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69/113)

<69>

도대체 렌은 저들이 나를 소환한 사람들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그리고 저 사람들은 내가 여기 있는지 어떻게 안 거고.

애초에 정말 날 소환한 사람들은 맞을까?

놈들의 발소리가 가까이 들려 올수록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카일은 말에서 내려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것처럼 자세를 낮췄고, 렌은…….

그냥 싱글벙글 웃고만 있었다. 위기의 상황에서 심신의 평화를 갖게 하는 재주가 아주 탁월했다.

“너희들은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카일이 소설 속에서나 보던 기사단장처럼 목청을 높여 말했다.

렌이 내 얼굴을 가린 덕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뭔가 털썩! 하고 앉는 소리가 났다.

이 마당에 가부좌 틀고 앉을 리가 없으니, 아마 무릎을 꿇었으리라.

척, 척, 척. 단체로 무릎 꿇는 소리가 반복되듯이 들려왔다.

정신이 아찔해졌다.

아, 이 새끼들이 날 소환한 단체가 맞긴 하구나 하는 느낌이 빡! 왔기 때문이다.

“……하.”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일단 내 본심을 드러내서 하등 좋을 게 없었기 때문에 나는 얌전히 렌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일단 침착해야 한다. 렌의 말대로라면 애써 날 소환했는데 죽이지야 않겠지만 수틀리면 어떻게 돌변해 나올지 알 게 뭔가.

“오래된 마법의 추종자, 진정한 마도의 후계, 카르세우스가 구원자님을 뵙습니다.”

“구원자님을 뵙습니다!”

쩌렁쩌렁 밀폐된 공간도 아닌데 사방이 목소리로 꽉 찬 듯했다.

나는 아주 작게 렌에게 속삭였다.

“이렇게 소리 질러도 되는 거야?”

그에 렌이 평소 말하는 톤으로 대답했다.

“들키면 우리는 튀면 돼. 그렇지, 용사야?”

“……마법사, 그런 얘기는 조용히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굳이?”

렌이 싱긋 웃으며 나를 더 바짝 끌어안았다. 정말 여차하면 튈 것처럼 말이다.

“구원자님, 감히, 청하건대 부디 그 사특한 제국의 마법사에게서 떨어져 주십시오! 그자는 위험한 자입니다!”

나는 대놓고 표정을 구겼다. 렌이 로브 소매로 내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지금 제일 위험한 게 누군데?

본인들 객관화가 잘 안되는 편인 것 같았다.

나는 우선 그들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뭔가 대화의 빌미를 지금 당장은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히 근본도 모르는 자 주제에 어디서 공주님께 함부로 말하나! 그대들의 정체부터 밝혀라! 그렇지 않는다면 그대들을 사특한 자라고 여겨 이 자리에서 단죄하겠다.”

카일의 말에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펜디엄 왕국의 왕자여. 우리는 그대의 적이 아니다.”

그때였다. 아까 처음에 제일 먼저 구원자 어쩌고 헛소리하던 인간이 짐짓 근엄하게 대꾸했다.

솔직히 말해서 염병 떨고 있다고 전해 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하지만 놈의 말은 꽤 효과적이었는지 카일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공주님, 내 옷 찢어지겠어.”

렌이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그에 나는 손에 잔뜩 들어가 있던 힘을 뺐다. 그래, 화내지 말고. 차분하게 구는 거다. 차분하게.

화내지 말자…….

비록 저놈들 때문에, 내가 장장 몇 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평생 보고 살 리가 없는 괴물도 보고 마법도 보고 아주 그냥 씻지도 못하고 거지 같은 세상에 홀로 떨어져서,

“공주님. 찢어진다니까?”

“……너는 돈도 많은 애가 무슨 옷을 넝마 조각을 샀니?”

“공주님이 나 잘생겼다고 했잖아. 눈에 띄면 안 돼. 공주님이나 좋은 거 입어.”

다시 마음이 차분해졌다.

아무튼 카일은 심각해진 얼굴로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것처럼 굴었고, 앞쪽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나이 든 남성은 여유로운 목소리고 개소리를 이어 갔다.

“그대는 구원자님을 영광으로 이끌 재목. 그대가 우리와 원활하게 협조한다면 온 세상을 그대의 발아래에 둘 수 있을 것이며, 그대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을 덮은 먹구름에서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렌은 몸을 기울여 내가 비에 맞지 않도록 내 머리를 감쌌고, 나는 어이가 털릴 수밖에 없었다.

빗물이 황금색이었다.

“우리와 함께한다면 마른 땅을 다시 생명이 샘솟는 곳으로 변화시킬 수 있으며, 추악하고 비겁한 배신자들은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그 말이 사실이기라도 한 듯, 우리가 서 있는 땅에 나 있는 잡초가 순식간에 오 센티씩 자라나기 시작했다.

이 무슨 유전자 조작 슈퍼 콩 같은 상황인가.

이것도 마법인 것 같은데 생각해 보면 마법이라는 건 정말 개사기가 아닐 수 없다.

아니, 그런데 이 사기적인 능력을 가지고 나라가 왜 이 꼬라지일까? 알 수가 없는 동네다. 참.

“펜디엄의 왕자여. 그러니 우리의 손을 잡아라. 구원자님을 모시고,”

“말 더럽게 많다. 그렇지?”

