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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
“끊겼다?”
“예. 단주님.”
백발의 노인이 단상에서 천천히 내려오며 아래를 노려보았다.
“무능한 것들.”
구원자와의 교신이 끊겼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뿐이었다.
구원자의 죽음, 혹은 의도적인 주술의 파훼.
“아아, 구원자님을 볼 면목이 없구나.”
“죄송합니다! 단주님, 시정하겠습니다.”
하얀 로브를 입은 젊은 남성이 무릎을 꿇고 노인의 앞에 엎드렸다.
노인은 그런 남성을 가만히 볼 뿐.
“이곳의 모든 자들은 들으라.”
“하명하십시오!”
노인이 손을 뻗어 소리쳤다.
“우리의 실수로 구원자님의 안위에 위험이 들이닥쳤다. 그러니 지금부터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원자님을 찾아 우리의 원대한 목표를 실현한다!”
“존명!”
“출발하라!”
***
나는 카일이 구해 온 맛대가리 없는 수프를 떠먹으며 생각했다.
싸늘하다.
왜인지 모르게 더럽게 싸늘하다.
“하, 당장 플로린스로 가서 어떻게야 할지 감도 안 오는군.”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내 미간을 문질렀다.
그에 카일이 대답했다.
“플로린스에 제 수하들이 있습니다.”
“……응?”
뭐지? 나도 모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침 식사를 방 안으로 가져와서 엿듣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만, 아니 얘는 무슨 그런 얘기를 아침 먹다 하니?
“기본적인 세력은 어렵지 않게 확보하실 수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주님.”
“……자네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가? 아니, 자네 전력을 그렇게 갑자기 나한테 공개한다고?”
“예.”
나는 얌전히 숟가락을 내려놓고 말했다.
“혹시 지난 밤에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나……? 아니면 어디 아픈가?”
“……아닙니다. 공주님.”
카일의 표정이 짜게 식었다. 나는 좀 멍해진 채, 반사적으로 렌을 바라보았다. 렌은 여전히 저기압인 상태로 먹는 둥 마는 둥 숟가락질만 힘없이 해댔다.
“왜 갑자기 자네의 전력을 내게 공개했는지 물어봐도 되나?”
내 말에 카일이 순순히 대답했다.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저는 공주님께 협력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그대 또한 일국의 왕자이지 않은가. 근본적으로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네. 내 굳이 따지고 들지 않을 테니 더 솔직하게 말해 보게.”
내 말에 카일이 조금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섣불리 이런 말 하기 실례일 수도 있으나, 나도 일국의 공주로서, 자네의 마음을 감히 이해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묻는 말이네.”
카일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꽤 단호하게 내게 말했다.
“공주님은 플로린스의 왕족이십니다. 그렇기에 공주님은 제 나라의 안위가 아닌, 오롯이 플로린스의 국익에 대해서만 생각하셔야 합니다. 설사, 제게 동정심이 들었다 하셨더라도 그 감정을 입 밖으로 꺼내선 안 됩니다.”
나는 입을 쩍 벌리고 카일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뭐……. 그건 일단 알겠네. 그래서 대답은?”
나만 느끼는 거 아니지? 카일의 태도가 명확하게 변했다. 뭔가 전까지는 그래도 날 알차게 골수까지 뽑아 먹겠다는 욕망이 아주 이글거렸는데 저건 마치…….
‘뭔 변화야, 저거?’
전혀 알 수 없었다. 그 덕에 나는 대놓고 카일을 이상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았고, 이런 내 반응에 카일은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
“공주님을 이용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뭐, 따로 말씀하실 것 없습니까? 저는 공주님을 이용하려 들었습니다.”
카일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그대가 나한테 거짓말을 세 번이나 한 시점에서 충분히 예상한 결론이었네. 애초에 내가 자네를 달고 다닌 이유도 이용하고자 했음이니, 그대나 나나 똑같지 않은가? 딱히 할 말 없네.”
“…….”
“그리고 전부터 조금 거슬렸는데. 자네 안에서 공주의 인상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그렇게 바보는 아니네. 몇 개월 같이 다녔으면 이제 좀 알 때도 되지 않았나?”
내 말에 카일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됐네. 자네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겠지 뭐.”
카일이 혼란스러움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왜, 또 뭔데. 나 뭐 잘못 말했니?
“공주님. 솔직히 말씀드려도 됩니까?”
“솔직함은 언제나 환영하네.”
내 말에 카일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잠시 렌을 응시했다.
그에 울적하게 수저를 가지고 미적거리고 있던 렌이 날카로운 기색으로 고개를 들어 카일을 마주 보았다.
