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표정 관리가 안 됐다.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생각해 보면 렌의 결정은 합리적이었다.
아무튼 난 완전히 믿을 수 없는 카일 때문에 조심하고 있었고, 그 덕에 불편한 점도 꽤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여태까지 내게 있었던 일들이 참고 참다가 한꺼번에 터져서 이렇게 화가 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당신도. 머리가 잘 돌아가는 건 알겠거든? 그러니까 일이 생기자마자 나한테 일러바쳤지. 무슨 생각이야? 나한테 이렇게 구는 게 뭔가 이득이 있으니까 이러는 거 아니야.”
내 태도에 카일이 당황한 듯 눈만 깜빡였다.
“뭐, 이제 나 배신하면 안 된다며? 안 그래도 답지도 않은 멋있는 척하느라 힘들었는데 잘됐어! 아주 그냥!”
나는 두 남자를 등지고 서서 내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하, 내가, 내가 미쳤지. 하…….”
그리고 최대한 침착해지려고 노력했다.
“……다시 이성적으로 대화합시다. 미안해요. 내가 잠시 정신이 혼미해서 화를 낼 게 아닌데 화를 내버렸네.”
나는 다시 의자에 앉아 내 이마를 짚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 나도 모르게 급발진했다.
너무 상식 외의 말을 들어 버려서.
아니, 뭔 목숨을 건 주종 계약이 말이야, 방구야.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중범죄라도 저지른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당신 마나가 렌한테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주종 계약을 한 거라고? 나랑?”
“…….”
카일이 죄진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럼 지금 내가 굉장히 원망스럽겠네? 거의 노예 계약 아니야 그거?”
“공주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감히 공주님을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
말 한번 번지르르하게 잘한다 싶었다.
“아, 왕족으로서의 자존심은 쉽게 버리는 타입? 자존심 지켜 봤자 실질적으로 이득이 전혀 없으니까? 무조건 실리만 따지자?”
“…….”
내 말에 카일이 이를 악물었다.
“와, 진정한 왕자님이네. 좀 존경스럽다. 그렇지, 윗대가리일수록 실리를 따지는 게 맞지. 그래서, 실리 엄청 따지는 그쪽은 왜 나한테 붙었나? 어차피 내 부군 자리는 이미 물 건너갔는데. 생각을 해 봐. 애초에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플로린스 왕이 평민한테 부군 자리를 주겠어? 대충 변명하다가 그 북부 대공인지 뭐시기한테 넘기겠지.”
카일이 잠깐 망부석처럼 굳은 채로 가만히 있다가 돌연 입을 열어 꽤 그럴싸한 말을 줄줄이 내뱉었다.
“꼭 제 목표를 이루는데 공주님의 부군 자리가 필요한 건 아닙니다. 공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공주님께서 왕좌를 차지하게 되시면 저는 공주님의 최측근이 되어 펜디엄을…….”
카일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에 나는 나도 모르게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씨, 나는 쓸데없이 공감 능력이 좋단 말이야.
쟤는 왜 하필이면 내 세계에서도 이 세계에서 더럽게 귀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으로 중무장을 했어?
“그래. 내 최측근이 되어 플로린스에서 권력을 얻은 후, 그 권력을 발판 삼아 독립을 도모하겠다?”
“……예.”
“아무리 플로린스를 등에 업었다고 해도 불가능할 텐데. 정확한 목표를 말하게. 오롯이 제국으로부터 펜디엄 왕국의 독립을 원하는 건가? 아니면 펜디엄의 이름으로 제국을 삼키길 원하는 건가.”
“…….”
내 말에 카일이 질끈 감은 눈을 떴다.
“공주님은 특이하십니다.”
“앞으로도 특이할 예정이니 벌써부터 놀라지 말게.”
“…….”
카일이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반쯤 벌렸다.
“그리고 이제부터 제발 빙빙 돌리지 말고 묻는 말에나 빨리빨리 대답하게. 내가 보기보다 성질이 급해.”
내 말에 카일이 주먹을 꽉 쥐고 어깨를 파르르 떨며 분노에 가득 찬 어조로 대답했다.
“……복수하고 싶습니다. 제국의 황제를 끌어내려, 똑같이, 만천하에 그의 시체를 난도질하여 걸어 두고 싶습니다.”
생각보다 살벌한 말에 겁을 안 먹었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런데 또 저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나 같아도 우리 가족이 효수되어……. 아 생각만 해도 기분 더러우니까 그만하자.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싹을 밟아 태워 버리고 싶습니다.”
카일의 표정을 보고 살짝 충격까지 먹었다. 나는 살면서 사람이 저토록 분노에 찬 표정을 한 번도 없으니 말이다.
드라마에서 보던 명배우의 연기와는 차원이 다른 얼굴이었다.
비교하기 미안해질 정도로.