렌이 큰 소리로 내 뒤에서 소리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 렌을 쳐다보았고, 렌은 눈을 찡긋거리며 상큼하게 웃어 주었다.

“미안하지만 공주님이 선택한 건 나거든? 늙은아?”

“…….”

숙연해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늙은……이가 뭐야 늙은이가.

“왜 내 눈 피해? 애써 무시하지 마. 공주님은 보다시피 내 품에 있는데?”

“……감히 제국의 배신자 따위가 어디서 내 말을 끊,”

“감히! 어디서 우리 공주님 따까리 주제에 큰소리야. 공주님 밑에서 빌빌 기어야 하는 입장 아니었어? 신기하네. 오백 년 전 제국 예법은 되게 느슨했나 봐?”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공주님 놀랐지? 괜찮아, 괜찮아. 내가 지켜 줄게!”

렌이 나를 향해 다시 한번 눈을 찡긋거렸다. 도대체 저 제스처는 어디서 배운 거냐.

나는 나름 표정으로 도대체 지금 뭐 하는 거냐고 표현해 보았다.

하지만 렌은 못 알아먹은 모양이었다.

“공주님 많이 놀랐어? 우리 공주님 심약한데 쟤들이 함부로 소리 지르고 비까지 뿌려댔으니까 많이 불쾌했다고?”

바람 소리만 사아아, 들리는 숲길에서 오로지 렌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꼴을 보자니 뭔가 기분이 오묘했다.

나름 저놈들을 멕이면서 헛소리를 하는 것 보니까 조금 통쾌하기도 했다.

“괜찮아, 괜찮아. 공주님이 명령만 하면 저런 놈들은 삼십 초면 끝나니까.”

렌의 말에 발끈했는지 우레와 같은 고함이 들려왔다.

“구원자님! 저자는 제국의 마법사입니다! 저 세 치 혀로 뱀처럼 교묘하게 구원자님을 홀려 지옥으로 끌고 갈 것입니다! 부디 이쪽으로!”

나는 짜게 식은 표정으로 렌의 옷에 가로막힌 앞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사가…… 너무 사이비 같다.

아무리 그래도 나를 여기로 소환한 놈들이 어찌 되었든 간에 내 조력자일 텐데, 뭔가 조력자라고 치기에는 많이 찝찝하다.

심각하게.

어차피 똑같이 기분 나쁠 테지만 이왕 나타날 거 좀 신성하게 나타나면 안 돼?

이래서야 내가 더 나쁜 인간 같잖아……!

안 그래도 플로린스의 적장자 밀어낼 생각에 양심이 심하게 따끔거리는구만.

“공주님. 어떻게 할까?”

나는 조용하고 다급하게 렌에게 속삭였다.

“말로 해 말로. 대화.”

그에 렌이 뚱한 표정으로 카일에게 속삭였다.

“공주님이 대화하재.”

“…….”

카일은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보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렌보다 카일이 말주변은 좀 더 있다.

“그대들의 목적을 먼저 밝혀라.”

카일이 근엄한 목소리로 말하자 이어 답변이 들려왔다.

“구원자님, 저희는 구원자님께 해가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부디 얼굴을 드러내시고, 그 사특한 제국의 배신자에게서 멀어지십시오!”

그에 렌이 불만을 가득 담은 얼굴로 내게 투덜댔다.

“공주님 나 기분 나빠.”

나는 그런 렌의 허벅지를 달래듯 톡톡 두드려 주며 놈들의 대화를 살폈다.

“너희들의 정체를 먼저 밝히라 하였을 텐데? 마법사의 말대로 예의라고는 시장 바닥에 버리고 왔나 보군.”

“…….”

놈들은 상황이 제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자 불만스러운지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놈들에게 큰 소리로 외쳐 주고 싶었다.

내가 미쳤냐, 니들 생각대로 놀아나 주게?

어쨌든 저놈들은 나를 이용해서 이득을 볼 생각이다. 그렇기에 더 고분고분하게 나가면 안 된다.

다른 세력이 내 뒤에 딱, 버티고 있어야 좀 날 만만하게 안 볼 거 아닌가?

무턱대고 내 앞에 저렇게 당당하게 나타난 것 자체가 날 만만히 봤다는 증거이다.

멀쩡한 인간이 다른 대륙도 아니고 무려 이세계로 납치를 당해 왔는데 얼씨구나 하며 납치범들에게 나를 받들어 모시라고 하겠어?

당장 엿을 날려 줘도 부족하구만.

“……구원자님. 저희는 구원자님이 필요합니다.”

그래, 필요하니까 불렀겠지. 안 필요했으면 지금쯤 한국에서 잘 살고 있었겠지. 안 그래?

내가 대놓고 썩은 표정을 지어 보이니 옆에 있던 카일이 나를 흘끗 보고 당황했다.

하기야, 지금 상황에서 카일이 제일 당황스러울 거다.

“구원자님께서는 대륙을 구하시고 이 땅의 사악한 자들을 몰아내실 의무가!”

그때였다. 나는 나름 잘 참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뭐? 의무? 지금 나랑 장난해?

“아, 씨……. 렌, 이것 좀 치워 봐. 도저히 못 들어 주겠네. 사이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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