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렌의 눈이 커졌다. 그는 당황한 얼굴로 내게서 뒷걸음치며 물었다.
“왜? 왜 몰라? 공주님이 모르면 어떡해?”
“하……. 렌. 진짜, 이게 뭐야. 네 몸 상태를 좀 봐.”
나는 렌의 몸을 보고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나, 솔직히 말해서 네가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어. 방금 건 솔직히 말해서 내 목숨이랑 관련된 것도 아니었잖아.”
내 말에 렌의 심각해 보이던 표정은 금방 풀어졌다. 그리고 평소처럼 방긋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내가 계속 말했잖아. 나는 공주님 마법사라니까? 공주님이 곤경에 빠지면 내가 구해 주는 게 당연해. 그런 건 왕자나 용사가 아니라 마법사가 하는 거야.”
“……렌. 내가 지금 그걸 말한 게 아니잖아. 이거 어쩔 거야, 이거!”
나는 렌의 몸을 가리키며 이마를 짚었다.
“하, 그래. 나도 갑자기 무서워져서 너한테 털어놓은 건 맞아. 그런데 네 몸이 이렇게까지 망가지는 걸 바라고 말한 게 아니라고!”
“공주님 지금 나한테 미안한 거지?”
렌이 내게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렌의 눈동자가 보라색으로 서서히 물들어 가는 게 보였다.
“응? 그렇지? 내가 공주님 때문에 다쳐서 싫은 거잖아.”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걱정 마, 나는 안 죽어.”
“……렌. 안 죽으면 다가 아니야. 알아?”
“그러면?”
나는 렌의 가슴팍에 손을 가져다 대며 물었다.
“좀 봐도 돼?”
내 말에 렌이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대로 렌의 셔츠를 벌렸다.
그 안으로 검붉은 멍 자국이 보였다.
“많이 아파?”
“글쎄? 공주님이 그런 눈으로 보니까 별로 안 아픈 것 같아.”
나는 렌을 째려보며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아야.”
“자꾸 장난칠래?”
“…….”
나는 다시 렌의 셔츠를 여며 주며 말했다.
“이것도 그 성서로 고칠 수 있는 거지?”
“뭐, 어느 정도는? 그런데 공주님, 나한테 말할 게 이것밖에 없어?”
“…….”
내가 가만히 입을 닫고 화제를 돌리려는 렌을 째려보자, 렌이 아공간에서 성서를 꺼냈다.
그 순간 렌의 몸에 화아악 하얀 불이 붙었다.
그리고 렌의 몸에 있는 멍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자, 됐지?”
“자, 됐지, 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네 몸을 좀 살피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아무리 마법 한 번이면 낫는다고 해도 제 몸에 상처 내는 바보가 도대체 어디 있니? 응?”
내가 렌의 팔을 콕콕 찌르면서 말하자 그는 그냥 입을 헤 벌리고 웃었다.
“렌, 웃으라고 한 말 아니야.”
“공주님한테 걸려 있는 술식 제거했으니까 상관없어. 이제 공주님 생각이 읽히는 더러운 일 같은 건 없어.”
나는 가만히 렌을 쳐다보았다. 의기양양한 렌을 보니, 그 빌어먹을 마법 시스템이 왜 렌을 대놓고 경계했는지 알 것 같았다.
렌은 마법사였고, 그들이 내게 걸어 놓은 마법을 결국 제거했다.
내 생각에는 그 시스템창으로 날 본인들이 원하는 대로 조종하려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렌의 말대로 나는 이미 일정 부분 그들에 의해서 조종되고 있었고, 카일도 그들 계획의 일부분이라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와중에 다행인 점은 놈들이 내 머릿속에 멋대로 주입한 잡다한 정보는 남아 있었다는 거다.
“……그러니까 지금 정리해 보면, 마탑도 날 노리고 제국도 날 노리고 정체불명의 단체도 날 노린다 이거야?”
“후자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 있다면 금방 정체를 드러낼 거야. 꽤 공들인 술식이 깨져 버렸으니까.”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제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했다.
그런데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왜 날까? 렌, 너도 알잖아. 나 아무런 힘도 없는 거. 그런데 왜 날 소환한 걸까?”
내 말에 렌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는 나를 위아래로 쓱 쳐다보았다.
“예뻐서?”
“…….”
순식간에 할 말이 없어졌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한테나 듣고 거의 들어 본 적 없는 단어가 쟤 입에서 나오니까 진짜 말문이 턱 막혔다.
쟤, 진짜 미친 건가?
어떻게 지금, 이 타이밍에 그런 말이 나오지?
“무의식적으로 깨달은 거지. 공주님이 날 꼬시고, 나는 홀려서 걔들 의도대로 제국이고 마탑이고 다 박살 내는 거야.”
렌이 기분 좋은 듯 씨익 웃었다.
“렌, 미안한데 나 지금 장난할 기분 아니야. 진지하다고.”
“나도 진지한데?”
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렌의 눈은 여전히 보랏빛이었다.
“공주님이랑 결혼하면 이제 그 빌어먹을 왕자는 안 봐도 되는 거지?”
