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0/113)

<70>

“의무는 무슨 의무? 나한테 그런 의무가 왜 있어?”

“…….”

렌의 팔을 치우고 나는 팔짱을 낀 채 놈들을 쳐다보았다.

웬 할아버지 한 명이 제일 앞에 나와 있었고, 뒤로는 네다섯 명 정도의 중년들이 고개를 숙이고 자세를 잡고 있었다.

“정체가 뭔지 밝히라고 벌써 두 번 말했는데 왜 자꾸 헛소리…… 하.”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이성을 되찾았다. 그래, 쓸데없이 날 세울 거 없다.

나는 애써 웃는 얼굴로 다시 친절하게 질문했다.

“그래서, 정체가 뭐라고?”

“…….”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질문에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누가 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열댓 명이 넘는 인원들이 나를 쳐다보았고, 그건 카일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렌만이 분위기에 안 어울리게 뒤에서 알 수 없는 음정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저건 또 뭔 노래니.

“구원자님,”

“또 헛소리 하는 거면 그만두는 게 좋을걸? 아무리 사람을 외관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고 한들, 자네들의 외관은 상당히 수상해. 안 그런가? 적어도 내 조력자랍시고 나타날 거면 좀 번듯하게 차려입고 오는 시늉이라도 부렸으면 좋았을 것 같군.”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망했음을 직감했다. 렌도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실실 웃으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공주님 가만히 보면 다혈질이야?”

“……조용히 하도록.”

“응. 나는 공주님 말 잘 들으니까.”

렌이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은 아까보다 더 얼빠진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와중에 우두머리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정신을 차렸는지 어렵게 입을 뗐다.

“저희는, 구원자님께서 이미 보셨다시피, 위대한 은하수의 후예로 세계를 혼란에 빠트린 배신자들을 처단하기 위하여 오백 년 전부터 구원자님을 기다려 온 진정한 마법사들로만 이루어진 단체입니다.”

나는 반사적으로 렌을 쳐다보았다. 그러니 제일 앞에 선 할아버지도 내가 뭘 궁금해하는지 파악했는지 곧바로 입을 털었다.

“그자는 배신자입니다! 구원자님! 사특한 힘으로 코어를 지배해 거짓된 힘을, 아아악!”

그때였다. 렌이 보라색 눈을 빛내며 손을 들어 올려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자 푸른색 불길이 솟으며 우두머리가 제 목을 잡은 채로 허공으로 이 미터가량 떠올라 발을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헛소리는 안 하는 게 좋았을 텐데.”

“커헉!”

렌이 검지를 세워 천천히 빙글 돌리자 허공에 떠 있던 노인의 몸이 거꾸로 돌아갔다.

“렌!”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는 렌을 돌아보며 인상을 쓸 수밖에 없었고, 그건 카일도 마찬가지였다.

“마법사, 지금 뭐 하는 겁니까!”

그에 렌이 비뚜름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쓸데없는 소리를 하잖아. 나는 지금까지 자비롭게 참아 줬는데.”

“구원자님! 어서 이리로! 그자는 위험합니다!”

노인의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이 다급하고 절박한 어투로 내게 비명을 지르듯 소리를 질렀다. 카일은 곤란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더니 곧, 허리춤에서 칼을 빼 들며 말했다.

“당장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는다면 그대들을 적으로 간주하겠다!”

카일의 말에 렌이 손에 힘을 풀었다.

“허억!”

그러자 노인이 땅바닥으로 떨어졌고, 렌은 씩 웃으며 손가락으로 허공에 선을 휙! 그었다.

순식간에 바닥에 경계선이 생겼다.

선은 보라색 불길을 활활 내뿜었고, 그걸 본 로브 입은 사람들 중 하나가 소리쳤다.

“경계선에서 멀리 떨어져라! 구 클래스 마법이다!”

“예!”

나는 그냥 멍하게 눈앞에 솟은 불길을 보았다.

그리고 아까 노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사특한 코어’라고 했다.

뭔가 머릿속에서 퍼즐처럼 맞춰지기 시작했다.

경계 밖에서 이뤄지던 실험은 분명 코어를 기반으로 한 실험이었다.

그리고 그 코어는 현재 마탑에 있고, 렌은…….

손목에 있는 흉터도 그렇고 감시자 어쩌고저쩌고한 것도 그렇고, 마지막으로 렌이 거의 나와 처음으로 정서적 교감을 나눴다는 듯한 뉘앙스를 보아하니.

결론이 하나밖에 나오지 않았다.

마탑이 렌을 쫓는 이유.

렌이……, 설마 황궁에서 봤던 것처럼, 코어를 이용한 실험체라서?

나는 경악한 얼굴로 렌을 바라보았다.

렌은 분명히 저놈들이 본인에 대해서 뭐라고 떠드는 걸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입을 막아 버렸다.

나한테 숨기고 싶어 하는 거다.

물론 애초에 숨길 거면 왜 그렇게 단서를 줄줄 흘리고 다녔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당시 렌이라면 눈치 못 챘을 수도 있다.

나는 마법에 대해 아예 문외한이었고, 렌도 나한테 본인의 정보를 줄줄 늘어놓을 때까지는 사회성이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으니까.

