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1/113)

<71>

렌은 광기 어린 눈으로 놈들을 바라보았다. 입꼬리에 걸린 묘한 비웃음이 분위기를 더 섬뜩하게 만들었으나, 신기하게도 나는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다.

아무튼 렌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앞의 인간들은 확실히 겁을 먹은 걸로 보였다.

“그러게 왜 함부로 공주님 기억을 건드려. 짜증 나게.”

렌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니었으면 어떡할 뻔했어. 안 그래? 그럼 그럼. 그런 의미로 공주님이랑 나는 운명이라고 할 수 있어. 그렇지? 보통 사람들은 이런 걸 그렇게 부르잖아?”

렌이 상당히 헛소리를 내뱉었지만 생각해 보면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사실 정확하게 따지고 보면 운명보다는 우연이겠지만.

아, 물론 렌의 얼굴을 처음 봤을 때는 운명인 줄 알았다.

잘생겼으니까. 예전에도 말했지만 내 인생에서 저렇게 생긴 존잘남과 대화해 볼 기회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고 보면 여태까지 멘탈 단단히 잡고 있는 나도 대단했다.

현실적으로 따지면 우리나라 최고 존잘 남자 연예인 옆에서 스물네 시간 생활하는 거 아닌가.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건 말건 렌은 더없이 뿌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카일은 어처구니가 완전히 나갔는지 표정 관리도 안 하고 대놓고 나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카일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 주었다.

꼭 이 상황에 웃음이 나오냐고 따지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그냥 아득한 마음으로 카일의 시선을 피하며 렌을 응원했다.

잘한다, 우리 집 또라이!

그런 내 응원이 먹혔는지 렌은 더 의기양양한 얼굴로 손가락을 휙, 추켜올렸다.

그때 노인의 품에서 주먹만 한 구슬이 포탄처럼 렌에게로 날아왔다.

렌은 기다렸다는 듯이 구슬을 낚아채고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물론, 대답할 의향이 없다면 내가 직접 알아보는 방법도 있지!”

렌은 안타깝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공주님, 나는 최대한 평화롭고 순조롭게 쟤들을 처리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렌이 내게로 다가와 보고했다. 그에 나는 아주 작게 속삭이듯 물었다.

“무슨 생각이야?”

내 말에 렌이 대답했다.

“인질?”

“……저들이 누 군줄 알고 인질로 삼습니까? 미쳤습니까, 마법사?”

옆에 있던 카일이 이를 악물고 화내듯 물었고, 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그러면? 죽여?”

“……방금 본인 입으로 죽인다, 하지 않았습니까.”

카일의 말에 렌이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공주님이 싫어하잖아. 당연히 협박이지. 용사야. 바보야?”

렌의 입을 막아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카일은 더 열받았는지 이제는 표정까지 구기고 물었다.

“저들을 인질로 잡아 플로린스까지 이동하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알아보려고 쟤 물건 뺏어 왔잖아. 용사야. 머리가 그새 어떻게 된 거야? 뭐야. 난 또 알고 득달같이 본인 물건 숨기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카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니, 그런데 얘는 자기 전력을 이렇게 함부로 노출해도 되는 거야?

아무래도 렌이 저 노인의 물품을 빼앗은 이유는 물품의 기억을 읽기 위함인 것 같았다.

구슬의 상태로 보아 새것이 아니었으니, 내 예상이 맞을 것 같았다.

렌이 두 손으로 구슬을 잡았다.

그리고 살포시 눈을 감았다.

전방에 있는 사람들은 렌이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채기라도 한 듯 자리에서 급하게 일어나 우리 쪽으로 달려오려고 했으나 순식간에 바닥에서 솟아난 빛으로 이루어진 사슬에 발이 묶여 그대로 고꾸라져 버렸다.

렌은 감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넘어진 사람들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쯧, 찼다.

“공주님. 망했다. 쟤들 바보야. 도움이 될까?”

“……으아아악! 비겁한 제국의 배신자 같으니! 위대한 선조, 대마법사 라크라혼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렌의 반응에 놈들이 비명을 질렀고, 렌은 그러거나 말거나 구슬을 만지작거리며 내게 물었다.

“만 년 전 사람은 왜 찾는 거야?”

그에 나는 친절하게 상식적인 대답을 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위인이나 신 같은 거겠지? 지금 찾는 거 보면?”

“효과가 있어?”

“……그거야 나도 모르지.”

나와 렌의 대화에 카일이 도저히 못 참겠는지 한 손으로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하……. 공주님,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하긴, 용케 안 물어봤다 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로브를 입은 자들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카일에 관해서는 렌이 조치를 취해 놓았다.

이럴 줄 알고 한 건가?

나는 다시금 세상 순진무구해 보이는 렌을 바라보았다.

