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렌이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변명하는 사람처럼 내게 말했다.
“이번에는 확실해. 실수 안 해, 공주님.”
렌의 눈이 마구 흔들렸다. 제 잘못이 뭔지 알긴 하나 보다. 에휴, 정작 당사자는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구는데 내가 여기서 더 화낼 수도 없고.
“저번에는 여관 주인이 올 수도 있으니까, 일반인은 경계에서 빼서 그래. 이제 정말 아무도 못 와.”
그때였다. 렌의 손이 덥석 내 손을 잡았다.
아니 얘는 왜 또 이러니, 제발. 깜빡이 좀 켜고 들어와라, 인간아!
렌은 한껏 부담스러운 눈으로 나를 꽤 애절하게 쳐다보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 보라는 양.
“……렌, 설마 내가 아까 화냈다고 이러는 거야?”
“공주님은 내가 아무렇지도 않아?”
또 시작이었다.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로 상대방을 당황시키는 저 화법!
나는 손바닥으로 렌의 입술을 꾹 눌러 주며 말했다.
“렌? 거기서 그 대사가 왜 나와. 응? 내가 화낸 건 그냥 지금까지 스트레스 쌓여서 폭발한 거라니까. 그만 신경 쓰고 이제 여기서 나가자.”
내 말에 카일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공주님. 방에서 잠시 기다려 주시면 말과 식량을 구해 오겠습니다.”
그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혼자 구해 오겠다고?”
“예.”
“제국에서 자네를 쫓고 있다 하지 않았나? 그럼 그대로 나가면 위험한 거 아닌가?”
내 물음에 카일은 대답이 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나 보다.
“능력껏 구해 오겠습니다. 공주님. 제 사정 때문에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렌은 안 데려가고?”
카일은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썩은 얼굴로 렌을 쳐다보았다.
“공주님께서는 혼자 계시면 안 됩니다.”
“아.”
“그리고 마법사에게 이런 일을 맡기기에는 믿음직스럽지 못합니다.”
“…….”
할 말이 없었다. 그때 마법서 사는 걸 두 눈으로 보지 않았는가.
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렌에게 말했다.
“렌. 그 그림자 망토인지 뭔지 잠깐 빌려주면 안 돼?”
“…….”
내 말에 렌이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는 곧 고개를 푹 숙이더니 아공간에서 넝마를 쑥 꺼내 카일에게 냅다 던져 버렸다.
카일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렌이 던진 넝마를 낚아챘고, 렌은 여전히 기가 잔뜩 죽은 얼굴로 땅바닥만 쳐다보았다.
“……일단 빨리 갔다 오게.”
“예…….”
카일은 여전히 못마땅한 눈으로 렌을 흘겨보다가 고개를 푹 숙여 보이곤 방을 나갔다.
“렌.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내 말에 렌이 겨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공주님.”
렌이 눈을 깜빡이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실망이지? 나한테 실망한 거지?”
할 말이 없었다. 렌은 집요하게 내게 가까이 다가와 제 할 말을 계속했다.
“나 이제 공주님 표정 알아. 왜 화난 거야? 나는 이해 안 돼. 난 공주님을 위해서 한 거야. 쟤는 위험하니까.”
혼란스러워 보였다. 나 또한 렌이 왜 저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 쟤한테 진짜 뭐라고 했나? 말실수했어?
“공주님한테는 함부로 마법도 안 걸었어. 공주님 무서워하니까 사람도 안 죽였어. 그리고 저 왕자도 거슬리는데 얌전히 있었어.”
나는 좀 흥분한 것처럼 보이는 렌의 팔을 토닥여 주었다.
“렌. 진정해. 눈 색깔 또 변했어. 그거 다른 사람한테 들키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내 말에 렌이 황급하게 두 손으로 제 눈을 가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이를 악물었다.
분명 뭔가 심경의 변화가 있는 게 틀림이 없었다.
정확히는 내가 어제 집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난 후부터 저런다.
뭐지. 날 집에 보내 주기 싫다 이건가?
왜?
“렌, 혹시 내가 집에 가는 게 싫어서 그래?”
“…….”
렌이 두 눈을 가린 손을 천천히 내리며 나를 보았다.
“하지만 나랑 약속했잖아, 렌. 너랑 결혼해 주면 집에 보내 주겠다고.”
“…….”
그때였다. 렌의 혼란스러운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가끔 카일에게 보여 주던 싸늘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그럼 공주님하고 결혼 안 하면 어떻게 되는데?”
“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저건 또 무슨 소리야.
“공주님은 어차피 날 선택했잖아. 머리가 제대로 돌아갔으면 나 말고 그 마법이 시키는 대로 했었어야지. 날 왜 찾아왔어? 공주님이 나랑 있겠다고 무의식적으로 선택한 거 아니야? 그렇지? 공주님도 나랑 똑같은 생각인 거지?”
렌이 보라색 눈을 치켜뜬 채로 횡설수설 말했다. 눈빛이 서늘한 게 정상은 아닌 것 같았다.
