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렌이 내게 뭘 원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결론은 지금 내가 집에 가는 게 싫다는 거야?”
내 말에 렌은 대답이 없었다.
“렌, 나랑 뭘 어쩌고 싶은 건지 물어봐도 돼?”
내 물음에 렌이 잠깐 굳은 얼굴로 눈을 이리저리 굴려 내 시선을 피하더니, 곧 씩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글쎄? 공주님. 나는 생각보다 변덕스러운 사람인가 봐.”
“……그래서 약속 못 지키겠다고?”
렌이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제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렌은 완전히 내게서 떨어졌다. 여전히 알 수 없는 얼굴로 고개만 좌우로 까딱였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렌이 약속을 안 지킨다고 해서 딱히 탓할 생각은 없었다.
쟤가 나한테 꼭 잘해 줘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말해서 경계 밖에서 꺼내 준 것만 해도 나는 충분히 감사해야 했다.
물론 화가 안 나는 건 아니었다. 렌의 반응에 실망감은 당연히 들었고, 심장이 철렁하는 기분도 충분히 느꼈다.
하지만, 렌은 지금 내가 당한 상황에 책임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일단 웃었다.
“괜찮아.”
“……뭐?”
당연히 괜찮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은 척했다.
나는 절박하다. 당장이라도 집에 가고 싶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사정이었다.
나는 이미 렌에게 한번 매달린 전적이 있지 않은가. 당시 렌은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도와줬다.
“지금까지도 나 많이 도와줬잖아. 네가 내키지 않으면 안 해도 돼. 사실 내가 벌이려는 일 말이야 간단하지만 충분히 위험천만한 일이니까.”
“…….”
“아, 맞아. 그거 알아? 너 나한테 직접적으로 싫다 한 거 이번이 처음이야.”
내 말에 렌은 당황했는지 입을 반쯤 벌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음, 물론 네가 안 도와주면 좀 많이 힘들겠지만…… 그래도 네가 싫다면 강요할 생각은 없어.”
“공주님은 화 안 나?”
렌은 되려 제가 화난 얼굴로 나를 보며 물었다.
“화? 당연히 나지. 나는 이 상황 자체가 싫어. 짜증 나고. 그런데 그게 내가 너한테 화풀이할 정당한 이유가 되지는 않잖아.”
“…….”
렌이 인상을 찌푸렸다.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든다는 양.
“냉정하게 말해서, 나랑 결혼하는 걸 포기하면 네가 날 도와줄 의무는 전혀 없지.”
내 말에 렌이 나지막이 대꾸했다.
“그럼 공주님이랑 나는 그 계약이 아니면 전혀 상관없는 사람인 거야?”
렌의 표정은 여전히 구겨져 있었고, 영 펴질 생각을 안 했다. 나는 조금 어색한 기분으로 대꾸했다.
“아니지. 따지고 보면 네가 내 생명의 은인인데 왜 그 계약이 아니면 상관이 없어? 게다가 나한테 결혼은 아무 의미도 없는 계약인걸? 어차피 나는……, 진짜 공주가 아니잖아.”
여태까지 내가 지켜본 바, 렌은 감정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이었다.
“공주님은 그럼 내가 필요 없어?”
렌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필요하지. 꽤 절실하게. 내 상태에 대해 아는 사람은 너밖에 없잖아.”
“그런데 왜 내가 약속 안 지켜도 괜찮아?”
렌의 물음에 나는 생각해야 했다. 사실 괜찮을 리가 없다.
“너는 이미 지금까지 나 도와줬잖아. 네가 싫다는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강요해?”
내 대답에 렌의 표정이 스르륵 풀렸다.
“내가 용사보다 더 필요해? 공주님한테 내가 꼭 필요한 존재야?”
“렌, 그렇게 말하면 내가 너무 좀, 그래 보이잖아. 물론, 네가 필요해서 같이 지내는 것도 있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사람이 어떻게 필요한 존재하고만 친하게 지내. 만약에 네가 나쁜 사람이었으면 네가 나한테 꼭 필요한 존재라도 멀리했을 거야.”
나는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렌에게 다가가 차분하게 물었다.
“렌, 그래서 정확하게 어떻게 하고 싶은데?”
내 물음에 렌이 죄지은 사람처럼 시선을 피했다. 압박하면 안 되려나? 렌이 스스로 말할 때까지 기다려?
“모르겠어. 공주님, 나도 뭘 하고 싶은지.”
렌이 바닥을 쳐다보며 말했다.
“처음에는 그냥 마탑에서 나오고 싶었는데…….”
렌이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흔들리는 시선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음, 일단 탈출하고 나서는 그냥, 자꾸 귀찮게 쫓아오니까, 응징하고 싶어졌어. 이걸 복수심이라고 한대. 그렇지?”
렌의 말에 대꾸해 줄 수는 없었다. 아무리 내가 렌의 과거에 대해 짐작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전부를 아는 건 아니니까.
“글쎄? 난 네 과거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렌이 입을 잠시 열었다 도로 닫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마탑에서 네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난 잘 모르겠지만, 네가 그런 생각이 든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내가 다정하게 묻자 렌이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
“그때 공주님을 처음으로 발견한 게 내가 아니어도 공주님은 이렇게 대할 거야?”
