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113)

<67>

렌은 시아를 뒤에서 거의 끌어안은 채로 말을 몰았다.

‘학습 능력은 좋은 듯합니다.’

‘……확실히, 능력은 다른 것들보다는 월등하게 뛰어나군. 쯧, 정식으로 탑에 입문했다면 꽤 이름 좀 날렸겠어. 어쩌겠나. 고아로 태어나 이곳까지 흘러들어 온 것이 네 죄이다.’

그저 살아남기 위한 과정으로 단기간 배운 승마지만 렌은 자신 있게 왕자인 카일보다 본인의 실력이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요즘 들어 그의 실력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가 오지 않아 아쉽던 참이었는데 잘되었다.

“공주님, 말은 안 무서워?”

“안 무서워. 어렸을 때 낙타 타 봤거든.”

렌의 말에 시아가 카일의 눈치를 보며 혹시라도 들리면 안 된다는 듯 아주 작게 얘기했다.

렌은 그에 눈을 깜빡이며 그녀의 음성을 차단시켰다. 매번 이래 봤자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인간인 왕자한테 다 들릴 텐데.

마법으로 이 세계에 대한 정보가 들어왔다고 하더니만, 반만 들어온 모양이다.

“……말을 안 타 봤는데 그건 왜 타?”

“다 방법이 있어.”

사실, 경계 안으로 들어오면서 렌은 묘하게 긴장감을 느꼈다.

아무래도 렌은 사람을 대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최근 일 년 동안 느낀 바가 많았다.

사람들은 그가 다가가면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 렌이 마탑에서 탈출한 후 추적을 따돌리는 동안 제대로 된 대화를 해 봤을 리 만무했다.

그러니까 그의 눈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시아가 신기하고 이상하게 다가오는 건 당연한 거였다.

이 세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주 조금이라도 마나를 가지고 있다.

그런 그들에게 압도적으로 많은 양의 마나를 가졌지만 마탑 소속이 아닌 마법사를 마주쳤을 때 나올 만한 반응은 단 하나였다.

마탑 소속이 아닌 마법사들은 대게 범죄를 저지르고 도주 중인 대마법사, 혹은 암흑길드 소속의 흑마법사들이 대부분일 테니까.

뭐, 간혹가다 왕실 마법사가 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왕실에서 거의 신을 모시듯 귀히 여겨지는데, 일반인들이 그런 마법사를 마주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심지어 렌의 마나는 그다지 정형화된 마나도 아니었기에 일반인들이 느낄 거부감은 어쩌면 당연했다.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해 두려워하고 꺼려 하니까.

“…….”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시아는 그를 너무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데?

마법에 대한 그녀의 반응을 보면 단 한 번도 그와 같은 힘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고, 렌의 눈 색이 물드는 걸 보고도 별생각 없는 걸 보면 시아는 마법사라는 존재 자체를 처음 보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그녀와 그는 완전히 다른 셈이었다. 심지어 그는 다른 세계 사람이지 않은가.

그의 세계에 그녀와 같은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더니 순전히 개뻥이지. 이러니 그걸 그가 믿을 리가 있나.

렌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타고 있는 말에게 몰래 마나를 흘렸다.

그의 마나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건 동물도 마찬가지였기에, 뇌에 마나를 주입해 순종적으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말은 그의 의지대로 다리를 움직였다.

렌은 흘끗 카일을 쳐다보고는 똑같이 품위 있는 모습으로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나저나 이대로 가면 좀 위험할 텐데?’

렌은 흘러내린 시아의 머리를 정리해 주며 인상을 찌푸렸다. 갑작스러운 렌의 접촉에 그녀가 움찔하는 게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왜인지 모르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공주님. 본격적으로 출발하기 전, 미리 알려 드릴 것이 있습니다.”

카일의 말에 시아가 다정하게 물었다.

“뭐지?”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무리수를 두더라도 그냥 떨어트려 놓을 걸 그랬나?

렌은 인상을 찌푸리며 앞을 바라보았다.

“당분간 도시나 마을에 들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카일의 말에 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즘에는 그가 네 시간마다 청결 마법을 써 주고 있어서 그런지 황금색 머릿결이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사르르 기분 좋게 흘러내린다.

생활 마법이 이렇게 좋은데 왜 마탑의 그 멍청이들은 멸시했는지 알 수가 없다.

“마탑이 이 근방에 있습니다.”

“아.”

렌은 열심히 시아의 머리에 집중했다. 원래 머리카락은 검은색이라고 했지? 확실히 이 금발보다는 검은색이 오히려 그녀에게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다음 구역부터는 제국 황실보다 마탑의 영향력이 더 센 지역으로, 다소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카일의 시선이 렌에게 닿았다. 렌은 눈썹을 쓱 들어 올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지 알 수는 없으나, 시아를 소환한 집단은 단체로 머리가 어떻게 된 게 확실하다.