렌은 위협적으로 내게 바짝 붙어 내 머리칼을 쥐며 말을 이었다.
“공주님이 처음이라고 말했잖아. 공주님 말고는 날 이렇게 다정하게 쳐다봐 준 사람도, 날 이렇게 걱정해 준 사람도 없어. 지금도 봐. 공주님 나 안 싫어해. 그렇지? 진짜 혐오스러워하는 눈빛이 뭔지 나는 알거든.”
그리고 나는 볼 수 있었다. 렌의 손목에서 목 끝까지 이어지는 붉은 선을.
렌의 표정이 고통으로 구겨졌다.
“렌. 뭔진 모르겠지만 너, 그만해.”
“…….”
“내가 분명히 경고했어. 무모한 짓 하지 말라고.”
내 말에 렌의 눈이 점차 푸른색으로 돌아왔다.
“왜 싫은데?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야, 렌.”
“…….”
내 말에 렌은 입을 꾹 다물더니 돌연 두 손으로 제 머리를 감싸 안고 방의 구석으로 달아나는 게 아니겠는가?
“야! 어디 가!”
“오지 마.”
렌은 구석에서 쪼그려 앉아 제 머리를 벽에 쿵, 쿵 박기 시작했다.
당연히 나는 깜짝 놀라 오지 말라는 렌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달려가 그의 머리통을 감쌌다.
“렌, 진정해. 왜 이래. 응? 말하기 싫어? 물어보지 말까?”
그리고 차분하게 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렌이 왜 이러는지는 사실 짐작 가능했다.
전부터 렌이 내게 무의식적으로 흘리는 단서들. 머리는 분명 좋은 것 같지만 감정 표현에 서툰 모습들.
“렌, 괜찮아. 응? 네 마음 나도 알지. 아까 화내서 미안해. 그래도 아닌 건 아니야.”
렌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네가 나한테 잘해 주는 것도 알고, 좋은 마음으로 신경 써 주는 것도 알겠어. 그래서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고.”
렌이 지금 내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입 안이 굉장히 썼다.
렌의 손목에 있는 상처는 학대받은 증거다.
렌이 말한 감시자는 렌이 그동안 어딘가 갇혀 있었다는 소리겠고, 그건 다름 아닌 마탑이 되겠지.
게다가 현재 마탑은 코어를 가지고 있다.
제국에서 코어로 무슨 짓을 했는지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너도 알잖아. 난 이 세상 사람이 원래 아닌걸. 게다가 네 말처럼 나는 인간도 아니야. 이건 내 본래 몸이 아니잖아.”
내 말에 렌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말했다.
“생체 반응은 인간이랑 똑같아, 공주님. 그거랑 상관없어.”
그리고 내 팔을 살며시 잡았다. 꼭 매달리는 사람처럼 말이다.
“공주님 나 강해. 플로린스로만 가면 정말, 공주님이 원하는 거,”
“렌.”
나는 렌의 두 팔을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냉정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너 이야기 이렇게 오래 해 본 거 내가 처음이라고 했지?”
내 말에 렌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래. 세상에 사람들은 많고, 더 만나 보다 보면 나는 아무것도 아닐 거야.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나쁜 사람보다는 착한 사람들이 더 많아.”
“공주님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는 렌의 두 손을 꼭 잡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나한테 집착할 거 없다고. 난 진짜 아무것도 아니니까.”
“…….”
내 말에 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렌은 뭔가 생각하는 듯 가만히 나를 쳐다보고 있다가 곧 입을 열었다.
“……그럼 공주님한테 난?”
렌은 다시 내게 바짝 다가오며 저돌적으로 물었다.
“공주님 세상에도 나 같은 사람 많아?”
나는 슬쩍 렌의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공주님한테도 나 같은 사람은 너무 흔해서 아무 의미 없어? 아무런 느낌도 안 들어?”
저건 또 무슨 질문이냐! 나도 모르게 렌을 바라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상식적으로 렌 같은 사람이 있기야 하겠지.
그런데 내가 지금 얘랑 대화 하면서 애먹고 있는 이유가 근본적으로 뭔가.
‘당연히, 이런 애 처음 본다.’
나는 렌의 집요한 시선이 부담스러워 눈을 돌렸다. 하지만 그러기가 무색하게 렌이 제 얼굴을 들이밀며 다른 곳을 쳐다보지도 못하게끔 했다.
“왜 눈 피해?”
렌은 사냥감의 약점이라도 잡은 맹수처럼 움츠리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나는 당황해 몸을 움찔거렸다.
렌이 완전 나를 덮치듯이 깔아뭉갰기 때문이다.
아무런 의도도 없는 저 표정이 나를 더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렌은 오로지 단 하나만 궁금하다는 듯 반복해 내게 물었다.
“나 같은 사람 별로 없을 텐데. 그렇지? 공주님이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나 봐.”
렌이 수줍음이라도 타는지 볼을 붉히며 내게 속삭였다.
“애초에 공주님 같은 사람이 여기 더 있을 거라고 생각해? 공주님은 이 세계 사람이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