나는 최대한 그의 감정에 동요하지 않은 척,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하……. 좋아. 그럼 그대의 계획이나 자세히 들어 보지. 플로린스에서 권력을 잡는다. 뭐 이런 간단한 계획만 있는 건 아닐 거 아니야? 무슨 연합이라든가, 아니면 제국에 당한 다른 왕국의 귀족들이라든가. 연락망은 있나?”
“……제국에 정복당한 국가의 귀족은 대부분 몰살되었으며, 운이 좋게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전부 숨어 버려 찾기는 요원합니다.”
순식간에 카일의 어조가 낮아졌다. 꽤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긴, 나라도 막막했다.
“그럼 지금 자네가 가지고 있는 세력은 살아남은 펜디엄의 귀족들과 마탑인가?”
“……마탑은 세력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직 마탑에서는 그대가 내 쪽에 붙은 걸 모르는 거 아닌가.”
“예.”
나는 최대한 내가 아는 것들을 모아 생각해 보았다. 보통 거대한 국가가 망가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외세의 침략?
아니. 내부 분열이다.
“제국 정세는 그럼 빠삭한가?”
내 말에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아, 물론 쓸데없이 다른 강대국 건드리다가 얻어맞고 세력이 약해지는 경우도 있고, 아니면 경제 인플레이션으로 압박당해서 망하는 경우도 있다.
“렌.”
“……”
내 말에 렌이 입술을 꾹 깨물고 죄지은 아이처럼 나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본인이 뭘 잘못한지는 대충 알긴 하나 보다.
“나 너한테 잘못했다고 안 할 거야.”
“……응?”
나는 렌의 귀를 잡아당겼다. 그에 렌이 갸우뚱하며 내 쪽으로 쓰러졌다.
“아야.”
“너, 내가 일 벌리기 전에 미리 말하라고 했어 안 했어. 간단한 부탁인데 이것도 안 들어줘?”
내 말에 렌이 억울한 얼굴로 구시렁거리듯 대답했다.
“이게 최선이었단 말이야. 언제 배신할지도 모르는 걸 어떻게 데리고 다니는데.”
“그으래. 네가 내 생각 해 주는 거 내가 제일 아는데, 그래도 기본적으로 내가 사람 목숨을 함부로 거는 걸 안 좋아해. 여기 도덕관념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나는 이런 식으로 나오면 굉장히 불쾌하다고. 알아?”
어차피 카일에게 무리한 요구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찝찝한 건 찝찝한 거였다.
“다음부턴 제발 나랑 상의 좀 하자. 상의 좀!”
“……공주님, 나랑 얘기 계속할 거야?”
렌이 살짝 물기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자꾸 말도 안 되는 질문 할래?”
나는 렌의 귀를 놓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좋아. 이제부터 마탑이랑 제국이 스스로 자멸할 만한 단서를 찾는다. 내가 볼 땐 그 방법이 제일 간단해. 굳이 전쟁까지 갈 것 없어. 일 벌리는 거 딱 질색이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밖을 살폈다.
“카일 경. 자네에게 자유롭게 돌아다닐 권리를 줄 테니, 제국의 경제 상황에 대해서 알아 와. 주식이 뭔지, 주식의 생산량은 얼마나 되는지, 유통은 어떤 식으로 행해지는지 뭐 이런 거 말이야.”
“예. 공주님.”
카일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나는 머릿속으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우선 플로린스로 돌아가 적당한 입지를 쌓는다. 그리고 그 북부 대공인지 뭔지를 만나 봐야 한다.
내란을 일으킬 거면 그 사람이 제일 먼저 일으킬 것 같으니까.
만약 그 사람의 목적이 공국의 독립이라면 협력하고, 그저 제국의 황위를 차지하는 것이라면 그냥 자극만 하고 놔둔다.
어차피 지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면 우리 쪽이 이득이다.
서로 약해진 틈을 타 쓱싹하면 되니 말이다.
문제는 플로린스의 왕자와 마탑인데…….
일단 마탑은 그렇다 치고, 플로린스의 왕자가 문제였다.
‘어떻게 처리하지.’
어차피 나는 떠날 사람이다. 이곳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왕자를 죽여서는 안 된다.
아, 물론 왕가를 싹 다 밀어 버리고 ‘옜다 민주정!’ 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좀…… 대왕 무리수이지 않나…….
아무튼 양심적으로 좀 찔린다 이 말이다.
“하……. 플로린스까지 얼마나 남았다고?”
내 말에 카일이 대답했다.
“수도까지 가려면 그래도 일주일은 걸립니다. 공주님.”
염병. 빌어먹을 중세.
마법이 있으면 뭘 하나! 이 무슨 부산에서 서울 걸어서 가는 것도 아니고, 이러다가 이동만 하다가 세월 다 가겠다. 다 가!
“……그래, 얼마 안 남았…… 군. 따라붙은 암살자는 없나?”
“마법사의 결계 덕분에 추적은 잘 피하고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공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