무슨 저런 걸 용사로 선택한 거지? 막상 위험한 건 그보다 저 왕자였다.

어차피 그에게는 그림자 왕의 망토가 있었다.

만약 없었더라면 문제가 되었겠지만 그래도 여차하면 그에게 붙은 추적대 정도야 죽여 버리면 된다.

물론, 추적대를 없앨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도 있다.

애초에 마탑에서 그를 왜 죽이려 드는가?

렌은 마탑이 철저하게 숨기는 비밀들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가 바로 그 비밀의 당사자이니까.

비록 그 방법을 쓰면 황실의 개가 되겠지만, 여차하면 황실로 달려가 다 털어놓으면 되는 거다.

그나저나 그녀가 나타나기 전까지 그가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지 이상하리만치 기억이 안 났다.

아무래도 대규모 세뇌 마법의 부작용이지 싶다.

“마음에 안 드는데?”

“응?”

렌은 웃는 낯으로 카일을 보며 말했다.

“나만 위험한 거 아니잖아? 공주님이랑 같이 있는 게 발각되면 우리 왕자님이 제일 위험하지 않아?”

“…….”

“본인은 당당하다는 듯이 말하네. 이러면 아무리 나라도 기분이 나쁘지. 그렇지, 공주님?”

시아가 고개를 돌려 렌을 쳐다보았다. 딱히 기분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발각되면 최악이다. 이거지?”

“예비책은 있어. 이대로 제국까지 달려가면 돼. 그럼 죽지는 않을걸?”

렌의 말에 옆에 있던 카일이 발끈했다.

“마법사!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그리고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이랑 사이 안 좋은 건 네 사정이고? 난 아니거든.”

렌의 말에 카일이 잔뜩 굳은 표정으로 살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제국의 개라도 되겠다는 말입니까? 황실이 당신을 보고 어떻게 나올지는 뻔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성인군자가 아닙니다.”

솔직히 좀 가소로웠다. 아니, 어제까지만 해도 그에게 마나를 단속하라 어쩌라 하더니, 본인이 나서서 살기를 내뿜을 건 뭔가?

시아가 마나를 느끼지 못해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죽였을지도 몰랐…….

아,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시아가 경계 밖 괴물 보듯 그를 보면 많이 서러울 것 같으니까. 죽이지는 않을 거다. 그럼 그럼.

아니, 잠깐만. 그럼 응징도 못 하지 않나?

어떡하지?

렌은 깊이 고민에 빠졌다. 겁을 주지 않으면서 응징할 방법이…….

“그렇다고 마탑에서 공주님을 죽이게 둘 수는 없잖아? 적어도 그 상황에서는 제국에 의탁하는 게 제일 좋은걸? 대놓고 들이밀면 뭐, 공주님 정도는 플로린스로 보내는 주겠지.”

“…….”

렌은 순수하게 기뻐했다. 왜냐면 그가 생각해도 나름 한 방 먹인 것 같았으니까. 안 그래도 위선 떠는 모습이 꼴 보기 싫은 참이었다.

이렇게 하면 시아가 무서워하지도 않고, 왕자에 대한 그녀의 인식을 감점시킬 수도 있었다.

내가 이겼지?

뿌듯한 표정으로 시아를 바라보았으나 카일 못지않게 살벌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어 렌은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미쳤어?”

“…….”

“헛소리하지 말고 최대한 돌아가게. 안 마주치는 방향으로 말이야.”

그녀의 말에 카일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멋들어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절로 불만이 생겼다. 아니, 다른 것도 아니고 무려 그가 희생해서 지켜 주겠다는데 왜 화를 내지?

‘아, 그게 문제구나?’

큰일이었다. 그녀는 남의 죽음에 대해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다. 집에 돌아가려면 앞으로 많이 죽여야 할 텐데.

‘갑자기 기분 나빠졌어.’

렌은 시무룩하게 축 어깨를 늘어트린 채로 말의 속력을 올렸다. 아무튼 플로린스로 최대한 빨리 가야 했다.

이미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다.

억지로 만들어진 인물답게, 공주라는 존재에게는 적이 너무 많았고, 아무 세력도 없는 그가 그녀를 지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니까 머리를 써야 했다.

허울뿐이지만 그래도 신분을 이용해 울타리를 치고, 카일 펜디엄을 이용해 명분을 얻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를 소환한 집단에 대한 정체도 알아야 할 텐데…….

‘뭐, 금방 나타나겠지.’

렌은 여유롭게 기다리기로 했다. 그녀의 몸에 새겨진 수식을 바꿔 놨으니 원래 상태로 돌려놓기 위해서 어떻게든 찾아올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를 죽이려 들겠지만.

전투가 벌어지더라도 인간들을 상대로 질 자신은 없었다.

렌은 그 순간이 오면 최대한 덜 잔인하게 죽일 수 있도록 방법을 생각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