렌의 물음에 표정이 바로 짜게 식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얘는 도대체 질문에 맥락이 없어?
“글쎄? 하는 거 봐서? 내가 좀 인성을 까다롭게 보거든.”
“그럼 공주님한테 내 인성은 좋은 편이야?”
렌이 얼굴과 딱 어울리는 순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물론 렌이 순진하지 않다는 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만약에 카일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테지만.
“씁, 글쎄. 딱히 지금 나한테 하는 거 보면 모르겠네……?”
“근데 공주님 나 안 싫어하잖아.”
“내가 널 싫어할 특별한 이유가 없잖아, 렌.”
***
렌은 계속 시아에게 물었다.
“공주님 짜증 나는 게 뭐야?”
“네가 카일이랑 말싸움할 때 내가 느끼는 거.”
옆에 있는 카일의 표정이 구겨지는 게 보였지만 평소처럼 렌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시아는 귀찮을 법도 하지만 렌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렌은 물으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세상의 사람들은 다 이런 건가?
잘 모르겠다. 당장 옆에 있는 카일만 해도 그를 두려워하는 게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사실 카일 정도면 그를 아주 훌륭하게 견디다 못해 개기기까지 하는 수준이었지만.
애초에 사람을 많이 겪어 보지 못한 렌이 그걸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시아와 미래를 그린 건 완벽한 그의 실수였다.
‘멍청이도 아니고, 계약의 내용을 어떻게 잊어버릴 수가 있었지?’
렌은 시아의 손가락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대로 그녀가 돌아가 버린다면 아무리 그녀의 남편 자리를 얻어도, 그는 붕 뜬 신세가 되어 버린다.
물론 마탑은 그를 더 이상 쫓지 않겠지.
하지만 그게 다였다. 그 이후에는?
“그럼 기분 좋은 건?”
“음, 청결 마법 쓰고 나서? 그건 개운하다, 인가?”
“마법사, 공주님은 쉬셔야 합니다. 그만 귀찮게 하십시오.”
카일이 인상을 찌푸리며 렌에게 경고했다. 시아는 당황한 얼굴로 카일을 쳐다보았다.
렌은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시아는 비밀을 공유한 그와 훨씬 더 깊은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그가 왕자를 거의 반노예로 만들어 버렸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그에게 훨씬 더 잘해 준다.
심지어 약속을 이행하고 싶지 않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해해 줬다.
“기분 더럽다. 맞지?”
렌은 카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웃었다.
“아오, 렌. 그건 예의가 없다!”
“……왜 화내, 공주님.”
시아가 인상을 찌푸리며 렌의 손을 찰싹찰싹 때렸다.
렌은 한껏 시무룩해진 기분으로 시아의 허리를 잡고 위로 들어 올렸다.
“마법사, 공주님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싫은데?”
“…….”
카일이 이를 빠득 가는 게 눈에 보였다. 렌은 그런 카일을 보고 비웃어 주었다.
어차피 아무 생각도 없으면서 자꾸 수작질이야?
어쩔 수 없이 카일을 그의 곁에 두게 되었지만 여전히 거슬리고 짜증 났다.
시아를 소환한 그 빌어먹을 집단의 계획에 그가 아닌 저 남자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짜증 났고, 시아가 본 엿같은 매개체에 저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사실도 거지 같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더 좋아하니까!
좋아하는 건가? 사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시아는 거부감 없이 그의 말에 올라탔고, 조금 움찔하긴 했지만 그가 뒤에 올라탈 때도 거부하지 않았다.
렌은 말에 올라 시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따뜻한 체온이 가슴에 그대로 느껴졌다. 렌은 묘한 충족감에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녀는 따뜻한 사람이다. 꼭 모닥불 같았다.
“……마법사, 이상한 짓 하지 마십시오.”
카일이 경고하듯 그에게 말했으나 렌은 그냥 어깨를 으쓱하고 그의 말을 무시하며 발을 굴렀다.
“공주님 빨리 달리는 거 무서워하니까 천천히 가자.”
“응, 그게 좋을 것 같아. 그럼 카일 경이 앞장서는 건가?”
그녀의 말에 카일이 한숨을 푹 내쉬며 대꾸했다.
“예, 길은 제가 먼저 알아봐 두었습니다. 승마에 익숙하지 않으시다면 많이 힘들 수도 있으니, 눈치 보지 마시고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쉬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카일의 말에 시아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고맙네. 그래도 최대한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텨 보겠어.”
기분이 순식간에 나빠졌다. 렌은 심드렁한 얼굴로 시아의 어깨에 턱을 기대며 몸을 더 바짝 붙였다.
아마 그녀의 앞에 그가 아니라 저 빌어먹을 왕자가 먼저 떨어졌다면 시아는 그가 아닌 저 용사 겸 왕자에게 더 친절했을 거라는 생각이 물씬 들었다.
거짓말쟁이.
“그, 렌? 너무 가깝지 않아?”
“공주님 말에서 떨어지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