“마법사와 계약을 했습니다.”
“응?”
“……왕자님. 죽고 싶어?”
챙! 차마 숟가락 부서지는 소리라고 믿기 힘든 소리가 바로 내 옆에서 들렸다.
쟤 지금 맨손으로 숟가락을 구부린 것도 아니고, 부순 거니?
분명 내 인생에서 더 놀랄 일도 없다 여겼건만, 아주 매일매일이 새롭다.
그리고 저놈의 계약은 또 뭔 말이야? 설마 전에 마탑에서 한 것처럼…….
“렌, 너 또 피 냈어? 미쳤어? 내가 그거 하지 말라고 어제 말했는데, 그걸 또!”
화들짝 놀라서 렌의 팔을 홱! 낚아챘다. 소매가 쓱 아래로 흘러내리니 렌의 팔에 있는 무수한 상처들이 보였다.
“공주님 그런 거 아닌데. 마법사와의 계약은 아무한테나 해 주는 거 아니라니까? 내가 머리에 구멍 났어? 쟤한테 그런 거 해 주게?”
내 말에 렌이 질겁을 하며 표정을 구겼다. 그러고는 이를 악물고 진짜 누구 하나 죽여 버릴 것처럼 카일에게 말했다.
“너, 간이 부었,”
나는 냉큼 렌의 입을 막고 짤짤짤 흔들었다.
“아니면 뭔데? 너 무슨 짓 했어. 응?”
서둘러 렌의 몸을 살폈다. 꼭 이상한 짓 할 때면 어디 하나 다치고 깨지던데 다행히 그런 건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자네가 말하게. 뭔가?”
카일이 기가 차다는 듯 렌을 보고 허, 웃더니 곧 내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비밀 유지 서약을 핑계로 마법사가 받아 간 마나가 있습니다.”
마나? 아, 그때 렌이 받아 간 그 은하수같이 생긴 예쁜 그거?
“마나를 사용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공주님. 목숨을 건 비밀 유지 서약이 될 수도 있고, 종속 계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은 아무에게나 마나를 내놓지 않습니다.”
카일이 한숨을 푹 내쉬며 인상을 썼다.
“당시 공주님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마법사에게 제 마나를 내놓았죠.”
“……어, 그래서 그 계약을 당했다? 종속 계약? 렌이랑?”
내 말에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어젯밤 마법사에게 공주님께 충성을 다하기로 맹세했습니다. 마나를 대가로 말입니다. 저는 앞으로 공주님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
나는 내 품에서 얌전히 있는 렌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뻘쭘하게 렌의 입을 막은 내 손을 떼어 냈다.
“저는 이제 공주님의 비밀을 함부로 발설할 수 없으며, 공주님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며, 공주님께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렌, 너 무슨 짓 했니?”
소름이 쫙 돋았다. 아니, 그 전에 물어볼 게 있었다.
“잠깐만, 그러면 만약 그 명령을 어기면 자네는 어떻게 되는 건가?”
내 말에 카일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죽습니다.”
“…….”
기가 막혔다. 렌은 여전히 카일을 죽여 버릴 것처럼 노려보았고, 나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감도 안 왔다.
“그러니까, 렌이, 네가 내게 충성하지 않는다면 죽인다 했다 이거지?”
“하지만 마법사와 별개로 저는 이미 공주님께 충성을 바칠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 웃기지 말라고 해! 뭔 개소리야, 둘 다!”
결국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성질이 확 뻗쳤다.
“아주 둘이 뚝딱뚝딱, 북 치고 장구 치고 난리가 났어. 너네 이거 나랑 상의했냐? 지금 누가 공주야? 아주 그냥 너네 둘이 살림 차리지 그래? 올 때부터 계속 싸우더니 둘이 정분 쌓고 있었냐?”
참고 있었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우선 나를 빼고 돌아가는 것만 같은 상황이 짜증 났다.
그리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해대는 두 놈 때문에 더 열이 받았다.
아니, 사람 목숨이 장난인가? 마법이면 다 되는 거야?
애초에 목숨이 걸린 맹세를 당사자 빼고 진행하는 경우는 도대체 뭔 경우인데?
“공주님.”
렌이 당황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려고 심호흡을 했다.
“하……. 렌, 그러니까 지금 네가 날 생각해 준 마음은 잘 알겠거든? 그런데 이건 나랑 상의를 해야 할 거 아니야! 사람 목숨이 장난이야? 아무리 저 사람이 싹수가 노랗다고 해서 이건 아니지!”
나는 카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언성을 높였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화를 내려는 게 아니고, 아니, 화가 나긴 하는데, 하……. 진짜 엿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