자기가 뭔데 복수를 한다 만다야. 어이가 없는 제안이었다.

그런데 내가 또 해 달라고 하면 해 줄 것만 같아서 더 어이가 없었다.

쟤는 나를 언제 봤다고 이렇게까지 해 주는 걸까?

나는 두 손을 얼굴에서 떼어내고는 씩씩한 기색으로 렌의 양어깨를 팡팡 두드려 주며 말했다.

“괜찮아. 참을 수 있어. 고마워.”

“…….”

렌은 이해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그냥 얌전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렌을 뒤로하고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했다.

“네놈들이 뭘 생각하고 날 부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딴 식으로 나 아니면 세상이 망한다느니, 구원자님이라느니 쓸데없는 부채 의식 돋울 만한 말들은 집어치워. 내가 네놈들하고 협력하길 바란다면 확실히 하는 게 좋을 거야. 네놈들이 내게 어디까지 이득이 될 수 있는지 보고해.”

“…….”

내 차가운 태도에 놈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쉬운 사람이 기어야지. 어디서 이용해 먹을 생각부터 해?”

“이, 이용이라니, 무슨.”

“뭘 기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살고 있던 사람 갑자기 납치해서 난처하게 만들었으면 네 몸을 갈아서라도 보상을 해야지.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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