나는 렌의 손을 잡으며 진중하게 말했다.

“렌, 진정해.”

“…….”

렌의 자수정 같은 눈이 내게 꽂혔다.

“괜찮아.”

내가 렌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자 그의 눈이 점점 푸른색으로 돌아왔다.

나는 배에 힘을 주고 외쳤다.

“그대들은 왜 나를 구원자라 칭하면서 내가 선택한 조력자에게 무례하게 구는가. 그대들이 정말 내 조력자가 맞나?”

내 말에 로브를 쓴 인간들이 조금 당황하는 듯하더니 곧장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며 대답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구원자님! 저희는 구원자님을 위해 존재하며, 구원자님을 위해 움직입니다!”

“그렇다면 말해 보게. 그대들은 내게 무엇을 원하는 것이며, 그 대가로 무엇을 내놓을 건지.”

사실 내가 말하면서도 말도 안 되는 질문이긴 했다.

대가로 내놓긴 뭘 내놔. 이미 저놈들은 나한테 납치범 그 자체인데. 애초에 기브 앤 테이크가 성립이 안 되는 관계다.

막말로 내가 양아치처럼 쟤네들한테 삥 뜯어도 쟤들은 도의적으로 나한테 할 말 없다는 소리다.

말을 하면서도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번 일만 마무리된다면 계시던 곳으로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이미 그 거지 같은 시스템창에서 봤던 내용이다.

“그건 그냥 당연한 소리 아닌가? 애초에 그대들이 내 동의도 없이 이곳으로 나를 데려왔는데 그걸 조건으로 내미는 건 조금 양심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안 그래? 렌?”

내 말에 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물론 옆에 있던 카일의 표정은 완전 썩어 들어갔다. 도대체 이게 뭔 소리냐는 듯 말이다.

놈들은 그런 카일의 눈치를 살피는 건지 황급하게 덧붙여 말했다.

“저희는 전적으로 구원자님을 위해 움직일 것입니다. 왕자. 그대는 우리의 원대한 계획의 실현자이며 우리는 모든 힘을 그대의 나라를 위해 사용할 것입니다.”

얼씨구? 이제 카일에게로 붙는 편이 조금 더 낫다고 판단했는지 아주 입을 현란하게도 털기 시작했다.

“플로린스에는 이미 저희가 확보해 둔 지지층이 있습니다. 이를 이용해 왕자께서 구원자님과 혼인하시면 계획대로 제국을 칠 생각입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지금 내가 돌려 돌려 이 상황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물었는데 저딴 식으로 대답을 하다니.

표정 관리가 잘되지 않았다.

“……일단 돌아가는 법부터 말해 보게.”

“구원자님, 그것은…….”

놈들이 말을 얼버무리자 렌이 내 허리를 껴안고 그대로 휙! 말에서 내려 버렸다.

“엄마야!”

“공주님 이래서야 안 되겠다. 그렇지?”

렌은 세상 친근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는 당황스러움에 멀뚱히 쳐다보았다.

당연히 카일도 렌의 모습에 당황했는지, 머뭇거리다가 본인도 말에서 내려 버렸다.

“늙은아.”

“아 제발, 렌.”

나도 모르게 얼굴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그건 카일도 마찬가지였다.

렌은 다른 건 몰라도 사람 열받게 하는 능력 하나는 아주 탁월했다.

카일을 연습 상대로 아주 마스터를 한 모양이었다.

“공주님이 집에 어떻게 가냐고 물어봤잖아. 공주님 말 잘 듣는다며. 개뻥이야?”

카일은 차마 말도 안 나오는지 나를 보며 애원하듯 말했다.

“공주님. 외람된 말씀이나, 저자를 말려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저러다 저들이 공격이라도 한다면…….”

나는 카일의 어깨를 짚어 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들보다 렌이 세다고 그랬네.”

“……물론 그건 사실일 겁니다. 공주님, 하지만 저들을 적으로 만드는 건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저희는 저들의 정확한 규모도 모를뿐더러, 무엇을 하는 자들인지도 확실치 않습니다.”

그때였다. 렌이 뒤를 쓱 돌아보더니 카일과 내가 쑥덕거리는 게 거슬렸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나와 카일을 직접 떨어트려 놓고는 다시 휙, 뒤를 돌아 상큼하게 말했다.

“공주님 몸에 그려 놓은 개수작 내가 아주 잘 봤어.”

카일이 여전히 불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렌을 말릴 생각은 없었다.

이왕 하는 기선 제압 확실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쟤들의 목적은 나를 장기짝으로 이용하는 거다.

그러니까, 누가 이용당하는 입장인지는 제대로 알려 줘야지.

안 그래도 납치당해서 억울한데 멋모르고 이용당하는 건 완전 사절이다.

렌의 등 뒤로 보라색 불길이 치솟았다.

“빙빙 돌리면서 기어오르지 말고 묻는 말에만 대답해. 안 그러면 너네는 여기서 죽어.”

“…….”

“죽여도 되지, 공주님?”

렌이 뒤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나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상황 봐서.”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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