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113)

<68>

뭔 놈의 동네가 반은 숲이었다. 도시라고 불릴 법한 동네에서 벗어난 지 삼십 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걸 정말 제국이라고 해도 되는 것인가.

게다가 마탑의 눈을 피해서 가는 길이라기에는 상당히 음산했다.

왜, 그 사람 인적 안 닿아 음침한 시골길 같은 거.

딱 그 꼴이었다.

뭔가 사람의 흔적이 있긴 한데, 딱 봐도 오래되어 보이는?

“이교도들이 여기 많이 살아서 그래.”

렌은 내 표정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뭘 궁금해하고 있는지 바로 알아차리고는 찰떡같이 대답했다.

“지금 최대한 마탑이랑 제국의 힘이 안 닿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그러면 당연히 권력을 피해 달아난 뒤 구린 놈들이 우글거리는 곳으로 갈 수밖에 없지?”

렌의 말에 카일이 이어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공주님. 그래 봤자 시정잡배나 무뢰배들 정도입니다.”

“그래그래, 그 정도는 굳이 내가 안 나서도 용사님이 알아서 처리해 줄 거잖아. 그렇지?”

렌이 내 뒤에서 사람 약 올리는 목소리로 헤헤 웃었다.

카일은 어느 정도 렌을 상대하는 노하우를 익혔는지 깔끔하게 무시하며 싱긋 웃어 보였다.

좀 당황스러웠다. 저렇게 웃는 거 처음 봤다.

많이 열받긴 하나 보다.

“물론입니다. 공주님. 공주님의 안전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카일이 정중하게 고개를 까딱였고, 나는 그냥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 그래. 항상 고마워. 어…….”

“공주님은 왜 맨날 고마워? 저건 당연하잖아.”

렌의 말도 맞아 대꾸하는 대신 그냥 그의 팔뚝을 꼬집어 주었다.

좀, 조용히 좀. 사람 성질 그만 긁고!

“아야.”

“시끄럽네.”

“나 이제 한마디 한 건데. 공주님 나 쪼끔 서운해. 맨날 조용히 하래. 쟤가 먼저 건드렸단 말이야.”

……아니 도대체 어딜 봐서?

내가 어이가 없거나 말거나 시무룩해진 렌은 턱을 내 어께에 기대며 웅얼거리듯 말했다.

역시 거리낌 없는 접촉에 나는 움찔할 수밖에 없었고, 옆에 있던 카일은 속이 터져 죽기 일보 직전의 얼굴로 최대한 웃으려 했지만 도무지 안 되겠는지 내게 말했다.

“공주님, 슬슬 말이 지칠 때가 되었으니 제 쪽으로 옮기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때 렌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뒤를 슬쩍 돌아보니 또 살벌한 얼굴로 산뜻하게 카일을 노려보고 앉아 있다.

도대체 ‘살벌’과 ‘산뜻’이라는 두 단어가 어떻게 공존할까 싶지만, 놀랍게도 그거 말고는 저 표정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용사야. 너는 일 터졌을 때 처리하러 뛰어나가야지. 옮기긴 뭘 옮겨?”

렌이 얄밉게 내 뒤에서 킬킬킬 웃었다.

“슬슬 등장할 때가 됐는데. 더 깊이 들어가야 하나?”

렌의 말에 의아해져 뒤를 돌아보았다.

“그게 무슨 뜻이야?”

내 시선을 받은 렌은 사르르 풀어진 얼굴로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이쪽 길은 마탑도, 제국도 잘 오지 않는 외진 구역이잖아? 그럼 온갖 비밀스러운 놈들이 여기 다 숨어 있다는 뜻도 되지!”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탁 짚었다.

순식간에 몸에 온기가 쫙 뻗어 나갔고, 내 팔 위로 겹겹이 비눗방울 같은 막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흠, 이 정도면 쉽게 건드리진 못할걸? 그래도 내 옆에서 떨어지면 안 돼. 알았지, 공주님?”

“뭐 한 건데?”

“보호막?”

순간 등골이 싸늘해졌다. 그걸 여기서 갑자기 왜 만든 건데? 꼭 당장 뭐라도 튀어나올 거라는 예고 같잖아.

“렌, 혹시 뭐가 튀어나오는 거니?”

“괜찮아, 공주님. 어차피 굳이 여기가 아니라도 찾아올 거야. 그런데 이왕이면 사람 없는 데가 좋지?”

렌이 빙그레 웃으며 속삭이듯 아주 낮게 말을 이었다.

“여차하면 처리해야 하는데, 소란스러워지면 안 되잖아?”

꽤 음산한 예고에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카일을 쳐다보니 딱딱하게 굳은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공주님. 뭔가……, 옵니다.”

나는 그냥 입을 쩍 벌리고 렌을 쳐다보았다.

“나 좀 대단하지, 공주님?”

의기양양하게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치켜드는 렌을 보고 입이 더 벌어졌다.

얘, 진짜 뭐지?

렌이 말의 몸통을 손가락으로 한 번 쿡 찌르니 말은 금방 얌전히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카일은 그런 렌을 보며 경악한 얼굴로 잠깐 멈칫하더니 곧 제 허리춤의 검을 당장이라도 뽑아낼 듯, 검 손잡이에 제 손을 올렸다.