여태까지 지켜봐 온 결과, 렌은 똑똑했다. 사람 열받게 하는 말재주만 빼면 거의 완벽하다 싶지.

물론 그게 제일 문제이지만 어차피 나한테는 잘해 주니까 크게 상관없었다.

아무튼.

“다른 건 모르겠고, 그대에게 생각보다 큰일이 났지만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겠군.”

렌이 구슬에 집중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응응. 책에서 봤어. 마음을 나쁘게 먹으면 돌려받는데. 맞지, 공주님?”

“……응?”

렌이 방긋 웃으며 카일에게 말했다.

“어차피 너도 우리 공주님 이용하려고 접근한 거잖아? 그래서 나도 너 이용했지. 그러니까 너도 나도 똑같아.”

“도대체 무슨 소립니까!”

“무슨 소리라니? 용사야. 진짜 바보야? 한 번에 왜 못 알아듣지?”

“…….”

“쟤들이 뭐라고 지껄이건 이제부터 넌 화낼 자격 없으니까 공주님한테 개기기만 해 봐.”

렌의 표정이 순식간에 지워졌다. 그리고 들고 있던 구슬을 그대로 노인에게 던져 주었다.

쐐애액! 무슨 포탄 던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구슬이 노인의 복부를 가격했고, 노인은 ‘커헉!’ 소리를 내며 뒤로 그대로 넘어갔다.

“……어라?”

“크윽!”

그에 렌이 잠깐 당황한 듯 제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곧이어 무슨 눈치 보는 사람처럼 삐걱삐걱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더니 매우 당황한 듯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그, 공주님 이거 고의 아니야. 힘 조절을 잘못했어…….”

와중에 렌은 내 옆으로 다가와 강아지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아니, 인간이 왜 중간이 없지? 나는 이번에도 그냥 웃고 말았다.

여기서 뭘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내가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내 옆에 있는 카일은 도대체 렌이 무슨 빅 엿을 먹이려고 밑밥을 이렇게 까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잔뜩 열받아 있었고, 앞에 있는 구 마탑의 잔당으로 보이는 무리들은 굳이 설명 안 해도 알 거다.

“그래서 뭐 알아낸 건 있어?”

“그럼! 당연하지. 공주님 나 되게 똑똑해.”

“응, 너 똑똑한 거 알고 있으니까, 굳이 강조해 주지 않아도 돼.”

내 말에 렌이 진짜 기분 좋다는 듯이 헤헤 웃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제 허리를 쓱 굽히고 내 손을 툭툭 쳤다.

이건 또 뭐 하자는 거지.

“공주님 칭찬 안 해 줘?”

“……여기서?”

“그럼 어디서 해 주게?”

“이 상황에?”

“그럼 어떤 상황이어야 하는데?”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니, 이 미친 인간을 봤나! 잘 날뛰길래 박수 쳐 줬더니 아주 그냥, 정신이 나갔다!

정말 여러모로 분위기를 개박살 내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얘는 이걸 알고 일부러 이러는 건지 그냥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손바닥으로 렌의 얼굴을 밀며 말했다.

“그래서 뭘 알아냈는데?”

“으음, 알려 주기 싫은데.”

“……그럴 거면 왜 설친 거야?”

순간 열받아서 짜증 내듯 말하자 렌이 헤, 웃으며 내게 말했다.

“내가 뭐라도 알고 있어야 공주님이 나 버릴 생각 안 하지.”

“……아니, 렌. 내가 널 버리고 자시고 할 입장이 안 된다니까?”

내 말에 렌이 고개를 저으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저기 공주님 따까리가 저렇게 많은데?”

“렌, 그건 또 뭔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니다. 렌. 일단 지금 우리끼리 노가리 깔 때가 아닌 것 같지 않아?”

내가 제발 분위기 파악 좀 해 달라는 뉘앙스로 간절히 말하자 렌이 어깨를 으쓱이며 활기차게 놈들을 향해 말했다.

“좋아! 너희들한테 플로린스로 가는 포탈을 열 기회를 줄게!”

“구원자님! 제발, 저희를 굽어살피시어 저 악랄한 배신자를 처단하시고 대륙을 구원해 주시옵소서!”

놈들의 상당히 사이비스러운 울부짖음에 카일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카일은 뭔가 공포에 질린 듯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고, 렌은 그런 카일을 보며 씩 웃었다.

“이제야 상황이 네 마음대로 안 돌아가는 걸 알아차렸어? 그러게, 처음부터 개수작 부리지 말았어야지. 어떻게 우리 공주님을 이용할 생각을 해?”

“…….”

“공주님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경계 밖에 버리고 왔을 텐데. 공주님은 너무 착해.”

렌이 안타깝다는 듯이 손을 뻗어 내 뺨을 쓸었다.

“마음에 안 든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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