렌이 상상만 해도 좋다는 듯 내 손을 잡고 제 뺨에 내 손등을 가볍게 비볐다.
“공주님이랑 결혼하면 계속 같이 있을 수 있지? 나는 공주님이 원하는 거 정말 다 해 줄 수 있어. 끊임없이 술이 나오는 분수도 만들어 줄 수 있고, 공주님 방을 온통 황금으로 채워 줄 수도 있어.”
렌이 꿈꾸는 듯한 얼굴로 내게 말을 쏟아냈다.
그리고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뭔가, 이상했다.
그러니까, 렌의 태도가, 이상했다.
“원한다면 하늘을 나는 정원도,”
“렌. 내가 한 말 잊은 거 아니지?”
“…….”
렌이 웃음기를 지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난 집으로 돌아가야 해.”
“…….”
렌이 입이 한일자로 굳게 다물렸다.
“황금, 분수, 정원, 왕자님 이런 거 다 필요 없어.”
“왜?”
내 손을 잡은 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렌. 생각을 해 봐. 가족들하고 친구들이랑 멀쩡히 잘 살다가 갑자기 납치되었,”
“난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어서 몰라.”
“…….”
렌의 말에 침묵했다.
“공주님은 내가 싫어?”
“렌, 그럴 리가 없잖아. 네가 나 저 경계 밖에서 멀쩡히 산 채로 여기까지 데려온 거, 내가 모르겠어?”
“그런데 왜 돌아가고 싶어? 공주님이 나 잘생겼다고 했잖아.”
렌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차마 설명하기 어려운 얼굴로 내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네가 먼저 약속해 줬잖아. 렌. 집에 보내 주겠다고. 나 지금 네가 무슨 소리 하는지 이해가 잘 안 가.”
“…….”
렌의 목울대가 크게 꿀렁였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렌의 고개가 푹 숙어졌다.
나는 아차 싶어졌다.
정말 지금 렌이 무슨 생각하는지 하나도 모르겠, 아니, 조금 알 것 같은데…….
근본적으로 이해가 안 갔다.
지금 도대체 쟤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감이 안 왔다.
“렌. 카일이 기다리겠다. 이제 슬슬 돌아가자.”
“……응.”
“나 도와줘서 고마워, 렌.”
“응.”
***
카일은 아주 잠깐 나를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보다가 이내 체념한 듯 평소의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예를 갖추며 말했다.
“말씀하신 의복은 구해 놓은 상태이며 쉬어 갈 수 있는 여관도 미리 알아봐 두었습니다.”
“자네에게 항상 고맙네.”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괘념치 마세요.”
착잡했다. 분명 그 이상한 마법을 지우기 전에, 카일을 이용해 제국을 치고 코어를 탈환하면 집에 보내 준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면 일단 집에 돌아가는 방법이 온전하게 있긴 있다는 얘기인가?
아니면 거짓말?
저게 사실이라면 나는 일단 기회를 한 번 잃은 거나 다름이 없다.
그 빌어먹을 가이드 프로그램을 지워 버렸으니까.
“렌, 거기서 뭐 해. 가자.”
“…….”
렌의 상태가 눈에 띄게 안 좋았다. 원래 활력이 좀 넘치는 스타일이었는데, 아까 잠깐 얘기한 후로 어깨가 축 처져서 쓸데없이 내 눈치를 보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카일도 이상하게 생각했는지 아주 조용하게 내게 다가와 물었다.
“공주님, 실례인 걸 알고 있으나……, 혹시 마법사의 태도에 대해 꾸짖기라도 하셨습니까?”
아. 나는 멍하니 카일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아하하하하! 그럴 리가 있는가. 그냥 오늘 좀 기분이 안 좋은 듯싶으니 신경 쓰지 말게. 내가 뭐라고 마법사를 혼내나.”
“……공주님께서는 왕족이십니다. 충분히 그럴 권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아, 그렇긴 하지. 나는 카일의 말에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냉큼 렌의 손목을 잡고 내 쪽으로 끌었다.
“렌, 빨리 오게나.”
“응.”
렌이 푸른 눈으로 나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껏 착잡해진 표정으로 한숨을 푸욱 뱉었다.
저거, 지금 내가 집에 보내 달랬다고 저러는 거야? 정말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유가 그거 하나밖에 나오지 않았다.
아니 근데 그건 애초에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약속한 거잖아?
이제 와서 왜 저러는 건데?
정들어서?
정이야 나도 들었다! 만약에 이대로 집에 돌아가면 몇 년 동안 계속 생각날 만큼 꽤 많이.
만난 지 일 년도 안 지났는데 말이다.
나는 렌의 팔을 토닥이며 말했다.
“렌, 표정 풀어. 응?”
“내 표정이 왜?”
카일이 나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만 사람처럼 이를 꽉 물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지.
“……공주님, 이곳에서는 보는 눈이 그리 없어 공주님의 다정한 성품을 보여 주셔도 상관없으나, 플로린스에 도착하면 더 이상 마법사에게 다정하게 굴지 않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아.”
“아무리 공주님께서 마법사와 계약하셨다 하더라고, 공주님께선 공주님이십니다.”