“이 정도면 좀 넓은 편인가?”

렌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곳은 우리가 왔던 길 중 그나마 좀 넓은 편에 속했다.

“마법사, 다 계산되었던 행동입니까?”

카일의 말에 렌이 뭔 개소리냐는 듯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뭔 소리야? 우리가 가는 길에 저 머저리들이 끼어든 거지.”

그러더니 제 커다란 로브를 휙! 펼쳐 내 얼굴을 가렸다.

“공주님 얼굴은 안 보여 줄 거야. 답답해도 참아야 해. 알았지?”

“어? 어…… 그래. 근데 도대체 누가 나타난다는 거야?”

내 말에 렌이 방긋 웃으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공주님이 맨날 이를 가는 그 나쁜 새끼들.”

“…….”

그때였다. 순식간에 밝던 하늘이 어둠에 휩싸였다.

“흠, 설득해야 하는 입장 아닌가? 왜 이렇게 음산하게 등장해? 바보야?”

뒤에서 아무렇지 않게 떠드는 렌이 아니었으면 무서웠을 것 같았다.

“……정체가 뭔지 알고 있나 보군요. 마법사.”

“너랑 다르게 공주님이 나한텐 다 얘기해 주거든. 미리 목줄을 채워 놔서 다행이야. 안 그래, 공주님? 들키면 곤란하잖아.”

렌의 말에 나는 크게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카일의 표정은 더없이 불쾌하다는 듯 구겨졌고, 렌은 그러거나 말거나 하늘을 바라보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나올 거면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나오지? 공주님 성격 급해!”

저게 뭔 줄 알고 저렇게 도발을 하는 거야? 내가 경악해서 렌의 소매를 꽉 붙들자 그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나 때문에 꾸물대는 것 같지? 흠, 왜 사람들은 날 안 좋아할까? 알 수가 없단 말이지.”

렌의 물음에 대답한 건 다름 아닌 카일이었다.

“평소 본인의 언행이나 생활 습관을 되돌아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마법사.”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공주님은 나 안 싫어하거든.”

“그건 공주님께서 인품이 좋으셔서 그런 것입니다.”

“흠, 보는 눈은 있네, 용사야.”

할 말이 없었다.

“왜 갑자기 왕자에서 용사로 호칭이 바뀐 겁니까?”

저 멀리서 자줏빗 로브를 쓴 사람 열댓 명이 스멀스멀 몰려왔지만 저 둘은 신경도 안 쓰이는지 별 쓰잘데기없는 이야기를 이어 갔다.

“왕자님이란 단어, 마음에 안 들어.”

“…….”

“흐음. 그렇다고 용사가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닌데. 평민이라고 부르면 공주님이 뭐라 한단 말이야?”

나는 팔꿈치로 헛소리하는 렌을 툭툭 쳤다. 이 또라이야, 지금 호칭 정리할 때야? 내가 말 똑바로 하라 할 때는 그렇게 개무시하더니 그걸 왜 지금 고민하고 앉아 있어!

렌은 내 아득해진 표정을 봤는지 손을 내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괜찮아. 쟤들 폼 잡는 거야.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공주님 환심 사야 하는 애들인데. 나도 그 정도는 알아.”

“……그럼 안 위험하다는 거야?”

내 말에 렌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공주님을 소환한 게 누군지 잊었어?”

“…….”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쟤들 목적이 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지? 수틀리면 공격할지 누가 알아? 아, 물론 지금은 아니야.”

렌이 방긋 웃었다. 카일은 영 찜찜한 표정으로 이쪽으로 다가오는 무리를 보다가 렌에게 시선을 돌린 채 물었다.

“당신,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도대체 정체가 뭡니까?”

카일의 말에 렌이 재미없다는 듯 입맛을 쩝 다시며 대꾸했다.

“조금 있으면 알게 될 거야. 쟤들이 알아서 설명할 테니까. 성급하게 굴지 말고 참지? 왕실에서는 그런 것도 안 가르쳐 줘? 인내심은 나도 배웠는데.”

“…….”

렌의 대답에 얼굴이 시뻘게진 카일은 입을 꾹 다물었다. 차마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쟤들은 발에 저주라도 걸렸어? 왜 이렇게 느리지?”

그때였다. 렌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싹 지워졌다. 내 옆구리에 위치해 있던 렌의 손가락이 오싹하게 움직였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렌의 손을 붙잡았다.

“렌, 뭐 하려고.”

“아.”

렌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그냥, 쟤들이 짜 놓은 판에서 나만 동떨어진 것 같아서 불쾌했거든, 공주님.”

“…….”

“괜찮아. 공주님. 죽이지는 않을 거야. 폭력적으로 굴지도 않을 거야. 공주님 그런 거 싫어하잖아? 나는 착하니까.”

렌이 언제 정색했냐는 듯 씩 웃으며 내게 바짝 붙었다.

“아, 물론 공주님이 해 달라고 하면 해 줄 수 있어. 나는 공주님의 마법사잖아.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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